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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은 늘 싸움터였다. 신앙의 대상이기도 했고, 민족의 깃발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제국주의의 포장지가 되기도 했다. 그 이름 아래 독립군은 총을 들었고, 친일 지식인은 대동아공영론을 감쌌으며, 북한은 평양 교외에 높이 22미터짜리 화강암 피라미드를 세웠다. 같은 이름이 그토록 다른 방향을 가리킬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단군 담론의 본질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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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에 관한 공식 기록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3세기다.
1270년 전후에 쓰인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그 출발점인데, 두 책이 그리는 단군은 뚜렷하게 다르다. '삼국유사'는 단군을 우리 역사공동체의 최초 시조로 채록하면서도 삼한 가운데 진한을 중국인 혈통으로 인정하는 등, 단일 혈연공동체에서 이어진다는 의식이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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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휴의 '제왕운기'는 달랐다. 단군(혈연공동체)->기자(문화공동체)->위만(민족생활권)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3조선계승의식'을 처음으로 체계화했다. 혈통과 문화와 생활권, 세 차원을 묶어 역사공동체 의식을 정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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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전까지 단군은 어디에 있었나.
고려말 몽고침략기 전후까지 단군은 대체로 평양이나 황해도 구월산 지역의 지역 시조신 또는 민간신앙적 자연신 정도로 이해되어왔다. 1325년 쓰인 '조연수묘지명'에는 "평양의 선조는 선인왕검으로서…평양군자는 삼한 이전에 있었는데 천년 이상의 수를 누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삼국유사'의 '선인왕검'이나 '고려사'의 '평양선인'이 단군왕검을 가리키는 것임을 짐작케 해준다. 13세기 이전까지의 고려인들이 단군을 국가 시조라기보다 특정 지역의 시조신이나 수호신으로 받아들였다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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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는 이승휴의 단군 인식을 공식 수용했다.
건국과 함께 단군은 국가 시조이자 동방 역사공동체의 시조로 선포되었고, 국호 자체도 단군의 옛 국호를 잇는 '조선'으로 정했다. 세종 11년(1429)에는 평양에 단군과 동명왕을 함께 모시는 사당이 세워졌고, 세조 2년(1456)에는 단군 위패를 '조선 시조', 기자 위패를 '후조선 시조'로 확정했다. 1725년(영조 원년)에는 평안도민의 강력한 건의로 단군전이 숭령전(崇靈殿)으로 격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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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6세기를 넘어서면서 사림파의 영향 아래 단군의 위상은 다시 흔들린다. 기자 중심의 정통론이 강화되면서 단군은 기자 때문에 역사적 의미를 설명하는 정도의 존재로 밀려났다. 단군을 우리 역사에서 아예 제거해버리는 '단군부정론'이 학문적으로 정립되어갔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다산 정약용조차 단군 관련 기록들을 대부분 신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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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흐름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 17세기 중반 이후의 일군 학자들이었다. 기호지방 남인 허목은 환웅을 천웅천왕(天雄天王) · 신시씨(神市氏)로 호칭하면서 신시씨 시대부터 우리 역사의 문화영웅이 탄생했다고 주장했다.
홍만종은 1705년 쓴 '동국역대총목'에서 단군 시대의 문화 내용을 본격적으로 복원하려 했다. 18세기 이익과 안정복이 이를 이어받아 더욱 체계화했다. 소론계 역사가 이종휘는 1780년대 쓴 '동사(東史)'에서 처음으로 단군 시절의 '신교(神敎)'를 인정하고 '조선의 처음에 환국(桓國)이 있었다'고 서술했다.
단군 고유의 종교문화인 귀신숭배 · 신선신앙을 '신교'라는 개념으로 정립한 최초의 시도였다. 이종휘의 단군신교 주장과 단군정통론은 훗날 단군성조(檀君聖祖)를 우리 민족의 하느님으로 받드는 대종교 계열 역사학에 그대로 계승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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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얘기를 빼고 근대 단군 담론을 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1909년 음력 1월 15일, 나철은 서울 재동 취운정 아래 초가에서 동지들과 함께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단군교를 중광했다. 1910년 교명을 대종교로 바꿨다. '종(倧)'은 상고의 신인, 곧 단군을 의미하는 글자다. 그런데 대종교의 중광은 종교 운동이기 이전에 정치적 선택이었다. 나철 자신이 을사오적 암살을 시도하고 일본 정계에 대한 민간외교를 펼치다 모두 좌절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2천만 민족을 하나로 묶을 정신적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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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의 역사적 의미는 신학에 있지 않다. 무장독립운동의 배후 조직이자 정신적 동력이었다는 데 있다. 서일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가 대종교 신도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1920년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918년 '무오독립선언서' 서명자 39인 가운데 대종교 핵심 인물들이 대거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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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월 21일, 모스크바 크렘린궁 극동민족대회에서 김규식은 이렇게 말했다.
"조선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섬기는 대종교 신자들은 그들의 위대한 신을 모시며, 조상의 잃어버린 땅을 되찾으려는 결심을 굳게 한 애국적인 젊은이들이 많이 있다."
대종교를 유럽 무대에 처음 소개한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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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의 역사학적 체계를 정립한 것은 2세 교주 김교헌이었다.
전직 규장각 부제학이었던 그는 1916년 나철 순교 이후 교주직을 이어받았고, 그보다 앞선 1914년 '신단실기(神壇實記)'를 저술했다. 이 책은 이종휘 계열의 신교(神敎) 및 정통국가 개창론을 수용하되, 배달족계승의식으로 종합한 것이 특징이다.
우리 민족은 배달족에서 출발했는데 그 계통은 조선족 · 북부여족 · 예맥족 · 옥저족 · 숙신족으로 이어졌고, 조선족->한족->신라족을 거쳐 오늘날 민족의 주류가 형성된 것으로 보았다. 북방계 종족들을 대부분 단군 후손으로 파악한 대단군주의의 제창이었다.
이 역사 서술은 이후 박은식의 '한국통사'(1915)와 안확의 '조선문명사'(1923) 등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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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계열의 대단군민족주의와는 방향이 달랐던 것이 신채호의 역사학이었다. 그는 1908년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써서 '단군->부여' 계승의식을 제기했다. 단군을 문화영웅으로 보기보다, 동이족문화까지 포괄한 대제국의 건설자로 복원하려 했다. 단군조선을 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것으로 해석했고, 이 대단군주의 제창은 이후 만주를 거점으로 한 초기 무장투쟁에 큰 원동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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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대단군주의에는 위험한 이중성이 내재해 있었다.
민족 고유의 특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자뿐 아니라, 보편주의의 논리로 대일본주의에 편승하는 이들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 구조였다. 이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 1925년 말 최남선의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이었다.
최남선은 대종교인들이 설정했던 동이문화권을 발칸반도 · 카스피해 · 일본 · 오키나와에 이르는 것으로 더 확대하면서 일본을 불함문화권 속에 끌어들였다. 한 · 일 문화동원론을 사실상 승인한 것이었다.
단군의 민족주의적 이미지를 샤먼적 신격(神格)으로 해석해 희석시켰고, 그가 주장한 '조선심(朝鮮心)'은 자기부정적인 한국사상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결국 1928년 최남선은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가 총독부 관료가 됐다. 대단군민족주의자로 자처하면서 친일행각을 벌인 그 인간의 본질이 드러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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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시아적 대단군론의 흐름은 대종교와 다른 노선을 걸으면서 친일인물들을 포섭했던 단군교 계통에서 활용됐다. 이후 단군숭배와 관련된 다양한 위서들이 세상에 나왔다. '규원사화'(1930년대 유포), '환단고기'(1980년대 유포), '단기고사'(1949년 전후 유포) 등이 그것이다. 이 책들은 겉으로는 민족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상은 불함문화론의 전통을 이어받은 저술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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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사관 진영에서 모든 대단군주의에 강하게 맞선 것은 '백남운'과 '김태준'이었다.
백남운은 단군사화를 귀중한 사료로 인정하되 실재화하거나 신비화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단군이란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단계의 첫단계에 위치한 지배계급 추장"이라는 것이었다. 신성불가침한 민족신('얼'적 단군론), 식민사학자의 위작설, 사료비판이 결여된 민족주의 역사학, 최남선의 범아시아주의적 억설 - 이 모두가 비과학적 연구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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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역사학계는 바로 이 출발점에서 시작했다.
해방 후 북한 학계는 역사적 유물론을 내세웠으므로 일차적으로는 백남운의 역사학을 계승했다. 그러면서도 전통사회의 문화영웅으로서의 단군을 강조하며 국내외 기록들을 수집 · 정리해놓았던 허목 · 홍만종 · 안정복 계열의 역사학과, 근대 대단군민족주의에 입각했던 신채호 · 정인보 계열의 역사학 모두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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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북한 역사학자 리지련이 내놓은 '고조선연구'는 남북한 학계가 함께 획기적 업적으로 인정하는 책이다. 중국 및 한국의 방대한 문헌자료와 당시까지의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종합해 고조선의 위치 · 영역변동 문제, 단군 건국전설 해석 문제, 종족구성 문제까지 다룬 본격적인 고조선 연구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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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런은 단군 사화를 3단계로 체계화했다.
씨족사회에서 단순한 곰 · 호랑이 씨족 토템이 생겼고, 군사민주주의 단계로 이행하는 시기에 군사적 수장으로서 '단군'이 등장했으며, 계급국가 형성 후 고조선 국왕으로서 '단군'이 자리를 잡았다는 논지였다.
1970년 11월 제5차 당대회에서 주체사상이 당의 교조로 확정되고 1982년 김정일에 의해 재해석되면서 북한의 단군 · 고조선 관련 연구는 고고학 계열과 국문학 계열을 중심으로 주체사관과 결합해갔다. 1970년대에는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발굴들이 이루어졌다. 한반도 지역에서도 구석기 · 신석기 · 청동기시대가 확고하게 설정될 수 있었고, 청동기와 철기시대의 절대연대도 각각 기원전 10세기, 기원전 7세기로 상향 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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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발표된 '고조선 문제 연구론문집'에서 북한 학자들은 단군조선이 요하 서쪽까지 이르는 강대한 영역국가라는 사실을 입증하려 노력했다. 같은 시기인 1972년부터 1978년 사이, 평안도 및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고인(古人)에서 신인(新人)에 이르는 인류 인골과 '조선옛유형 사람'의 인골들이 속속 발견됐다.
그 연구성과는 1978년 '조선사람의 기원에 관한 인류학적 연구'로 발간됐는데, "조선사람이 인종적으로 한 갈래에서 유래하여 하나의 핏줄을 줄기차게 이어온 인류학적으로 단일한 주민집단"이라는 주장에까지 이르렀다. '본토 기원의 단일민족 집단'이라는 주체사관이 고인류학 분야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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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93년 초, 모든 것이 바뀌었다.
평양시 강동군 대박산 기슭에서 단군릉이 발굴됐다.
남녀 한 쌍의 유골 86개가 발견됐고, 남자의 유골에 대해 두 전문연구기관이 각각 24회, 30회씩 전자상자성공명법을 적용해 측정한 결과 지금(1993년)으로부터 5,011±267년 전의 인물이라는 수치가 나왔다. 북한은 이를 근거로 단군이 실존 인물이며 고조선의 창건 시기가 기원전 3000년경이라고 공식 선언했다. 고조선의 발상지·중심지 · 수도는 모두 요동지방(요녕성)이 아닌 평양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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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지 북한 학계의 정설은 전부 '비과학적인 낡은 학설'이 되었다.
당시 북한 력사연구소 소장이 밝혔다. 이전 학자들은 "낡은 력사관의 구속에서 완전히 해탈되지 못한 탓으로 우리 민족사의 시조인 단군을 신화적 인물로 생각하면서 반만년 력사의 시초자료를 료동에서 찾으려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단군에 대한 문헌기록이나 단군릉을 모두 가짜라고 인식한 비과학적인 태도에서 초래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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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0월 11일, 개건된 단군릉이 완공됐다.
높이 22미터, 아랫부분 너비 50미터의 9층 계단식 피라미드형 무덤이다.
개건을 기념해 화강암 1,994개를 썼고, 총 부지면적은 45정보에 달한다. 한편 이 발굴과 함께 북한 학계에서 새로운 개념 하나가 등장했다. '원시조(原始祖)'였다. 단순한 건국시조나 민족시조와는 다른 개념이다.
단군은 지배계급 출신의 군주였지만 당시의 역사적 조건에서 우리 민족의 첫 건국시조로서 선조들을 국가시대 · 문명시대로 이끌었고 단일민족으로 발전하게 하는 시초를 열어놓았으며, 바로 이런 의미에서 '민족의 원시조'라고 부른다는 논지였다. 단군은 아울러 "본토 태생의 조선사람"으로서 "강력한 국가건설로 민족의 단일성을 유지 강화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 점도 부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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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조 단군'과 이를 증명한다는 단군릉. 이것이 중화민족 통합의 상징으로 이용되고 있는 중국의 황제릉(黃帝陵)과 같은 정치성을 띤다는 사실은 차갑게 짚어봐야 한다. 단군릉 발굴 이후 북한의 단군 인식은 '남한지역보다 북한지역이 역사적으로 정통성을 지닌다'는 국가 이데올로기로 나아가고 있다. 단군을 '원시조'로 받들고 민족을 핏줄과 언어 중심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점점 선명해졌다. 민족 개념에 핏줄을 강조하게 되면 권력세습체제 또한 강조될 수 있다는 맥락을 함께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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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자체의 학문적 문제점도 분명하다. 단군릉은 일제강점기에 이미 도굴되어 파헤쳐진 무덤이어서 학술적 결론을 내기 어렵다. 발굴된 무덤의 양식이 고조선이 아닌 고구려시대 무덤양식으로 개장한 것이라는 문제, 전자상자성공명법에 의한 연대측정법의 부정확성, 민족 개념을 경제 · 문화 · 지역적 공동체의 역사적 공통성보다 핏줄과 언어의 공통성을 기본으로 보려는 경향의 문제 - 이는 남한 학계 여러 연구자들이 지속적으로 지적해온 사항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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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이후 북한 학계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경향이 있다.
이종휘가 정립한 단군신교 사관과, 대종교 2세 교주 김교헌의 '신단실기' 계열 역사해석 방식을 긍정적으로 재평가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전까지 북한 학계에서 단군을 종교적으로 받드는 계열을 전혀 무시해왔던 것과 판연히 다른 태도였다. 그러나 그 재평가 과정에서 과학적 사료비판이 생략되는 비학문적 경향도 함께 나타났다.
일부 연구논문에서는 '규원사화'나 '환단고기'처럼 '불함문화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위서들조차 신뢰할 수 있는 사료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민족해방투쟁기 전통을 받은 사료해석과 과학적 역사학에 입각한 북한 역사학의 전통이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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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연구자의 시각에서 보면, 이 전반적 흐름은 하나의 역설을 품고 있다.
이종휘가 정립하고 김교헌이 '신단실기'에서 체계화한 단군신교 사관은 본래 일제의 동화정책에 맞서 민족 고유의 정신을 지키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사관이 훗날 평양의 국가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쓰이고 있다.
나철의 봉교과규(奉敎課規)는 타종교 참여를 금하지 말라고 명시했다.
순교를 앞두고 남긴 밀유(密諭)는 "다른 종교인을 별달리 보지 말며 외국인을 따로 말하지 말라"는 유훈을 새겨넣었다. 1916년 중광가(重光歌) 10장 도연원(道淵源)은 불교의 제석천·유교의 상제·기독교의 야훼·이슬람의 천주가 "실상은 한 한배님"이라고 선언했다. 이 정신은, 핏줄과 언어를 중심으로 단일민족의 정통성을 세우는 논리와는 애초에 방향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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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1월, 김태준은 '단군론'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국수주의적 역사 등이 천조대신(天照大神) 대신에 단군을 가르치고 왜천황(倭天皇) 대신에 이승만을 우상화하고 있으며"라고 하여 단군 연구를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이용하지 말라고 했다.
해방 직후의 말이었지만, 그 경고는 지금도 유효하다. 남한과 북한 모두 단군의 이름을 국수주의적 · 국가주의적 방향으로 써온 경향이 있고, 앞으로도 그 위험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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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 사화는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가'라는 물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기원의 이야기를 누가, 어떤 목적으로 쓰는가'라는 물음이기도 하다. 신화와 역사 사이, 신앙과 정치 사이, 독립운동과 국가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단군 사화는 지금도 그 자리를 옮겨 다닌다.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묻는 것, 그것이 우리 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