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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5:4(p.5) 애통하는 자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우리는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불행한 일들을 수없이 보았습니다. 16년 전의 일이지요? 2003년 2월18일 오전 대구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에서 우울증을 앓던 50대 남성의 방화로 사망자 192명 등 340명의 사상자를 낸 대형 참사를 보았습니다.
세월호 침몰사건도 우리는 보았습니다. 2014년 4월15일 오후9시 세월호가 인천에서 제주도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탑승자는 제주도 수학여행을 떠나는 경기도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 325명을 포함해 모두 476명이었습니다.
이 중에 300여명이 사망했으며 대부분이 학생들이었습니다.
사망자들의 기족들에게는 상상도 못한 일이기에 그 슬픔을 누가 다 알겠습니까? 세상에는 애통할 일이 참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 백성의 특징인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두 번째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애통이라는 말은 그냥 슬퍼하는 정도가 아니라, 슬픔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그 고통의 감정이 겉으로 폭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주님의 말씀이기에 이 시간 함께 말씀을 듣는 중에 은혜가 임하여 우리들이 에통할 때 위로의 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4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Ⅰ. 애통하는 자
지금 이 순간에도 장례식장에서는 애통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병원 응급실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통곡하는 눈물이 있을 것입니다. 사업의 실패로 통곡하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있다”라고 할때는 이런 애통과는 좀다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충격을 받고 놀라서 결국 애통하게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자신의 심령이 파멸하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속에 역사하셔서 자신의 영적인 결핍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 것은 하나님이 없는 영혼의 비참함과 부족함을 발견하고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만족 할 수 없는 빈 공간을 가지고 있음을 하나님께서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가난한 마음은 결국 엄청난 애통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를때에 우리는 세상적인 눈으로 자신을 봅니다. 주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뜨면서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너무나도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에 기가 막혀서 눈물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큰 충격과 심한 슬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보게 될 때되어 지는 일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지금의 모습에 가장 애통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최초로 우리 인간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처음 만드셨을 때는 지금처럼 우리 모습을 이렇게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조금도 부끄러움이나,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도록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처음 사람을 만드셨을 때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서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하나님의 형상도, 아름다움도, 당당함도, 모든 것이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엄청난 파괴가 일어났습니다.
이 모습을 가장 애통하게 바라보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우리 인간을 가장 불쌍하게 여기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구원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병원 중환자실을 심방가게 되면 그때마다 가슴이 아픈 모습들을 보게됩니다. 그곳에는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들을 봅니다. 도대체 병이 무엇이기에 사람을 이처럼 비참하게 만들어놓는지요?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여위고 호흡조차 자가호흡이 않되어, 코로, 입으로 호스들이 연결되어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눈물이 나오게됩니다. 가슴이 답답해오는 것을 느끼게됩니다.
병원중환자실에서만 이런 장면을 목격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막 가는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에서도 사람이 왜 이토록 야수(野獸)처럼 변해 버렸는가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사창가에서 몸을 파는 여자들, 도박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는 이들, 싸움으로 살아가는 조폭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권력의 자리에서 온갖 협잡(挾雜)과 뇌물(賂物)과 거짓으로 결국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지는 이들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철저하게 파괴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보신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인 것을 짐작하게 됩니다.
첫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철저하게 파괴되어 망가져버린 우리의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무서운 죄에 빠져서 도무지 처음 모습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는 우리 모습을 하나님은 보시고 애통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는 우리의 모습을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면 보게 됩니다. 지금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파멸에 빠져 있으며, 자기 안에 얼마나 무서운 죄성(罪性)이 지배하고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기 전에는, 지금까지 자기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수양이 부족하고, 마음을 먹지 않아서 그렇지 결심만 단단히 하고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완전히 죄의 종이 되어 있었어, 자기 안에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으며,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 죄를 많이 저질렀는지 깨닫게 된다면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라고 탄식하게 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죽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미 죽어서 썩고 냄새가 코를 찌르고 구더기가 들꿇고 있는 자신의 실체를 목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 절망의 상태에서 도움을 구하기 위하여 애통하게 됩니다. 이 절망의 상태에서 스스로는 벗어날 수가 없기에 필사적으로 부르짖게 되어 있습니다.
건물에 불이났으나, 화재(火災)가 진압이 된 후에 화재 현장에서 아주 애처롭고도 가슴 아픈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화재 현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은 분들이 화마(火魔) 속에서 필사적으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쳤던 흔적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연기로 그을린 벽이나 문에 손톱자국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살려달라고 그 얼마나 부르짖었겠습니까?
사람은 죽음 앞에서는 그냥 절망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심령의 가난을 경험한 복있는 자는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게 됩니다. “하나님 이 무서운 절망과 사망의 두려움에서 건져주옵소서”라고 간절히 부르짖게됩니다. 이때 그에게 무엇이 보여집니까?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려집니다. “사랑하는 자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죄를 위하여 이렇게 못 박혔노라.
이때 그는 필사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붙들게 됩니다. 그리고 애통하는 사람은 자기의 슬픈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오직 예수님 한 분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붙드는 그 길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를 이 무서운 죄에서 건지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애통하기 때문에 부끄럽기는커녕 감사와 감격 가운데 애통합니다.
성자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셨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믿어질 때..., 그것도 나를 위해서 그렇게 되셨다는 것이 믿어질 때 어찌 무덤덤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을 나무에 못으로 박아 세워 놓았으니, 그 아픔, 그 고통, 그 수치, 그 모멸(侮蔑) 감을 우리가 가늠하기도 어렵습니다.
그 십자가에 달려 될 사람은 사실 내가 달려야 했던 십자가였습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당하신 십자가의 고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애통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그 아들을 그 십자가에 위에 못 박으시고 우리에게 대한 모든 진노를 그 위에 다 쏟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될 진노와 심판을 예수님이 담당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가 마실 진노의 마지막 잔까지 모두 다 마시셨습니다.
이 사실을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감화와 감동을 주실때에 제 아무리 강팍한 심령일지라도 주체 할 수 없는 감사의 봇물이 터지고, 감격의 댐이 터지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Ⅱ. 애통하는 자에게 주시는 위로
장례식에서나 병원 응급실은 언제나 애통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 슬퍼아는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에게 계속 계속 애통만 하도록 두시지는 않습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무엇을 약속 하셨습니까?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로’를 주시겠다라고 말씀 하시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위로하여 주시는 것일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주변에서 여러 가지 말로 위로를 해줍니다. 그런 위로가 완전한 위로가 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사람은 서로 위로하므로 견디어 나가게 되고, 버틸 수 있는 작은 버팀목이라도 되는 것입니다.
재물을 잃고 망연자실 눈물을 삼키고 있을때의 가장 큰 위로는 재물로 도와 줄 때 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애통할 때 어떻게 위로해 주시는 것일까요?
ⅰ.첫째로,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에게 먼저 의롭다는 법적인 선언을 해주십니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애통하는 자에게 ‘의롭다’라고 선언(宣言)해 주시는 것을 다른 말로는 ‘칭의’(稱義)라 합니다.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되어 그 죄로 인하여 애통하는 심령으로 나오는 자에게 ‘의롭다’고 선언해 주시는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선언입니다. 이 선언을 하나님이 해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더욱 자신의 죄로 인하여 괴로워하게 될 뿐입니다.
‘의롭다’라는 칭의는 하나님 앞에 죄 없다함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죄를 대산하여 형벌을 완전하게 받아 주셨으므로 죄없다함을 받은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받은 나는 이제부터 모든 신령한 은혜를 받을 수 있는 합당한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두렵지 않습니다. ‘의롭다’함을 받기 전까지는 무엇엔가 쫓기는 심정이었습니다. 특히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두려웠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에게 은혜를 구할 자신감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롭다’ 선언하여 주셨으므로 더 이상 우리는 하나님을 피할 이유가 없습니다.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은혜를 구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살 것입니다.
히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가 재판을 받을때에 대법원의 판결로 종결이 됩니다. 1심과 2심에서 모두 유죄(有罪) 판결이 나왔을지라도, 대법원에서 무죄가 되면 무죄가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1심에서 무죄, 2심에서 무죄가 되었을지라도 대법원에서 유죄로 판결나면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법원의 대법관이십니다. 하나님이 ‘의롭다’해 주시면 죄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쫓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어둠에 살 필요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얼마든지 하나님과 교통하며 기도하며 예배하며 찬송 드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이웃을 얼마든지 사랑하며 예수님의 복음을 나눠주며 기쁨으로 함께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힘을 다하여 주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봉사도 하고 주님을 향한 꿈을 주님께 이야기 드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이런 위로의 은혜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ⅱ.두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에게 존귀함을 회복해 주심으로 위로를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기 전까지는 자신을 죄에 완전히 방치하여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먹는 것과 취미까지도 우리의 영육간에 치명적이었습니다. 술과 담배로 혹은 도박이나 마약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에 몰두하는 것도 알고보면 하나님을 잊어 버리려는 몸부림이었습니다.
이런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게 되면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존귀한 사람인지 발견하게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죄를 지으면서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완전히 청산하게 됩니다.
자신이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살려주신 예수님으로 사는 것을 믿고 고백하면서 살기 때문에 아름답게 존귀한 삶을 살게 됩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아멘
사람의 존귀함은 많은 돈이나, 값비싼 옷이나, 고가의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것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의성 어느 지역에 가보면 무덤이 경주에 있는 왕릉을 보는 것처럼, 아주 대단하게 조성해둔 묘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 만들어진 묘지라도 죽은 사람이 누워있는 묘지일 뿐입니다.
돈으로 학벌로 아무리 외모를 잘 꾸며도 그 사람의 삶이 존귀하게 살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잘 만들어진 무덤일 뿐입니다.
존귀한 삶을 살려면 자기 자신을 볼 줄을 알아야 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제 아무리 자신을 들여다보아도 보여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도 스스로는 볼 수 없습니다. 거울을 들여다보아야 자기의 얼굴을 볼수 있습니다.
나의 자아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야1:23, 유1:7)
그런데 사람의 자아상을 주위의 사람들에 의하여 형성됩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구박하고 학대한다면 그가 아무리 잘났을지라도 낮은 자아상이 만들어집니다. 심지어 폭력적이고 도벽성이 있는 자아상으로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존귀하게 대하면 그에게는 존귀한 자아상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존귀하게 대해줘도 존귀한 자아상이 생겨진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존귀하게 대해 주신다면 그야말로 그 사람은 존귀한 자아상을 갖게될 것이 자명(自明)합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에게 존귀한 자아상이 이루어지도록 하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실 정도로 자기가 소종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존귀함으로 옷을 입혀 주십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죄에 쉽게 빠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존귀함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ⅲ.세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를 끝까지 버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기만 하면 언제나 성령을 주셔서 우리 마음에 있는 상처를 치료하시고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는 법이 없습니다.
빌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계획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 전적으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천지창조를 육일동안 완전하게 이루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새롭게 지으시는 이 일을 시작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 일을 이루실 분도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확신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아기가 처음 엄마 뱃속에서 나오는 순간에 '응애~"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것은 새로운 호흡법에 적응하기 위해서입니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아기는 필요한 산소를 탯줄로 공급 받습니다. 그러나 엄마 뱃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면서 전혀 다른 환경에서 숨을 쉬어야 합니다. 아기는 태어나는 순간 엄마와의 지난 열달 가까이의 모든 것과는 완전히 단절 됩니다.
이제는 자신의 폐를 통해 살아가기에 충분한 산소를 흡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울음이 바로 이 호흡의 첫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울음을 터뜨리지 않으면 결국 호흡을 하지 못해 살아남을 수없게 됩니다. 만약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아기가 울지 않으면 엉덩이를 때려 울음을 터뜨리게 합니다.
우리 신앙에도 애통은 거듭나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애통할 때 그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감추지 않고 표현합니다. 그냥 속으로 자신의 부족을 느끼고마는 정도가 아닙니다. 자신의 부족함이 낮뜨겁도록 부끄러움에 애통하게 됩니다. 자신의 상태가 비참하다는 것을 깨달아지기에 애통함을 감추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서 바로 이것을 원하십니다. 마치 환자가 의사 앞에서 자기의 부끄러운 상처를 감추지 않고 그대로 보여주면서 살려주기를 바라듯이 하나님 앞에 나의 상태가 죄로 인하여 너무나도 비참하게 파괴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드러내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이것이 애통입니다. 나의 상태를 표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자를 위로해 주십니다.
죄사함을 선언해 주시고 의롭게 됨을 성령으로 우리 심령에 확신시켜 주십니다.
애통하는 자가 비록 연약하여 죄와 허물을 범할지라도 하나님은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부르짖기만 하면 언제나 성령을 주셔서 우리 마음을 치료해 주시며 위로해 주시며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애통하는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께 엎드려 감사하면서 이 은혜로 의롭게 된 자로서 담대하게 주를 앙망하며 살아가시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