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 제국의 멸망
동서교회의 분열이후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부흥, 제국 내부의 내분으로 제국과 수도는 동시에 쇠퇴 일로를 걸었다. 또한 성상논쟁 등 과거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을 연상시키는 지나친 교리 논쟁은 국가 전체에 악영향을 미쳤다. 결국 1203년 제4차 십자군의 공격으로 이 난공불락의 수도는 함락되고 말았다.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었고, 궁전은 물론 대부분의 관청과 학교, 성당이 약탈당했다. 이로서 900년 가까이 그리스도교 세계의 중심이자 고대 유럽 문명의 계승자로서 쌓아왔던 대부분의 지적 기반을 잃고 말았다.
콘스탄티노플은 서구인들이 지배하는 라틴 제국의 수도로 전락하면서 본격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했다. 1263년, 유민들의 거점이었던 니케아가 이 도시를 탈환하고 ‘제국’을 재건했으나 이미 활기를 잃은 지 오래였다. 그 뒤로 제국은 점점 더 쇠락하면서 콘스탄티누스 12세가 마지막 황제로서 공방전을 지휘한 1453년 당시에는 도시 안에 겨우 4만 명밖에 남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 출신(다른 기록에는 독일인 또는 스웨덴인)의 우르반이라는 기술자를 고용했는데 그는 대포 제작 전문가였다. 당시로선 대포는 비교적 신무기에 속했다. 그는 포신의 길이가 8m가 넘고, 직경은 75cm이나 되고, 544kg 의 돌포탄을 거의 1.6 km 까지 날려 보낼 수 있는 거포를 제작했다. 사실 우르반은 선대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를 위해 일하고자 했으나 거절당하자 오스만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콘스탄티노플의 대우가 시원치 않았다는 설도 있지만 시대의 변화를 상징하는 일화임에는 분명하다.
결국 이 도시는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기를 갈망한 메메드 2세의 오스만 제국군에 의해 함락되고 말았다. 오스만군은 이 거포를 끌고 와서 포격을 하고, 방어군의 10배가 넘는 대군의 돌격으로 콘스탄티노플은 무너지고 말았다. 10만의 공격군에 비해 방어군은 7천 명에 불과했으니, 두 달 가까이 버틴 분전이 오히려 대단한 셈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천년 제국의 수도다운 최후를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