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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19 - 영국과 네델란드 간에 무역 독점을 위해 4차례 벌어진 영란전쟁!
'황인숙의 행복한 시읽기' 에 황학주 님의 “풍선” 이란 시가 있습니다.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날이 있다.
아이에게 풍선을 불어 묶어주려다
갑자기 바람구멍이 열리자
풍선이 갯벌위로 끌려 날아간다
무슨 말을 저리 온몸으로 하나싶어 문득 소름 돋는다.
색색의 풍선이 떠있는 바다
또 하나 풍선이 터지면
부끄러운 입술 하나가 다물어지는 걸까
욕심 많은 사람 처럼 국가도 하나의 생명체로 스스로를 확장시킬려는 본성 이 있으니 이런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는데.... 대항해시대에 유럽을 떠나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에서
무역 이익을 독점하려고 하다가 식민지 획득을 위해 유럽 국가들 끼리 싸우던 제국주의 시절입니다.
중세시대에 "동방무역" 을 하던 나라는 제노바, 피사, 아말피, 베네치아 였는데 무역 독점을
위해 서로 싸우다가 멸망하고.... 남은 두 나라인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십자군 전쟁 중에도
싸웠으며 제노바는 베네치아 도시 까지 침공해 들어갔으니 "영란전쟁" 은 그 2탄인가 합니다.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크게 보면 성 사바스 전쟁 (1256 ~ 1270년), 쿠르촐라 전쟁 (1294 ~
1299년), 해협 전쟁 (1350 ~ 1355년) 과 키오자 전쟁 (1377 ~ 1381년) 네번이지만, 전투
는 수십차례를 치뤘으며... 1294년 마르코폴로는 제노바가 베네치아를 공격해 온 쿠르촐라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제노바 감옥에서 저술한게 저 유명한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 입니다
“영란전쟁” 이란 17세기 후반에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간의 3차에 걸친 전쟁과 18세기 말엽의 1차례
전쟁을 합쳐 영란 전쟁(英蘭戰爭) 이라고 부르는데.... 17세기초만 해도 잉글랜드와 개신교 국가
인 네덜란드는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포르투갈 세력에 대항하면서 서로 협력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실력이 잉글랜드 동인도 회사를 능가했고, 1623년의 암보이나
사건을 계기로 영국은 네델란드에 밀려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으니 향신료 무역을 독점한 네덜란드에는 아시아의 부(富)가 유입되었고 잉글랜드
에서는 네덜란드에 대한 반감(심술)이 높아지니 상업이익 때문에 우방이 적으로 변한 것입니다.
전쟁은 해전이 중심을 이뤘으며 양쪽 모두 상대방의 본토를 침공하지는 않고 어중간한 결과로 끝났는
데.... 잉글랜드는 3차에 걸쳐 전쟁을 통해 네덜란드 수출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1688년 명예혁명
에 의해 한때 적대적이었던 네덜란드의 군주 빌렘 3세를 잉글랜드왕 윌리엄 3세로 맞이하게 됩니다.
18세기에 행해진 제4차 영국- 네덜란드 전쟁으로 네덜란드의 국력은 피폐해졌고 해상 교역의
우위를 잃었으니 네델란드가 우세했던 17세기 3차례의 전쟁과는 원인이 다른데, 사학자
들은 영국과 바타비아 공화국(프랑스 나폴레옹 치하의 헤이그 괴뢰국)의 전쟁과 나폴레옹
시대 홀란드 왕국과의 전쟁을 각각 제5차, 제6차 영국 - 네덜란드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카톨릭 합스부르크 왕조와 개신교 국가들 사이에 1618년부터 30년 종교 전쟁을 하는 동안 잉글랜드
와 네덜란드 모두 외교적으로 직접 관여했고 동시에 양국은 장거리 탐사 항해에 착수했는데,
중세 후기와 르네상스때는 잉글랜드나 플랑드르, 네덜란드는 베니스, 제노아, 포르투갈,
카스티야 또는 아라곤 과 같은 상거래 주도 국가와는 동등한 유럽 해상 동맹국이 아니었습니다.
대항해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네덜란드와 영국은 중상주의와 발트해 무역 으로 영향을 받았
으며 신세계에서 이익을 추구하려는 유혹을 받았는데... 1600년대 초에 네덜란드는
가톨릭 합스부르크가와 80년간이나 독립전쟁을 계속하면서도 원양 탐사를 시작
했으니.... 주식회사를 만들어 주식을 발행해 모은 돈으로 탐사 자금을 지원할수 있었습니다.
네델란드는 북미, 인도 및 인도네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또한 사략선(해적선!) 운용
에서도 성공을 거두었으니 1628년에 피트 하인 제독은 스페인의 대규모 보물 함대를
성공적으로 나포한 유일한 지휘관이었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장기간의 항해로
동인도 회사에 의한 관료 계급과 지식을 구축했으며 후발 주자인 영국은 이걸 모방합니다.
17세기 중반 네덜란드는 동인도에서 포르투갈 무역소 대부분을 무력으로 빼앗아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향신료 무역을 독차지했고, 플류트 범선의 저비용 대량생산으로 네덜란드는 다른 모든 나라들보다 더
많은 배를 보유한 유럽 최대 상선함대를 보유해 발트해 무역과 원양 무역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합니다.
헤네랄은 대부분의 네덜란드 군대를 해체하기로 결정하니 주요 네덜란드 도시와 새로운
스타트허우더, 오라녜공 빌럼 2세 사이의 충돌로 이어졌고 공화국은 내전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으며 1650년 스타트허우더의 예기치 못한 죽음은 정치적 긴장감을 높입니다.
제1차 영란전쟁 (1652 ~ 1654)
청교도 혁명전쟁 중에 상실한 잉글랜드 해운과 무역의 지위를 회복하고자 올리버 크롬웰은 1651년
항해조례를 발표하니 1652년부터 3년간 잉글랜드 공화국과 네덜란드 공화국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는데, 잉글랜드 함대는 동인도 제도에서 아시아 특산물을 싣고 귀국하는 네덜란드 함대를
영국해협에서 공격하고 나포하기 시작하니 처음에는 잉글랜드 해협의 제해권이 초점이 되었습니다.
네덜란드의 조선능력은 세계최고로 네덜란드에서 만든 대형 군함은 수출 상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지만
소형함 중심의 네덜란드 함대가 대형함 중심의 스페인 함대에 항상 승리했고, 항로의 보호를 위해 다수
의 소형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 편리하다는 이유로 부르주아 정치인들은 대형 군함 건조를 승인하지
않았으니 네덜란드 해안은 수심이 얕기 때문에 흘수가 깊은 대형함을 운용하기 어려운 사정도 있었습니다.
이에 반해 잉글랜드는 장비를 갖춘 대형 군함을 투입해 단종진이라는 전술을 펼치는 네덜란드
해군과 충돌했으니 1652년에서 1653년까지 네덜란드의 마르턴 트롬프 제독은 로버트
블레이크가 이끄는 우세한 잉글랜드 해군에 분전했지만..... 장비의 차이는 극복하지
못하니 잉글랜드는 굿윈샌즈 해전과 플리머스 해전과 켄티쉬 노크 해전에서 승리를 거둡니다.
네덜란드는 1652년 12월에 던지네스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지만, 포틀랜드 해전에서 패했고
중상을 입은 브레이크와 교체된 조지 뭉크는 갇바드 해전에서 네덜란드에 승리를 했으며
헤이그 근해 스헤베닝언 해전에서는 트롬프 제독이 전사하고 네덜란드는 영국 해협의
제해권을 잃었고.... 네덜란드 함대는 스코틀랜드의 북쪽을 크게 우회해 네덜란드로 귀국합니다.
잉글랜드 해군은 네덜란드의 여러 항구를 봉쇄했고 무역 입국인 네덜란드는 큰 타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대단한 손해는 입지 않았으며 잉글랜드의 호국경 크롬웰은 이상주의적인
개신교 국가인 영란의 대등한 합방론을 주창했으나 1654년 4월 웨스트민스터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끝났지만 17세기 전반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던 네덜란드는 쇠퇴의 길을 걷는 전조가 됩니다.
제2차 영란전쟁 (1665 ~ 1667)
네덜란드는 재정을 정비하고 해군을 확장하여 무역을 진흥시켰으나, 잉글랜드는
1660년의 왕정복고 후 찰스 2세가 항해 조례를 갱신하고, 1664년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뉴네덜란드를 침략하여 뉴암스테르담을 점령하고 이를 뉴욕으로 고칩니다.
다음 해 1665년 3월 잉글랜드가 네덜란드에 선전포고하여 2차 전쟁이 개시되었는데 잉글랜드
는 로스토프트 해전에서 네덜란드 해군을 무찔렀으나, 이후 프랑스가 네덜란드
편을 들어 참전했고 잉글랜드의 동맹국 뮌스터 공국도 참전했으나 프랑스에게 패배합니다.
이번 전쟁에서는 1665년 흑사병과 1666년 런던 대화재로 잉글랜드가 밀려 1667년 6월에
메드웨이 해전에서 네덜란드의 미힐 더 라위터르 제독이 템스강에 침입하여 하구를
봉쇄하는 등 전과를 올렸으며 1667년 7월에 브레다 조약(Treaty of Breda) 으로 종결됩니다.
양국의 영토는 현 상태를 유지하며 잉글랜드는 뉴암스테르담(뉴욕) 을 얻었고, 네덜란드는 수리남을
확보했으며 항해 조례를 수정하고 1662년 통상조약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에도 조약이 체결되어, 잉글랜드는 아카디아를 프랑스에 양도하고 서인도 제도의 영토를 얻습니다.
제3차 전쟁 (1672 ~ 1674)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행한 침략전쟁 중의 하나로 네덜란드의 무역 독점 타파를 목적
으로 했는데 직접적인 원인은 네덜란드가 프랑스 망명자를 비호한데 있으니 루이
14세는 앞서의 3국 동맹(네덜란드, 잉글랜드, 스웨덴)을 타파하고자 1670년에는
잉글랜드와 도버 밀약을 맺고 1672년에는 에스파냐와 그리고 독일 제후들과 결탁합니다.
1672년 프랑스군은 라인 강을 건너서 네덜란드에 침입하였으니 네덜란드에서는 요한 더 빗이
암살되고 오렌지공 윌리엄이 총독이 되어 수문을 열고 홍수전술(洪水戰術)로 항전하였습니다.
1673년 네덜란드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황제 레오폴트 1세 그리고 에스파냐와 동맹
을 맺고 또 잉글랜드와도 화해를 함으로써 프랑스에 대해 외교전술로 대항하였으니 전투는 네덜란드와
알사스, 그리고 지중해에서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1678년 네이메헌 화약으로서 전쟁이 끝납니다.
이 조약에 의해 네덜란드는 모든 영토를 회복하고 중립을 약속했으며, 에스파냐는 프랑스에 프랑슈콩테
와 그 밖의 동북 국경의 몇개 도시를 양보하고 레오폴트 1세는 프랑스에 일부 영토를 양보하였습니다.
제4차 영란전쟁 (1780.12.20~ 1784.5)
제4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은 영국이 1780년 12월 20일에 네덜란드에 전쟁을 선포하였고 1781년에
네덜란드 해안을 봉쇄한뒤 서인도 제도와 동인도 제도를 점령해 영국에게 유리하게 전개 되었습니다.
1781년 8월에 네덜란드는 마지막으로 도거뱅크 해전에서 승리했으나 그 후 함대를 조직하지
못해 1784년 5월에 네덜란드의 항복으로 종결되었는데 이 4차례 전쟁으로 네덜란드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세계 강대국 지위를 상실했으며 영국이 세계 해양강국으로 부상합니다.
1685년 빌럼(윌리엄 3세)의 장인이자 작은 외삼촌인 요크공 제임스가 찰스 2세에 뒤를 이어
제임스 2세로 즉위하게 되는데 그는 친가톨릭 정책을 펼치면서 국교도와 청교도가 많이
있었던 잉글랜드 의회를 불안하게 했고 그러던중 제임스 2세가 뒤늦게 아들을 낳게 됩니다.
제임스 2세의 아들이 가톨릭 왕자로 키워질 게 뻔한 상황에서 다시금 피의 메리의 시대가 도래
하는 것을 우려한 잉글랜드 의회는 토리파, 휘그파 할 것 없이 프로테스탄트였던 제임스
2세의 딸 메리와 그의 남편 빌럼을 주목하게 되었고, 결국 빌럼에게 군대를 요청하게 됩니다.
빌럼은 1688년 11월 5일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했고 명예혁명으로 장인 제임스 2세가 쫓겨나자,
아내인 메리 2세와 공동국왕 윌리엄 3세로 즉위하니 그의 치세때는 네덜란드도 잉글랜드와 동군연합
을 이뤘는데 부인 메리 2세가 1694년에 사망하게 되면서 윌리엄은 1702년 까지 단독재위를 하게 됩니다.
그는 권리장전을 승인했으니 잉글랜드 의회가 조세, 군대 조직 등을 관리하는 입헌체제를
확립하게 되었으며 또한 1689년 5월 비국교도를 포함한 개신교 교도들에게 예배
의 자유를 허용하는 관용법이 통과되었으니 사실 이것은 가톨릭 교도 국왕의
즉위를 극히 꺼린 잉글랜드 의회와 개신교도였던 윌리엄의 영향력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20대에 총사령관으로 잉글랜드, 프랑스 연합군과 대적했을 정도로 타고난 무인이었던
윌리엄 3세는 스코틀랜드 곳곳에서 제임스 2세를 지지하는 반란들을 진압했으며,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제임스 2세의 군대들이 버티고 있던 아일랜드에 역시
군대를 보내 제임스 2세의 군대를 대파하면서 아일랜드 반란을 진압하게 됩니다.
대외적으로는 당시 최강국이었던 루이 14세의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한 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치게 되니 루이 14세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에 잉글랜드
-네덜란드가 동시에 참가하게 되었고, 곧바로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에 참가하게 됩니다.
물론 이 때 루이 14세의 위세가 대단했기 때문에 굉장히 어려운 전쟁을 펼치긴 했으나
루이 14세 역시 재정상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1697년 레이스베이크 조약을
맺게 되고 여기서 루이 14세가 처음으로 윌리엄을 잉글랜드의 왕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1700년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가 죽고 그의 후계자로 루이 14세의 손자 펠리페 5세가
후계자가 되자 프랑스-스페인 사이의 통합에 대한 유럽 열강들의 반발이 심각해 집니다.
1701년 제임스 2세 사후 루이 14세가 레이스베이크 평화조약을 깨고 제임스 2세의 아들 제임스를
잉글랜드의 왕으로 임명하게 되자 윌리엄은 곧바로 대동맹을 맺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나서게 되는데...... 1702년 3월 낙마사고로 인해 폐렴에 걸렸고 합병증으로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윌리엄과 메리 사이 자녀가 있었지만 요절했기에 월리엄 3세 사후 처제이자 사촌동생인 앤 여왕이 즉위
하는데, 외조부인 찰스 1세를 통해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메리 2세가
죽은후 윌리엄 3세가 재혼해 자녀를 보았다면 왕이 될 수 있었겠지만 그런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러한 문제로 오라녜 가문은 침묵공의 동생 가문이 대를 잇게 되었고 두 나라의 동군
연합도 해체되었는데 여왕이 될 처제 앤 또한 자식들이 모두 요절한 상태였기에 후계
문제를 염려하여 왕위 계승법을 만들었으니 가톨릭 교도는 잉글랜드 왕이 될 수 없음을
못박아놓아 앤 여왕 치세후 하노버 공국의 조지 1세가 즉위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재위중이던 1696년 집에 있는 창문의 개수에 비례하여 세금을 걷는 '창문세' 를
시행하는 150년 가까이 유지되었는데 모국인 네덜란드 도 창문세가 있었습니다.
한편 아일랜드 섬에서는 주황(오렌지)색 = 개신교 상징색이 되어 있는데, 이것은 윌리엄 3세
때 확립된 것으로 북아일랜드 내 강경파 개신교도들이 관여하는 단체인 오렌지 오더
(Orange Order)는 오라녜(오렌지) 공이었던 윌리엄 3세와 장인 제임스 2세와의 전쟁과
관련이 깊으며 현대 아일랜드의 국기에 들어 있는 주황색도 윌리엄의 추종자를 상징합니다.
1702년에 윌리엄 3세에 이어 제임스 2세의 차녀 앤은 잉글랜드 국왕, 스코틀랜드
국왕이자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초대 국왕에 오르는데 군주로서의 명성은
높지 못하지만 그녀의 재위 당시 잉글랜드에는 중요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앤은 윌리엄 3세가 개입한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을 치렀으니 위흐레흐트 조약을 통해 지브롤터
를 확보하면서 영국은 해군력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니 이 때부터 영국의 세력 균형책이
시작되었으며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반란을 진압하고 1707년 통합법에 의해 동군
연합이었던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을 통합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성립됐습니다.
또 네덜란드의 왕위 자리는 '침묵공' 빌럼 1세의 동생의 후손이 이어받았으며 앤여왕은
토리당과 휘그당의 불화를 이용하여 왕권을 유지하였으며 토리당과 휘그당을
번갈아 중용한 후에 한 세력이 너무 강해진다 싶으면 실각시키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1708년 남편 사망후 앤여왕은 건강이 악화되었으며 병상에 누워서도 국정을 돌보다가 1714년 8월 1일에
사흘동안 이어진 어전 회의를 버티지 못하고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여왕이 동생인 제임스 2세
의 아들과 접촉하여 복권시키려 하자 주위의 반대파들이 두려워해 여왕을 암살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1671년 앤과 사별한 요크 공 제임스 2세는 25살이나 적은 15살의 이탈리아 북부 모데나 공국의 메리와
재혼했는데 당시 제임스의 두 딸 메리와 앤이 각각 11살, 8살이어서 메리와 같이 어울려 놀기도 했다
는데 여기서 출생한 아들이 제임스 3세를 칭하며 영국 왕위를 요구했지만 가톨릭교도라 거부되었습니다.
명예혁명후 프랑스 망명시절 베르사유 궁정에서 제임스 2세보다 외모는 물론 성품과 재기가 돋보였던 메리
왕비의 인기가 훨씬 좋았으니 그녀는 패물을 팔아 제임스 2세의 군자금뿐 아니라 지지자들의 형편까지
도왔을 만큼 망명정부의 안주인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고 하며 남편 사후 평생 상복을 입고 살았다고 합니다.
스튜어트 왕조의 직계가 제임스 2세 이후 끊어졌기 때문에 영국에는 그녀의 즉위 이전부터 왕조
교체가 예정되어 있었으니 앤의 사후 왕위계승법에 따라 제임스 1세의 외손녀 소피아 공주
의 후손인 하노버 선제후국의 조지 1세가 영국왕으로 즉위함으로써 하노버 왕조가 시작됩니다.
앤 여왕과 메리 2세의 이복남동생 제임스는 제임스 3세를 자칭하며 영국 왕위를 주장했으며 영국 역사상
국왕의 거부권을 행사한 마지막 군주이니 1708년 영국 의회를 통과한 Scottish Militia Bill 1708 라는
법안에 앤 여왕이 거부권을 행사했는데 스코틀랜드 민병대를 강제 해산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1707년에 한 나라가 되었는데 프랑스에서 스코틀랜드에 "잉글랜드를 치자" 고 제안
한걸 법안을 통과시킨후 알았으니 스코틀랜드 민병대를 무장해제시킬 경우 프랑스가 스코틀랜드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영국을 침공할 명분을 없애기 위함이니 스코틀랜드의 민병대(군대) 는 빅토리아 여왕 때 해산됩니다.
젊었을 때부터 심각한 비만이어서 건강이 좋지 않았으니 알현실에서 왕의 방을 잇는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들어 왕의 방바닥을 뚫어 알현실과 오가는 승강기를 설치했다고 하며 임신
을 18번 했지만 대부분 유산 내지 사산했고, 무사히 태어났던 자녀들도 어렸을 때 사망합니다.
영국 역사에서 이름이 같은 왕이 없으므로 훗날 앤이란 왕호를 사용하는
왕이 나오기 전에는 '앤 1세' 가 아닌 '앤 여왕' 으로 호칭을 붙입니다.
헨델은 1713년 앤 여왕의 48세 생일을 기념하여 축가를 작곡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아리아인
Eternal source of light divine 은 300여년후,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의 결혼식에서 신부 입장곡
으로 사용됐으며 빅토르 위고의 소설 웃는 남자에 조시아나 여공작의 언니 앤 여왕으로 등장합니다.
앤 여왕 전쟁(1702~1713) 이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때 일어난 영국·프랑스 식민지의 전쟁으로
프랑스의 스페인 병합에 의한 식민지 확대에 위협을 느낀 영국은 이 계승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으니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교전하였고 캐나다에서의 프랑스령 식민지를 공격했으며
위트레흐트 조약에 의해서 프랑스로 부터 뉴펀들랜드, 노바스코샤, 허드슨 만 지역을 확보합니다.
당시 소설로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가 유명한데 스위프트는 영국계 아일랜드인으로 앤여왕 시절
에 이 소설을 썼으니... 걸리버란 이름부터가 풍자이니 Gull(바보) + Ver(진실). ‘진실을 말하는 바보’ 란
뜻으로 책의 내용엔 당시 집권한 영국 휘그당을 비꼰 대목이 많아 불똥이 튀겠다는 안팎 우려가 컸습니다.
원고를 저자 친구가 베껴 출판사에 넘겨 걸리버란 이름으로 출간했지만 원저자가 누군지
는 온 런던 사람이 알았다는데.... 1부는 소인국으로 앤틸로프호 선상 의사인 걸리버는
표류하다가 소인국(릴리펏)에 닿는데 성인 키가 15㎝인 소인국인을 본 ‘산악 인간’
걸리버는 너그러운 마음이 솟구쳤다고 했으니 인간 마음속 비열함에 대한 은유 입니다.
소인국 밧줄 곡예 얘기는 풍자니 이 나라에서 고관 자리를 밧줄 곡예로 결정하니
많은 도전자가 낙상하거나 목숨을 잃는데 부정하게 고위직에 오른 자,
출세욕에 눈먼 인사, 능력· 합리가 사라진 정치인에 대한 통열한 야유 입니다.
2부는 거인국 모험담이니 걸리버는 인도행 상선 어드벤처호를 탔다가 웬 섬에
남겨졌으니 거인국(브롭딩낵)으로 걸리버는 농부 집으로 붙들려가 애완
인간이 되는데 거인국 침대가 길이 20m 정도이니 거인 체구가 감이 잡힙니다.
3부에서는 아일랜드를 수탈하는 영국을 빗댔으니 바다에 버려진 걸리버가 맞닥뜨린 곳은
날아다니는 섬(라퓨타)이니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천공의 섬 라퓨타’ 나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 ‘아바타’ 에 나오는 떠다니는 섬이 여기서 나왔다고 보는데 보면 되니
이 거대한 섬이 추진력 없이 비행한다니...... 우주를 지배하는 중력 법칙을 뭉갠 것 입니다.
3부에는 또 일본이 개신교를 탄압하는 나라로 나오는데 18세기는 서양과 교류하기 시작한
일본에 유럽 국가가 관심을 키우던 시기니 당시 초판본 삽화 지도에 ‘Sea of Corea’
표기가 보이니 동해를 “한국해(韓國海)” 로 표시한 것인데.... 이후 고종의 조선 정부는
동해를 “조선해” 로 불렀고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고종은 “대한해” 로 고쳤습니다.
걸리버는 4부에서 선장이 되니 이성을 가진 말[馬]을 만나는데 그들은 야만인 인간 ‘야후’(포털 야후,
저팬 야후가 이 이름을 땄다)를 지배하는 나라 ‘후이늠’에 사니 걸리버는 자신을 거두어준 말을
주인으로 섬기며 사회·문명을 비판하는 대화를 나누니 앤 여왕은 그를 싫어해 인사에서 배척합니다.
스위프트식 풍자와 독설은 달리 말하면 이상 사회를 좇는 갈망이니 문인이면서 영국 성공회
사제였던 스위프트는 유토피아를 꿈꾸며 “세상에 타락이 슬그머니 들어오는 것을
단계별로 감지하고 모든 단계마다 인류에게 끊임없는 경고와 가르침을 주어 이를 막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