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파병, 숙제 검사 맡는 한국 정부
정부, 결국 미국 원하는 안정화군 위주 파병 추진
장상종 기자
이라크 파병과 관련 정부는 그동안 국내여론, 이라크 현지 상황, 국제정세, 미국의 요구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후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그러한 맥락에서 정부는 두 차례에 걸쳐 이라크에 현지 조사단을 파견했고, 지난 5-6일에는 워싱턴에 정부 파병협의단을 파견해 미국의 입장을 확인하고 왔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들의 발언을 분석해 보면 정부의 ‘종합적 검토’는 사실상 미국의 요구사항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부는 워싱턴에 파병협의단을 파견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비전투병 위주의 2-3천명 규모의 파병안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미국의 이견은 정부가 예상한 것보다 심각했으며 11일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열린 통일외교안보관계 장관회의에서 이러한 미국의 입장이 깊게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안정화 작전을 위해 보다 큰 규모의 파병을 기대한다'는 미국 측 입장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향후 협의과정에서 애초 3천명 규모의 정부안보다 다소 늘릴 수도 있다는 입장을 정리한 것으로 전해졌다.
반면 한국군 파병에 대해 미국은 ‘간섭해 봐야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는 내부 판단에 의해 관망하는 듯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최근 고조되고 있는 국내의 ‘반미의식’을 고려한 판단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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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스펠드 미국방부장관, 16일-18일까지 SCM을 위해 방한하여 파병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다.ⓒ연합 |
럼스펠드 미 국방부장관은 11일 아시아지역 외신기자들과의 회견에서 '자기들이 하고 싶어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미국의 일이 아니고 각 주권국가들의 일'이라며 결정 권한을 한국정부에 전적으로 위임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미국은 지난 9월 리처드 롤리스 국방부 부차관보를 통해 파병 요망 의사를 타진한 이후, 지난 5,6일 한미 정부 협의단이 만나 파병문제를 논의하기 전까지 한국군의 파병에 대해 언급을 자제해 왔다.
이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9.11테러 이후 부시 행정부에게서 나타나는 특유의 스타일이라며 “미국은 ‘자기편에 설 것이냐 테러 편에 설 것이냐’를 던져 놓고 Define moment(결정의 순간)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관계자는 “SCM에서도 미국이 먼저 (파병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한다. 우리가 얘기하지 않으면 아직 준비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라며 파병추진 과정에서 미국의 압력은 절대 없을 것을 강조했다.
하지만 압력이란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해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는 것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 파병과 관련한 한미간의 모습은 말 잘 듣는 학생이 과묵한 선생한테 숙제 검사를 맡는 꼴이다. 선생이 학생의 숙제를 보고 직접 매를 들지 않고 불편한 표정만 지어도 학생은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합뉴스가 미국측이 대미 파병협의단에게 '초기 안(initial offer)이지 최종 안(final offer)이 아니기를 바란다'고, 정부합동 이라크조사단에게도 '그럴 바에는 파병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한 것은 미국의 불편한 심기가 한국에게 이미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첫 번째 숙제 검사에서 불합격을 받은 한국은 오는 17일 열리는 두 번째 숙제 검사(SCM)에서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정도의 파병 안을 마련해야 하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국방부 차영구 정책실장은 “특정 지역을 맡아 책임지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정도의 부대를 파병하는 방안이 정부 내에서 공감대를 얻고 있다”라고 말해 전투병의 비중을 높여가고 있다.
하지만 2차 이라크 정부조사단의 단장이었던 김만복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정보관리실장은 '적대행위 대상 및 발생지역 확대, 위협세력 다양화, 민생범죄 증가 등으로 당분간 치안불안 상태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직접 면담한 이라크 인사들은 `(파병부대가) 후세인 추종세력과 과격 이슬람세력들의 공격대상이 될 수 있으며, 설령 재건지원을 위한 파병이라도 과격세력들의 공격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해 정부 부처간 이견 표출은 계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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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차영구 정책실장(좌)과 김만복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정보관리실장.ⓒ민중의소리(왼쪽)/연합 |
결국 파병안을 둘러싼 정부 부처간 입장 차이는 노무현 대통령의 무게 중심이 어느 쪽을 향해 있느냐에 따라 정리될 것인데, 이미 지난 한미 정상회담에서 파병을 약속한 이상 미국의 요구 수위를 무시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SCM을 위해 방한하는 럼스펠드와 18일 면담이 예정돼 있는 노무현 대통령으로서는 지난 대미 정부협의단이 미국에 전달했던 비전투병 위주의 3천명 파병안보다 미국이 원하는 ‘안정화군’ 쪽의 방안을 고민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기자의 눈]전투병/비전투병 구분 논리에 대해
차영구 국방부 정책실장은 11일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최근 파병과 관련된 논의 중 시정돼야 할 부분들을 나열해서 설명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전투병과 비전투병으로 나누어 설명하려는 2분법적 사고방식에 대한 지적이었다.
차 실장은 전투병/비전투병이라는 이분법적 접근이 오히려 국민들에게 오해를 일으키고 있다며 마치 비전투병을 파견하는 것은 안전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것으로, 전투병 파병은 위험하고 전쟁을 하러 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현상을 꼬집었다.
이어 차 실장은 “군대는 전투병, 비전투병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굳이 나누자면 전투, 전투지원, 근무지원으로 나뉜다”라며 “다만 부대편성 시, 어디에 무게 중심을 더 두느냐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결국 어떤 부대가 파견되더라도 전투병은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날 차 실장이 “찬성을 하든 반대를 하든 정확히 알고 하라”라고 목소리를 높여가며 지적한 부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열린 우리당은 ‘비전투병 위주의 파병’을 당론으로 결정해 놓고 ‘그래도 우리는 전투병을 주장하진 않는다’며 마치 보다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듯이 하고 있고 심지어 일부 시민단체에서도 ‘비전투병 정도면 용서할 수 있다’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2차 정부조사단이 “설령 재건지원을 위한 파병이라도 과격세력들의 공격 가능성이 있다'라고 발표한 것처럼 이라크 사람들에게 외국군의 의미는 차이가 없다. 또한 2차 정부조사단은 '6개월 전과 비교해 해방군이라는 인식은 줄고 점령군이라는 시각이 크게 증가하는 등 이라크 일반주민들 사이에 반미감정이 점증하고 있다'라고 발표했다.
이라크 현지에서 4개월여간 활동하고 돌아온 오수연 작가는 이라크의 상황이 악화되기 이전에 이미 “미군은 자신들의 치안 유지에도 급급하다”라며 이라크의 치안유지를 위해 파병하는 것에 대해 말도 안 되는 논리라고 반박한 바 있다.
이라크인들에게 전투병이나 비전투병이 ‘백마 히프’나 ‘흰말 엉덩이’처럼 거기서 거기로 받아들이는 이상 그러한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논점을 정확히 할 필요가 있다. 전투병이냐 비전투병이냐가 아니라 파병 찬성이냐 반대가 있을 뿐이다. |
2003년11월12일 ⓒ민중의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