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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이야기 글입니다 그러나 역사에 기초를 둔 글입니다 사실과 다를수도 있습니다 양해 하시고 보셨으면 해요
양귀비 (당나라)
楊貴妃(영귀비는) 누구인가 ?
중국역사상 4대 미녀로 손꼽히는 양귀비. 꽃 이름이 양귀비라 전설의<양귀비>에 대한 이야기는 어렴풋이
아시는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중국의 미인이었다 하더라 그정도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중국의 4대 미녀에다 오늘날의 꽃 이름 까지.
4 대 미녀란 西施. 虞美人. 王昭君. 楊貴妃(우미인 대신에 初選을 넣는 분도 있음)
그녀의 본 이름은 楊玉環(양옥환).
서기 719년 6월 26일 출생
서기 756년 7월 15일 연인 <<安祿山>>과 <<史思明>>의 반란으로
중국 섬서성 뫄외란 곳에서 황제와 같이 피난을 가던중 군사들에 의해서 환란의 원인이 양귀비이니 내
놓으라 하였으나 같이 피난 중이던 현종이 양귀비는 반란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하였으나 병사들이
양귀비를 내 놓치 않으면 황제의 안위마저 보장할 수 없다하니 같이 가던 신하 <<고력사>>가 황제마져 위험하니
어쩌냐. 할수없이 양귀비를 앞에 느티나무에 목을 매게 하니 양귀비가 죽는 걸 보고 병사들이 물러스니
그때 나이는 37세였습니다.
같이 가던 사촌오빠 승상 양국충 올케들 모두 살해당했습니다
현종을 만난때가 22세였는데 15년을 같이 살다 간 것이지요.
이들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역사적인 연관은 조금 있으나 직접적인 것은
57세였던 현종황제 이융기가 어느 늦봄 보름달밤에 달빛을 받으며 배밭에서 연회를 하는데
단 위에서 내려다 보니 마치 선녀 같은 여인이 서있는데 달빛에다 배나무 꽃들로 그야말로 사방이
휘황찬란하게 보였지요 하늘의 선녀가 아니냐 깜짝 놀란 황제가
“ 저게 누구냐 ? ”
“아 18왕자 <<이모>>수의 妃입니다”
황제는 연회중인데도 다른 데는 눈길도 안주고 연회도 하는둥 마는둥 멍하니 앉아서
먼산만 바라보고 있었다합나다
황제는 그날 이후로 줄곧 밥도 잘 먹지 않고 모든게 시큰둥하고 말도 없고 뭔가 수심에 찬 얼굴이었다
합니다. 궁중에 눈을 돌리면 호화 찬란한 여인이 몇백명이라도 있었을 텐데도 통 말이 없고 가끔 한숨만.
그렇게 한달반 가량 지났는데 궁중이 근심이 꽉 찾지요
양귀비의 키는 어느 책에는 155cm라 하던데 내가 알기엔 165나 170에 가까웠던것
같아요. 170되는 여인이 달밤 배밭에 특이한 중국옷인 목부터 다리 끝까지 백색 천으로 감아 내리고
검은 머리는 허리까지 내려 왔다고 하는데 거기다 22세 한참 때 풍만한 체구가 서 있었으니 황제 눈에 안띨 리가 있어요.
반면 황제 몸체는 키는 5척(150)이 조금 넘는 키에다 배는 불룩해서 황제가 아니었다면 볼품이가 전혀
업던 체구였지요 여하간 이렇게 한달 반 가량을 말없이 때를 거르면서 지내니 궁궐이 뒤숭숭해지고 이상한
소문도 떠돌구 병이 들었다는 둥 멋인가 이상하다는 둥
신하들도 서로 눈치만 보고 말을 못하니 승상인 <<고력사>>는 그 속내막이야 다 알지만 차마
어떻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지요 .
皇帝는 無所不爲다( 황제는 못할 것이 없다)
皇帝는 無恥다(무엇이던지 부끄러운게 없다)
승상이야 이런걸 알고 있었지만 말을 꺼낼 수가.
황제의 18번째 친아들 <<이모>>수의 妻였으니.
생각다 못한 <<고력사>>가 생각을 냈는데
어느날 황제에게 주청하기를
“지금 산동 반도 쪽에서 도둑이 출물하고 세상이 어지럽다고하니 아무래도 누구를 보내서 실상도
알아보고 대책도 세워야 한다고 하면서 상소가 매일 올라와서 여러 왕자 중에 한분을 파견하려고
합니다. 왕자중에 18왕자가 똑똑하고 건장하니 추천하려고 합니다.”
승락을 받었습니다.
長安에서 동쪽 산동성까지는 약 3000km. 가는 것도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지나는 성마다 들려서 그곳의 관장의 이름과 백성의 생활상태 사람사는 모습을
면밀히 살피고 오라고 했으니
산동성까지 城이 한두 개도 아니고 그 많은 성을 다 들리기만 해도 가는데 3년
오는데 3년이 더 걸리니 성에서 말을 얻어타고 간다고 해도 가는 것도 무리지만 툭하면 집도 절도 없는
허허벌판을 비롯해서 비바람이 불 때도 있고 백성사는 모습까지 다 실피고
성의 성주의 이름과 나이는 필히 적어오라고 하니 왕복 10년이 걸려도 올까 말까한 거리였습니다.
기가 맥힌건 18왕자 <<이모>>수 였지요 사람으로 가능한일이 아니었지요.
이 왕자가 떠난다고 해 놓구 얼마 가다가 귀비가 보고 싶어 되돌아 와서
셩내로 몰래 들어와 귀비를 만나려다 발각이 됐습니다.
황제의 칙명을 어겼다 황제가 노발대발 칙명을 어겼으니 그길로 귀양길을.. 그리고는 왕자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황제는 無恥라하지만 유교를 숭상해서 예의범절을 중히 여긴 중국이라
체면이 있던지 양귀비를 감업사 절에다 넣었습니다
감업사란 절은 선대왕들이 죽으면 그 왕밑에서 시중들던 여인들은 모두 이 감업사에
넣어서 일생을 마치게 했는데 여기다 양귀비를 넣어두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구실로 감압사에서 3년.
필요할 때면 언제든 불러다 보면서
여러분이 잘아시는 <<측천무후>>도
태종 <<이세민>>이 죽자 태종을 모시던 여인이라 하여 감업사에 같히게 되었는데 이세민의 아들인
고종의 태자시절 몰래 사랑을 나눈게 있어서 고종이 보위에 오르자<<축천무후>>는 다시 궁으로
빠져나오개 되었고 고종옆으로 가게 되었지요 이 야기도 희한한게 많은데 여기서는 다음으로 미루고
양귀비를 3년 감업사에서 지내게 한다음 궁안에 태진궁이란 도교궁을 짓고
2년동안 女冠이라 하여 양귀비를 임명하여 감독하게 한다음 2년지난 27세에 현종이 후궁을
삼으니 이가 곧 楊貴妃입니다. 이때 현종의 나이는 62세였습니다.
서기 745년 양귀비가 30세일 때 북방 흉노족 변방에 지방담당관이던 <<安綠山>>이란자가
황제를 뵈러 왔다가 <<楊貴妃>>를 봤지요. 첫눈에 반했지요. 나이는 40중반.
이 안록산이 부임지로 갈줄 모르고 양귀비에게 어머니로 모신다면서 들락이고 갖은 보물을 구해다가
바치고 공을 들였지요. 말은 어머니로 모신다고 했으나 난녀 간의 사이가 어디로 가나요 둘은 곧 사랑에
빠졌습니다. 황제가 있지만 어머니로 양아들이 되겠다면서
들락이고 영귀비도 좋아 하니 왕제도 그런가 보다 했던가 봐요 설마 네놈이 감히.
이게 벼락이 안날리 있나요 남녀간의 사랑은 솜이불로 틀어막아도 샌다는데
여기서 당시 청치 상황을 간략하게 전합니다 당나라가 결국은 망했으니 망한 이유가.
황제 이융기는 초장에는 참 정치를 잘했다 합니다. 세월이 가고 양귀비를 품속에 넣으면서
세상만사 다 귀찮았던지 양귀비의 친척을 대거 불러 들이게 됐습니다.
그중에도 대표적인 인물이 사촌 오빠인<<楊國忠>>이었습니다. 국충이란
이름을 황제한데 하사 받고 승상이 돼서 정치를 왈가왈부하는데 국정을 모두 이 양국충에게
일임하고 있었습니다.
양국충이 보니 난데없는 안록산이란 놈이 와서 양귀비도 차지하고 황제를 속이고 있고
양국충은 자신의 처지가 불안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불륜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궁중이라보는 눈이
많고 소문이 금방 퍼지니 두사람은 몰랐어도 불륜사실 모으기는 쉬었지요 이걸 황제에게 고해 바쳤습니;다.
호화침실에서 꿈같이 지내던 안록산은 벼락을 맞었지요. 황제가 대노하여 처형을 하려하자
<<고력산>>이 말리기를 안록산은 흉노족 변방 국경을 맡고 있는 장수인데 지금 그를 죽이면
흉노족이 내일이라도 처 들어 올 것이니 안록산으로 하여금 죽을 때 까지 변방에 있게 하고
장안에는 다시는 오지 못하게 특명을 내리소서 안록산은 그날로 쫓겨 갔지요.
애가타고 양귀비가 보고 싶어 거의 초축음이 된 안록산 그가 결국 생각한건 반란.
“皇后將相에 씨가 따로 있느냐?” 였습니다.
( 안록산이 생각하기를 원래 지나간 역대 왕들은 제 나름대로 실력을 키워서
스스로 왕이 된 것이지 애초부터 왕의 씨앗이었던건 아니지 않느냐
흉노족 사막에서 평생 갗혀서 양귀비도 보지 못하고 살 바에야 주력군 부대가
내 손안에 있는데 이참에. 서기 755년 史思明이란자와 내통하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중국대륙 역사는 그렇습니다. 왕의 씨가 원래 따로 있떤게 아니었지요
역대 황제들이 제 나름대로 특별한게 있어서 황제가 된것인데
이를 대충 훑어 보면
500여년동안 春秋戰國시대를 지나
(1)처음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BC 150년경에 秦始皇이었지요. 만리장성을 쌓고
장안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마차 두 대가 달릴수 있는 고속도로를 건설한다 하면서
백성을 들들 볶다가 50년을 넘기지 못하고 51세의 생을 마감했고
2)<<項羽>>와 <<劉邦>>가 다음타자 였습니다.
항우는 힘이 세서 많은 졸개들이 모여 들었지만 성격이 포악하고 상대방 적이 항복하지 않고 반항하는
기미만 보여도 성을 점령한 다음 성안백성을 몽땅 생매장을 시킨 덕에 인심을 잃고
결국엔 유방에게 패해서 결국 유방이 漢나라를 세웁니다 한나라가 400여간 지내오다가 세상이 어지럽고
매관매직에다 부패가 극성이니 백성들이 살수없게 되자 급기야
黃巾賊이 나타나서 혹세무민 세상이 어지러워 지자 잘아시는
(3) 조조와 유비. 손건 세사람이 三國을 세워서 경쟁을 한게 서기 180년 대입니다 왈 三國志 다 아시지요
이 3나라도 60년을 남기지 못하고 司馬懿에게 위나라를 넘기고
(4)사마의는 진나라를 세우니
3國이 다시 晉나라로 통일이 된게 서기 240년대 였습니다
(5) 진이 망한 후 중국대륙은 또다시 四分五裂 혼돈의 시대로 접어 들었고
5호16국으로 갈라집니다 혼돈의 시대가 300년간 이어 오다가
이를 통알한 자가
(6)<<隋煬帝>>였습니다 을지문덕에게 참패를 당한 수양제 고구려와 전쟁에서
젊은 남자들을 대부분 다 죽고 운하를 판다고 백성을 들들 볶다가 40년도 못버티고
사위에게 죽임을 당하고
(7) 당나라 李淵에게 나라는 넘어가고 安市城 이세민을 거쳐 측천무후 다음 지금 당나라 현종 까지
왔습나더. 안록산이 임이 그리워 벌린 전쟁으로 임은 목매달아 죽고 <안록산>은 반란을 나라를 이르킨
2년후 눈이 나뻐져 결국은 눈이 멀고 애첩의 자식인 안경은을 세자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큰아들
안경서가 이를 알아채리고 애비를 죽였으니 웃기는 소리 잘하고 현종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하는 것에
홀딱반한 양귀비도 씨름선수 같던 거구의 안록산과 몰래사랑을 했지만 안록산은 761년 반란을
한후 6년을 버티다가 망하니 부귀영화가 다 일장춘몽이된 역사입니다
반란이 평정되고 장안으로 돌아오던 72세의 현종. 양귀비 무덤에 들려 눈물을 흘린 황제.
황제와 양귀비 사이는 이랬다고 전합니다. 후궁이 된후 양귀비는 싫고 그름을 분명히 했다고 합니다.
황제가 무슨 말을 하면 옳고 그름을 가려서 싫은 것은 구지비 하지 않았고
황제와 싸우면서 안하고 어느때는 화가 나서 며칠씩 등을 돌리고 말도 안했다고 하네요.
황체로서는 처음이지요. 이렇게 반항을 하는건. 그러나 한편으로 귀여운 마음도 들어서
황제가 늘 지고 했답니다. 어느 때는 맛잇는 음식을 해 놓고 몰래 황제께 쪽지를 보내서
들어와 드시고 가란 소리도 해서 일을 마치고 황제가 일부러 들어와서 먹고 나가곤
했는데 이 모든걸 직접 손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뭐 맛있는 걸 두었다간
입에다 넣어 주기도 했다 합니다. 이를테년 情을 준것이지요. 후 몇 년씩이나.
현종은 황제를 30년이나 했지만 이런 건 처음이었습니다.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정에
황제의 마음은 양귀비에게 쏙 빠졌습니다. 황제란 투구를 벗은 한가정의
가장으로 정을 느꼈고 인간이 본 정에다 양귀비는 불을 붙인 것입니다.
이 정 때문에 폐단도 있었는데 양구비의 가족 친척을 궁중으로 대거
불러 들인 겁니다. 대표적인게 사촌오빠인 <<楊國忠>>.승상이 돼서
나라를 뒤 흔들었으니. 72세 황제에 눈물엔 이 양귀비의 정이 있었습니다
그가 나이가 더 들면서 양귀비를 더욱 그리워 했다 합니다. 78세에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얼마나 그리워 했겠어요
긴글 수고 하셨습니다.
등대지기
첫댓글 그 젊은 나이에...
이쁜게 죄였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