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두 얼굴] 행동하지 않는 지성 - 장 폴 사르트르(1)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버트런드 러셀처럼 대중을 상대로 설교를 하고자 했던 전문 철학자였다. 그런데 두 사람의 접근 방식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러셀은 철학을 대중은 참여할 수 없는 성직자들의 과학으로 봤다. 러셀처럼 세속적인 철학자들의 대부분은 지혜의 극히 일부만을 추출해서 신문 기사나 대중 서적, 방송 등을 통해 아주 희석된 형태로만 유포시킬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카페에서 철학을 토론하는 나라에서 연구한 사르트르는 희곡과 소설을 통해 대중을 자신의 사상 체계를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사르트르의 시도는 최소한 한동안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20세기 그 어떤 철학자도 세계 전역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의 정신과 태도에 그처럼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실존주의는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에 인기를 얻은 철학이었다. 사르트르의 희곡들은 히트를 쳤다. 그의 저서들은 엄청나게 팔려나갔다. 그중 일부는 프랑스에서만 200만 부 이상 팔렸다. 그는 삶의 길을 제시했다. 그는 불명료한 형태이긴 했지만, 세속적인 교회의 지배자였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결국 어떻게 됐는가?
대부분의 지도적인 지식인들처럼, 사르트르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였다. 그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고 나면 놀랄 일은 아니다. 그느 ㄴ버릇없는 외동아들의 전형적 사례였다. 그의 가족은 지방의 중상층 계급이었다. 아버지는 해군 장교였고, 어머니는 알자스 지방의 부유한 슈바이처 가문 출신이엇다. 사르트르의 아버지는 그의 아버지의 말에 꼼짝도 못하는 변변치 않은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영리했던 그는 다재다능했으며, 작은 키(158cm)를 보완하기 위해 텁수룩하게 수염을 길렀다. 여하튼 그는 사르트르가 15개월밖에 안 됐을 때 사망해서 “우리 어머니 침실에 있는 사진으로만” 남았다. 어머니 안-마리는 라로셸에서 들로네-벨빌 자동차 공장을 운영하는 기업가 조제프 망시와 재혼했다.
1905년 6월 21일 태어난 사르트르는 아버지로부터 작은 키(159cm)와 뛰어난 머리, 책들을 물려받았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아버지를 인생에서 지워 버리기 위해 저서전 <말>에서 온갖 노력을 다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그분은 나를 윽박지르면서 압도해 버렸을 것이다. 다행히도 그분은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덧붙였다. “가족 중 그 누구도 내가 아버지에 대한 궁금증을 품도록 만들 수 없었다.” 책에 대해서는, “아버지는 그분의 동시대인 모두가 그랬던 것처럼 허접한 책만 읽었다….나는 (그 책을) 팔아 버렸다. 돌아가신 분은 나에게는 거의 의미가 없었다.
자식들을 억눌렀던 할아버지는 사르트르는 무지하게 감싸고 돌면서, 손자가 그의 서재를 자유롭게 들락거릴 수 있게 해 줬다. 어머니는 아들의 못된 짓을 다 받아 줬다. 어린 아들은 그녀의 소중한 재산이었다. 어머니는 그가 여덟 살이 될 때까지 아들에게 여자 옷을 입히고 머리를 자르지 않아 꼬마 헤밍웨이보다 더 길게 만들었는데, 할아버지는 결국 머리를 짧게 자르도록 엄명했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천국”이라 불렀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우리와 같이 살면서 모두로부터 감시당하고 억압받은 이 성처녀는 나를 떠받들기 위해 계신 분이었다…..어머니는 내것이었다. 어느 누구도 어머니가 내 재산이라는 사실에 도전하지 않았다. 나는 폭력이나 증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고, 질투심을 숙달하는 가혹한 도제 기간을 피할 수 잇었다. “반항”할 기회는 전혀 없었다. “사람들의 변덕스러운 생각은 내게는 규범이 될 수 없었으니까” 네 살 때 그는 잼에 소금을 집어넣었다. 그 외에는 못된 짓도 하지 않았고, 벌도 받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를 ‘풀루’라고 불렀다. 예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란 그는 “자신이 그렇다고 믿었다.” 그는 “조숙한 말들”을 했고, 사람들은 그 말들을 “기억했다가 나에게 다시 해 줬다.” 따라서 “나는 다른 사람들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 그는 “내 나이보다 앞선 얘기들을 하는 법을 힘들이지 않고” 터득했다고 말했다. 사르트르의 설명은 때론 루소를 연상시킨다. “선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태어났고, 진리는 내 지성의 젊은이 특유의 어둠속에서 태어났다.” “나는 사랑에 압도됐기 때문에 아무런 권리도 없다. 나는 모든 일을 사랑을 통해 하기 때문에 아무런 의무도 없다.” 사르트르의 할아버지는 “진보를 믿었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진보, 그것은 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고 고된 길이다.” 그는 자신을 “문화에 사로잦ㅂ힌 사람”으로 묘사햇다. “문화로 충만한 나는 그 문화를 퍼져 나가는 광채처럼 가족에게 되돌려 줬다.” 그는 (당시에도 여전히 충격적인 소설로 여겨졌던)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을 읽어도 되냐고 어머니에게 물었을 때 나눈 얘기를 회상했다. 어머니: “그렇지만 우리 꼬마 왕자님이 그 나이에 벌써 그런 책을 읽으면, 나중에 커서는 무슨 일을 할까?” 사르트르::”책에 쓰인 대로 살 거예요!” 이 재치 넘치는 대꾸는 가족들 안팎에서 기쁜 목소리로 되풀이해서 들먹여졌다.
사르트르가 진실을 존중하지 않았으므로,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에 대한 그의 묘사가 얼마만큼 신뢰성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들의 자서전 <말>을 읽어 본 어머니는 당혹스러워했다. 그녀는 “우리 풀루가 어린 시절 일들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는구나”하고 논평했다. 사르트르의 어머니는 아들이 가족에게 무정한 평가를 내렸다는 점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사르트르가 버릇이 없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네 살 때 큰 재앙을 만났다. 인프루엔자가 한바탕 휩쓸고 간 뒤, 그의 오른쪽 눈에 다래끼가 생겼고, 사르트르는 다시는 오른쪽 눈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는 눈 때문에 항상 고생했다. 그는 언제나 두꺼운 안경을 꼈고, 60대에는 점차로 실명에 이르렀다. 사르트르는 학교에 다니면서 어머니가 그의 외모에 대해 거짓말을 했으며, 자신은 못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키는 작았지만 체격은 좋아서 가슴은 물통처럼 넓었고 힘도 셌다. 그렇지만 얼굴은 지나칠 정도로 못생겼고, 눈의 장애 때문에 더욱 괴상해졌다. 그는 못생겼다는 이유로 얻어맞곤 했다. 그는 재치 넘치는 이야기와 비웃음, 농담으로 보복했고, 그런 과정을 거쳐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성격을 가진 학교의 어릿광대가 됐다. 훗날에 그가 기록했듯, “못생겼다는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 여자들을 쫓아다녔다.
사르트르는 당대에 가능한 최상의 교육을 받았다. 그른 라로셸의 명문 국립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당시 프랑스 제일의 고등학교였던 파리의 앙리 4세 고등학교에서 2년간 기숙사 생활을 했고, 프랑스의 지도적인 학자들이 학위를 받는 파리고등사범학교를 다녔다. 그는 폴 니장, 레이몽 아롱, 시몬 드 보부아르 등 당대에 가장 유능한 사람들과 사귀었다. 그는 권투와 레슬링을 했다. 피아노를 꽤 잘 쳤고, 힘이 넘치는 목소리로 노래도 잘 불렀으며, 사범학교의 연극 평론지에 풍자적인 스케치들을 기고했다. 그는 시, 소설, 희곡, 노래 가사, 단편 소설, 철학 에세이를 썼다. 그는 다시 한번 어릿광대가 됐는데, 이번에는 훨씬 다양한 재주를 부렸다. 그는 해마다 300권의 책을 읽는 습관을 길러서 수십 년 동안 그 습관을 유지했다. 그는 책을 매우 폭넓게 읽었는데, 특히 미국 소설에 열광햇다. 그는 첫 애인인 시몬 졸리베도 사귀었다. 그는 아버지처럼 가급적이면 자기보다 키 큰 여자들을 좋아했다. 시몬은 호리호리한 금발로, 사르트르보다 머리 하나는 컸다. 사르트르는 첫 번째 학위 시험에 떨어졌다. 그렇지만 이듬해에는 1등이라는 놀라운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보다 세 살 아래였던 드 보부아르가 2등이었다. 당시 가장 영리한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사르트르는 1929년 6월에 교사가 됐다.
1930년대는 사르트르에게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세월이었다. 그가 열정적으로 갈망하고 고대했던 문학적 명성은 그에게 오지 않았다. 그는 촌스러움의 축소판이라 할 도시 르아브르에서 1930년대의 대부분을 교사로 보냈다. 아롱의 제안에 따라 베를린으로 여행을 간 사르트르는 그곳에서 당시 중부 유럽에서 제일 독창적인 철학이던 후설, 하이데거와 현상학을 공부했다. 그런데 이들 철학은 고역스러웠다. 그는 부르주아지를 혐오했다. 그는 굉장히 계급 의식적인 사람이었지만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다. 사실상 그는 축약본 정도는 읽었을 수도 있지만 마르크스를 읽은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는 반항아, 특히 이유 없는 반항아였다. 그는 어떤 당에도 입당하지 않았다. 그는 히틀러의 득세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스페인에 대해서는 냉정한 태도를 보였다. 그가 나중에 어떻게 주장했건, 남아 있는 기록들은 그가 전쟁 전에는 강경한 정치적 관점을 조금도 갖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사르트르가 학위 연설을 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면, 그는 주름장식이 있는 검정 가운과 담비 털가죽으로 만든 노랑 망토 차림인데, 두 옷 모두 그에게는 너무 커 보인다. 평상시에 그는 오픈 네크 셔츠에 스포츠 재킷 차림으로 타이를 매지 않으려고 했다. 그가 지식인의 유니폼인 흰색 폴로 스웨터와 절반만 가죽으로 만든 괴상한 재킷을 입기 시작한 것은 중년이 끝날 무렵이었다. 사르트르는 술을 많이 마셨다. 그는 연설 이틀째에는 킹슬리 에이미스의 <럭키 짐>을 연상시키는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연출하면서 그 장면의 핵심 연기자가 됐다. 술에 취해 앞뒤를 가리지 못하게 된 그는 해야 할 연설을 하지도 못한 채 연단을 내려와야만 했다. 사르트르는 그 당시부터 평생 쭉 자신을 젊은이, 특히 젊은 학생들과 동일시했다. 그는 제자들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 뒀다. 그의 메시지는 이랬다. 개인은 스스로를 전적으로 책임쳐야 한다. 개인에게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비판할 권리가 있다. 학생들은 교실 안에서 재킷을 벗을 수 있었고,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 필기를 할 필요는 없었고, 에세이를 제출할 필요도 없었다. 사르트르는 결코 출석부를 체크하지 않았고, 벌을 주거나 성적을 매기지도 않았다. 그는 초기 소설을 다량 집필했지만 출판업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니장과 아롱 같은 친구들이 책을 출판하고 명성을 얻는 것을 지켜보면서 원통해했다. 결국 그는 1936년에 독일에 대한 연구서 <철학 연구>를 내놨지만, 책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가 원하던 것들은 가시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르트르의 연구의 핵심은 픽션과 드라마를 통해 철학적 행동주의를 현실 세계에 투사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 후반 즈음에는 그의 마음속에서 이런 생각이 확고해졌다. 그는 기존의 소설가들 모두 -그는 도스 파소스, 버지니아 울프, 포크너, 조이스, 올더스 헉슬리, 지드, 토마스 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직접적, 간접적으로 데카르트와 흄으로부터 도출해 낸 과거의 사상들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장 폴랑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이데거의 시간을 주제로 소설을 쓰는 것이야말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며 굉장한 흥미를 보였다. 사르트르의 난점은 그가 1930년대부터 소설과 철학을 별도로 작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두 가지를 한데 묶어 보여 줬을 때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했고, 무대를 통해 관심을 끌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철학적 소설 한 편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소설에 ‘우울’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었지만 출판업자는 훨씬 인상적인 <구토>로 제목을 바꿨다. 책은 마침내 1938년 세상에 나왔지만 처음에는 반응이 거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