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관찰사 윤공 묘갈〔觀察使尹公墓碣〕
공은 휘가 가적(嘉績), 자가 여휴(汝休)이다. 칠원 윤씨(漆原尹氏)는 신라 태사 시영(始榮)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고려 시대에는 8대에 걸쳐 군(君)에 봉해졌다. 우리나라에서 직제학을 지낸 석보(碩輔)는 바른 말을 하다가 유배 가서 죽었으며 또 청렴하기로 이름났는데 공에게는 몇 대 조가 된다.
정랑 자신(自莘), 군수 유길(有吉), 장령 우정(遇丁)이 증조, 조부, 부친이다. 외조는 유수 이후산(李後山)이다. 공은 미목이 수려하고 총명이 남보다 뛰어났다. 세 살의 어린 나이에도 조모의 상을 당하자 고기를 먹지 않았다. 문예를 일찍 성취하여 22세에 진사가 되고, 이듬해 급제하여 주서를 맡으니, 사람들이 삼묘(三妙)라고 하였는데, 나이와 글, 글씨 때문이었다.
승문원 박사를 거쳐 세자시강원 설서로 옮기고 사서로 승진하고 다시 문학이 되었다.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 이담명(李耼命)과 박천영(朴千榮)이 과장에서 간사한 짓을 벌인다고 논하면서 “광해조 이후로 없던 일”이라고까지 하였다.
다시 정언이 되어 상소하여 전형이 공평을 잃었다고 논하며 각기 사사로울 사(私) 한 글자를 타파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헌납 윤경교(尹敬敎)가 정승 허적(許積)을 논죄하다가 엄한 비지를 받고 특별히 체직되었는데, 공이 스스로 인혐하며,
“신처럼 용렬한 자가 전하께서 대각을 경시하는 마음을 열었기에 이처럼 지나친 일이 생긴 것입니다.”
하고, 마침내 체직되었다.
어버이의 봉양을 위해 외직으로 나가 김화 현감(金化縣監)이 되었다. 숙종 즉위 초에 홍문관 부수찬으로 부름을 받았다. 당시 청성(淸城) 김석주(金錫胄)가 갑자기 수어사로 발탁되자 공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한 문제(漢文帝)는 두광국(竇廣國)을 현명하다 여겼으나 정승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이조 참판을 차출할 때 특명을 내려 추가로 의망하게 하여 반드시 전관(銓官)으로 하여금 성상의 뜻에 영합하여 김석주를 의망하게 하고야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전에 남구만(南九萬)이 상소 한 통 때문에 즉시 체직된 일을 두고 전하께서 김석주를 위해 자리를 비운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 뒤 여러 직임을 겸임하였는데, 번번이 말망(末望)으로 낙점을 받았습니다. 이래서야 어찌 사람들의 마음을 감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양암(諒陰)의 제도를 비록 다시 시행하기는 어려우나 중비(中批)로 관직에 제수하는 길이 이미 열렸습니다. 처음을 신중히 해야 할 때 이처럼 제멋대로 하시니, 훗날의 근심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비록 백관을 신칙하고 공도를 넓히고자 하시지만, 그 근원을 맑게 하지 않고서 지류가 깨끗해지는 일은 없습니다. 대궐에 숙직하는 대신은 오로지 받들어 따르기만 일삼고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않으며, 대간은 한결같이 침묵하고 있습니다. 어찌 새로운 교화를 펴는 초기에 말을 꺼리는 풍조가 생긴 것입니까.”
하였다.
대신은 다름아닌 허적이었다. 엄한 비답을 받고 체직되었다가 두 차례 병조 정랑이 되었다. 을묘년(乙卯年,1675, 숙종 1) 조정의 상황이 일변하여 적신 윤휴(尹䥴)가 명을 받들고 좌의정 김수항(金壽恒) 공에게 전유하였는데, 공공연히 꾸짖고 모욕하자 허적이 억지로 추고를 청하였다.
헌납 이우정(李宇鼎)이 초야에 버려진 선비는 격례로 책망할 필요가 없다며 환수를 청하기까지 하였다. 공은 수찬으로 상소하여 대신을 공경하는 의리를 아뢰었다. 흉당이 이조 판서를 공격하여 제거하려 하자, 허목(許穆)이 대신할 만하다는 이야기를 연석에서 아뢴 자가 있었다.
공은 그를 무엄하다고 비판하고, 또 이수경(李壽慶)이 밀계(密啓)를 올린 죄를 청하였다. 또 남천한(南天漢)은 글재주가 없고 무식하니 함부로 승정원에 임명해서는 안 된다고 논하였다. 그러자 흉인들이 번갈아 일어나 논척하여 마침내 체직되어 외직으로 나가 장연 부사(長淵府使), 성주 목사(星州牧使)가 되었다.
성주는 영남의 큰 고을이나 무단(武斷)이 풍속을 이루어 수령을 좌지우지하였다. 권신(權臣) 이원정(李元禎)의 아우 원지(元祉)의 집이 관아 곁에 있었는데, 방자하게 군 지 오래였다. 공은 향임(鄕任)을 엄히 신칙하여 그 집을 철거하게 하였다. 공이 관청에 오자, 원지는 이미 다른 고을로 피하였다.
호강하고 교활한 자가 자취를 감추고 백성이 안도하였다. 그러나 이원정의 당파인 관찰사가 마침내 하고(下考)에 두었다. 공이 처음에는 진천(鎭川)에 살다가 곧 충주(忠州)의 가호(嘉湖)로 이사하였다. 성상께서 경연에 나와 한쪽 편 사람들이 모두 청요직에 금고당한 이유를 묻자, 흉당이 모두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성상께서 이르기를,
“윤 아무개 같은 자는 무슨 죄가 있는가?”
하니, 흉당이 아연실색하였다.
공이 예전에 서연에 자주 입시하여 성상께서 그가 현명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경신년(庚申年,1680) 정국이 바뀌자 발탁되어 의주 부윤(義州府尹)에 임명되었다. 공은 누차 고을을 맡았으나 파직되어 돌아가는 날이면 집안사람이 돈을 빌려다 주었다.
이때에 와서는 더욱 청렴한 지조를 스스로 가다듬어 상인 역관을 멀리 쫓아내고 청탁을 통렬히 끊었다. 1년이 지나자 고을 창고가 가득찼으나 돌아가는 행낭에는 중국본 책 약간 권 뿐이었다. 조정으로 돌아오자 누차 승정원 승지, 예조 참의에 임명되고, 외직으로 나가 공홍도 관찰사(公洪道觀察使)가 되었다.
임기가 차서 돌아가자 호서 사람들이 은혜를 칭송하는 말이 오랜 시간이 지나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병조 참의를 지내고 또 외직으로 나가 충원 현감(忠原縣監)이 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관청에서 세상을 떠나니 을축년(1685) 6월 27일로 향년 44세였다. 집에 예법대로 상을 치를 도구가 없어 대부분 경내에 있는 서울 상인에게 사다 썼다.
수암(遂菴) 권공(權公 권상하)이 이웃 고을에 있었는데, 와서 상을 치르다가 보고서 탄식하기를,
“이 사람의 청렴은 남이 미칠 수 없다.”
하였다.
그해 모월 모일에 면천(沔川) 주절동(駐節洞) 장령공의 묘소 오른편 언덕에 장사 지냈다. 공은 풍모가 온화하고 성품이 침착하였으며 효성과 우애는 천성에서 나왔다. 대부인을 섬길 적에는 정성과 예의가 모두 지극하여 관직에서 받는 녹봉과 고을에서 받는 선물은 모두 대부인의 처분을 따랐다.
공은 관직에서 물러나서는 형제들과 슬하에 모여 술 마시고 담소하며 대부인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힘썼다. 충원 현감이 된 것도 대부인의 뜻을 따른 것이었다. 숙형이 일찍 죽자 어린 자녀를 데려다 집에서 길렀으며, 과부가 된 형수의 아침저녁거리도 반드시 달을 계산하여 지급하였다.
이를 미루어 일가친척의 곤궁하고 급한 이들을 구휼하는 데 모두 힘을 다하였다. 평소 교유하며 몰려다니기를 좋아하지 않아 집안이 항상 조용하였으니, 간엄하고 조용하기가 이와 같았다. 부인은 배천 조씨(白川趙氏)이다. 의금부 도사 석명(錫命)은 낙정공(樂靜公)과 동당의 친지 사이였는데, 그가 바로 부인의 부친이다. 어질고 조심스러워 부인의 도리를 깊이 터득하였다.
온 집안사람들이 공의 깨끗한 지조와 화목한 의리는 부인의 도움이 컸다고 말한다. 노년에 거친 밥조차 끼니를 잇지 못하였으나 탄식하고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공보다 22년 뒤 병술년(丙戌年,1706) 나이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훗날 갑인년(甲寅年,1734) 공의 묘소에 부장하였다.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지호(志浩)는 진사를 지냈고 재주가 뛰어났으나 일찍 죽었다. 차남은 지명(志溟)이고 딸은 관찰사 이만견(李晩堅)에게 시집갔으니, 이분이 나의 계부(季父)이다. 지호는 지명의 아들 경조(敬祖)를 후사로 삼았는데, 경조가 또 후사 없이 요절하였다.
딸은 진사 임형(任逈)에게 시집갔다. 지명의 아들은 경조(敬祖), 경륜(敬倫), 경신(敬臣), 경빈(敬賓)인데, 셋째와 넷째는 모두 요절하였다. 딸들은 유한위(柳漢緯), 이경상(李庚祥)에게 시집갔다. 관찰사 이만견의 아들은 현령을 지낸 수(綬)와 유(維)이다.
사위가 넷인데 참의 윤급(尹汲), 진사 원경후(元景厚), 홍재(洪梓), 유각(柳愨)이다. 지명이 살아 있을 때 묘갈문을 부탁한 적이 있기에 그의 말을 차마 저버릴 수 없어 마침내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곧기는 화살 같고 / 其直如矢
맑기는 물과 같네 / 其淸如水
이중에 하나라도 있으면 / 有一於此
명사라 하기 충분하네 / 足稱名士
지위와 덕이 걸맞지 않았으니 / 位德不稱
이치는 알 수 없네 / 難諶者理
면천에 묘소 있으니 / 有墓于沔
묘갈명으로 미덕을 드러내네 / 銘以昭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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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관찰사 윤공 묘갈 :
이 글은 윤가적(尹嘉績)의 묘갈명이다. 윤가적의 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여휴(汝休)이다. 1642년(인조 20) 태어나 1685년(숙종
11) 6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주02] 한 문제(漢文帝)는 …… 않았습니다 :
두 광국은 황후 두씨의 동생이다. 문제는 그가 현명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사사롭다는 혐의를 꺼려 정승으로 임명하지 않았다. 《漢
書 卷97上 外戚傳 孝文竇皇后》
[주03] 양암(諒陰)의 제도 :
양암은 상중에 지내는 방이다.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양암에 있으면서 삼 년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禮記 喪服四制》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