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隨筆분과 방 스크랩 정구선생과 도동서원 은행나무
이팝나무 추천 0 조회 31 07.02.02 13: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강 정구선생이 1607년 도동서원이 사액된 것을 기념하여 심은 은행나무

 

 한강 정구 선생이 돌아가시기까지 만년을 보낸 북구 사수동

 

 

 


조선 후기의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은 한강 정구 선생을 일러 “영남 상·하도 학문을 도산(陶山)과 덕천(德川) 두 사문(師門)으로부터 흡수 소화하여 자기를 대성시킨 분이다. 남명적 체질 위에 퇴계적 함양(涵養)을 가했다.”고 했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본다. 16세기 사실, 영남지방은 같은 지역에서 같은 성리학을 공부하면서도 지리산을 거점으로 한 조식(曺植1501~72)선생의 남명학파와 소백산을 거점으로 한 이황(李滉·1501~70)의 퇴계학파로 양분 되어 때론 반목과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한강 정구 선생은 정인홍과의 마찰로 퇴계학파로 기울어지긴 했으나, 이들 양 계파를  아우르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오히려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수립했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지역적으로 한정된 영남학을 근기(近畿)지방까지 확산시키고 더 나아가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태동시켜 종래 공허한 이론에 치우친 유학을 실사구시를 중시하는 학풍으로 발전시킨 분이다.

선생은 본관이 청주로 1543년(중종 38) 성주의 사도실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정응상은 동방 오현의 수현으로 추앙 받는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제자이자 사위였다. 이런 연유로 선생의 아버지 정은중은 한 때 현풍 솔례로 옮겨와서 살기도 했었다.

주위에서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만큼 영민했던 그는 9세에 아버지를 여의는 슬픔을 맞았지만 13세 때에 당시 성주향교에 교수로 와 있든 오건을 시작으로 21세에는 퇴계, 24세에는 남명에게 글을 배우고 과거를 보기위해 시험에 필요한 한정된 과목을 공부하기보다는 폭 넓게 공부하는 것에 오히려 매료되었다. 훗날 역사, 의술, 예학 등 다양한 그의 저술을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명성이 알려지면서 나라로부터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1579년(선조 12) 그의 나이 37세 때 비로소 창녕 현감을 시작으로 강원도관찰사, 충주목사, 안동대도호부사, 형조 참판, 대사헌 등내외직을 두루 역임하다가 은퇴했다.  

그는 고매한 인격과 폭 넓은 학문의 세계를 독자적으로 구축한 분이기 때문에 많은 선비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구의 재지 사족들 역시  앞 다투어 그의 제자가 되었다.

웅부 대구는 한강 이전에 이미 서거정이 나라의 문형을 맡는 등 출중한 유학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일찍 상경한 관계로 지역에서 활동하는 두드러진 학자는 없었다. 따라서 대구의 문예부흥기라고 할 수 있는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까지는 이른 바 한강학맥이 대구의 공론을 주도 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강의 제자들을 기록한 ‘회연급문록’에 의하면 당시 대구지역의 한강 문인(門人)들은 곽재겸, 송원기, 서사원, 손처눌, 정광천, 손처약, 채몽현, 손린, 채선수, 이윤우, 채선길, 곽주, 유시번, 도성유, 이문우, 박수춘, 도응유, 최무,  도여유, 채선견, 정기, 채선근, 도언유, 서사선, 최동율, 최동집, 박종우, 도경유, 도신수, 도신징, 이도장, 최흥국, 서시립, 등이며 성씨 별로는 달성 서씨, 일직 손씨, 팔거 도씨(후에 성주 도씨로 바뀜), 인천 채씨, 현풍 곽씨, 경주 최씨 등 지역의 재지 사족과 그 가문들이 총 망라 되어 있었다.

특히 이들은 임진왜란으로 대구가 왜군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있을 때 한강의 제자들인 낙재 서사원과 모당 손처눌이 주도하여 의병을 일으키는 등 최 일선에서 국난극복을 주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강의 문인 도신징은 제2차 예송논쟁에서 상소를 올려 서인계 노론의 우두머리 송시열을 실각하게 하는 등 당시 집권층인 노론에게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그러나 그 후 남인들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자 서인들에게 적대적이었던 대구에 서인(西人)의 거두 이숙(1626~1688)을 기리는 상덕사(尙德祠)가 건립되는 상상을 초월한 일이 벌어진다. 이러한 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배경도 따지고 보면 대구의 사림들이 한강의 애국 충절과 퇴계, 남명학을 아울렀던 개방적인 사상을 이어받아 그들을 포용하고 협조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던 가 한다.

한강이 선생이 만년을 보내다가 돌아가신 곳은 이외에도 성주가 아닌 대구이다. 처음 팔거현 노곡으로 이주했다가 그 곳에서 화재를 만나 그 동안 써 두었던 많은 책을 잃고 다시 옮긴 곳이 사빈(泗濱)이었다. 사양서당(泗陽書堂)을 지어 다시 저술에 몰두하다가 1620년(광해군 12) 78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문목(文穆)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영의정에 추증 되었다. 그 후 사빈은 한강이 그렇게 그리워하던 공자가 살다가 묻힌 사수(泗水)로 지명이 바뀌고 지금까지도 불려지고 있다.

그는 학문적인 스승이자 외증조부이기도 한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받드는 일에도 한 줌 소홀함이 없었던 것은 한원당 선생의 흩어진 행장(行狀)을 수습해 기록으로 남겼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으로 불탄 선생을 모신 서원 재건에도 특별한 열성을 보였다.

당시 안동부사였던 한강은 경북 북부 지역에서 생산되는 재질이 좋은 나무를 골라 낙동강의 수운(水運)을 통해 운반해 왔을 뿐 아니라, 사액받기를 주도하는 등 한훤당 선양에도 남다른 노력을 했다. 1607년 드디어 사액이 내려오자 그는 서원 앞에 한 그루 은행나무를 심어 기쁨을 오래 기리고자 했다. 올해가 어언 400년 주변에 도로를 개설하면서 물 흐름이 나빠져 그런지 수세가 떨어져 백방으로 노력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우람하게 자라 서원의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다. 선생은 비록 성주 출신이지만 아버지가 한 때 대구에 살으셨으며 만년을 대구에서 보내며 사수(泗水)라는 뜻 깊은 마을 이름을 남기셨고, 특히 대구의 문풍 진작(振作)에 크게 기여하였음은 물론 대구 사람들에게 한 편으로 지나치게 치우치지 아니하는 중립적이고 다른 파당의 사람들조차도 포용하는 개방적인 사고를 가지도록 하였다고 할 수 있어 크게 존경받아야 마땅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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