인문 사회학의 중요성
4년제 대학의 커리큘럼을 보면 대개 1, 2학년은 교양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전공수업에 들어가기 전 2년의 시간을 통해 갖가지 교양과정을 연마하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보통 이 2년의 세월을 갖가지 유흥으로 소비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현상은 거의 살인적인 입시교육으로 일관된 우리 중등교육의 현실에 지칠대로 지친 학생들이 한순간 압박감에서 풀려나는 해방감에 도취된 일면도 분명 있겠으나,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철학이니 사회학이니 심리학이니 하는 순수 인문사회과학 분야가 실질적인 삶과는 동떨어진 허황되고 쓸모 없는 것들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대학 4년에서 반을 차지하는 2년 간을 교양과정에
투자한다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다.
오히려 2년의 시간은 삶에 필요한 각종 인문사회학을 배우는데 있어서
아쉬울 정도로 짧은 시간이다.
이 시간들을 금쪽 같이 아끼어 광범위한 인문 사회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물론 그런 공부는 평생을 두고 계속 되어야 하겠지만 마음껏 전념할 수 있는 시기는 바로 그 때가 아닌가 한다.)
그는 훗날 어떤 일에 몸을 담고 살아가게 되더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더 깊이, 더 정확히 보고 느끼고 판단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그는 드러난 세상이 존재하고 돌아가는 그 이면에 감추어진,
그러나 실제로 세상을 지탱하고 움직여 가는 보이지 않는 구조를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인문사회학적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나무의 줄기와 잎만을 볼 수 있다면
그는 땅 밑의 뿌리까지도 볼 수 있다.
한마디로 그는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알게 모르게 그가 종사하고 있는 일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만일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더더구나 그 학문의 분야를 막론하고 광범위한 인문사회학적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다.
내가 소속해 있는 한 학회의 세미나에서 한
미술사학 교수가 자신의 논문을 발표하고 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한반도의 고대 유물 중 어떤 것이 스키타이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기존의 학설을 부인하고 나섰는데 이유인즉 스키타이와 우리나라 삼국시대는 시간적으로 천년이 넘는 간격이 있어 영향을 받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그 미술사학 교수가 가지고 있는 시간의 개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인간의 생활 형태가 급변을 이루게 되는 시기는 자연과학의 발달과 그에 힘입어 공업기술이 발달하기 시작한 근대 산업사회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전의 인간의 생활 형태는 그야말로 '천년을 하루같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그 변화가 느린 것이었다.
지금도 산업화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오지의 사람들은 거의 수 천년 전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그 교수의 시간 개념은 눈코뜰새 없이 돌아가는 현대 사회,
아니 더 나아가 온갖 하이테크놀러지가 판치는 숨가쁜 후기 현대- 지금에 기준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교수에게 있어서 천년이란 세월은 얼마나 까마득한 것이었으랴!
문학을 함에 있어서도 인문사회과학적 지식은 결코 불필요한 '다른 세상의 것'이 아니다.
문학이 단지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작업이 아닐진대 세상을 제대로 읽어내고 판단하는 능력이 어찌 필요하지 않겠는가?
지난 90년대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의 문학과 예술계에 봇물 터지듯 밀려들던 시기였다.
포스트모더니즘 이란 작년에 타계한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 의
해체주의 를 기반으로 하여 미국에서 탄생한 일종의 문예사조라 할 수 있다.
당시 한 일간지의 신춘문예에 '해체 되어 가는 현대 가족관'을 소재로 한 소설이 당선되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라는 것이 평소에 불만을 품은 자식이 부모를 살해한다는 것이었다.
자식이 부모를 쳐죽이는 것으로 이 시대의 해체와 포스트모더니즘을 드러내려 하였다니 실로 가공할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결국 그 작가는 해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 소설을 썼으며
그 글을 뽑은 평론가들 또한 그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해체'와 '파괴'를 혼동하는 오류 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들 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학자, 작가, 평론가들이 이런 식으로
해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왜곡된 상태로 받아들여 대중에 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상 데리다가 말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이 차용한 해체란 '중심'의 해체이며 모든 '경계'를 허문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따라서 이를 궂이 가족관에 적용하고자 한다면 가족과 가족간의 경계가 허물어져서 내 가족 남의 가족의 구분 없어지는, 다시말해,
우리나라의 고질적 병폐라 할 수 있는 '가족 이기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아야 옳을 것이다.
이와같이 인문사회학적 지식이 밑받침되어 있지 않으면 소설을 씀에 있어서도 한 사건과 사물의 존재 이면의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고 통찰해낼 수 없으며 때로는 이처럼 치명적인 오류조차 범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구조적인 면을 피해 가는 글쓰기가 전혀 있을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작품에 한 시대를, 사회를, 역사를, 그리고 사상과 철학을 담고자 하는 작가라면 그리고 이를 읽고 평가해야 하는 문학 평론가라면
제대로 된 인문사회학적 소양을 필히 갖추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런가하면 인문사회학자들 또한 문학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하며
실제로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글쓰기에 있어서 그리고 정서에 있어서 인간의 감성에 다가갈 수 없는 이론이라면 그것이 제아무리 뛰어나고 훌륭하다해도 어떻게 인간에게 온전히 전달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철학자 들뢰즈 는 '자신은 문학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간혹 문학과 인문사회과학을 두고 상호 배타적인 글들이 오고가는 경우를 보곤 하는데 그렇게 부질없는 소모전은 이 시대에 있어서 그야말로 불필요한 낭비라고 생각한다.
'장르와 장르간의 경계를 허무는 것'
그것이 바로 '해체주의'의 특성이며 진정한 이 시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 김숙경 ' 철학아카데미' www.acaphilo.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