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11월 3일 조은교회 주일 예배 설교
*설교자 - 조한우 목사
날씨가 많이 쌀쌀해지면서
우리 집에는 요즘 겨울옷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장롱 속에 틀어박혀 있던 겨울옷들을 꺼내서
새로 정리하는 것을 보니까
참 세월이 빠르기도 하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더라구요.
게 중에는 이미 작아서 못 입게 된 아이들의 옷도 있었구요,
패션이 지나버린 구닥다리 옷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옷들은 입을 수도 없고요, 또 입고 싶은 마음도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새로운 것들을 원하고,
또 우리들의 몸이 성장함에 따라서
옷도 작은 옷에서 큰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기 때문이죠.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한 이래
점점 시간이 지나고 믿음이 자라나면서
우리에게 맞는 옷이 있습니다.
옛날에 하던 구닥다리 신앙의 모습을 아직도 하고 있다면
그건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닐 거예요.
자기 몸에 맞는 옷, 계절에 맞는 옷,
또 패션에 뒤떨어지지 않는 옷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필요한 옷,
그리고 어울리는 옷이 있습니다.
우리 조은교회 성도님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시기 바랍니다.
저 또한 여러분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여러분들을 위해서 해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갈4:19)
엊그제부터 우리 큰 아이가
내가 입는 츄리닝 웃도리를 입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초등학교 4학년, 열 한 살짜리 녀석이
허수아비 마냥 지 아빠 옷을 입고 다니는 걸 보니까
왠지 모를 흐뭇함이 있더라구요.
아직은 헐렁하긴 하지만 그런 대로 잘 어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이 아이가 학교에도 그 옷을 입고 다니는 모양인데,
아이들이 흉이나 안 보는지 모르겠어요.
제 딴에는 어른 옷을 자기가 입고 다닌다는 것에 대해서
남 모르는 자부심이 대단한 것 같아 보였습니다.
나는 고등학교 때에 처음으로 아버지 옷을 입어보았는데
그때 그 기분이 참 묘하더라구요.
벌써 지 엄마 어깨에 닿을 만큼 부쩍 자란 아들을 보면서
알 수 없는 묘한 기분에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았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을 닮아가면서 조금 어설프긴 하지만,
그래도 어느 사이엔가 성숙한 신앙인으로 자라나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우리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얼마나 기뻐하시겠어요?
조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도
자기 믿음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가상하게 여기시고 기뻐하시며 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맨 날 자기 신앙을 제한하고 그 이상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신앙의 성장은 불가능합니다.
신앙이 한 단계 한 단계 껑충껑충 뛰어 올라가야지
늘 제 자리 걸음만 해서야 되겠어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정말 야곱과 같이
성숙한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을 받았습니다만
야곱은 자기 열두 아들을 모두 불러 놓고 차례대로 유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요셉을 불러서
다시 한번 요셉에게 자신의 장례에 대해서 부탁을 하는 거예요.
자기가 어떤 모습으로 죽게 되든지 간에
미리 자신의 장례에 대해서 준비를 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고 또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아무 준비도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만큼 허무한 일도 없을 거예요.
아침부터 죽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마는
죽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우리가 지치고 피곤하면 잠을 자야 하듯이
일평생 우리의 수고와 고생이 끝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는 거예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의 죽음은
또 다른 영원한 삶을 위한 하나의 과정인 겁니다.
그렇다면 누구든지 맞게 되는 죽음이라는 과정을 아무 생각 없이,
또 아무 대책도 없이, 그렇게 맞을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자신의 죽음을 가장 잘 예비한 사람이 야곱이더란 말입니다.
야곱이 자기의 죽음을 준비하고,
또 자기의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그런 작업을 해야 되겠다.'....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도요,
영적으로는 물론이고요, 육적으로도 서서히 이 죽음에 대해서
준비를 해 가고 있습니다.
벌써 수 년 전에 저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에
제 시신을 기증해 놓았고요,
국립 장기 이식 관리 센타에 장기 기증도 이미 다 끝냈습니다.
저는 하나도 나를 위해서 남기는 것이 없이 다 주고 갈 겁니다.
그 대신에 저는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새 옷을 입게 될 거예요.
그래서 저에게는 남들에게는 없는 증(證)이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시신기증 등록증이고요,
또 하나는 장기 기증 희망 등록증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장기 기증 희망 등록증에 이런 글이 써 있네요.
"Don't take your organs to heaven.
Heaven knows we need them here."
"당신의 장기를 가지고 하늘로 가지 마십시오.
하늘은 당신의 장기들이 우리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뜻이죠?
아직까지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선뜻 권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을 위해서 사는
희생적인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일에도 할 수만 있으면 적극 동참을 해야 하는 거예요.
정 망설여지고 자신이 없으면
헌혈이라도 해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 동참해 보세요.
얼마나 큰 기쁨이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몸은 마치 장막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장막이 뭐예요?
텐트잖아요.
수 십년, 또는 수 백년 살도록 지어진
이런 튼튼한 콘크리트 집이 아니라,
잠깐 머물다가 떠날 텐트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장막 같은 우리의 육신이 무너지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우리를 위하여 마련해 주신 그 영원한 집으로 가는 겁니다.(할렐루야!)
이런 집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던지 죽던지, 거하든지 떠나든지,
하나님 오직 그분 한 분만 기쁘시게 해드리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서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심판을 받게 되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고후 5 : 1 -10)
야곱이 요셉을 특별히 불러서 당부한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유해를 가나안 땅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지내 달라는 것이었어요.
창세기 23장을 보면 막벨라 굴은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은 400세겔을 주고 사서
자기 앞으로 등기를 낸 땅이었거든요.
그러므로 이 땅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얻은
최초의 부동산이었단 말입니다.
그러니 막벨라 굴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는 매우 큰 거예요.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도
우리나라 사람들만큼이나 땅을 사모하는 모양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특별히 이 막벨라 굴이 있는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장차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에게 분깃으로 주시리라고 하신
땅이었기 때문에 더 없이 소중했던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첫 사건이었습니다.
불과 몇평 되지 않는 땅이었지만,
야곱에게는 더 없이 소중했던 거예요.
거기엔 야곱의 할아버지 할머니인 아브라함과 사라가 묻혀있었고요,
야곱의 아버지와 어머니인 이삭과 리브가가 거기 장사되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아내 레아도 거기 묻혔단 말예요.
그런데 한 가지 참 아쉬운 것은
야곱이 그렇게도 사랑했던 라헬은
벧엘에서 떠나서 에브랏으로 가다가 베냐민을 낳게 되었는데
그만 베냐민을 낳고서는 산고가 너무나 심해서 죽었잖아요.
그 바람에 라헬은 막벨라 굴에 장사지내지 못하고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가에 장사되었죠.
그래서 막벨라 굴엔 라헬의 시신은 없었습니다.
아무튼 막벨라 굴에는 야곱의 조상들이 편안히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야곱 역시도 막벨라 굴을 육신의 안식처로 택했던 모양입니다.
나중에, 약 2000년이 흐른 뒤 헤롯 시대에
막벨라 굴은 성지로 지정이 되었습니다.
그때 길이가 33m, 높이가 5.9m, 그리고 두께 2.4m나 되는
큰 성벽을 쌓아서 그곳을 성역화 했습니다.
그로부터 약 1000년 후죠?
서기 1119년 6월달에 고고학자들에 의해서
막벨라 굴이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그 무덤의 바깥쪽에 이들 세 부부,
그러니까 아브라함, 이삭, 야곱 부부의 기념물들이
전시가 되고 있다고 그럽니다.
무덤 내부는 관람을 할 수 없다고 해요.
나중에 우리 교회에서도 성지 순례의 기회가 주어지면
꼭 한번 보시고 다 같이 은혜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벌써 4000년이나 지났지만,
지금도 많은 기독교인들과 회교도들이
이 곳 막벨라 굴을 순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첩 하갈에게서 육체를 따라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이고요,
그 후손들이 지금의 아랍민족들, 즉 이슬람, 회교도들이잖아요.
그리고 아브라함이 사라에게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낳은 아들이 이삭이고,
이삭의 후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고요.
이스마엘의 후손들인 회교도들도
아브라함을 자기들의 조상으로 삼고 있고,
이스라엘 사람들도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서로가 예루살렘을 자기들의 성지라고 주장을 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도 철천지 원수가 되어서 저렇게 야단들이잖아요.
갈라디아 4장 29절 말씀대로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하는 겁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그러잖아요?
그러나 이것은 전쟁으로 싹쓸이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와 사망의 법을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내어쫓으라는 말씀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전쟁에 이용하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 세 가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는 영원한 가나안,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29절 말씀을 보니까,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야곱은 자기가 죽어서 막벨라 굴에 묻힘으로
자기들의 조상에게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조상들이 묻혀 있는 선영(先塋)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자신의 육신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 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말에도 죽었다는 말을 돌아가셨다고 말하잖아요?
어디로 돌아갑니까?
우리들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있습니다.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다 이 본향을 바라보고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죽었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한 성을 예비하셨는데
그 성이 바로 새 예루살렘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히11:13-16, 히12:22, 계21: 2, 10)
야곱은 그걸 알았어요.
우리는 누구나 다 돌아갈 인생들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밖에서 흙장난을 하고 놀다가
저녁이 되면 엄마가 부르시잖아요.
그러면 내 땅 네 땅, 땅따먹기하며 놀던 아이들이
다 집어치우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우리에게도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돌아간 곳입니다.
그곳은 우리 주님께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 승천하여 올라가신 곳입니다.
거기에는 영원하신 하늘 아버지
우리 하나님의 거룩하신 하늘 보좌가 있는 곳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친히 함께 계셔서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겨 주실 것입니다.
그곳에는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입니다.(계21:3,4)
그곳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죽음이 임박한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사모해야 할 곳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들은 우리 자녀들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언약을 자꾸 심어주어야 합니다.
야곱이 요셉을 불러서
자기가 죽으면 막벨라 굴에 묻어달라고 유언한 것은
장사지낼 땅이 없어서가 아니예요.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하신 약속의 땅이란 말입니다.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나이 75세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단지 믿음 하나로 하나님을 따라 나섰던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그곳은 장차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받아 누리며 살게 될 축복의 땅이었고요.
또한 그 곳은 우리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돌아가시기 위해서
이 땅에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미리 예비된 땅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은 야곱에게 뿐 아니라 그 후손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의 땅이요, 축복의 땅이요,
또한 예비된 땅이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지금 그 땅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 이스라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 새 예루살렘인 것입니다.
그걸 자손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유산을 나누어주는 일도 중요하지요.
여러 가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유익한 교훈들을 남기는 것도 필요합니다.
또한 자신의 삶을 정리해서 책으로 남기는 것도 훌륭한 일이예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자녀들이 믿음으로 살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약속들을 이루기 위해서
평생동안 몸 바쳐 살도록 교훈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 야곱은 마지막 자신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몸으로 실천해 보이고 있는 거예요.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통해서도
자녀들에게 신앙적인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죽기 싫어서 버둥거리는 비참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평안과 안식 가운데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33절 말씀을 보니까,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치 다음날 아침에 일어날 것을 약속이라도 하고 잠들 듯이 말이죠.
야곱은 그 발을 거두어 침상에 가지런히 놓고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여러분 상상이 가십니까?
야곱은 지극히 편안하고 고요한 가운데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돌아간 겁니다.
흔히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괴로워서 고통으로 신음하며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죽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원망을 하고요.
또 어떤 사람은 더 살고 싶어서 발버둥을 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죽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고통도 두려움도 없었고요,
정신적인 불안이나 초조한 기색도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음은 아주 편안한 죽음이었습니다.
얼마나 행복한 죽음이었는지 모릅니다.
육신의 눈을 감는 동시에 영혼의 눈을 열려지는 거였어요.
147년을 살면서 야곱에게는 별 일들이 다 있었잖아요.
그러나 이제는 안심입니다.
더 이상 형 에서에게 쫓기며 불안하게 살지 않아도 되었고요.
딸 디나가 당한 부끄러움도 이젠 다 씻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어버리고
15년 동안을 눈물로 보냈던 아버지의 쓰린 마음도 다 아물게 되었고요.
가나안에 몰아닥친 흉년으로
자기가 거느리는 식솔 70명이 겪어야 했던 굶주림의 고통도
이젠 다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잠시 후면 야곱은 가장 어려웠을 때에 자기를 만나 주셨던
벧엘의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거예요.
자신과 언약을 세워 주셨고,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지켜 주셨던 능력의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쁘고 얼마나 감사한 일이예요?
세상의 모든 수고와 근심과 고통이 일 순간에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편안하게 두 발 쭉 뻗고 눈을 감는 거예요.
누구에게나 한번은 다가오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 있어서의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이요 시작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젊었다고 해서 죽음이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태어나는 것은 순서가 있어도 죽는 것에는 순서가 없습니다.
늙었다고 해서 죽음을 불안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죽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안식입니다.
자다가 죽는다고 그것이 복된 죽음이 아닙니다.
또한 불의의 질병이나 사고로 갑자기 죽게 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불행한 죽음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거예요.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께서 영혼을 수확하시는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자신의 죽음을 믿음으로 겸허하게, 감사하게 받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도
두려움이나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 앞에 가 설 수 있도록
신앙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진정한 신앙의 승리자가 되어서
영광의 하나님 앞에 가 서게 될 때까지
더욱 더 믿음으로 사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영원한 가나안을 사모하며
이 땅에 살아갈 동안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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