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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A 스타들의 소소한 과거 이야기’ 8편 – 아 입니다.
* 평어체 양해 부탁 드립니다.
* 동영상은 유투브 펌
아 – 은사
대학농구는 ‘감독의 스포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NBA를 비롯한 여타 프로리그에 비해 감독이 팀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Max 4~5년 정도를 머무르는 선수들과 달리 NCAA의 유명한 명장들은 대부분 20년 이상 한 팀에서 지휘봉을 잡고 있으면서 그 학교, 넓게는 그 지역의 터줏대감들이다.
그렇기에 대학농구 감독들은 ‘Manager’라기보다 ‘Teacher’, 즉, 학생들과 사제지간에 가까운 관계도 많이 보이는데 NBA 스타들의 대학 농구 은사들은 누가 있을까.
(1) 스티브 커 – 루트 올슨(애리조나, 1983 ~ 1988)
학교 프로그램의 새 역사를 만든 사제지간
선수로써 5회, 감독으로 4회, NBA에서만 무려 도합 9개의 반지를 획득한 인물인 스티브 커에게 잊을 수 없는 은사가 바로 NCAA 명감독 리스트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감독, 루트 올슨이다. 애리조나, 나아가서 Pac-12 컨퍼런스의 역사는 루트 올슨의 애리조나 부임 전과 후로 바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올슨 감독이 애리조나 대학교에 미친 영향력은 엄청났다.
1983년, 루트 올슨은 직전 시즌 4승 24패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한 팀을 맡게 되는데 애리조나는 4승 24패라는 기록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농구에서 전혀 명망 있는 팀이 아니었다. 올슨 감독 부임 전까지 애리조나가 토너먼트에 진출한 횟수는 단 3회. 올슨 감독은 괜찮은 고등학생을 리크루팅해서 이 선수들이 3~4학년이 되었을 때 승부를 띄울 생각으로 부임하자마자 애리조나 주를 넘어서 캘리포니아에 있는 자원들까지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때 올슨 감독의 눈에 들어온 선수가 바로 스티브 커였으니, 레바논에서 태어나서 이집트, 프랑스 등 유년 시절에 전세계를 떠돌던 커는 농구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고등학교는 LA에서 다니고 있었던 슈터였다. 올슨 감독은 빠르지 않고 신체도 왜소했지만 슈팅력 하나만큼은 전미에서 누구와 붙어도 꿀리지 않을 것 같은 스티브 커에게 바로 장학금 제시를 하고 싶었지만 옆에 있던 어시스턴트 코치, 그리고 올슨 감독의 아내까지도 반대했다고 한다. 그 사이 LA 인근에 있는 학교인 칼 스테이트 풀러턴이 커에게 장학금 제시를 했고 애리조나도 뒤늦게 제안을 했지만 커는 일단 풀러턴으로 마음을 굳힌 듯 했다. 그러나 뒤늦게 커는 애리조나 행을 결심하고 다시 전화를 해서 올슨 감독의 로스터에 합류할 의향을 전한다.
결국 루트 올슨이 애리조나에서 지휘봉을 잡게 된 첫 시즌, 신입생으로 애리조나에 합류한 커는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해 나가면서 아주 길지는 않지만 평균 20분 이상을 소화하면서 올슨 감독의 시스템에도 순조롭게 녹아들고 있었다. 하지만 1984년 1월, 스티브 커 인생 최대 시련이 찾아온다. 바로, 모국인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근무하고 있던 아버지가 킬러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지금도 ‘깡따구’하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스티브 커는 아버지가 사망한 지 며칠 뒤, 라이벌이었던 애리조나 스테잇과의 경기를 앞두고 올슨 감독이 뛸 수 있겠냐고 물어보자 “당연하죠.”라고 대답하고 야투 7개를 던져서 5개를 성공시키며 12득점, 팀도 22점차로 대승하면서 이때부터 커는 애리조나 대학이 위치한 투싼 지역의 대스타가 된다. 스티브 커는 지금도 그때를 돌이키면 ‘올슨 감독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 때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자주 얘기하며 그때부터 커는 올슨을 아버지처럼 따랐다.
2학년 시즌부터 주전으로 도약한 커와 함께 애리조나 대학교는 승승장구한다. 커가 2학년이던 84-85시즌, NCAA 토너먼트에 진출한 애리조나는 그 이후 올슨 감독이 맡은 2007년까지 무려 23년 연속 토너먼트에 진출하며 스티브 커가 애리조나에서 보낸 마지막 시즌인 87-88시즌에는 1번 시드를 받고 파이널 포까지 진출한다. 부임한 지 5시즌 만에 올슨 감독은 4승 24패 팀을 파이널 포 팀으로 바꿔놓은 것이며 그 중심에 스티브 커가 있었던 것이다.
스티브 커는 대학교를 떠난 이후에도 올슨 감독이 타계한 2020년까지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꾸준히 연락하고 가족들끼리도 자주 만나면서 가족처럼 가깝게 지냈으며 2016년, 골든스테이트 감독으로 첫 우승을 한 직후 인터뷰에서도 우승하자마자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 중 한 명이 올슨 감독이었다고 하면서 또 한 번 화제가 되었다.
올슨 감독 부임 이후 애리조나는 완전히 농구 명문 학교가 되었으며 1997년 학교 역사상 첫 토너먼트 우승까지 하였고 이제는 UCLA와 함께 Pac-12를 대표하는 농구 명문이 되었으며 수많은 NBA 리거를 배출해 내기도 했다.
[스티브 커 애리조나 대학 하이라이트]
(2) 드레이몬드 그린 – 탐 이조(미시간 스테잇, 2008 ~ 2012)
최고의 투쟁심을 가진 제자
드레이몬드 그린과 탐 이조 역시 끈끈한 사제지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조합이다. 미시간 주에서 나고 자란 그린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린이 미시간 스테잇으로 커밋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실제로 그린이 처음 정한 행선지는 켄터키였다. 하지만 그린을 리크루팅한 켄터키의 터비 스미스 감독이 갑자기 사임을 하는 바람에 그린은 켄터키 입학 선언을 철회했고 이 때 이조 감독의 진심어린 전화 한 통이 그린으로 하여금 고향팀에서 뛰게 만들었다.
이조 감독은 리크루팅하기 위해 감언이설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이조 감독은 여느 감독들과 다르게 그린에게 “출장시간을 보장해준다는 말은 여기서 할 수 없다. 내가 너에게 출장시간을 몇 분 이상 보장해준다고 말하면 그것은 거짓이기 때문에 나는 너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출장시간은 온전히 너의 훈련량과 성장세에 맞춰서 결정될 것이다.” 라고 했으며 그린은 이 코멘트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NBA를 동경하고 꿈꿨지만 본인이 진짜로 NBA 선수가 될 것이라고는 대학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그린은 그러나 이조 감독을 만나고 그 꿈이 현실이 되었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그린은 이조 감독 하의 체계적인 훈련 프로그램 속에서 해가 거듭될수록 약점들을 하나씩 메우면서 성장했고 1,2학년 때까지 3점슛이 없었던 선수가 4학년 때는 경기당 1.4개 성공, 성공률 38.8%라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내며 결국 2라운드 5번으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지명된다.
그린의 2015년에 미시간 스테잇에 3.1M(한화 약 41억)을 기부하기도 하는 등 학교에 대한 애정이 엄청난 선수로도 유명하며 미시간 스테잇 행을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라고 여러 번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조 감독과는 지금도 부자 지간과 다름 없는 관계로 지내고 있으며 본인이 NBA에서 슬럼프를 겪거나 감정 통제가 잘 되지 않을 때마다 탐 이조 감독에게 전화해서 상담하면서 슬럼프를 탈출하고 마음을 추스르곤 한다.
탐 이조 감독은 미시간 스테잇에서만 28시즌 감독직을 맡으면서 많은 NBA 스타를 배출해 냈으며 이 중 파이널 포에 무려 8회 진출(우승 1회)하며 토너먼트의 귀재라고도 불리는 명감독 중의 명감독이다. 이런 화려한 이력답게 이조 감독이 키워낸 NBA 선수들도 많은데 그 많은 선수들 중 이조 감독은 최고의 투쟁심을 가진 선수로 2000년 우승 멤버인 마틴 클리브스와 함께 드레이몬드 그린을 꼭 언급한다.
[드레이몬드 그린 34득점 vs 곤자가]
(3) 스테픈 커리 – 밥 맥킬롭(데이비슨, 2006 ~ 2009)
친구 아빠
‘마’ 코너에서 이미 대략적으로 소개하기도 했지만 스테픈 커리는 (지금으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명문대학교의 장학금 제의를 하나도 받지 못하고 결국 미드 메이저의 학교 몇 개 중에서 집과 젤 가까운 데이비슨 대학을 선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데이비슨 대학의 감독, 밥 맥킬롭은 커리의 ‘친구 아빠’이기도 한데, 맥킬롭 감독의 막내 아들인 브렌단 맥킬롭과 커리는 초등학교 친구로, 이 둘은 초등학교 시절, 같이 야구 유니폼을 입고 야구부 활동을 하기도 했으며 이때부터 소소하게 맥킬롭과 커리의 인연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인 델 커리가 말년은 토론토에서 보내게 되면서 커리 가족은 토론토로 이주했다가 델 커리 은퇴 후 다시 샬럿에 정착하였고 데이비슨 대학은 샬럿에서 20마일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학교로 커리는 미국의 수많은 농구선수들 중 아주 드물게 집에서 통학이 가능한 학교로 진학한 케이스이기도 하다.
학교가 집에서 너무 가까웠던 탓인지 커리는 데이비슨 대학 입학 후 공식적인 첫 훈련 시간에 지각을 했다고 하는데 평소에는 온화하지만 훈련에는 얄짤없던 맥킬롭 감독은 지각한 커리를 첫 훈련 때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고 결국 커리는 다음날부터 훈련에 참가할 수 있었다고 한다.(당연하겠지만 이 때 이후 학교를 떠날 때까지 지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아는 사실이기도 한데 커리는 대학 무대 첫 경기에서 15점, 13턴오버를 기록하며 커리를 적극 리크루팅한 맥킬롭 감독을 다소 무안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맥킬롭 감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리를 35분이나 코트에 세워놓으며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격려해줬고 바로 다음 경기인 미시간 원정에서 무려 32점을 터뜨리면서 본격적인 자신의 등장을 알린다. 신입생 시즌부터 평균 21.5점을 넣은 커리는 2학년 때 25.9점, 3학년 때는 28.6점을 넣으면서 농구 불모지나 다름없던 데이비슨에서 7번 픽으로 드래프트에 지명되는 전설을 써내려 간다.(역사상 데이비슨 출신의 NBA 선수는 커리 포함 6명에 불과하며 커리 이후로 아직까지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메이저 대학에서 콜을 받지 못해서 데이비슨을 선택한 커리이지만 이것은 결과적으로 전화위복이 되었다는 평이 많은데 그 이유는 맥킬롭 감독이 외곽슛을 장려하고 외곽슛 위주의 패턴을 가져가는 것에 우호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며 1학년부터 1옵션이 될 수 있는 팀에서 눈치 보지 않고 3점슛을 마음껏 던질 수 있는 환경에서 커리는 날개 단 호랑이처럼 폭발적으로 3점슛을 터뜨렸고 오늘날의 커리의 기초가 되었다.
커리의 데이비슨 대학 시절 3점슛 기록
1학년 : 8.8개 시도 3.6개 성공(40.8%)
2학년 : 10.3개 시도 4.5개 성공(43.9%)
3학년 : 9.9개 시도 3.8개 성공(38.7%)
커리어 통산 9.7개 시도 4.0개 성공(41.2%)
왜소한 신체조건과 부족한 운동능력 등으로 모두에게 외면받았던 커리에게 손을 내밀어 준 ‘친구 아빠’ 맥킬롭과 NBA 슈퍼 레전드 목록에 이름을 올리며 그 은혜에 200% 이상 보답한 커리, 이 둘은 현재도 가족들끼리도 자주 왕래하면서 보는 사이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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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디 그린 저 날 엄청났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