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서 파노라마
에스더서의 사건은 스룹바벨이 주도한 제1차 포로귀환과 에스라가 주도한 제2차 귀환 사이(에스라 6장과, 7장 사이)에 바사국 수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바사 왕은 아하수에로였는데 에스라 4:6절에 보면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성전 재건을 방해하기 위해서 고소하는 글을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무렵의 상황은 바사에서는 하만에 의하여 유다 인들을 진멸하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고, 예루살렘에서는 성전재건을 저지하려는 대적들의 방해가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고 있느냐 하면 대내외적(對內外的)으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무산시키려는 사탄의 간계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① 에스더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 1-4장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진멸하려는 음모이고
㉡ 5-10장까지는 음모는 무산이 되고 역전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의 승리와 영광으로 되어 있습니다.
② 두 부분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하만은 아하수에로 다음 자리에 오릅니다. 그는 이 지위를 이용하여 눈에 가시 같은 모르드개와 그의 동족 유다 인을 진멸할 음모를 꾸밉니다. 왕의 조서를 각 도에 보내어 12월 13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젊은이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을 막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3:13)하고 명합니다. 유다인의 운명은 풍전등화와도 같고 특별히 모르드개를 달기 위해서 하만의 집에는 50규빗이나 되는 높은 나무가 세워졌습니다. 이 상황은 어느 모로 보아도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 그러나 모르드게는 에스더에게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멸망하리라” 절망(絶望)하고 있지 아니합니다. 만일 그렇게 말을 했다면 그는 하나님을 의뢰한 것이 아니라 에스더라는 “인간”을 의지한 것이 되고 맙니다.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4:14)하고 확신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신본주의 신앙입니다.
③ 그런데 뒷부분에서 사태는 완전히 역전(逆轉)이 되어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다음 자리에 오르게 되고 위기에 몰렸던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는지라”(8:16)하고 말씀합니다.
㉡ 유다 인을 죽이려던 대적자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고 모르드개를 달려던 나무에 도리어 하만이 달리게 됩니다.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다”(9:22) 하고 말씀합니다.
④ 그런데 에스더서에는 “하나님”이란 말이 없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의 이름이 없으면 하나님의 선한 손이 있다”하고 말한 매튜 헨리의 지적은 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바벨론의 포수로부터 돌이키실 때에 하나님의 선한 손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계셨음을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서 이미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그 손은 같은 시대에 일어났던 에스더서에서도 변함없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서 역사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의 섭리하시는 방법들을 주목해 보십시ㅁ오.
㉠ 요나서에서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시고”(욘 1:17)하신 하나님은 전쟁 고아 에스더를 왕후로 이미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모르드개가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4:14)한 말은 결코 무심한 말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 에스더가 베푼 잔치자리에서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곧 허락하겠노라”(5:6)하는 왕의 말에 심중에 있는 소청을 하루 뒤로 미룬 것은 결코 믿음이 없어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밤에 왕으로 잠이 오지 않게 하시고 역대 일기를 읽게 하시는 중에 내시들이 왕을 모살하려는 음모를 모르드개의 고발로 사전에 면할 수가 있었던 기사를 읽게 만드십니다. 그런데도 그에게 “아무것도 베풀지 아니하였나이다”(6:3)하고 신하는 말합니다. 이것도 “이 때를 위함”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 그렇습니다. 이튿날 모르드개는 하만이 수종을 드는 존귀를 얻게 됩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잔치 둘째 날에
㉤ “왕이 이르되 하만을 그 나무에 달라”(7:9)하고 사태를 완전히 뒤집기 위한 예비적인 섭리였던 것입니다.
⑤ 우리는 에스더서의 사건을 구속사의 관점에서 더 멀리 더 넓게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즉 “여자의 후손”을 진멸하려는 음모는 창세기 3장 이후로 계속되고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을 진멸하려는 하만은 사탄의 대리자(代理者)로, 이를 대항하여 싸우는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대리자(代理者)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러하기 때문에 성경은 하만을 “유다인의 대적(對敵) 하만”(3:10, 8:1, 9:24)이라고 지칭하고 있고, 모르드개는 개인 모르드개가 아닌 “유다인 모르드개”라고 부르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만의 신분을 “아각 사람 하만”(3:1, 10, 8:3, 5, 9:24)이라고 5번이나 소개하고 있는데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 아각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진멸하라고 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사울 왕이 임의로 살려준 아말렉의 왕(삼상 15:9)이었던 것입니다. 출애굽기 17:16절에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출애굽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진군을 저지하기 위해서 대적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다”(출 17:11)하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 하만과 모르드개의 대결은 바로 이 싸움의 연장선상(延長線上)에 있다 하겠습니다. 모르드개는 사울 왕과 같은 베냐민 지파 사람이라고 2:5절에서 밝히고 있음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입니다. 사울왕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으나 모르드개에 의해 진멸됩니다.
만일 일이 반전되지 않고 하만에 의해서 바사에 남아 있던 유다 인들이 진멸 당했다면 에스라 느헤미야를 통한 2차, 3차, 귀환도 불가능했을 것이요, 바사의 지배 하에 있던 예루살렘의 유다 인들도 무사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큰 위기에 직면하였을 것입니다.
⑥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3:2, 5, 5:9)한 이유가 무엇인가?
㉠ 이는 선민 이스라엘이 꿇어서는 아니 될 때에 무릎을 꿇었고, 절해서는 아니 될 곳(우상)에 절을 했다가 멸망 당하고 포로가 되었다는 것과 결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 이점이 “날마다 권하되 모르드게가 듣지 아니하고 자기는 유다인임을 알렸더니”(3:4)한 말에서 드러납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만을 우상시했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시대적 배경에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도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절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위기에 봉착하나 하나님의 선한 손에 의하여 구원됨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⑦ 하나님께서 이처럼 유다 인을 보호하여 주신 것은 “이는 구원이 유다인에게서 남이라”(요 4:22) 하신대로 메시아를 보내시어 천하 만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주권적인 행사입니다.
㉠ 에스더서 파노라마를 마치기 전에 한 가지 부언할 점은 하만이 왕의 명의로 하달한 조서, 즉 유다 인을 진멸하라는 조서를 취소해달라는 에스더의 소청에 대한 아하수에로 왕의 반응입니다.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철회할 수 없음이니라”(8:8)하고 말합니다.
㉡ 하물며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발하신 금령(禁令)이겠습니까? 또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세워주신 “언약과 맹세”를 가리켜서도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히 6:18)이라고 말씀합니다.
⑧ 에스더서는 마지막에 이르러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9:22) 합니다.
㉠ 메시아 예언으로 유명한 이사야 선지자는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사 61:3)하고 예언합니다.
㉡ 스가랴 선지자도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 지니라”(슥 8:19) 합니다. 이러한 궁극적인 기쁨과 즐거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에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살후 1:6-7) 합니다. 이것이 에스더서가 우리에게 하시는 격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