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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尊賢養士 스크랩 도산서원
이장희 추천 0 조회 98 14.09.02 15: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도산서원                           陶山書院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연산군 7년(1501)에 현재의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출생하여, 선조3년(1570)에 돌아가신다. 3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단양군수, 풍기군수, 공조판서, 우찬성, 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70여회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 인격 도야, 후진양성에 힘써 우리나라 교육 및 사상의 큰 줄기가 되었다.

 

 

 

 

 

 

 

 

 

 

 

 

퇴계 이황이 1557년(명종12)에 대제학에서 물러나 고향인 안동 도산(陶山)으로 돌아 와 , 후진을 가르키기 위하여 도산서당(陶山書堂)과 제자들의 기숙사인 농운정사(壟雲精舍)를 4년 여에 걸쳐 건립한다. 그가 죽은 후  4년이 지난 선조 5년(1572) 유림(儒林)들이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서원을 짓기로 하고 이듬해 완공하였다. 선조(宣祖)로부터 "도산서원"으로 사액(賜額)되어 도산서원으로 승격하였다. 도산(陶山) 이름의 유래는... 이 산속에 옹기를 굽는 가마가 있어 마을 이름이 도산(陶山)이었다.

 

 

 

 

 

 

 

  

 

 

 

 

그의 사상은 이기이원론적 주리론(理氣二元論的 主理論)으로 집약된다.  이(理. 四端)로서 기(氣. 七情)을 다스려 인간의 선(善)한 마음을 간직하여 바르게 살아가고, 모든 사물을 순리로 운영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理)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으로 4가지가 있는데 이를 사단(四端)이라 한다. 즉... 측은지심(惻隱之心... 불쌍히 여기는 마음), 사양지심(辭讓之心. 양보하는 마음), 수오지심(羞惡之心). 부끄러워 하는 마음), 시비지심(是非之心.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네 가지 타고난 본성으로 기(氣. 七情)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이(理)와 기(氣)가 다 존재하는데...이(理)로서 기(氣)를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이다. 칠정(七情)은... 희(喜...즐거워 함)..  노(怒...노여워 함)...애(哀. 슬퍼 함)...구(懼. 두려워 함)...애(愛. 사랑함)... 오(惡. 미워함)...욕(慾. 욕심을 부림).

 

 

 

 

 

 

 

 

 

 

 

퇴계는 도산서당을 조성하기 훨씬 전부터 학문을 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칠 건물을 지었다.1546년 퇴계가 46세 되던 해에 관직(官職)을 물러나 낙향(落鄕)하여, 경상도 예안 건지산 남쪽 기슭에 동암(東巖)에 양진암(養眞庵)을 지었고, 1550년에는 상계의 퇴계 서쪽에 3칸 규모의 집을 짓고 집 이름을 한서암(寒棲庵)이라 하였다.    

 

 

 

 

 

                                                              도산서원 전후

 

 

 

 

 

그 후 전국 각지에서 제자들이 모여들자 1551년 한서암(寒棲庵) 동북쪽 계천(溪川) 위에 ' 계상서당(溪上書堂) '을 짓고 제자들을 본격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는 퇴계종택(退溪宗宅)이 있다. 도산서당(陶山書堂)은 계상서당(溪上書堂)이 좁고 또한 제자들의 간청이 있어 집 뒤산 너머 도산(陶山) 자락에 지었는데, 도산서당이 완성된 뒤에도 퇴계는 계상서당에서 도산(陶山)으로 왕래하였고,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퇴계는 1557년 57세 되던 해에 도산 남쪽의 땅을 구하고, 1558년 터를 닦고 집을 짓기 시작하여 1560년에 도산서당을 완공하였고, 이듬해에 학생들의 숙소인 농운정사(壟雲精舍)를 완공하였다.   

 

 

 

 

 

 

 

 

 

 

도산서당 터를 찾은 기쁜 심정을 퇴계는 시(詩) 몇 편으로 남겼고, 도산서당을 짓고 난 다음 해인 1561년 11월에는 ' 도산잡영(陶山雜詠) '을 썼다. 이 시(詩)에 붙인 '도산잡영병기(陶山雜詠幷記)'에는 서당 주변의 경개(景槪)를 비롯하여 퇴계가 '도산잡영'을 읊은 동기 등이 서술되어 있다.여기에서 퇴계는 ' 처음에 내가 퇴계 위에 자리를 잡고, 시내 옆에 두어 칸 집을 얽어 짓고, 책을 간직하고 옹졸한 성품을 기르는 처소로 삼으려 했더니, 벌써 세 번이나 그 자리를 옮겼으나 번번이 비바람에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 시내 위는 너무 한적하여 가슴을 넓히기에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다시 옮기기로 작정하고 산 남쪽에 땅을 얻었던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현재 도산서원 일곽에 있는 건물로는 도산서당, 농운정사, 역락서재(亦樂書齋), 하고직사(下庫直舍) 등이 있는데, 모두 간결하고 검소하게 꾸며져 있어 퇴계의 인품을 잘 반영하고 있다. 기타시설물과 자연 경관으로는 유정문(幽貞門), 열정(열井), 몽천(夢泉),정우당(淨友堂), 절우사(節友社), 천연대(天淵臺), 운영대(雲影臺), 곡구암(谷口巖), 탁영담(濯纓潭), 반타석(盤陀石), 부용봉(芙용峰) 등이 있는데, 이 모든 이름들은 퇴계가 손수 붙여 성리학적(性理學的)인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도산서당(陶山書堂)은 3칸밖에 안 되는 작은 규모의 남향 건물이다. 서쪽 1칸은 골방이 딸린 부엌이고, 중앙의 온돌방 1칸은 퇴계가 거처하던 완락재(玩樂齋)이며, 동쪽의 대청 1카는 마루로 된 암서헌(巖棲軒)이다. 건물을 남(南)으로 향하게 한 까닭은 행례(行禮), 즉 예(禮)를 행함에 있어 편하게 하고자 함이고 재(재)를 서쪽에 두고 헌(軒)을 동쪽에 둔 것은 나무와 꽃을 심을 뜰을 마주하며 그윽한 운치를 숭상하기 위함이었다.  퇴계는 서당의 동쪽으로 치우친 곳에 작은 연못을 파고, 그곳에 연(蓮)을 심어 정우당(淨友堂)이라고 하였으며, 또 그 동쪽에 몽천(夢泉)이라는 샘을 조성하였다. 샘 위의 산기슭에는 평평한 단(壇)을 쌓아 암서헌과 마주보게 하였고,그 위에 매화, 대나무, 소나무, 국화를 심어 절우사(節友社)라고 불렀다. 암서헌 대청에서 정우당, 절우사를 지나 낙동강으로 경관이 이어지게 한것은 궁극적으로 자연(自然)과 합일(合一)하려는 퇴계의 성리학적 자연관을 잘 나타낸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은 퇴계가 세상을떠나고 삼년상(三年喪)을 마치자, 그의 제자들과 온 고을 선비들이 선조(宣祖) 7년인 1574년 봄, ' 도산(陶山)은 선생이 도(道)를 강론하시던 곳이니, 서원(書院)이없을 수 없다 '하여 서당 뒤에 두어 걸음 나아가서 땅을 개척하여 짓기로 하면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그 이듬해인 1575년 8월 낙성(落成)과 함께 선조(宣祖) 임금으로부터 ' 도산(陶山) '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고, 1576년 2월에 사당을 준공하여 퇴계의 신위(神位)를 모셨다.

 

 

 

 

 

 

 

 

 

 

 

 

 

퇴계 이황은 나이 31세 되던 1531년 생애 첫 집을 장만하였다. 첫 부인과 사별(死別)하고 두 번째 부인을 낮아들인 이듬해이었다. 7남 1녀 중 막내이었던 퇴계는 첫 집을 마련함으로써 홀어머니와 형제들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는 출생지인 안동(安東) 도산(陶山)의 온혜리 본가에서 ?은 날을 보냈으며 결혼 후에도 그곳에서 10년을 더 살았다.

 

 

 

 

                                                          퇴계와 건축, 철학

 

 

 

 

퇴계는 자신의 첫 집을 달팽이 집을 의미하는 ' 지산와사 (芝山蛙舍) '라고 불렀다. 당호(堂號)에서 경제사정은 넉넉하지 못하지만 안분자족(安分自足)하겠다는 삶의 철학이 배어난다. 그는 이 집에서 전처(前妻) ?의 두 아들 및 부인과 지내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는 이 집에서 15년을 살았다. 그 사이 과거(科擧)에 급제하였으며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하였다.  한양에서의 벼슬살이에 환멸을 느낀 퇴계는 46세 때 병(病)을 핑계로 고향으로 내려온다. 이 때 그는 두 번째 집을 짓는다. 바로 토계리에 지은 양진암(養眞庵)이 그것이다. 자호(字號) 퇴계(退溪)는 토계리에서 따온 것이다. 이듬해에는 죽동에 터를 구하여 집을 짓고 이사하였다. 50세가 되어서는 죽동 위쪽에 한서암(寒棲庵)을 건축하였다. 서재를 겸한 서당이다. 제자들이 몰리면서 한서암(寒棲庵)이 불편해지자 이듬해 새로 서당을 세웠는데, 계상서당(溪上書堂)이 그것이다.

 

 

 

퇴계는 청장년기 20년 사이에 최소한 집을 4번 지어 이사를 하였다. 물론 고향인안동에서만 장만한 집을 말한다. 여러 차례 출처(出處 ..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남)를 반복한 그는 서울에서는 집을 빌려 생활하기도 했다. 퇴계 최후의 거처는 도산(陶山)이었다. 퇴계는 57세에 그곳에 터를 장만하고 5년의 준비과정을 거쳐 건축물을 완성하였다. 오늘날까지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 도산서당이 그것이다. 도산서당은 퇴계가 말년 10년 동안 거처하며 학문을 닦고 후학(後學)을 길렀던 퇴계 최후의 안식처이다. 퇴계 사후에는 제자들이 서당 주위에 사당과 강당, 서고 등을 지어 도산서당이 도산서원으로 확대되었다.

 

 

 

현존하는 서원(書院) 가운데 경내(境內)에 독서하고 제자를 가르쳤던 서당을 갖춘 곳은 도산서원이 유일하다. 도산서당은 퇴계가 건축한 최후의 득의작(得意作)이다. 퇴계는 도산서당을 짓기 위하여 설계도(說計圖)를 직접 그렸다. 그가 '이숙량'에게 보낸 편지에서 도산서당 구상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재(齋)를 반드시 서쪽 정원을 마주 보도록 한 것은 아늑한 정취가 있도록 함이며, 그 나머지 방, 부엌, 곳집, 대무느 창 등도 모두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니, 그 구조가 바뀌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남쪽 변의 3칸의 들보와 문미의 길이를 8자로 하고 북쪽 면에 4칸의 문미는 남쪽과 동일하게 하되 ... 

 

 

 

퇴계의 이같은 구상이 도산서당에 그대로 구현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퇴계가 도산서당 건축에 앞서 오늘날의 건축설계도와 같은 도형(圖形)을 만들었음은 분명하다. '퇴계선생년보'에는 퇴계가 죽동에 집을 지을 때에도 ' 아들 준에게 편지를 보내 그림에 따라 집을 짓도록 명하였다 '는 ㅐ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집을 지을 때도 설계도를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퇴계가 일평생 집에 집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꿈은 '산수(山水)에 묻혀 공부에 전념하려는 것 ' 이었다. 퇴계가 거처를 옮겨가며 집짓기를 계속한 것은 이상적인 집을 마련하려는 그의 간절한 염원을 뿌리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산서원은 책을 읽고 잠을 잘 수 있는 완락재(玩樂齋)와 공부로 피로한 심신을 달랬던 휴식 공간인 암서헌(巖棲軒)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북아시아의 철학자들은 글 말고도 자신의 철학(哲學)을 건축과 원림(園林)으로 표현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들의 철학을 자세히는 몰라도 그들이 자신의 철학으로 어떤 삶을 추구하였는지는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철학의 정원

 

 

 

 

 

특이하게도 그들은 자신의 철학을 간단하게 정리한 그림을 그렸고, 그 원리에 따라 건축(建築)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추상(抽像)의 언어(言語)를 구성한 글이 있었고, 그 글은 다시 2차원의 그림으로 재현되었으며, 다시 3차원의 공간(空間) 속에 표현되었던 것이다. 요즘 말로 하면 정보를 부호화(符號化)하는 데 능했다는 이야기이다. 이곳 도산서원은 그 대표?으로, 500여 년 전 퇴계 이황의 사상을 지금 우리에게 그대로 낭독해 주고 있다. 도산서당을 걷는 것은 퇴계의 철학서(哲學書)를 읽는 것과 같다. 3칸의 단출한 집인 도산서당을 그 뒤쪽의 도산서원과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퇴계학파의 방대한 저작을 살피기위해서는 분명히 그 시원(始源)이 되는 저술을 따로 뒤적여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도산서원은 도산서당이라는 퇴계의 저술을 바탕으로 거기에 주석을 달고, 해석하며, 발전시킨 퇴계학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학봉 김성일, 한강 정구, 서애 유성룡부터 시작하여 근처의 임청각(臨淸閣)을 지은 '고성 이씨'들까지 안동지역 유림(儒林)을 비롯한 영남학파(嶺南學派)의 방대한 계보가 그대로 도산서원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세 칸짜리 도산서당은 그 핵심이고 상징이다. 퇴계 생전(生前)의 건물로서는 제자인 정사성이 입학할 때 그의 아버지가 지어서 바친 역락서재(亦樂書齋)와 기숙사인 '농운정사'가 있고, 도산서당과 관리시설인 하고직사(下庫直舍)까지 네 채가 전부이다. 퇴계 사후(死後) 도산서원의 건립에 지대한 역할을 한 이가 '월천 조목 (月川 趙穆)'이다. 퇴계 팔고제(八高弟) 중의 한 사람인 조목(趙穆)이 퇴계의 숨결과 손길이 하나하나 밴 도산서당의 배치에 새로이 도산서원을 앉힌 방법은 놀랍게도 도산서당과 그 이외의 건물들을 과감히 양분(兩分)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도산서당의 선물들은 서원(書院)의 정문(正門)인 진도문(進道門)으로 들어가는 접근로에 의하여 끊겼다. 아울러 지금의 하고직사(下庫直舍) 위쪽으로 새로 들어서는 서원의 영역을 한정하면서 동편의 서원과 도산서당 사이의 화계에 의해 도산서당은 더욱 독립적인 공간이되었다. 철학의 정원에서 느껴야 하는 감탄이다.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성리학은 조선의 관학(官學)으로 정착하였다. 그 과정에서 영남학파의 거두(巨頭)퇴계 이황은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 천원지폐의 주인공이다. 이황은 성리학적 인간관에 주목하여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의 원리를 탐구하였다. 四端이란 맹자가 말한 네가지 실천도덕의 근간, 즉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 등을 말한다. 또 칠정이란 예기(禮記)와 중용(中庸)에 나오는 것으로,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慾) 등 인간이 품을 수 있는 일곱가지 감정이다.

 

 

 

 

 

 

 

 

 

 

 

이러한 4단7정에 대하여, 이황은 사단이란 이(理)에서 나오는 마음이고, 칠정이란 기(氣)에서 나오는 마음이라고 하였다. 성리학적 인간관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理와 氣를 함께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황은 인간의 마음을 이(理)의 발동을 생기는 것과 기(氣)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 두가지로 구분한 것이다.그중에서 사단은 선과 악이 생기지 않은 순수한 마음으로 이(理)가 발동해서 생긴 것이고, 칠정은 선과 악이 뒤 섞인 탁한 마음으로 기(氣)가 발동한 것이라고 보았다. 인성(人性)에 있어 " 본연(本然)의 性 " 과 " 기질(氣質)의 性 "이 다르다는 점에서 착안한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인 것이다.

 

 

 

 

이황의 학설은 당시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조선의 사상사를 휩쓸며. 200년에 걸친 당쟁의 이론적 바탕이 된 유명한 사단칠정논쟁이 시작됐다. 반론을 제기한 사람은 이황의 제자이기도한 고봉,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었다. 기대승은 어려서 변변한 스승도 없이 혼자 독학하여, 31세에 주자문록(朱子文錄)이라는 책을 3권이나 편찬한 주자학에 통달한 文材이었다. 기대승은 이황에게 편지를 보내 " 理와 氣는 관념적으로는 구별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마음의 작용에 있어서는 구분할 수 없다." 며 스승의 사단칠정론을 반박하였다. 기대승은 인간의 물질적 욕망이나 감정과 별개로 도덕적 감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며, 스승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 반대하였다. 주기론적 관점에서 사단과 칠정을 설명하려 한 것이다.

 

 

 

 

 

 

 

 

 

 

 

26년이나 어린 제자의 당돌한 지적에 대하여, 이황은 수십번에 걸쳐 서신을 주고받으며 정성으로 답변하였다. "측은지심, 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 같은 사단은 인간의 이성, 즉 理에서 나온것이기 때문에 순전한 선(善)이라네..그러나 칠정은 氣를 겸했으므로 선악이 있는 것이다. 주자어류(朱子語類)에서도 사단은 理가 발한 것이며, 칠정은 氣가 발한 것이라고 분명히 나와 있네. 사단은 理가 발하여 氣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氣가 발하여 理가 올라 타는것으로 이해하여 보게......

이 것이 바로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이다.

 

 

 

기대승과의 8년에 걸친 토론끝에 이황은 마침내 "사단은 궁극적인 관념 그 자체가 드러난 것이지만. 현상화할 때 사물의 근원인 氣가 뒤따른다. 또 칠정은 氣의 소산이지만  현실화될 때에는 일정법칙의 제어를 받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 논쟁의 내용은 기대승의 후손들이 묶은 양선생사칠이기왕복설(兩先生四七理氣往復說)이란 책에 남아있다. 이 논쟁으로 말미암아 이황의 사상은 논리성과 정밀성을 갖추게 되었고, 중국의 흉내가 아닌 진짜 조선의 성리학이 싹트게 되는 것이다.

 

 

 

이황의 사단칠정론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입각한 인성론(人性論)이었다. 그것은 동서고금의 주요한 철학주제인 "인간의 마음은 어떻게 생겼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연구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황과 교조적인 주자학자들은 이(理)개념을 물질적 세계 밖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의 차원으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이(理)가 현실화해 도덕규범으로 성립한다고 주장하여 봉건윤리의 절대성을 합리화한 것이다. 한편 이황의 학설을 논박한 기대승의 학설은 이율곡에 의하여 뒷받침되었다. 그러써 이황의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이율곡의 기호학파(畿湖學派)가 대립하면서 부단한 논쟁이 벌어진다. 이는 마침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사이에 벌어진 당쟁(黨爭)의 이론적 근거가 된다.

 

 

 

 

 

 

  

 

도산서당(陶山書堂).... 퇴계 이황이 4년에 걸쳐 지은 건물로 ,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거처하던 방은 완락재(玩樂齋)...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 하였다.

 

 

 

 

 

 

 

 

 

 

 

 

이퇴계의 매화(梅花) 사랑은 유명하다. 항상 매화꽃을 곁에 두었으며, 매화에 관한 107首의 詩를 남겨, 매화시첩(梅花詩帖)이란 시집도 편찬하였다. 그가 임종한 날 아침에 남긴 말이 매화에 물 주어라..이었다.  그리고 죽기 며칠 전에 이질에 걸려 설사를 줄줄 하고 있을 때 매화를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매형(梅兄)에게 불결하니 마음이 절로 미안하구나....

 

 

 

               도산월야영매  陶山月夜影梅                  도산 달밤 위에 핀 매화

 

 

 

           독의산창야색한   獨倚山窓夜色寒        산(山)집 창가에 홀로 기대서니

           매초월상정단단   梅梢月上正團團        매화가지 끝에는 둥근 달이 떠있다.

           불수갱환미풍지   不須更喚微風至        살랑 살랑 미풍을 기다릴 것도 없이

           자유청향만원간   自有淸香滿院間        온 집안에 맑은 향기가 절로 가득하다.

 

 

 

 

 

 

 

   

                                     장판각(藏板閣)     

 

                                                                                                                           원에서 찍어 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던 장소이다.  선조어필(御筆), 퇴계문집, 유묵(遺墨), 언행록(言行錄), 도산십이곡 등 2,790장이 보관되어 있다가, 최근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되었다.

 

 

 

 

 

                                          전교당                 전교당

 

 

 

 

 

 

 

 

 

 

 

 

 

전교당(典敎堂)은 서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스승과 제자가 함께 모여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도산서원의  사액(사額)현판이 걸려 있는 곳이다. 한석봉의 글씨이다. 크기는 정면 4칸, 측면 2칸이고 팔작지붕 단층의 목조 건물이다. 보물 제210호로 지정되었다. 

 

 

선조(宣祖) 7년인 1574년에 세웠으며, 도산서원의 강학(講學) 공간중심에 위치한 강당(講堂)으로, 앞마당에는 동재(東齋)인 박약재(博約齋)와 서재(西齋)인 홍의재(弘懿齋)가 자리잡고 있다. 1969년 보수를 하였는데, 앞면에 장대석으로 쌓은 축대 위에 남향으로 세웠으며, 건물 오른쪽 1칸은 온돌방이고 나머지는 동쪽으로 대청마루를 놓았다. 대청의 옆과 뒤는 벽마다 각각 2짝 10개의 판문(板門)을 달고, 앞면의 기둥 사이는 모두 텄다. 모두 네모진 기둥을 세워 대들보를 받치고 두주(頭柱)마저 생략하여 매우 간소한 모습이다.    

 

 

 

 

 

 

 

 

 

 

 

 

 

  

 

 

 

 

 

퇴계는 관직을 물러나서, 1551년 이 곳 고향에 먼저  계상서당(溪上)을 세우고, 1561년 다시 도산서당을 세워 제자를 가르치지만, 너무 좁아 제자들의 권유로 이곳에 도산서원을 정식으로 건립한다.  퇴계가 계상서당을 세워 후학의 교육에 열중할 당시, 23살의 이율곡이 찾아와 퇴계를 만나고 詩를 남긴다.

 

 

 

                          시냇물은 수사(洙泗)에서 나뉜 가닥이고

                          산봉우리는 무이산(武夷山)처럼 빼어났습니다

                         살아가는 살림은 천여권의 경전이고

                         거처하는 방편은 두어칸의 집뿐입니다

                         뵙고 싶었던 회포를 푸니 구름속의  달 보듯 머리 개이고

                         웃음섞인 말씀을 듣고나니 거친 물결을 멈추게 합니다.

                         저로서는 道를 듣고자 온 것이지

                         반나절의 한가로움을 훔치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광명실(光明室)... 책을 보관하는 서고(書庫)로서, 현판은 퇴계의 친필이다. 동,서 두군데로 나뉘어 있으며, 습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누각식으로 세웠다.

 

 

 

 

 

                                          농운정사                 농운정사

 

 

 

 

 

 

 

 

 

 

농운정사(壟雲精舍)... 제자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이황은 제자들에게 공부에 열중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집 모양을  공부의 공(工)자 모양으로 짓도록 하였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를 시습재(時習齋)라 하고, 휴식을 취하던 서편 마루를 관란헌(觀瀾軒)이라 하였다.

 

 

 

 

 

 

 

 

 

 

 

 

                                                 이황의 성교육

         

 

 

 

선조(宣祖)는 벼술에서 물러나 고향에 은거(隱居)하고 있던 이퇴계를 다시 불렀다. 퇴계가 입궐할 즈음, 남문 밖에는 여러 관리와 유생들이 모여 그의 가르침을 받고자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현학적인 질문과 답변이 오고간 끝에.. 얼굴이 희고 뺨이 붉은 소년 하나가 공손히 다가와 절을 하고는 말하였다.

 

 

 

" 듣자하니 선생님께서는 독서를 많이 하셔서 모르시는 바가 없다고 하시기에, 평소에 궁금하였던 것을 묻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배우고 싶은 마음을 물리치지 말아 주십시요." 퇴계는 빙그레 웃으며   " 그래요. 그대가 알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  " 예. 우리 말에 여자의 아래에 있는 소문(小門)을 보지라 하고, 남자의 양경(陽莖)을 자지라 하니, 그것은 무슨 까닭이 있어서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까?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렸지만, 퇴계는 온화한 얼굴로 자세를 바로잡고 천천히 대답한다.

 

 

" 그러니까 여자의 소문(小門)은 걸어 다닐 때 감추어지는 것이라 해서 보장지(步藏之)라고 하는데, 발음하기 쉽도록 감출 장(藏)이 빠지고, 보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의 양경은 앉아 있을 때에 감추어지는 것이라 해서 좌장지(坐藏之)라고 부르던 것이 변하여 좌지가 되고, 다시 자지가 된 것입니다. "

 

 

" 예.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여자의 보지를 씹이라 하고, 남자의 자지를 좆이라고 하는 것은 또 무슨 까닭입니까? "몇몇 관리가 그 소년을 끌어내려 하는것을 퇴계는 말리며, 다시 조용히 대답한다. 

 

 

 

"여자는 음기(陰氣)를 지녀서 축축할 습(濕)자의 발음을 따라 "습"이라고 한 것인데, 우리 말은 된소리를 내는 것이 많아 씁이 되었고 다시 편하게 말하느라 씹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남자는 양기(陽氣)를 지녀 마를 조(燥)의 음을 따서 "조"라고 한 것인데, 이것 역시 발음이 뒤를 세워 강조하느라고

좆이 된 것입니다.'

 

 

소년은 그제서야 고개를 다시 숙인 뒤 물러나며 말했다. " 예 말씀을 들으니 이치를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만 물러 나겠습니다. " 그 때 소년의 거동을 살피던 관리가 거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 뉘 집 자식인 줄 모르나, 어린아이가 어른들앞에서 저런 무엄하고 천한 질문을 하는 것을 보니 필경 버린 자식임에 틀림없을 거외다." 퇴계는 그저 조용히 웃으며 말한다.

 

 

 

  

 

 

  

 

 

"어찌 그리 단정하십니까? 세상의 학문이란 가장 근본적이고 가까이 있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부모에게서 태어날 때, 자지와 보지를 몸의 일부분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고, 당연히 그것의 명칭에 대하여 궁금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 어찌 상스럽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陰과 陽이 서로 비속한 마음과 어지러운 관계로 서로 합하여, 세상의 윤리와 기강을 흔들어 놓는 것 거기에 상스러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입에 쉽게 올리지 못하는 것은 자칫 우리가 범하기 쉬운 천박한 행동과 욕망을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지, 저 소년과 같이 순순한 마음으로 진상을 알고자 하는 것을 억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음양의 근본과 이치를 탐구하는 저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궁구하는 성리학의 근본을 성찰하는 진지한 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마 저 소년은 장차 세상 음양의 조화를 잘 살펴, 변화에 맞게 세상을 이끌어 갈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

 

 

 

                                    그 소년은 백사 이항복(李恒福)이었다.

 

 

 

이 이야기에 관하여 다른 이야기도 있다. 천하의 난봉꾼인 이항복이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이율곡의 문하에 들어 가면서, 율곡에게 질문 한 것이라는..... 어쨋건 이항복의 질문이다.율곡은 자지와 보지에 대하여 달리 설명한다.자지는 아이(子)를 낳는 가지(枝)이므로 자지이고,보지는 아이라는 보배(寶)를 담고 있는 연못(池)이니 보지라고.....

 

 

 

 

 

 

 

 

 

 

 

 

 

역락서재(亦樂書齋).... 정사성이란 고을 사람이 자기 아들을 퇴계에게 제자로 맡기며, 지어 준 건물로, 뜻있는 제자들이 힘을 합쳐 세웠다고 한다. 현판의 글씨는 퇴계의 친필이다.

 

 

 

 

 

 

 

 

 

 

 

 

 

 

 

상덕사(尙德祠)....이황의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 퇴계의 위패와 제자인 조목(趙穆)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고, 매년 춘,추로 제사를 모시고 있다.

 

 

 

 

 

 

 

 

 

 

 

 

 

                                           시사단                   試士壇

 

 

 

 

 

 

 

 

시사단(試士壇)... 조선 정조 16년(1792)에  정조(正祖)가 평소 흠모하던 이황의 학덕(學德)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 주기 위하여 어명으로 특별 과거시험인 "도산별과(陶山別科)"를 보던 장소이다. 총 응시자가 7,228명이었고, 정조(正祖)가 직접 11명을 선발하여 급제시켰다.

 

 

정조(正祖) 16년인 1792년, 왕(王)은 퇴계 이황(李滉)의 학덕(學德)을 추모하기 위하여 규장각 각신(閣臣) 이만수(李晩秀)를 도산서원에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한 그곳 송림(松林)에서 과거(科擧)를 치러 영남(嶺南) 인재를 선발하게 하였는데, 이때 응시자가 모두 7,228명에 이르렀다. 이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1796년 이곳에 단(壇)을 모으고 비(碑)와 비각(碑閣)을 세웠다. 비문(碑文)은 당시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썼는데, 1824년 비각을 개축하면서 비석을 새로 새겼다.

 

 

 

 

 

 

 

비각(碑閣)은 원래 도산서원과 마주보는 강변 송림(松林) 안에 세워져 있었는데, 1974년 안동댐건설로 인한 수몰(水沒)로 송림은 없어지고, 단(壇)을 지상 10m 높이로 쌓아 옛 건물과 비(碑)를 그대로 옮겼다. 비각은 1칸인 팔작지붕 목조집이며 중방 밑에 판벽이 둘러쳐져 있고, 추녀 네 곳에 모두 활주(活柱)를 받쳐 안정감을 주었다.    

  

 

 

 

 

 

 

 

 

 

                                                                    서원                    書院

 

 

 

서원(書院)은  조선시대 사림(士林)의 사상적 본거지이자, 활동기반으로서 사림(士林)의 운명공동체 역할을 하며...강학(講學)과 선현(先賢)의 제향(祭享).. 이 두가지 기능을 담당하였다.서원이 강학과 제향의 기능을 가진 점에서는 관학(官學)과 차이가 없었지만,  제향의 대상이 공자(孔子)와 그의 제자인 성현(聖賢)이 아니라 , 우리나라 선현(先賢)이라는 점과 설립주체가 중앙정부가 아닌 士林이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지방의 향교, 중앙의 사부학당, 성균관으로 이루어진 관학(官學이 중심이었던 조선 초기의 교육제도는 中期를 지나면서,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 반대로 인한 집현전 폐지와 연산군(燕山君)에 의한 서원의 황폐화 등으로 국가 지원의 부족에 부딪치고, 결국 관학은 교육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이처럼 관학이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이 축소되면서, 학덕을 겸비한 유학자들은 개인적으로 서재(書齋),  정사(精舍) 등의 사학(私學)을 설립하여 학문을 보급하고 계승하였다. 조선 성리학(性理學)의 문화유산인 서원은 선비들이 학문을 연마하고, 선현에게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향촌사회를 이끌어 가는 정신적 지주 역할과 아울러 후에 지방 사림세력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나아가 중앙정치 세력에 대한 견제기반으로서의 기능을 갖게 된다. 

 

 

조선 중기 교육 기능면에서 쇠퇴의 기미를 보이던 관학에  대응하여,  새로운 교육활동의 중심지로 부상했던 서원은 과거시험과 법령의 규제에 얽메인 관학(官學)과는 달리 학문의 자율성이 존중되어  출세주의나 공리주의(功利主義)가 아닌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던 민족 교육의 산실이자, 유교적 인재 배출의 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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