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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학동네 1999년 봄/제6권 제1호/통권18호/젊은작가특집-한창훈
불화, 나의 자유, 나의 디딤돌
“후딱 나가서 하늘 쪼까 보시오. 달이 참 밝소. 보름달이오.”
수화기 저편에서 파도 소리가 쏴 밀려오는 듯 귀가 시렸다. 거문도라고 했다. 거기서 보는 보름달은 얼마나 장할 것인가. 도심 빌딩에서 고개 내밀고 보는 달하곤 차원이 틀릴 것이었다.
“바람하고 파도하고 함께 있소.”
느릿느릿 전선을 타고 밀려오는 바람이 황량한 서울에 ‘휘잉’ 한줌 싱싱한 비린내를 뿌리고 사라졌다.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껍껍하게 가물던 참에 눈이 얌체처럼 뿌리고 돌아서도 이리 시원하고 말끔한데 망망한 바다 앞에 앉아 있으면 어떨까 싶었다. 섬 외갓집에 내려와 있다는 작가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잘 계셨소” 인사했다.
그를 처음 만난 것도 전화줄을 통해서였다.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한창훈씨를 짧은 통화로 인터뷰했던 것이 지난해 늦은 여름이었다. “이러구저러구 해서 어쩌구저쩌구 합니다…….” 소감이라긴 뭣한 얘기 몇 마디 끝에 그는 “서울 가면 한번 뵙시다……”로 말을 맺었다. 다른 건 다 잊었는데 딱 한마디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다른 모든 것들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난 힘과 자유로 전업 작가 길을 걷고 있다”는 그의 말꼬리를 ‘기자질’하는 자의 치기로 잡았다. 이 어려운 시절을 어찌 견디실라요, 하다하다 굶어 죽게 생기면 어쩔라요, 쯤 되는 물음이었을 것이다. 그는 재깍 이 어리석은 질문을 칼 같은 한마디로 막아버렸다. “다행히 몸이 튼튼해서 여차하면 노가다판으로 뛰어들어 돈 벌어버림 되니께, 내 그 통배짱으로 버팁니다.”
그가 이 대목에서 늘 단호하고 한결같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문학판에서 더러운 꼴 보느니 노가다판에서 등짐 지고 살겠다는 뱃심이 ‘한창훈 문학’을 지키는 울타리였다. 한계 상황이 오면 노동으로 밥 벌어먹겠다는 결심을 그는 아끼는 선배나 후배에게도 다짐받곤 하는 모양이었다. 한동네 글쓰는 이 하나가 지역 문단 모임에서 얼쩡거리며 빌붙는 걸 보고 그가 술 한잔 먹고 한코 먹였다는 얘기를 들었다. “형, 나 만났으니까 그런 짓 딱 끊어. 다방 가서 마담 궁둥이 만지면서 하는 게 그게 문학이야. 문학을 포장물로 생각하는 것들하고 상종을 하지 마시오. 일할 자신 있지? 일해. 일해서 먹고삽시다.”
서울 깍쟁이들이 으레 하는 “한번 뵙시다”가 그에겐 빈말이 아니었다.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홍합』 출판 일로 서울에 온 작가는 사무실로 찾아와 빈자리를 착실하게 한 삼십 분 지키다가 갔다고 했다. 한창훈은 그런 사람이었다. 뚝심이라면 뚝심이고, 진실됨이라면 진실됨이다. 나중에 수상식장에서 스치고 지나간 첫인상은 한창훈 소설집 『가던 새 본다』에 발문을 쓴 시인 유용주씨 묘사를 따라갈 길이 없다.
“한창훈의 첫인상은 뭐 이런 기 다 있노였다. 본 사람은 다 알다시피 멧새들이 보면 집짓기 딱 알맞은 봉두난발과 옛날 추자나뭇잎 다 갉아먹던 추자벌레처럼 금방이라도 살아 꿈틀거릴 것 같은 눈썹에다 꺽정(巨正)이 살아왔나 구레나룻과 턱수염 좀 보소. 나도 어디 가서 체격 하나라면 밑지고 들어간 적이 별로 없었는데 아따 한창훈은 참말로 세월을 조금만 물리자면 조선 시대 삼도 수군통제사 감이었다. 그는 겉모습 및 체격과는 달리 손 따뜻하고 인사 부드럽고 허리가 유연해 보였다.”
정말 그랬다. 구랍 어느 날, 문학동네 송년 모임에서 다시 만난 그는 말끔한 도시 문학인들 사이에서 도드라져 보이는 야성을 발휘하며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양식당 테이블에 섞여 앉아 있는 창백한 사내들 틈에서 그가 낸 태깔은 ‘거무튀튀’였다. 건강하고 힘있어 보이는 검은빛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어제 서울에 와 소주 먹고 막걸리 마시고 밤과 낮새 펐다는 그는 또 한잔을 기울이며 좀 흥분해 있었다. 그가 등을 돌리고 앉아 자꾸 뒤돌아보는 홀 가운뎃자리에 캐나다에서 돌아온 박상륭 선생이 앉아 계셨다. 나중에 그는 “그 양반 와 있단 소릴 듣고 가슴이 뛰었어요. 귀국하셨다는 소식 듣고 언젠가 한번 뵙겠지 했는데 우연히 마주쳤으니 참 복도 많다, 싶었죠” 했다. 그때 그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똑 사모하던 선생님 곁에 선 여학생 같았다. 유용주 시인 글을 한마디 더 인용해야 그 까닭이 밝혀진다.
“(우리는) ……박상륭과 이문구라는 천하에 숭악한 사람들이 우리 선배라는 사실에 곧바로 절망했으며, 어떻게 하면 이분들을 구워먹나 삶아먹나 회쳐먹나를 가지고 진지해하다가 주름살이 깊어졌고 폭소가 터졌으며 이 끈질긴 혓바닥들은 죽기 전까지 도저히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존재라는 데 동의하고 말았다.”
그리곤 그 일이 일어났다. 오줌 마려운 사람모양 안절부절 기회를 엿보다 결국 못 참고 일어선 한창훈은 뚜벅뚜벅 그 테이블로 걸어가 박상륭 선생 두 손을 잡고 넓죽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그건 사정이 있어 오래 못 본 제 아비를 만나 눈물겨운 상봉을 하는 아들의 모습이었다. 술을 한 잔 올리고, 받고, 손을 흔들고, 뭐라 인사를 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는 평생 원을 풀었다는 듯이 사뭇 감개무량해 있었다.
이러하니, 날을 받아 공덕동 고개 언저리 돼지갈비집에서 다시 그를 만났을 때 얘기 꼬투리를 그 감격 시대부터 풀어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열명길』을 읽기 시작했는데 참 난감합디다. 억지로 넘기기보다 묵혀뒀지요. 사람을 조금씩 끄는 맛이 참 좋드란 말입니다. 그러다가, 한 발 빠지니까 아! 환장하겠습디다. 문학 맛이란 게 이런 거구나. 초짜들은 못 읽을 겁니다. 노인네 넋두리하듯,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는 그 문장. 박상륭 소설은 문장으로 읽어야지 의미로 읽으면 그야말로 의미가 없습니다. 요새도 마음 안 좋을 때, 뒤숭숭할 때 박상륭을 읽습니다.”
그가 혼잣말하는 노인들이 두덜거리며 주절주절 늘어놓는 입말을 잘 쓴 건 단편 「가던 새 보다」에서다. 탁하고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에 척 얹어서 씨부렁대는 할매 얘기가 참 징했다. 뒷방 세 얻어 든 총각은 분명 작가의 초상인 듯한데, 주인집 할머니와 잔술 마셔가며 들었다는 그 넋두리는 코끝 찡하게 만드는 한 자락 산조였다.
“그랑께…… 말이요…… 즈가부지…… 쌌소…… 알었…… 께라…… 했소야…… 그라잖게라…… 한식 때요…… 좀 지둘리…… 워채서…… 사요…… 니당…… 알았소…… 그랍시다……” “세상천지 만물 중에 나맹이 짠한 것이 또 있겄냐이. 총각아, 나도 인자 죽을란다, 죽어뿔란다. 콱 죽어뿔란디, 아이 어찌 이리 죽고 잡은디도 죽어지지가 않는다냐. 왜 그런다냐.”
내친 김에 자주 손이 가는 책이 또 있는가 물었다. 뜻밖에도 포리스터 카터가 쓴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란 답이 돌아왔다. “그 왜 체로키 족 인디언 아이 ‘작은나무’가 산 속 오두막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았던 얘기 있지요…….”
『녹색평론』 99년 1~2월호에 마침 그가 쓴 서평이 실렸기에 왜 이 책을 “가슴에 품어 받들어 모시게” 되었는가 살필 수 있었다.
“나무에게서 평생 땔감과 그늘을 얻어 썼으니 갚아야 된다며 스스로 나무 밑으로 들어가는 죽음에서, 나는 인간의 위대함을 발견한다. 죽음의 아름다운 완성을 본다. 숱한 발명과 발견 중에 그처럼 아름다운 게 어디 또 있을까? 그들은 종교 없이도 피안을 얻고 대오각성 없이도 해탈을 하는 이들이었다. (……) 언젠가 공주에 있는 찻집 다예원에서 자연의 일부분으로 살아가는 이들에 대해서 말들 하다가 북아메리카 인디언이 가장 아름다운 종족이지 않을까, 결론을 보게 된 적이 있었다. (……) 그들은 모두 시인이다.”
지글거리는 돼지갈비를 뒤집을 때, 불판을 갈 때, 풀썩 먼지가 일고 연기가 나자 그가 “옛날 생각 나네요” 했다. 83년 광주 지산동 법원 앞에서 포장마차를 했는데 불을 잘못 다루면 천장으로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고, 콜록콜록 기침은 나오고, 뭣 하나 쉬운 게 없었다는 거였다. 그가 일찍이 바닷가 뱃놈으로 입문해 트럭 운전사, 막노동꾼, 음악 다방 디제이 등등을 전전한 인생유전에서 얻은 결론은 “참말로 드럽게 안 풀리는 인생이랑께”였다.
“스무 살에 집 나와 살갗 시리게 떠돌 때, 겉늙어버렸어요. 빨리 늙는 게 소원이기도 했고. 때로 겉늙은 게 도움도 됐지만…… 사방팔방이 지랄같았고.”
열일곱 살 때 겪은 광주 민중항쟁이 그에게 어떤 자국을 남기고 사라졌는지 가늠할 길은 없다. 그 자신 성장 소설이라고 부른 「변태」에서 엿볼 수 있는 건 죽음과 성(性)을 한몸에 끌어안은 한 소년이 비틀거리며 역사 현장을 통과하는 사춘기 풍경이다. “공부는 당연히 안 하고 껍데기만 학교를 왔다갔다하던 고2 때”, 그는 5·18을 금남로에서 보냈다. 열병처럼, 광기처럼, 아픈 상처를 다시 지지는 심정으로 십구 년 전을 돌아본 그가 어렵게 입을 뗐다.
“본 그대로 쓴 거구요. 광주 이야기는 안 하고 싶었지만…… 새삼스럽기도 하고. 근데 다들 착 가라앉아버린 게 우습기도 해서. 그래서 이제는 써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 그이 가슴속에서 조각조각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소설집 후기 한 뒤퉁이에 적은 건 문학적인 겉치레가 아니었다. 어느 한순간, 세상은 결딴나버리고 소년은 곤두박질치듯 늙어가기 시작했다.
“팔잔가 몰라도 오랫동안 삶의 원천을 불화(不和)에 두고 살아왔다. 불화로써 나는 자유스러웠고 불화로써 찬바람 버티는 디딤돌을 삼았다. 부끄러울 때 많았지만 그러나 겨우 서른여섯. 돌아볼 나이는 아니다.”
한남대 지역개발학과를 다녔지만 소설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뒤엔 전공을 제쳐두고 문(文) 자 들어간 과목이란 과목은 죄다 수강했다. 산동네에 방을 얻어놓고 주말 이틀에 이삿짐 센터 일을 몰아서 해, 일 주일치 식량을 팔았다. 그때 들었던 강의 가운데 하나가 문예창작론이었고, 거기서 운명처럼 아내 최은숙을 만났다.
“그 시간에 늘 제 앞에 앉았던 여자가 마누라예요. 우릴 가르친 분이 채진홍 선생인데 빼빼 마른 몸피에 꼬장꼬장한 성격이며, 참 저만큼 안 풀리는 도사 같은 만년 시간 강사였죠. 그 양반한테 좀 배웠습니다. 글패를 만들어 사회과학 이론도 공부하고. 그거 하면서 은숙이랑 느닷없이 키스도 해보고.”
연애하는 맛에 주말 일을 작파하니 산 입에 거미줄 치게 생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한푼 생기면 데이트할 생각밖에 안 났다. 천원 있으면 흐뭇하고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사학년 땐데, 이 사람이 어디서 만원을 꿔왔더라고요. 때는 11월이라, 늦가을 산색이 참 고왔지요. 세천(細川)이라고 일본인들이 만든 댐이 있던 아주 예쁜 동네엘 데려가더니 거기 가서는 불쑥 책 한 권을 주는 거예요. 이문구 선생이 쓴 『관촌수필』이었습니다. 남은 돈으로 원고지를 한 꾸러미 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한창훈씨는 이문구 선생과 인연이 깊다. 구수한 입말에 진하고 투박한 사투리, 해학과 입심이 도드라진 청국장 같은 향토색 등 두 사람 소설이 지닌 비슷함을 들어 이 둘을 앞뒤로 붙여놓고 비교하는 이들이 많다. 게다가 한창훈씨가 한창 서산, 태안 글패들과 어울려 술동아리깨나 축내고 있었을 때 서산에 내려온 이문구 선생이 마실 때 마시되 달거리로 하라는 충고와 함께 내려준 당호가 ‘서해안주당협회’였다. “이문구를 빼다박았다”는 소리, 이 질긴 끈을 그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대답은 짧았다.
“서울 쪽 사람들은 계보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 같습디다. 저야 워낙 존경하는 선생님이고 으레 나오는 얘기라 뭐…… 칭찬이라 생각하지요.”
대전 충남권 문단에서 유망주로 손꼽히던 아내에게 “세천 가 냉이 뜯으며 살자”고 바람을 넣어 방을 하나 잡고 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90년대 초였다. 밑천은 원고지뿐이었으나 그는 소설가가 되었고 92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닻」이 당선되면서 비로소 오랜 항해 끝에 닻을 내릴 항구를 발견하게 되었다. 오래 세상에서 쫓기던 자로서 그는 겨우 한숨을 돌리고 버스럭거리는 그 가슴을 열게 해준 광야 같은 문학 동네에 둥지를 틀었다.
모든 게 너무 버거워 울고 싶었다. (……) 울 수도 있고 절망의 끝자락에서 발악을 할 수도 있는 곳이 있었다. 광야였다. (……) 피의 한 방울까지 몽땅 눈물로 바꾸어 저 메마른 대지에서 불어오는 수분 없는 바람에 모두 말려버리는 것도 괜찮을 짓이었다.(「은사시나무 겨울」)
그는 이제 서른일곱이 되었다. 지난해 장편소설 『홍합』이 제3회 한겨레문학상에 당선되면서 이름이 더 났지만 서산, 태안 친구들과 글패를 만들 때 세웠던 초발심을 더 야물게 다잡고 있다.
“모든 것의 중심은 각 삶의 현장이다. 진정한 중심은 대학 강단도 아니요, 출판사 편집실도, 이론가의 세미나실도, 지식인들의 연구실도 아닌, 너른 땅 곳곳에 흩어져 축지고 모나고 깨지고 짜부러진 채 생활을 모시고 살아가는 이들과 그 텃밭이다.”
그가 쓴 소설들은 이 “배고픈 삶의 텃밭”에서 태어난다. “농어촌과 소도시 하층민들의 웃음 속에 들어 있는 슬픔을 따뜻하게 걸러내고 싶다”는 작가의 마음이 글 갈피갈피에서 뚝뚝 묻어난다.
『홍합』은 고향인 여수 근처 한 홍합 공장에서 한창훈 자신이 겪은 체험을 그대로 불러낸 것이다. 떠돌다 우연히 홍합 공장 트럭을 몰게 되는 먹물 문 기사에 작가의 모습이 투영돼 있다. 마감 기일이 코앞에 닥쳐 한여름 땀을 바가지로 쏟으며 기를 써 끝냈고, 그만큼 아쉬운 게 많은 소설이지만 젊은 한때 추억을 되짚느라 즐겁기도 했다.
“홍합이란 것이 원래 흐히히히히 웃음 나오게 하는 물건이잖아요. 사람들이 오징어 보고 웃겠어요. 제목만 보고 야한 소설인 줄 알고 샀다가 속았다고 입맛 다시는 독자가 있었다니께…… 으하하하.”
불콰하니 주기가 오른 작가는 그래도 자세히 뜯어보면 ‘홍합 부인 가랑이 찢어졌네’쯤 되는 에로 비디오 감이 있다고 박장대소를 했다.
……발랑 벌어진 홍합을 솥에서 들고 까먹는데 어느 누구라도 입 다물고 그냥 먹는 이가 없었다.
“참말로 아무리 봐도 똑같이 생겼네.”
간밤에 보던 것과 단순 비교하는 측이다.
“어째 이 불쌍한 것을 이렇게 모지랍스럽게 쌀어분다냐…….”(『홍합』)
“『홍합』에 나오는 여수 국동패와 신풍패 두 아줌마 패들은 지금도 가끔 만나는 실존 인물들입니다. 일 년쯤 같이 일했고 소설 썼다는 소릴 듣고는 자지러지던 그 아줌씨들 얼굴이 선하네요.”
“어디서 저런 보리문딩이가 들어왔어.”
“보리문딩이? 보리문딩이? 이기 증말 죽어볼라 이러나.”
“동네가 안 될라니께 어디서 경상도 것들이 와서 위아래도 읍이 설친당께.”
“싸우다 말고 뭐하러 전라도 경상도 갈러. 사람이 비겁하게.”(『홍합』)
모두 11장으로 꾸려진 이 장편소설의 묘미는 한 장마다 한 인물씩 삽화처럼 떠오르는 그 억척 또순이들의 인생역정이다. 하나같이 무능하거나 집안을 돌보지 않는 가장들을 둔 그이들이 “그 고생해서 벌어 새끼들 입히고 멕이고 학교 보내는” 팔자가 짠하면서도 건강하게 드러난다. 때로 그 가부장제를 뛰어넘으려는 당당함이 엿보여 짭쪼름한 바닷내를 맡은 듯 싸하기도 하다.
아마도 한창훈씨가 이렇듯 여성들 삶에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것은 개인사와 연관이 있을 성싶다. 그는 한때 글쓰기 교사를 했지만 직업이 없었고, 부인은 중학교 선생님이다. 그리하여 이웃 유용주 시인과 결성한 것이 ‘생각 없는 주부들의 모임’이었는데, 이 두 남자는 두 ‘바깥양반’들 대신 안살림을 하느라 주부 습진이며 우울증에 걸려 혼이 나기도 했다. 구질구질한 집안 일에 지쳐 “가사 노동을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냐”라는 진전된 생각을 지니게 된 이 ‘생각 없는 주부’들은 반(半)여성화된 시각으로 이렇게 외친다. “휴머니즘의 최고봉은 요리다.”
권커니 잣거니 오가는 술잔 속에 짧은 겨울 오후가 설핏 기울고, 먼길 가야 하는 작가는 느닷없이 바다가 보고 싶다, 바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느냐 자문자답했다.
소주로 얼얼해진 속을 푸는 덴 역시 소리지르는 게 최고다. 대전에 내려가야 하는 작가는 네시 언저리엔 서울역 근처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기에 역 앞 노래방에 알딸딸한 몸을 부렸다. 토요일 오후, 서울역 앞 노래방은 한산했다. 휴가 나온 군인들이 한 방을 차지하고 발악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거기 질 수 있느냐, 힘차게 번호판을 눌렀다.
“나의 과거는 어두웠지만 나의 과거는 힘이 들었지만 그러나 나의 과거를 사랑할 수 있다면 내가 추억에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우리는 『홍합』 공장 문 기사가 비 내리는 소호면을 고물 타이탄 트럭을 운전해 빠져나가며 듣던 들국화의 〈행진〉을 목이 터져라 불러젖혔다.
“행진 행진 행진 하는 거야 난 노래할 거야 매일 그대와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그는 서울발 네시 삼십분 기차에 몸을 실었다. 신동엽 30주기 준비 모임에서 그가 할 일이 많을 것이었다. 우리는 마치 입영 전야 오라비를 떠나보내는 누이처럼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 개찰구를 빠져나가는 작가 눈이 시린 겨울 바다처럼 잠깐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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