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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백성호
관심
㉙ 예수가 말한 가나안은 어디인가
며칠 뒤면 유월절이었다. 그런 들뜬 분위기 속에서 예수는 예루살렘 도성으로 들어갔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죽음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유월절에는 그런 물음이 담겨 있다.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이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존재론적 물음에 대한 예수의 실천적 해답이다. 그 일주일이 시작되고 있었다.
모세 시대에 유대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했다. 양을 치다가 시나이산에 올라간 모세에게 신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네 조상의 하느님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모세는 두려운 마음에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음성은 이어졌다.
“나는 내 백성이 고통당해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고, 그들의 괴로움을 알고 있다. 이제 나는 내 백성을 구해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 가나안으로 인도할 것이다.”
모세는 이집트 파라오를 찾아가 이 사실을 전했다.
솔로몬 왕 때 세운 유대인의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됐다. 지금은 통곡의 벽만 남아 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되면 이 통곡의 벽 앞에 가서 기도를 한다. 백성호 기자
나는 궁금했다. 왜 ‘아브라함의 하느님’이 ‘이사악의 하느님’이고, 그 하느님이 또 ‘야곱의 하느님’일까. 왜 그럴까. 아브라함, 이사악, 그리고 야곱은 시간의 흐름을 뜻한다. 그것이 오늘의 아브라함, 내일의 이사악, 모레의 야곱이 될 수 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의 강물이다. 그 바탕에 신의 속성이 깔려 있다. 다시 말해 신의 속성 안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가 흘러간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것을 ‘초월’이라 부르고, ‘영원’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하나의 하느님이다.
가나안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이 살았던 땅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한마디로 낙원의 땅이다. 나는 예루살렘 구시가지의 도성을 거닐며 생각했다. 모세 당시의 유대인들이 꿈꾸던 가나안 땅이 어디일까.
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바로 이 땅이 가나안이다. ‘그럼 여기가 낙원일까. 지금 이곳에 젖과 꿀이 흐르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둘러봐도 그렇지 않았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지금도 ‘잠자는 폭탄’이고, 예루살렘 성안에도 중무장한 경찰과 군인들이 수시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통곡의 벽 앞에 서 있는 유대인들은 지금도 ‘약속의 땅’을 찾고 있었다.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와 있음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가나안은 무엇이고 또 어디일까. 오랜 세월 광야를 떠돌아야 했던 유대인들에게는 ‘나의 땅, 나의 조국’이 가나안이었으리라. 식민지 시절, 대한제국 백성에게 해방된 조국이 하나의 ‘가나안’이었듯이 말이다.
진정한 가나안 땅은 과연 어디일까. 예수가 설한 산상수훈 속에 있는 하느님 나라야말로 어쩌면 진정한 가나안이 아닐까. 시들지 않는 평안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백성호 기자
그런데 막상 해방된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떤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살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지금도 ‘가나안’을 찾고 있다. 약속의 땅, 낙원의 땅을 갈구하고 있다.
그렇게 목이 마른 우리에게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제시했다. 또 하나의 가나안을 내놓은 셈이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광야를 떠돌아다니며 찾던 가나안과는 성격이 달랐다. 예수의 가나안은 찾고 나서도 여전히 목이 마른 가나안이 아니었다.
예수는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복음서 4장 14절)
그 이유도 설명했다. 예수가 주는 물은 우리 안에서 샘이 된다고 했다.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고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이 있는 지역을 ‘올드 시티(Old City)’라고 부른다. 성안으로 들어서면 타임머신을 타고 수천 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다. 묵직한 돌들로 쌓아 올린 성벽이 있고, 성경 속에나 나올 법한 복장으로 사람들이 다닌다. 유대인들도 그렇고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그렇다. 나는 조용한 성벽 아래 벤치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예수가 말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묵상했다.
안식일에 통곡의 벽을 찾은 정통파 유대인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도 유대의 전통을 지키며 살아간다. 백성호 기자
예수가 주는 ‘물’이 뭘까. 메시지다. 그 메시지는 왜 특별할까. 그 속에 신의 속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메시지 앞에서 내가 부서지고 나의 내면에 구멍이 뚫릴 때 비로소 샘이 생긴다. 그 샘에서 물이 솟는다. 신의 속성이 솟아난다. 예수는 그것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불렀다.
그러니 예수가 제시한 가나안은 ‘땅 위의 가나안’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소멸하는 가나안이 아니다. 그것을 넘어서 있다. 나는 이를 ‘마음의 가나안’ ‘영성의 가나안’이라 부르고 싶다. 땅 위에서 온갖 가나안들이 생겨나고 무너지고, 다시 생겨나고 무너질 때도 흔들림이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갈릴래아의 호숫가, 사마리아의 우물가, 광야와 요르단 강가, 올리브산의 동굴, 카파르나움의 뒷산에서도 예수는 그런 ‘가나안’을 설했다. 사람들은 예수의 말에 귀 기울였다. 가난한 사람이든, 부유한 사람이든, 몸이 아픈 사람이든, 마음이 아픈 사람이든 다들 들었다. 왜 그랬을까. 인간은 누구나 ‘소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누구나 죽게 마련이다. 사고사든 자연사든 누구나 죽는다. 그래서 두렵고 겁이 난다. 죽음을 피할 길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모세 당시 유대인들에게도 그런 죽음이 닥쳤다.
짧은 생각
신라에는
‘신라 삼성(三聖)’으로 불리는
인물이 셋 있었습니다.
의상 대사와 윤필 거사,
그리고 원효 스님이었습니다.
윤필 거사는
원효·의상과 더불어
관악산 삼막사에서
수행했다고 전해지는 거사입니다.
역사적 기록은 별로 없습니다.
조선시대에 그린 의상 대사 진영(왼쪽)과 원효 대사 진영이다. 사진 범어사
원효와 동시대를 살았던
신라 사람들은
그를 “원효”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삼국유사』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순우리말로
“새벽”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원효(元曉)’는
으뜸 원자에,
새벽 효자입니다.
그러니 “새벽 대사”라고 불러도
원효 대사와는
뜻이 그대로 통합니다.
저는 왠지
“새벽 대사”라는 어감이
우리 정서에 착 달라붙는 것 같아서
참 좋습니다.
새벽 대사에게는
유명한 일화가 있지요.
원효는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처음에는
고구려를 거쳐 요동까지 갔지만
당나라 땅을 밟진 못했습니다.
고구려군에게 잡혀서
다시 신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당시에는
신라에서 중국으로 가려면
백제땅의 항구에서 배를 타거나
고구려땅을 지나 육로로
가야만 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습니다.
삼국의 치열한 쟁탈지였던
서해의 당항성(지금의 경기 화성)을
신라가 차지했습니다.
당항성에는
당나라로 가는 항구가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원효는
의상과 함께
서해 당항성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원효의 나이는
마흔다섯 살이었습니다.
당항성으로 가는 길에
두 사람은
큰비를 만났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땅을 파서 만든 토굴을 하나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거기서
비를 피했습니다.
원효의 깨달음 일화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익히 아는
해골물 일화는 『종경록』에
기록돼 있습니다.
빗길에 고생한 원효는
지쳐서 잠에 떨어졌습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잠을 깬 원효는
옆에 놓인 바가지의 물을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타들어가던 갈증이
순식간에 해소되었습니다.
심심산골의 약수처럼
말입니다.
아침에 일어난 원효는
기겁을 했습니다.
간밤에 손에 잡았던 바가지가
실은 사람의 해골이었습니다.
시원하기 짝이 없던 물은
해골에 고인 물이었습니다.
원효는 그 순간,
구역질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그 직후
원효는 강하게 묻기
시작합니다.
간밤에 마셨던
시원한 약수와
오늘 아침에 확인한
해골바가지의 물은
똑같은 물이다.
지난밤에는
시원하기 짝이 없었는데,
오늘 아침은 왜
구역질이 나오는 걸까.
그렇게 궁리하던 원효는
마침내 깨닫습니다.
둘 다 하나의 마음이구나.
좋아하는 마음과
싫어하는 마음,
두 마음의 뿌리가
하나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뿌리가
실은 비어 있음을
깨닫습니다.
원효는 그걸
‘일심(一心)’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쓰는
희로애락의 온갖 마음도
이 ‘일심’에서 올라온
가지에 불과합니다.
슬픈 가지를 붙들면
삶이 슬퍼지고,
기쁜 가지를 붙들면
삶이 기뻐집니다.
그런데
그 가지가 올라온
나무의 뿌리를
알게 되면 달라집니다.
슬픈 가지든,
즐거운 가지든,
아픈 가지든
그게 하나의 뿌리에서
올라온 것임을 알게 됩니다.
나무를 가만히
살펴보세요.
가지는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뿌리는 이 모두를
떠받치며
여여하게 있습니다.
깨달음을 이룬 선사들은
그 여여함으로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원효,
아니 새벽 대사도 그랬습니다.
그렇게
뿌리를 보는 눈으로
시장 바닥을 누비며
글자도 모르는 서민들에게
새벽 대사는
‘뿌리의 여여함’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리라
하셨습니다.
신라 사람들은 원효 대사를 순우리말로 불렀다고 한다. 그러니 "새벽 대사"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중앙포토
새벽 대사에게는
무덤 속에서 마신
해골 바가지의 물이
그런 물이겠지요.
그런데 해골물 자체가
목마르지 않는 물은 아닙니다.
해골물로 인해 얻은
새벽 대사의 깨달음,
그게 바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겠지요.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주는 물이 뭘까요.
그건 사마리아 우물가의
바가지에 담긴 물이 아니라
예수의 메시지입니다.
그러니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은
그 메시지에 담긴
하늘나라의 속성입니다.
그걸 마시면
누구라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될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가나안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나안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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