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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탄은 이정(上) '삼청첩']검은 비단위 금빛 죽순..세파 뚫은 고고함 고스란히
조선 최고 묵죽화가 이정 - 비단·금가루 최상의 재료로
왜란 상흔 속 드높은 기개 담아 - 대나무·매화·난초 '三淸' 소재
최립의 문장·한석봉 글씨 더해 - 조선 중기 문화적 역량 총결집
탄은 이정의 ‘삼청첩’ 중 ‘순죽’, 25.5x39.3cm,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제공=간송미술문화재단
껍질을 뚫고 나온 죽순(竹筍)에서 승천하는 용의 기세가 느껴진다. 그림 한 폭에 대나무의 생애가 모두 담겼다. 화면 맨 오른쪽이 갓 나온, 그래서 제일 야들야들한 죽순이다. 보통의 나무들은 커가면서 일 년 치씩 나이테를 만들지만, 죽순은 껍질을 벗으며 대나무 마디, 즉 죽간(竹幹)의 형태를 잡아간다.
죽순 시절의 껍질을 늘어뜨린 두 번째 대나무는 그 성장해 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하여 추위가 몰아쳐도 홀로 꼿꼿함을 지키는 세한고절(歲寒孤節) 대나무의 틀을 잡아간다. 돋아난 댓잎이 싱싱한 전성기 대나무보다 실상 더 아름다운 것은 화면 아래쪽, 흙 밖으로 드러난 노죽(老竹)의 뿌리인 성 싶다. 작은 보석들을 알알이 박은 듯 굽은 마디마디에 뚫린 구멍들이 풍파를 견뎌낸 훈장처럼 빛난다.
조선 최고의 묵죽화가로 불리는 탄은(灘隱) 이정(李霆·1554~1626)이 검게 먹물들인 비단 위에 금가루를 개어 그린 순(筍) 나오는 대나무 그림, 즉 ‘순죽’이다. 두루 탁월한 이정의 대나무 그림 중에서도 눈앞에서 보듯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낸 ‘회화성’ 면에서 그중 제일로 꼽히는 작품이다.
탄은은 41세 되던 해 이 그림을 포함한 대나무 그림 12점, 대나무와 난이 어우러진 난죽 1점, 매화 그림 4점, 난 그림 3점 등 총 20폭 그림을 그리고 21수의 자작시를 써 ‘삼청첩(三淸帖)’을 만들었다.
탄은 이정은 세종대왕의 현손으로 왕실 사람이다. 39세이던 1592년 임진왜란이 터졌고 왕족의 신분이던 그는 왜적의 칼을 맞아 오른팔을 심하게 다친다. 거의 잘려나갈 뻔했다는 얘기도 전하지만 목숨을 보전했고 2년 남짓 지나 몸을 추슬렀다.
어렵사리 다시 붓을 들 수 있게 된 감격에 겨워 1594년에 그린 그림들이 바로 ‘삼청첩’을 이루고 있다. 금가루를 개어 안료로 만든 금니(金泥)는 비싸고 구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재료적 특성상 먹보다 표현하기가 더 힘겹기도 했으나 이정은 이를 자유자재로 구슬렸다.
고려 시대에는 먹물들인 검은 인견 바탕에 금니를 사용해 불경을 정성스럽게 베껴 쓰는 ‘사경(寫經)’ 제작이 많았으나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는 호사스런 재료의 사용을 자제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이정이 삼청첩을 완성할 당시는 전란이 채 가시기 전이라 물자가 턱없이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이 ‘삼청첩’을 전시하며 ‘칼을 이긴 붓’이라 칭한 백인산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무리를 강행해서라도 비단과 금니를 사용한 것은 조형적 아름다움뿐 아니라 최상의 재료로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전쟁 상흔을 이겨내고 내가 살아있음을 보여주겠다는 탄은의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면서 “임진왜란을 겪고 만든 삼청첩이 상징하는 것은 비록 지금의 우리가 물리적 힘은 왜군에 밀리지만 문화적 힘은 꿀리지 않는다는 것을 시서화의 문화적 기제를 통해 드러낸 우리 정체성과 자긍심”이라고 평했다.
고려의 팔만대장경이 몽고의 침입을 불심(佛心)으로 이기려 한 의지였다면 조선의 삼청첩은 선비정신을 상징하는 사군자를 담은 시서화로 오랑캐에 맞선 격이다.
그림으로 자신의 건재함을 알린 탄은은 이듬해 조선 중기 최고의 문장가로 추앙받은 간이 최립(1539~1612)을 찾아가 서문을 받고, 글씨로 으뜸인 석봉 한호(1543~1606)에게 글씨를 맡겼다.
탄은 이정의 ‘삼청첩’ 중 ‘월매’, 25.5x39.3cm,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제공=간송미술문화재단
혼탁한 세상에서 맑게 살아가는 세 가지로 매·죽·란을 꼽은 삼청첩은 당대 문화계 최고의 3인방이 합심해 만든 시화첩이라는 점까지 더해져 ‘일세지보(一世之寶)’라 불리며 꼭 봐야 할 귀한 보물로 여겨졌다.
세종대왕 때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가 그림 뒤로 22명의 감상글이 더해져 조선 초기 문화의 정수를 이뤘다면, 삼청첩은 조선 중기의 문화적 역량이 집결된 기념비적 작품이라 할 만하다.
달과 매화를 그린 ‘월매’는 오른쪽에서 기세등등하게 뻗어나온 매화 둥치 끝에 둥그렇게 달이 걸려 있다. 운치있는 구도로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이른봄 밤의 청량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금니의 농도를 바꿔가며 매화 줄기를 쳤고, 꽃은 윤곽선 없는 몰골의 점매법(點梅法)으로 그렸다.
백미는 단연 금니를 흩뿌리듯 찍어가며 그린 둥그런 달이다. 은은하고 그윽한 달빛이 눈을 사로잡더니 어느새 다가온 매화 향이 코를 간지럽힐 지경이다.
강인한 대나무와 부드러운 난을 함께 그린 ‘난죽’에서도 이정의 기량은 탁월하다. 한 꽃대에 여러 꽃이 달리는 혜란(蕙蘭) 한 포기가 바람에 날리는 모습을 그렸는데 부드러운 난잎이지만 찌를 듯 베일 듯 단단해 보인다.
탄은 이정의 ‘삼청첩’ 중 ‘난죽’, 25.5x39.3cm,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제공=간송미술문화재단
삼청첩의 마지막 그림은 다가올 추운 겨울을 대비해 잎을 떨궈낸 마른 대나무의 ‘고죽(枯竹)’이다. 날렵하게 처리한 댓잎이 예리하면서 강경하다. 말랐어도 기세마저 오그라들지는 않았음을 과시하는 모양새다.
화면 왼편에 이정의 인장과 함께 ‘의속(醫俗)’이라 적혀 있다. 속된 것을 고친다는 뜻의 ‘의속’은 소동파(1037~1101)가 “고기가 없으면 사람을 여위게 하고 대가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한다. 사람이 여위면 살을 찌울 수는 있으나, 선비가 속되면 그 병을 고칠 수가 없다 (無肉令人瘦 / 無竹令人俗 / 人瘦尙可肥 / 士俗不可醫)”라고 적은 글을 줄인 말이다.
탄은 이정의 ‘삼청첩’ 중 ‘고죽’, 25.5x39.3cm,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제공=간송미술문화재단
이정은 심기일전으로 완성한 삼청첩을 후대에 전해주고자 애썼지만 말년에 가세가 기울자 믿을만한 집안이라 판단한 선조(宣祖)의 부마 홍주원 가문에 넘겨준다. 그러나 이내 병자호란이 터지고 강화도 피난길에 함께 들려간 삼청첩은 화재로 앞쪽 표지 한석봉의 글씨 부분을 잃고 만다.
이정의 그림이 무사한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복원된 삼청첩에는 송시열 등 후세의 발문까지 더해져 문화의 켜가 쌓인다. 그러나 19세기 말 조선이 또다시 혼란을 겪으며 삼청첩은 일본으로 흘러 들어가고 만다.
이것을 되찾아 온 이가 바로 간송 전형필(1906~1962)이다. 간송이 어떤 경로로 사들였는지에 대한 명확한 자료나 증언은 없지만 상당한 금액을 치렀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현재의 삼청첩 표지는 맑은 푸른색이다. 그림 못지않게 글도 좋다. 백 연구실장이 풀어 해석한 한시 중에서도 49쪽에 실린 ‘화죽(畵竹)’이 묵죽 대가 이정에 대한 상찬으로는 제격이다.
“…용 뿌리 돌에 서려 죽순으로 솟아나고(龍根帶石金筋怒) /
봉황 마디에 서리 머물러 옥골이 차갑구나(鳳節停霜玉骨寒) /
바람 소리에 음률인가 문득 의심했더니(風韻却疑生律呂) /
어두워지자 대나무 축축해지네(天陰最覺濕琅) /
…독수도 그대에겐 너그러워 팔뚝을 자르지 못했으니(毒手饒君不折肱) /
하늘이 이겨내고 그대로 그리게 하신 것인가(天敎槃攘相仍) /
붓끝에 봄빛 있어 참모습이 활발하고(春在筆頭眞態活) /
…삼절의 높은 재주 모두 다 기댈만하네(三絶高才可憑) ”
/조상인기자
15. 탄은 이정(下) '풍죽' - 거센 바람에 홀로선 대나무, 당당한 君子의 기개가...
농묵으로 강인하게 표현한 대나무 - 희미하게 그린 뒤쪽 세그루와 대조
세찬 바람과 혼연일체...춤 추는 듯 - 조선 고유의 묵죽 양식 창안한 이정
30대에 "中 문동·소식급" 평가받아
탄은 이정 ‘풍죽’ 비단에 수묵, 127.5X71.5cm.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제공=간송미술문화재단
의지할 데 없는 대나무가 세찬 바람을 앞에 홀로 맞서고 있다. 뒤에 선 대나무는 휘청이는 몸을 가까스로 뿌리에 의지했다. 파다닥거리는 댓잎에서 바람의 기세가 느껴진다. 뒤로 젖힌 이파리는 찢어질 듯 위태롭다. 애초 자리 잡고 뿌리 내린 곳이 거친 바위틈이었으니 누굴 탓하겠는가, 이것이 대의 숙명인 것을.
한국 회화사를 통틀어 최고의 묵죽(墨竹) 화가로 평가받는 이정(李霆·1554~1626)의 대나무 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손꼽히는 ‘풍죽(風竹)’이다. 그림 속 대나무는 총 네 그루다.
담묵(淡墨)으로 희미하게 그려 이리저리 흔들리는 뒤의 세 그루와 달리 앞에 선 농묵(濃墨)의 대나무는 굳세고 강인하다. 댓잎 한 획 한 획이 올곧다. 꺾이고 부러질지언정 굽히고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결연하다. 나부끼는 대나무는 이미 바람과 혼연일체라, 어느새 고된 몸부림이 춤을 추는 듯하다.
간송미술관 소장품인 이 그림을 실제로 볼 기회는 흔치 않으나 그 이미지는 지갑 속에서 찾을 수 있다. 5만 원권 지폐 뒷면이다. 그러나 세로로 길죽하게 세웠어야 할 그림을 가로로 눕히고, 원작의 구도를 무시한 채 옹색하게 욱여넣고 중간쯤에서 나무를 잘라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어몽룡(1566년~생몰년 미상)이 그린 ‘월매도’를 앞에 두고 이정의 ‘풍죽’은 희뿌옇게 뒷배경으로 깔아둔 탓에 원작의 등등한 기세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분히 불만스럽다. 돈이 내미는 유혹의 손길 앞에 “대나무인 나도 이렇게 버티는데 사람인 너도 굴하지 마라” 독려한다 셈 치자니 그나마 낫다.
이정의 작품이 중요한 이유는 단지 대나무를 ‘잘’ 그렸다는 사실 뿐 아니라 우리식 미감을 반영한 조선 시대 고유의 묵죽 양식을 창안했다는 점에 있다. 일찍이 대나무 그림은 중국 북송 때의 문인화가 문동(1018~1079)과 소식(소동파·1037~1101)이 평정했다.
고려 때부터 우리나라에서도 대나무 그림이 즐겨 그려지기 시작했는데 그 평가와 찬사의 기준은 한결같이 ‘문동과 소식’이었다. 30대에 이미 ‘문동과 소식’을 떠올리게 하는 묵죽화라 호평받았던 이정에 대해 백인산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조선 중기 탄은 이정의 등장 이후 대나무 그림을 두고 ‘탄은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 ‘탄은이 살아 온듯하다’ 는 식으로 상찬하는 글이 나오기 시작해 조선 묵죽의 기준 작가가 마련됐다”면서 “학술적 연구가 가능한 조선 초기 이전의 대나무 그림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한계가 있지만 이정을 기점으로 예전에 없던 조형성과 양식적 특성이 나타나기 시작했기에 ‘조선 묵죽화의 정립자’라 부를 만하다”고 분석했다.
문인화의 소재로 매·난·국·죽이 다뤄졌지만 그중 ‘군자’의 상징성을 맨 먼저 얻은 것은 대나무였고 매화가 그 뒤를 이었다. 난과 국화가 등장한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런 탓에 조선 시대에는 유독 대나무 그림을 높이 평가했다.
백 연구실장은 “도화서 화원 선발 시험 과목이 산수·인물·화조 등이었는데 그중 가중치 제일 높았던 분야가 ‘묵죽’이었다는 사실은 ‘경국대전’에 기록으로 전한다”고 설명했다. 대나무 그림은 조선이 법으로 정한 최고의 그림이었다는 얘기다.
탄은 이정 ‘문월도(問月圖)’ 종이에 그린 수묵담채화, 24.0×16.0cm,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제공=간송미술문화재단
이정은 세종대왕 넷째 아들의 증손인 왕실 사람이다. 조선 시대에 활동한 ‘이정’이란 이름의 왕실 종친 서화가만 다섯 명 이상이라 헷갈릴 수 있으니 ‘탄은(灘隱)’이라는 호로 구별해야 한다.
이정은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칼에 맞아 오른팔을 다친 후 치료 겸 정치적 이유로 지금의 충남 공주시 탄천 부근에 월선정을 짓고 숨어 지냈다. ‘탄은’이라는 호는 탄천에서 은거한 그의 삶을 압축한다.
이정이 서울을 등지고 공주 탄천에서 살았던 건 대쪽같은 그 성품 탓이다. 어차피 왕실 종친이라 정계 진출은 불가능했고 직접 정치에 나서고자 했던 적도 없으나 광해군을 향한 입바른 소리를 참지 못했다. 인목대비 폐위를 만류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으니, 결국 눈밖에 나고 말았다.
반면 탄은은 인조에 대해서는 극진했다. 인조 즉위 이듬해인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 왕이 공주로 피신했을 당시 이정이 곡식을 대주었다는 일화는 인조가 적은 탄은의 추도사에도 등장한다. 가까운 왕족에게 주어지는 작호에 따라 정3품 정(正) 등급의 ‘석양정’에 봉해진 이정이 훗날 종1품의 ‘석양군’까지 승격된 것도 인조와의 각별함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탄은이 살았던 월선정은 “두 그루의 소나무와 천 그루의 대나무가 빽빽한” 곳으로 전한다. 풍죽뿐 아니라 새로 나는 순죽(筍竹), 빗속 우죽(雨竹), 눈 맞은 설죽(雪竹), 이슬 얹은 노죽(露竹) 등 변화무쌍한 대나무의 표정을 생생하게 그릴 수 있었던 까닭이 대밭에 둘러싸여 가까이 보고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달이 먼저 오는 정자라는 뜻의 월선정(月先亭)에 은거하던 이정 자신을 그린 것으로 보이는 그림 한 폭이 전한다. 간송미술관 소장의 ‘문월도(問月圖)’는 탄은의 작품으로는 극히 드문 인물화다. 듬직한 바위에 걸터앉은 도인이 해맑은 표정으로 달을 가리킨다. 벗겨진 더벅머리와 맨발이 정겹다.
달과의 문답에서 해탈을 깨친 희열이 온 얼굴에 만연하다. 푸른빛 도포 자락과 옷깃에서 댓잎의 고고한 기운이 느껴진다. 거친 바람 견디고 얻은 미소가 달보다 더 빛난다.
/조상인기자
탄은 이정 ‘묵죽도’, 149.4x69.9cm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13. 신라 금동반가사유상] 슬픈듯 웃는듯...온화한 미소 속에 담긴 깊은 사유
82.3㎝ 크기로 6세기 후반에 만들어져 - 일월식보관 등으로 균형잡힌 화려함 추구
고뇌의 심오함·해탈의 경지 보여주는 듯 - 7세기에 제작된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더 푸근한 얼굴에 몸매도 넉넉 '대조'
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 높이 83.2cm 무게 37.6kg, 삼국시대 6세기 후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프랑스 루브르미술관에 걸려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작은 그림이지만 속내 모를 오묘한 미소로 마법을 부려 관람객을 붙든다. 어디를 보고, 왜 웃는지, 웃고 있기는 한 건지, 만족한다는 뜻인지 유혹하겠다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다. 연애 시작하는 사람 마냥 그 속을 알고 싶어 안달 나고 또 보고 싶게 만든다.
또 다른 명작인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원래 ‘지옥의 문’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진 시인(詩人)이었으나 따로 떼 크게 제작됐고, 지옥에 몸을 던질지 고심하는 인간의 실존을 탁월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손에 잡힐 듯 꿈틀대는 근육은 현실의 육신이나 눈으로 볼 수 없는 그의 고뇌는 유한한 삶의 이면을 내다보고 있다.
깨달음의 그윽한 미소를 보여주는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의 측면 얼굴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모나리자의 미소와 생각하는 사람의 사유를 합쳐놓은 것 이상의 우리 걸작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국보 제78호 금동반가사유상이다. 눈을 내리깐 그윽한 미소는 모나리자가 무색하며, 무릎에 팔을 대고 턱을 괸 채 빠져든 사색의 깊이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압도한다.
떠올리기 쉽게 하려는 의도로 외국 작품에 빗대 우리 유물을 설명한 것이 부끄럽기는 하나, 그들은 흉내도 못 낼 우리 반가사유상에 대한 자부심은 등등하다.
금동반가사유상의 오른쪽 볼에 살짝 닿은, 날렵하고 긴 손가락은 눈을 감아도 아른거린다. 더러운 것은 만져본 적도 닿은 적도 없는 듯 무구한 손이다. 그 손가락 끝에서 세상이 시작되고 이치가 펼쳐지는 듯하다.
앉은키가 82.3㎝인 제법 큰 불상이지만 허리는 팔에 감길 듯 잘록하다. 가는 허리 위로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옷자락이 착 달라붙어 몸을 더욱 드러낸다.
채색 없는 청동 불상임에도 더없이 화려하다. 천의(天衣) 자락의 어깨 부분이 살짝 들려있다. 어디선가 바람이 느껴진다. 유려하게 몸을 감싼 옷자락은 양 무릎과 의자 위로 물이 흘러넘치듯 반복된 곡선을 그리며 내려앉았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화려함의 극치는 불상의 머리장식인 보관(寶冠)이다. 탑 모양으로 보이지만 실은 태양과 초승달을 결합한 형식이라 ‘일월식(日月蝕)’이라 불린다. 해와 달, 새의 날개, 나무와 꽃잎 등을 단순하게 만들어 꾸몄다. 이런 일월식 보관 장식은 원래 페르시아 왕관에서 유래해 비단길을 따라 동쪽으로 전파됐다.
인도 간다라의 보살상이나 중국 돈황석굴, 운강석굴, 용문석굴 등지에서 이렇게 생긴 보관을 쓴 불상이 다양하게 발견됐다. 통치자의 왕관에서는 지배자의 절대적인 권위를, 불교미술에 사용되면서는 성스러운 존재의 고귀함과 위엄을 상징한다.
반가사유상이라는 이름은 한쪽 다리만 들어 올린 반가부좌(半跏趺坐) 자세로 생각에 잠겨있는 형상을 뜻한다. 이는 부처가 되기 전 석가모니인 싯타르타 태자의 일화를 들려준다. 왕자는 12살 때 아버지 숫도다나왕이 지내는 농경제에 참여하게 됐다.
그곳에서 뙤약볕 아래 밭 가는 농부를 봤고, 그 농부의 채찍질에 힘들게 쟁기질하는 소를 보았다. 그리고 그 쟁기 끝에 파헤쳐진 흙에서 꿈틀대며 몸부림치는 벌레와 그 벌레를 물고 날아가는 참새를 봤고, 그 새를 다시 낚아채는 독수리를 보며 충격을 받는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이 서로 먹고 먹히며 고통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아닌가.
그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고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생명이 더불어 행복할 수는 없단 말인가. 결국 석가모니가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는 계기가 된 이 사건을 불교에서는 부처의 첫 깨달음으로 본다. 반가사유상은 싯타르타 태자가 품었던 약육강식과 생로병사에 대한 고뇌를 담고 있다.
인도에서는 발목을 포갠 자세, 발을 무릎에 올린 자세 등을 ‘생각하는 자세’를 표현하는 방식이 여럿 있었지만 특히 한쪽 무릎을 다른 무릎에 올린 ‘반가사유상’이 5~6세기 중국에서 정형화해 유행했고 우리나라에까지 흘러들어온 게 6세기 후반이다.
이 금동반가사유상을 삼국시대 6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보는 이유다. 온화한 얼굴과 가냘픈 몸매, 또 커다란 발을 올려놓은 족좌(足坐)의 연꽃무늬 등이 중국 동위(東魏·534~550)의 불상양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불상 제작 시기 추정의 근거다.
국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 높이 93.5cm로 삼국시대 7세기 전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이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은 국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과 ‘쌍벽’으로 통한다. 국보 83호는 앉은키 93.5㎝로 조금 더 크지만 나즈막한 삼산관(三山冠)을 머리에 썼고 상반신에 옷을 걸치지 않았다는 점이 다르다. 화려한 국보 78호와 달리 83호는 소박하고 단순한 목걸이 정도만 착용했다. 얼굴도 더 푸근하고 몸매도 한층 넉넉하다.
양희정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학예사는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은 보관, 천의 어깨부분 등 여러 군데의 장식을 통해 전반적으로 균형감 있게 화려함을 추구했다”면서 “반면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보관이나 옷을 입지 않은 상반신이 단조로운 대신 하반신에 방점을 두고 무릎과 대좌에서 포개진 하의 옷주름을 올록볼록 볼륨감 있게 표현해 더없이 화려하지만 과도하지 않게 기량을 뽐냈다”고 설명했다.
그 같은 양식 특성에서 볼 때 국보 83호는 7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불상 양식은 날렵한 몸매에서 점차 덩어리감이 느껴지는 형태로 변화한다. 포용력 있는 양감의 석굴암 불상은 이들보다 더 나중인 8세기의 것이다.
또한 중국에서 들어온 반가사유상은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에 전파됐다. 일본의 국보 1호로 꼽히는 교토(京都) 고류지(廣隆寺) 목조반가사유상은 이들 금동반가사유상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고대 한중일의 문화교류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임에도 국보인 이들 두 금동반가사유상은 정확한 출토지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확인된 것은 1912년 조선총독부가 일본의 사업가이자 골동품 수집가였던 후치가미 데이스케에게서 불상을 입수했고 1915년 총독부박물관이 신설된 이듬해에 기증된 것이라는 정도다.
일제강점기 고미술품 유통상황을 잘 아는 일본인의 증언을 토대로 신라에서 불교가 제일 먼저 전래된 경북 북부 지역 인근의 사찰에서 출토된 것이라는 추정이 있을 뿐이다. 비슷한 시기에 입수된 두 금동반가사유상은 박물관 소장품으로 국가 소유가 됐고 국보로 지정됐다.
이 불상은 비교적 큰 편이지만 두께가 2~4mm로 얇다. 신라의 뛰어난 주조술이 피부처럼 얇은 금동 불상을 제작할 수 있게 했고, 그 안에 생명력을 불어넣게 했다. 마침 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이 최근 보존처리를 거쳐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3층 불교조각실에 전시 중이다.
고뇌의 심오함과 해탈의 경지를 보여주는 미소는 실물을 봐야만 ‘안다’.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옛 장인은 불교 교리에 충실하게 경건한 마음으로 불상의 옷과 손발을 만들었지만 그 얼굴과 표정만은 오롯이 그의 손재주였다.
그윽하게 내린 눈매와 시원하게 곡선을 그리는 눈썹. 반듯한 콧날 아래로 미소가 번진다. 조명의 변주에 따라 표정이 달라지듯 보는 사람에 따라 그 인상도 달라진다. 고통에 빠진 눈에는 고뇌가 가득하고, 행복을 갈구하는 눈에는 미소가 보인다. 미소를 본 것은 내 마음, 각자의 마음이다.
[출처] : 조상인 서울경제신문 기자: <조상인의 예(藝)- '신라청동반가사유상'> /서울경제신문, 2017.6.23.
14.김홍도 '풍속도 화첩' - 가벼운 필치로 쓱쓱...익살·정감 넘치는 士農工商의 일상
25점에 젖먹이·서당 아이들서 - 아낙·장정·서민·양반까지 담고
소재도 논갈이·대장간·기와이기 - 서민의 놀이·선비 일탈 등 다양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삶에 공감 - 생략된 그림 배경은 여유를 주고
투박한 필치엔 포근함 배어있어
보물 제527호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 중 ‘서당’. 18세기, 26.9x22.2cm.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527호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 중 ‘서당’. 18세기, 조선시대, 26.9x22.2cm.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527호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 중 ‘무동’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각각 다르다.’
레프 톨스토이는 그 유명한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장을 이렇게 시작한다. 행·불행의 여부는 차치하고, 별스러울 것 없는 일상의 희로애락은 예나 지금이나 엇비슷하다는 게 맞는 말 같다. 수확의 기쁨은 다소간 고된 몸도 힘을 내게 하고, 흥미진진한 씨름판은 좌중의 눈을 끌어모으며, 신명 난 무동의 춤사위는 보는 사람까지 어깻짓 하게 만든다.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 한 편에 150여 명 등장인물을 집어넣어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사회상을 거울처럼 투영해 추앙받는 것 못지않은, 단원(檀園) 김홍도(1745~1806년 이후)의 풍속도 화첩이다.
보물 제527호로 지정된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은 25점의 그림에 젖먹이 아기부터 글 배우는 아이들, 젊은 아낙과 힘센 장정, 서민과 양반을 모두 쓸어 담았다. 그림 소재도 농업·상업·어업 등 노동부터 휴식까지, 서민의 놀이와 선비들의 취미·일탈 등 다양하다.
화첩의 첫 그림은 그 유명한 ‘서당’이다. 스승께 혼났는지 돌아앉아 눈물 훔치는 학생 얼굴에 서러운 기색이 역력하건만 둘러앉은 급우들은 뭐가 좋은지 키득거리고 이를 바라보는 훈장의 표정은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요즘 같았으면 ‘왕따 문제’를 제기했으려나. 정작 서당 안은 익살과 정감이 넘친다. 생략된 배경이 주는 여유, 담백한 무명옷 질감 같은 투박한 필치, 눈매 동그랗고 얼굴 넓적한 사람들과 둥근 구도가 풍기는 포근함 덕분이다.
‘천상의 목소리’ 조수미나 ‘가왕’ 조용필도 가끔은 힘 빼고 노래하는 날이 있을 터. 털 세운 호랑이가 그림을 찢고 나올 듯한 생생한 묘사력을 가진 김홍도지만 이 풍속화들을 그릴 때는 힘과 공(工)을 빼고 가벼운 필치로 쓱쓱 그린 모양이다.
하나같이 배경은 없고 구도는 단순하다.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라는 분석이 주류 학설인데, 어쨌거나 한눈에 쓱 보고 오래 기억하기에 더없이 좋다.
한 쌍의 소가 쟁기를 끌고 두 명의 농부가 쇠스랑으로 흙을 고르는 ‘논갈이’와 활 쏘는 법을 유심히 배우는 ‘활쏘기’에 이어 그림은 ‘씨름’으로 넘어간다. 맞붙은 두 씨름꾼을 중심으로 아래위로 구경꾼 무리가 둥글둥글 배치된 원형구도다.
절묘한 ‘신의 한 수’는 왼쪽에 선 엿장수다. 모두가 주목하는 씨름판에서 등 돌린 그는 관중을 바라보고 있으나, 정작 사람들에게 그는 안중에도 없다. 그림 오른쪽에 씨름꾼들이 벗어둔 신발짝 4개와 이 엿장수는 소외됐다는 점에서 대칭을 이룬다.
지게 진 장사꾼과 아이 업은 채 광주리 인 아낙을 그린 ‘행상’ 다음은 화첩 안에서 가장 신명나는 그림인 ‘무동(舞童)’이다. 힘의 강약이 살아있는 필선이 춤추는 아이에게 생기를 입혔고, 초록의 옷이 가세했다. 둘러앉은 연주자들의 시선을 따라 북과 대금, 장구와 해금이 주거니 받거니 소리를 맞춘다.
보물 제527호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 중 ‘기와이기’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527호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 중 ‘벼타작’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밑에서 던진 기와를 맨손으로 받아 지붕을 만드는 ‘기와이기’에서는 한쪽 눈을 감고 기둥의 쏠림을 점검하는 사람과 대패질하는 목수가, 달군 쇠를 내리쳐 연장 만드는 과정이 모두 담긴 ‘대장간’에서는 풀무에 바람 넣느라 정신없는 나이 어린 견습생이 주변 인물이지만 해학성을 끌어올린다.
한 아이는 업고 더 작은 아이는 안고서 길을 가는 부부 곁으로 나귀 탄 양반의 모습을 그린 ‘노상파안(路上破顔)’에서는 선비의 시선이 재밌다. 부채로 얼굴을 가렸지만 아이 안은 여인을 훔쳐보는 눈빛을 들키고 말았다.
길에서 여인이 승려에게 ‘시주’하는 그림은 한동안 ‘점괘’라는 제목으로 알려졌었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짐보따리 가득 실은 ‘나룻배’나 급하게 요기하고 자리를 뜨는 ‘주막’의 풍경은 조선 후기 상업 발달의 단면을 보여준다.
집채만한 지게를 내려놓고 한숨 돌리게 하는 ‘고누놀이’, 재잘거리는 아낙들과 이를 훔쳐보는 선비를 그린 ‘빨래터’도 해학적이다. 더워 털 난 가슴팍까지 풀어헤친 남정네에게 고개 돌린 채 물을 내주는 젊은 여인과 이 모습을 보고 그윽하게 웃는 중년 부인, 멀리서 혀를 끌끌 차는 할머니가 한 화면에 뒤섞인 ‘우물가’는 곱씹어 웃음 짓게 한다.
보물 제527호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 중 ‘노상파안’(일명 ‘나들이’)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보물 제527호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의 마지막 그림인 ‘장터길’. 다른 24점이 세로 28cm, 가로 23cm 내외지만 이 그림은 두 폭 합친 크기로 세로 28cm, 가로 49.4cm이다. /사진제공=국립중앙박물관
이외에도 ‘담배썰기’ ‘자리짜기’ ‘벼타작’ ‘길쌈’ ‘편자박기’ ‘고기잡이’ 등은 풍속화인 동시에 조선 시대 생업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기록화이다. 중간에 낀 19번째 그림 ‘심관(審觀)’은 종이 한 장을 가운데 두고 둘러선 선비들이 ‘그림 감상’하는 장면이라는 해석이 많지만, 망건 쓴 유생들이 과거시험 후 머리 맞대고 답안지를 보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어 화첩은 신부 집으로 향하는 신랑 행렬을 그린 ‘신행길’과 땀 흐르게 일한 후 시장을 달래는 ‘점심’으로 이어지며, 풍속도첩의 대장정은 다른 그림 두 폭 합친 크기로 널찍하게 그려진 ‘장터길’로 마무리된다. 저만치 앞서 가는 소나 가운데 따라붙은 말 등짝이 텅 빈 것으로 보아 장에서 물건을 다 팔고 돌아가는 길인 성 싶다. 장사가 잘 된 덕인지 그림도 경쾌하다.
1918년 조한준(趙漢俊)이라는 사람에게서 구입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이 된 이 화첩에는 풍속화 외에 신선 그림도 붙어 있었으나 1957년에 ‘군선도(群仙圖)’ 2점은 별도 족자로 분리됐고, 따로 꾸민 풍속도 화첩만 1970년 보물로 지정됐다.
미술사가 오주석은 이 신선도를 두고 “풍속첩 그림처럼 살아가는 이 땅의 사농공상 모든 백성들의 삶에 행복이 찾아들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그려졌을 것”이라고 했다.
[출처] : 조상인 서울경제신문 기자 : <조상인의 예-김홍도'풍속화도첩'> / 서울경제신문, 2017. 6.23.
15. 신윤복 '풍속도 화첩'] 눈썹달 내리비친 야밤의 여인 '월하정인'
남자는 호롱불로 길 비춰주며 애지중지 - 어른들 눈 피해 야심하게 만나는 것일까
달빛 침침한 한밤중, 두마음을 누가 알랴
국보 제135호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 중 ‘월야밀회’, 28.2x35.6cm,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제공=간송미술문화재단
단원 김홍도(1745~1806년 이후)는 주로 남자를 그렸고, 혜원 신윤복(1758~생몰년 미상)은 여인을 많이 그렸다. 단원의 호방한 필치가 남성적이라면 혜원 신윤복의 섬세한 붓질엔 여성적이라는 평이 따른다. 오죽했으면 신윤복을 여장남자로 설정한 드라마가 방송됐을 정도다.
굳이 둘의 풍속화를 나누고 비유하자면 김홍도의 그림은 백자, 신윤복의 그림은 청자 느낌이 아닐까 한다. 투박하게 만든 듯하지만 장인의 노고가 짙은 백자는 손으로 쓰다듬고 싶고 편히 옆에 둘 만하다.
반면 정교한 기법과 화려한 장식으로 한껏 멋을 낸 청자는 보고 또 보고 볼 때마다 감탄하지만 감히 손댈 엄두는 나지 않는다. 세세한 작은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꾸몄지만 적재적소에 가장 적절한 장식으로 탁월한 균형감을 발휘한 덕인지 질리지 않고 볼수록 무궁무진 얘깃거리가 샘솟는 것도 청자가 그렇고, 신윤복의 그림이 그렇다.
섬세한 여성적 붓질에 화려하고 정교한 기법
구도부터 인물·배경 묘사 등 흠잡을 곳 없어
남녀 관계의 연정과 욕망 그린 ‘情의 화가’
풍속화에서 드러난 이들의 시선도 갈린다. 단원의 풍속도는 화가가 그 현장에, 그러니까 씨름판이건 타작하는 논이건 주막과 우물가이건 사람들 곁에 바짝 붙어 앉아 직접 눈 맞춰 가며 그린 것 같다. 반면 혜원의 풍속화는 몰래 엿본 것 같은 장면들이다.
서민의 일상과 평범한 삶을 그린 김홍도는 상(常)의 화가요, 남녀 관계의 연정과 욕망을 그린 신윤복은 정(情)의 화가다. 그래서 단원의 그림은 상황이 주를 이루고, 혜원의 그림은 감정이 미묘하다.
일명 ‘혜원전신첩’이라 불리는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은 국보 제135호로 지정돼 있다. 일본으로 유출됐던 것을 간송 전형필이 1930년에 사비를 털어 되찾아 온 소중한 유산이다. 이후 30폭 그림으로 세로 35㎝, 가로 28㎝ 화첩에 새 틀을 짜고 독립운동가 위창 오세창이 발문을 썼다.
신윤복은 화원화가인 부친 신한평(1735~1809)의 뒤를 이어 도화서에 들어갔다. 부전자전이라, 인물 풍속화에 뛰어났고 왕의 초상을 그리는 어진도사(御眞圖寫)에도 여러 번 참여해 그 공으로 벼슬도 받았다.
그러나 장수한 부친이 75세까지 도화서로 출퇴근하니 공식 석상에서 마주치지 않으려 피해 다니던 것이 자연스럽게(?) 상류사회 풍류 자제들의 일상으로 파고들었다. 그림마다 화제(畵題)가 적혀있어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신윤복 ‘춘색만원’ /사진제공=간송미술문화재단
신윤복 ‘소년전홍’.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제공=간송미술문화재단
새파란 젊은 서방이 여인 꽃 꺾는 ‘소년전홍’
여인네들 멱 감는 모습 훔쳐보는 ‘단오풍정’
보름달 밑 알수없는 관계 세사람 ‘월야밀회’
첫 그림부터 화끈 달아오른다. 술기운에 얼굴이 벌건 젊은 선비가 춘심에 이끌려 아낙에게 수작을 거는 중이다. 여인은 허리를 살짝 틀었지만 싫은 기색은 없고, 생긋 웃는 눈매에 원숙미가 느껴진다. 봄빛이 뜰에 가득하다는 뜻의 ‘춘색만원’이라 적힌 그림이다.
두 번째 그림인 ‘소년전홍’은 소년이 붉은 꽃을 꺾는다는 제목 그대로 새파란 젊은 서방님이 노골적으로 여인의 손을 잡아 끈다. 팔뚝 잡힌 여인의 치마 끝이 왼쪽으로 여민 것은 기생이거나 노비라는 낮은 신분을 보여준다.
이 화첩의 대표작으로는 단옷날 그네 뛰고 머리 감는 여인들을 주인공으로 이들을 훔쳐보는 두 사내까지 그려넣은 ‘단오풍정’이 꼽힌다. 구도부터 인물의 세부묘사, 배경묘사까지 흠잡을 곳 하나 없는 수작이다. 그러나 상상의 나래를 펴기에는 밤 풍경이 제맛이다.
눈썹달이 침침하게 내리비친 야밤에 젊은 선비가 쓰개치마를 둘러쓴 여인과 담모퉁이를 돌아가고 있다. 달빛 아래의 연인을 뜻하는 ‘월하정인’이다. 남자는 손에 든 등불로 여인의 길을 비추며 애지중지의 마음을 드러내지만 여자는 새침하기 그지없다.
층층시하에 있는 젊은 선비가 어른들의 눈을 피해 집을 빠져나오느라 이렇게 야심하게 만난 것일까. 그림 곁에 “달빛이 침침한 한밤중에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안다(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고 적혀있다.
하지만 고관대작의 심부름으로 호롱불 들고 여인을 모시러 왔던 사내가 몇 차례 단둘이 밤길을 거닐다 서로 연모의 마음을 품게 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둘만 알지, 누가 알겠나.
달밤에 몰래 만난다는 뜻의 ‘월야밀회’에는 세 사람이 등장한다. 보름달이 민망할 정도로 담 아래서 포개지듯 진하게 끌어안은 남녀와 꺾어진 담모퉁이 뒤에 숨은 또다른 여인이다. 남자의 차림새가 전립을 쓰고 지휘봉 같은 방망이를 든 것이 장교인 듯하니 이렇게 길에서 체면없는 애정행각을 펼칠 신분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소장은 이 그림을 두고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버린 옛 정인을 그리워 못 잊다 급기야 이 닿을 만한 여인에게 구구히 사정하여 겨우 불러내는 데 성공한 모양이지만 여기서 이렇게 다시 헤어져야 하는 듯하다”며 “담모퉁이에 비켜서서 동정 어린 눈길로 이들을 지켜보는 여인은 이 밀회를 성사시킨 장본인”이라고 풀이했다.
해석이야 보는 사람 마음이다. 오른쪽에 숨어있는 여인을 남자의 정실 부인으로 보는 이도 있다. 사내 품에 안긴 여인은 뒷모습이지만 한참 어려 보인다.
야근하는 남편이 미심쩍어 몰래 뒤를 밟은 여인이 급기야 ‘못 볼 장면’을 목격한 것이라면 그녀의 갸름한 눈은 동정이 아닌 원망의 눈빛이다.
조선시대 화류계에서는 대개 영문(營門)의 장교나 무예청 별감 같은 하급 무관들이 기생의 기둥서방 노릇을 했다고 한다.
신윤복 ‘단오풍정’.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제공=간송미술문화재단
이 화첩에서 그들은 새빨간 도폿자락을 휘날리며 자주 등장한다. 삶에 대한 열정일지 모를 그 붉은색은 ‘단오풍정’에서 그네 타는 여인이 입은 치마 색과 똑같은 색이다.
야간 통행금지를 소재로 한 ‘야금모행’에서 그는 지체 높은 선비와 도도한 기생의 밤길을 막아섰다. 양반 체면 무릅쓰고 갓테를 숙여 인사하는 남자 곁에서 여인은 보란듯이 긴 담배만 피워대는 모습이 해학적이다. 몸종인 동자만 괜히 고생이다.
마지막 그림인 ‘유곽쟁웅(유곽에서 남자들끼리 다투다)’에서는 술집 손님들의 주먹다짐을 붉은 옷 입은 무예청 별감이, 기둥서방의 도리로 말리는 중이다. 싸움의 장본인은 갓 망가지고 웃통이 벗겨진 채 씩씩거린다. 얻어맞은 귓전이 부어오르기 시작한 젊은이는 분하고 억울한 기색이 역력하다.
여기서도 문앞에 나온 기생은 긴 담배만 피울 뿐이다. 염려보다는 한심하다는 표정이다. 이처럼 혜원전신첩의 주인공은 단연 여인들이다. 남녀유별, 신분차별의 당대 유교질서를 따르는 듯하지만 그림 속 여인들은 작은 일이 동요하지 않고 늘 대범하다.
못 이긴 척 따라 나서도 자존심을 구기지는 않으며, 담담하면서도 당당하다.
신윤복 ‘야금모행’, 간송미술관 소장. /사진제공=간송미술문화재단
신윤복 ‘유곽쟁웅’. 간송미술관 소장 / 사진제공=간송미술문화재단
[출처] : 조상인 서울경제신문 기자 :<조상인의 애-신윤복'풍속도첩'> / 서울경제신문,
16. 김기창 '투망' - 한가로운 산촌...천렵하는 아이들...천재화가가 꿈꾼 '이상향'
청록색 산으로 화면 반 이상 채우고 - 산만큼이나 푸른 계곡 물·바위 담아
초여름의 산수 정취 아름답게 표현 - 예술적 변신 보여주는 '바보산수'
서민들의 삶·해악 꾸밈없이 화폭에
일명 ‘청록산수’로 불리는 운보 김기창의 1981년작 ‘투망’, 140x69cm
비단에 그린 수묵 채색화.사진제공=아라리오컬렉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이 아마도 이쯤 아니겠나. 시인 정지용(1902~1950)이 대표작 ‘향수’를 통해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읊조리던, 애틋한 꿈에서 깨기 싫어 지그시 눈감게 한 그 풍경이 여기 있다. 딱 요맘때 초여름 날씨인 듯 짙푸른 녹음이 산과 논을 가른다. 운보 김기창(1913~2001)의 그 유명한 ‘청록산수’ 중 하나인 1981년작 ‘투망’이다.
화가는 가장 좋아하는 색인 청록을 중심으로 화면의 반 이상을 산으로 채우고 산 만큼이나 푸른 계곡 물과 바위를 그린 다음 한가로운 정자와 물고기를 잡으러 그물 던지는 소년들을 그 안에 집어넣었다. 벗은 등짝이 햇볕에 그을려 새까맣지만 정겹다.
청력 상실이라는 장애를 극복한 천재화가 김기창의 섬세하고 색 고운 ‘청록산수’와 민화풍에 투박할 정도로 과감한 붓질이 파격적인 ‘바보산수’의 인기는 지금의 아이돌이 부럽지 않았다.
10년 전 인기리에 방영된 MBC 주말드라마 ‘하얀거탑’에서는 전도유망한 외과의사의 부인이 병원 부원장 부인에게 청록산수를 뇌물로 건네는 장면이 등장했고 “바보산수도 모르냐”는 대사가 오갔을 정도다. 그만큼 탐내는 사람이 많은 그림이었다는 뜻이다.
일명 ‘바보산수’로 불리는 운보 김기창 1976년작 ‘정자’, 59x49cm 비단에 수묵채색화
/사진제공=아라리오컬렉션
서울 토박이로 태어나 와룡동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인사동에 신설된 유치원에서 신학문을 배웠던 김기창은 7살에 승동보통학교 입학식 다음날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운동회에 다녀온 후 장티푸스를 앓았고 체질상 상극인 인삼을 달여먹고 열병에 시달려 청력을 잃었다.
그는 남의 말을 들을 수 없었고 그의 말은 남이 알아듣기 어려웠다. 그런 김기창에게 그림은 소통의 수단이었다. 대상을 보는 눈은 예리했고 이를 표현하는 손끝은 절실했다.
열두 살에 보통학교 복학을 하고도 문맹이던 아들에게 한글과 일본어를 직접 가르친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목수가 되길 바랐던 남편의 뜻과 다르게 화가로 키울 것을 결심해 이당 김은호(1892~1979)를 찾아간다.
지금으로 치면 당대 으뜸의 미술대학이라 할 만한 이당의 화숙 ‘낙청헌’에서 김기창은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입문 반년 만인 1931년 열린 조선예술전람회(선전·鮮展)의 입선을 시작으로 연속 6년간 특선까지 휩쓸자 당시 신문들은 그를 장애의 역경을 딛고 일어난 용기와 재능이라 칭송하며 일제히 대서특필했다.
김기창은 운보(雲甫)라는 이름이 유명하지만 원래 아호는 어머니가 지어준 운포(雲圃)였다. 줄곧 운포로 활동하던 그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포(圃) 자에서 테두리인 구(口)를 벗어 던지고 보(甫) 자를 써 스스로 ‘운보’라 선언했다. 이는 스승인 이당 김은호의 그늘에서 나오겠다는 의미이자 법도에 얽매인 일본식 화풍을 떨치겠다는 의지였다.
그림뿐 아니라 글솜씨도 좋았던 김기창은 그간 조선 미술의 발목을 잡은 봉건적 잔재를 떨치고 대중 속으로 들어갈 것을 주장했으며, 자신이 매진했던 수묵 채색화이건만 시대를 외면한 폐물(廢物)이라고 격렬히 비판했다.
해방 직후에는 자유신문사에서 문화부 기자 겸 삽화가로 활동했고 국립민족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의 전신) 미술부장으로도 몸담았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운보에게 화가의 길을 열어준 이가 자애로운 어머니였다면 그 길을 평생 같이 걸어간 사람은 삶의 반려이자 예술적 동반자였던 아내 우향 박래현(1920~1976)이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부부전’을 열었던 1947년 그해, 부인은 필담을 통한 남편과의 대화방법을 극복해야겠다 결심하고 상대방의 입모양을 보고 말을 읽어내는 구화법을 운보에게 가르쳤다.
1963년에는 한국 최초로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김환기가 커미셔너로 뽑혀 유영국·김영주·서세옥과 함께 김기창이 참여했다. 당시 그의 출품작은 ‘유산의 이미지’ ‘태고의 이미지’ 등 추상화들로 시대의 변화에 결코 뒤지지 않는 선구적 감각을 뽐냈다.
일제강점기이던 20대 시절부터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김기창이지만 그림의 전성기는 1970년대였다. 앞서 조선의 풍속화 내용과 한국적 산천의 모습을 곧잘 그림에 등장시키다 1970년 현대화랑에서의 개인전을 기점으로 청록산수가 첫선을 보였다.
일각에서는 왜색풍을 걷어낸 운보가 대만 출신 화가 장다첸(張大千·1899~1983) 화풍의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도 제기한다. 어쨌거나 이 그림의 인기는 엄청났다.
게다가 1979년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아이들을 돕고자 한국농아복지회 초대회장을 맡기도 한 운보가 후원금 마련에 힘을 보태고자 일부러 잘 팔리는 청록산수를 더 많이 그리기도 했다는 얘기도 전하니 뜻이 남다른 화가였음은 분명하다.
실제 경치에서 시작해 관념 속 이상향을 그려낸 청록산수가 대중적 인기였다면 미술전문가들은 외려 바보산수를 운보의 대표작으로 꼽는다. 오랫동안 민화(民畵)를 수집해 온 김기창은 아내와 사별한 절망의 나락에서 민화 특유의 ‘바보스러운 해학성’과 정다운 익살을 붙들고 예술적 변신에 성공했다.
“나는 오랫동안 근원을 찾아 헤매다가 한국적이면서도 순수한 인간의 감정을 잘 표현해 놓은 것이 민화임을 알게 됐다”고 한 그는 “아주 훌륭한 예술인 우리의 민화에는 서민들의 소박한 삶과 해학이 꾸밈없이 담겨 있으며, 바보산수는 그런 민화의 정신을 내 나름의 작품세계에 담아보려고 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림의 인기로는 원없이 산 운보지만 그의 삶 곳곳에는 시대의 상흔이 감지된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운보가 처가인 전북 군산으로 피난 갈 때 두 동생은 월북을 택했다. 운보의 그림에도 등장하는 막내 여동생 기옥 씨는 북한에서 의사가 됐다. 남동생 기만 씨는 공훈예술가로 이름을 날렸다.
지난 2000년 이산가족 상봉 때 기만 씨는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해 있는 형을 찾았고, 이 극적인 만남에서 둘은 서로의 그림을 나눠 가졌다. 병상에 누운 채 그리던 동생을 만나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화가는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하나 잘하는 사람은 둘도 능하고 열 일 빼어나기 마련이니 김기창은 산수뿐만 아니라 인물화에도 독보적이었다. 역사 속 위인의 증명사진을 대신하는 그림인 ‘표준영정’ 작업에 참여해 을지문덕·무열왕·문무왕 등 6명을 그렸다.
특히 그가 1973년 그린 세종대왕 인물화는 1만원권 지폐 도안에 사용돼 화가를 더 친숙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난 2014년, 당시 정부가 지정한 93점의 표준영정 가운데 14점이 ‘친일 화가’의 작품이니 표준영정 지정을 철회하자는 주장이 제기됐고 그 바람에 김은호·장우성과 함께 김기창의 친일행적이 도마 위에 올랐다. 급기야 지폐에서도 운보가 그린 세종대왕 인물화를 없애자는 여론이 일기도 했다.
그랬다. 일제시대 때 이미 유명세를 쌓은 김기창은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작품을 비롯해 강제 징집을 부추기는 그림을 그리는 등 적극적으로 친일행위에 가담했다. 스스로 일본병사를 그리던 부끄러운 과거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기도 했으나, 결국 2009년 그 이름은 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과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화가를 원망할지언정 그림까지 미워할 필요 있겠나 편드는 목소리도 있지만 예술이 작가의 사상과 감정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비춰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전혀 별개로 볼 수만은 없겠다. 판단이야 각자의 몫이다.
누군가는, 꽤 많은 이들이 운보의 그림에서 그리운 시절을 떠올리며 아련한 향수를 곱씹곤 한다. 화가는 가고 없으나 여전히 남아 빛나는 그림에서 외할머니의 부채질 같은 위안과 여유를 느낀다 한들 누가 탓하랴.
[출처] : 조상인 서울경제신문 기자 :<조상인의 예-김기창'투망'> / 서울경제신문, 2017. 7. 7.
17. 백남준 'TV정원'] 수풀 속 꽃처럼 피어난 TV...시간·공간을 초월하다
눕거나 천장 향한 수십개 모니터엔 - 세계각국 다양한 음악·춤 흘러나와
그의 범세계적·우주적 상상력 표현 -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로 불리지만
기술보다 동양전통·무속신앙 관심 - 독점 상업방송으로부터 자유 갈망
SNS로 실시간 소통 오늘날과 겹쳐
백남준 ‘TV 정원(TV Garden)’ 1974/2002년작 ⓒNam June Paik Studios /사진제공=백남준아트센터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이 발생한 1932년 7월 20일에 나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아들로, 그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손자로 태어났다. 음력으로 하면 6월 17일(스탈린에 대항하는 봉기일)이다. 한국 전통에 따라 집에서는 음력 6월 17일에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하지만 학교 서류와 여권에는 7월 20일이 내 공식적인 생일로 기록되어 있다. 나는 이 날을 더 좋아했는데, 왜냐하면 독일국민이 히틀러에 저항한 날이기 때문이다. 스탈린 때문에 흘린 피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처럼 6월 17일 뿐만 아니라 7월 20일도 국경일로 정해야 할 것이다.
1933년에 나는 한 살이었다.
1934년에 나는 두 살이었다.
…
1965년에 만일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서른세 살이 될 것이다.
…
1982년에 만일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나는 쉰 살이 될 것이다.
2032년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백 살이 될 것이다.
3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천 살이 될 것이다.
119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십만 살이 될 것이다.“
백남준 ‘TV 정원(TV Garden)’ 1974/2002년작 ⓒNam June Paik Studios /사진제공=백남준아트센터
여기서 ‘나’는 백남준(1932~2006)이다. 이 글은 1965년 서른세 살의 백남준이 “정확한 자서전을 써달라”고 부탁한 동료에게 적어준 글이다. 태연하게 썼지만 백남준은 제국주의와 열강이 지배한 조국을 생각했고 전쟁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그보다 더 인상적인 대목은 해가 바뀌어 나이를 먹는 게 당연하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천 살’ ‘십만 살’을 내다봤다는 점이다. 겨우 십 년 앞을 내다보는 뭇사람들을 향해 백 년, 천 년을 얘기하던 백남준. 신선 같고 때로는 무당 같았던 예술가 백남준이 여전히 살았더라면 오는 20일 여든 다섯 살 생일을 맞는다.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을 표방하는 경기도 용인의 백남준아트센터에 가면 전시장 한 칸을 가득 채운 비디오 설치작품 ‘TV 정원’을 만나게 된다. 우거진 수풀 속에 텔레비전들이, 마치 꽃송이처럼 피어오른 정원이다. 서진석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백남준의 대표작 중 하나로 서슴없이 이 작품을 꼽았다.
백남준 ‘노마드’ 1994년 /사진제공=아라리오뮤지엄
보통 텔레비전은 시청자를 정면으로 보기 마련이나, 이 정원의 TV모니터들은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있거나 아예 천장을 향하기도 한다. 수십 개의 모니터 속 장면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음악과 춤이 백남준 특유의 흥겹고 현란한 편집으로 제작된 ‘글로벌 그루브’라는 비디오 작품이다.
미술관 실내에 자연의 환경이 조성됐나 싶더니 그 자연에는 텔레비전이라는 테크놀로지 기기가 안겨있고, 그 안에는 세계 각국의 다채로운 문화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범세계적, 범우주적 상상력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했던 백남준다운 작품이다.
일제강점기던 1932년, 백남준은 육의전 포목상 집안으로 방직공장을 운영하던 부친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서울을 통틀어 몇 손 안에 드는 부잣집 막내아들인 그는 어려서 피아노를 배웠고 일본에서 미술사와 음악사를 공부했다.
유복했지만 뭔가 아쉬움이 있었고 그 결핍을 채우고자 1956년 독일로 갔고 음악적 스승 존 케이지를 만났다. 당시 전후 유럽은 기존 질서에 대한 회의와 반성이 깊었기에 새로운 예술을 추구했고 백남준은 그 최전선에서 가장 멀리 내다보는 사람이었다.
1959년에는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라며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선보여 ‘아시아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얻었다. 고전 예술을 상징하는 피아노를 파괴한 것은 근대 서구 유럽 문화에 대한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한발 더 나아간 서른 살의 백남준은 “황색 재앙, 그것이 바로 나다”라고 선언한다. 루이 14세의 “짐은 곧 국가다”를 응용한 이 말은 유라시아 초원지대를 누비며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이룬 정복자 칭기즈칸의 강렬한 화법을 닮았다. 백인 주도의 문화에 동양의 이질적 잠재력을 보여주겠다는 다짐이었다.
백남준 ‘히드라부다’ 1984년작 /사진제공=아라리오뮤지엄
백남준 ‘달에 사는 토끼’ /사진제공=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의 첫 개인전은 1963년 3월 독일 서부 소도시 부퍼탈의 파르나스갤러리에서 열렸다. 전시는 시작도 하기 전부터 들썩였다. 갤러리 입구에 걸린 도살된 소머리 때문이었다. 진동하는 피 냄새에 파리와 악취가 창궐해 결국 경찰이 나서 소머리를 없애버렸다.
백남준은 “소대가리를 오프닝 3일 전에 경관이 와서 제거했는데, 두개골은 지하 1m에 묻어야 하는 독일법이 있다 한다”며 투덜댔다.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 소머리는 굿이나 제사에 올리는 동양의 샤머니즘을 떠올리게 하는 동시에 초승달 모양 뿔을 가진 소머리가 달(月)이나 대기권 상공에 뜬 인공위성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분석된다.
소머리를 뚫고 들어간 이 파르나스 갤러리 현관은 거대한 기상 관측용 풍선이 꽉 차 있어 비집고 기어야 겨우 들어갈 수 있었고 내부에서는 13개의 텔레비전 수상기가 지직거리는 화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그림은 없었다.
백남준의 친구가 된 독일의 개념미술가인 요셉 보이스가 개막식에서 도끼로 피아노 한 대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 전시는 미디어 아트의 출발점이자 서양미술이 근대로부터 해방된 순간으로 평가된다.
이후 백남준은 뉴욕으로 옮겨갔다. 1965년 당시 뉴욕을 처음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휴대용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해 소공연장에서 방영한 것이 최초의 비디오아트로 미술사에 기록돼 있다.
이 때문에 백남준에게 붙은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라는 수식어 탓인지 마치 그가 기술문명 신봉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관심사는 동양의 전통과 정신성, 무속신앙과 선(禪) 사상 같은 것이었고 최첨단의 아이디어는 오히려 여기서 피어났다.
백남준이 첫 비디오테이프 상영회 때 발표한 ‘레이저 아이디어 3번’에서 시작한 ‘유토피안 레이저 TV 스테이션’은 미래의 다채널 방송국에 대한 예언이었다.
레이저의 고주파를 이용해서 수천 개의 크고 작은 TV 방송국들이 생겨나고 이를 통해 독점적인 상업적 방송국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희망한 그의 미래는 SNS와 1인미디어 등으로 실시간 소통이 가능한 오늘날과 겹쳐진다.
아직 인터넷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1974년에는 ‘전자 초고속도로(Electronic Superhighway)’와 함께 ‘W3(World Wide Web)’이라는 단어를 제시했다. 인터넷 상용화보다 20년 먼저 현대사회의 웹문화와 대중매체를 예견한 것이었다.
보통 기술 발전은 생활의 편리를 가져다주지만 백남준의 관심은 기술이 서로 떨어진 공간을 연결하고 과거와 현재를 이어 미래까지 엮어낼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후 선보인 백남준의 일명 ‘위성 3부작’은 위성방송을 통해 세계를 하나로 묶었다. 조지 오웰이 1949년작 ‘1984’에서 매스미디어에 의한 감시 사회로 표현한 암울한 미래를 백남준은 굿판같은 위성 텔레비전 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표현했고 이어 ‘바이바이 키플링’, 1988년 올림픽을 겨냥한 ‘손에 손잡고’로 보여줬다.
언젠가 백남준은 “TV 화면을 레오나르도만큼 정확하게, 피카소만큼 자유롭게, 르누아르만큼 다채롭게, 몬드리안만큼 심오하게, 폴록만큼 난폭하게, 재스퍼 존스만큼 서정적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거장에 비할쏘냐. 오직 하나뿐인 우리의 천재를. /조상인기자 18. 박노수 '류하(柳下)'] 청량한 쪽빛 아래 홀로 선 사내...기다림은 기대감이다 살짝 돌린 옆 얼굴... 눈빛엔 아련함 가득 - 시선의 끝에서 새어나오는 노란빛 탓에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희망의 기운 담겨 - '그림 곧잘 그리던' 한학자집 아이 박노수 18살에 청전 이상범 화숙서 처음 붓 들어 - 문인화풍 남화와 북화의 색채 절묘히 절충 동양화로 현대미술사 열어젖힌 첫 세대 남정 박노수 ‘류하(柳下)’ 화선지에 그린 수묵담채화, 1980년작, 97x179cm 사진제공=종로구립박노수미술관 눈이 부시게 푸르른 자연 한 남자가 동그마니 섰다. 그를 둘러싼 쪽빛(藍色)이 산이어도 좋겠고, 물이어도 좋겠지만 실상은 가지 늘어뜨린 버드나무다. 한국 현대 동양화단의 대표작가 남정(藍丁) 박노수(1927~2013)가 1980년에 그속에린 ‘류하(柳下)’, 즉 ‘버드나무 아래서’라는 작품이다. 짙은 파란색 덕분에 눈으로 보기만 해도 온몸이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더운 날씨 탓인지 마치 공기청정 기능을 탑재한 에어컨의 찬바람을 만난 것처럼 반갑다. 자연을 그린 것이건만 기계 바람에 빗댈 정도로, 요즘은 어디를 가야 저토록 맑고 청량한 푸른색을 볼 수 있을지 속상한 의문이 들지만 말이다.
자연 안에 홀로 선 사내는 먼 곳을 바라본다. 살짝 돌린 옆 얼굴과 아련한 눈빛이 그렇다. 뭔가를 기다리는 모양이다. 조금 처진 사내의 어깨가, 거대한 자연에 비해 왜소한 사람의 몸뚱이가 처연한 기운을 풍기기도 하지만 기다리는 그 누군가가 있으니 홀로 서 있어도 아주 외로워 보이지만은 않는다. 기다림은 곧 기대감이다. 푸른색이 주는 특유의 희망적 분위기에다 사내의 시선 닿는 곳쯤에서 새어나오는 노란 빛이 그런 분위기를 더해준다.
충남 연기군의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박노수는 5살부터 할머니께 천자문을 배우고 아버지로부터 서예를 익혔다. 동네에서 그림 곧잘 그리는 아이로 알려진 것도 거의 그 무렵이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공중폭격이 심했던 동경으로 미술 유학을 떠나지 않기로 한 것은 돌이켜보건대 탁월한 결정이었다. 대신 열여덟 살 되던 해에 상경해 서울 누하동에 자리잡은 청전 이상범(1897~1972)의 화숙에서 처음 붓을 들었다.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스승은 약관의 박노수에게 “그림은 여운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1년 이상 그림 공부를 하고서는 194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1과(동양화과)에 입학했다. 해방 이후 설립된 국내 미술대학에서 체계적으로 미술이론과 실기를 배운 첫 세대가 바로 그다. 그러나 졸업장 받기 몇 달 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밥을 굶고 시체를 넘어 도착한 부산에서 종군화가단으로 활동했다. 어렵사리 전쟁통에 졸업장을 받기는 했으나 졸업작품전에 출품해 최고상인 문교부장관상까지 받은 그림은 중간에 어디로 사라졌는지 돌려받지 못했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시절이었지만 재능은 어디서나 빛났다.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 처음 참여해 두각을 나타냈고 1955년에는 수묵채색의 인물화 ‘선소운(仙簫韻)’으로 최고 영예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신선이 듣는 퉁소 소리라는 뜻의 ‘선소운’이란 운치있는 제목 아래 화가는 검은 한복차림의 여성을 그렸다. 먹이 아닌 아이보리블랙의 검은색으로 붓자국 없이 평평하게 색을 칠한 것이나 하얀색으로 옷주름을 표현한 것은 파격적이었다. 신선의 피리소리가 들릴 듯한 격조와 세련미를 동시에 품은 이 그림은 오늘날 청와대에 해당하는 경무대에 들어갔다가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박노수의 1955년작 ‘선소운’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젊은 시절 박노수는 한동안 여인과 소년 등 인물화에 몰두했다. 한국의 산천을 계절별로 다채롭게 그려내던 스승 청전의 그늘이 신경 쓰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특히 그가 즐겨 그린 소년은 어린 남자라기 보다는 절개있는 선비 같고, 고고한 이상을 가진 젊은이의 모습으로 작가 자신을 투사하곤 했다. 지난 2010년 덕수궁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 ‘박노수, 봄을 기다리는 소년’을 기획한 박수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박노수의 작품 소재는 말, 노루, 소년, 선비, 달, 나무, 산, 강, 바위 등 지극히 한정적이며 그 안에 초연히 인물 하나가 등장한다”면서 “소년, 고사(高士)로 표현되는 인물은 봄을 기다리는 외로움, 쓸쓸함을 표상하는 소재인 동시에 그 시선은 관객을 화면 속 너머의 무한한 공간으로 이끈다”고 설명했다. 세속을 떠나 자연에 안기고자 했던 작가의 태도는 그가 1992년의 수필에서 “왠지 나는 자연이 좋고 그 속에서 안온함을 느낀다.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생이어서 그런 것일까?”라고 적은 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허연 옷을 입은 버드나무 아래의 남자는 하얀색 옷을 좋아하면서, 혼자 있는 작업실일지라도 점퍼를 목 끝까지 올려 잠근 채 그림을 그리던 화가와 많이 닮았다.
박노수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겸재의 진경산수 이후 조선 화단을 지배하던 전통 한국화를 현대화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제강점기에 드리운 왜색을 극복하는 동시에 고유한 한국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말이다. “동양화에는 남화(南畵)와 북화(北畵)가 있다. 대체적으로 남화는 묵과 선 중심의 담채가 특징이고 북화는 채색을 많이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풀어 설명한 적도 있는 작가는 격조있는 문인화풍의 남화와 감각적인 색채의 북화를 절충해 절제된 고유의 화풍을 이뤄냈다. 북화적인 스케일과 남화적인 정신세계가 조화됐다는 평가도 받는다. 동양화로 현대미술사를 열어젖힌 첫 세대 주요 작가로 그가 손꼽히는 이유다. 박노수 1970년작 ‘숭산은천’ /사진제공=종로구립박노수미술관 그런 박노수는 1970년대부터 집중적으로 산수풍경화를 파고든다. 먹그림을 먼저 배웠지만 남정의 색감은 탁월했다. 특히 개나리 같은 노랑과 단풍 닮은 주황색의 사용은 ‘예쁘장하다’ 소리를 들을 정도다. 하지만 색에 취해버린다면 그의 그림 맛은 반밖에 못 보는 셈이다. 종잇장에 착착 달라붙은 듯한 선(線)의 맛이 제맛이다. 그때그때 먹을 갈아 세필부터 갈필까지 휘두른 그 붓질에서 작가의 호흡이 느껴진다. 선으로 잡은 옷주름에서 그림 속 인물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군청색’으로 불리는, 고상한 짙은 파란색도 이 무렵 등장했고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에 절정을 이룬다.
사실 박노수는 남정(藍丁)이라는 그의 호(號)에서부터 짙푸른 쪽빛을 자랑한다. 그가 20대 후반이던 시절 서예가 소전 손재형(1903~1981)이 이름을 지어주며 ‘푸른 빛’과 ‘변치 않는 마음’, ‘가람’(불교 사원)이라는 뜻을 되새겨줬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의 고사를 의식했던 것인지 손재형이 “청전(박노수의 스승 이상범의 호)이 싫어하겠구만”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화가 자신은 “군청은 한눈에 척 보면 들어오는 색”이라서 좋아하면서도 “푸른색이 좀처럼 주변과 어울리기 어려운 색”이라 더 파고들었다.
박노수 ‘고사’, 연도미상작. /사진제공=종로구립박노수미술관 이화여대와 서울대 교수로,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활약하던 작가는 2003년 병석에 든 이후 고심 끝에 40여 년 산 자신의 종로구 옥인동 집과 그림 500여점을 포함해 고가구와 수석·석물 등 1,000여점을 종로구에 기증했다. 2011년 종로구립박노수미술관을 조성하기로 협약식을 맺은 후 병색이 악화하는 바람에 일정을 서둘렀음에도 2013년 9월 개관을 채 보지 못하고 화가는 세상을 떠났다. 경복궁 옆 서촌 안쪽에 자리잡은 미술관은 1937년경 지어진 프랑스식 내부와 일본식 건축이 결합된 절충식 주택으로 박노수는 1973년부터 이곳에 살았다. 절충식이라지만 온돌이 깔린 한식 생활이 주를 이뤘고, 미술관에 들어서자마자 눈길을 사로잡는 정원이 백미다. 생전의 화가는 아무리 바빠도 하루 2시간씩 정원 가꾸기에 공을 들였고 새하얀 화선지에 그림을 그리듯 벽오동·백모란·자색모란·백일홍을 심고 기암괴석과 석물을 배치했다. 그 안에서 만나는 남정의 그림들은 오래된 홍송 나무바닥의 향기와 어우러져 진한 감동을 전한다. 박노수 1960년작 ‘하산요수’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출처] : 조인상 서울경제신문 기자 : <조인상의 예 박모수 '류하(柳下)'> / 서울경제신문, 2017. 7.21. 19.최욱경 '환희' - 색채의 환희에 입힌 불꽃같은 삶 45년 짧은 생 살다간 여성 화가 - 단색주류 한국화단에 미국식 접목 강렬한 색감으로 표현한 '이방인' - '학동마을'은 뇌물로 쓰이기도 최욱경의 1977년작 ‘환희’ 227x456cm 크기 캔버스에 그린 유화.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유난히 기분 좋은 날이 있다. 알람이 울리지도 않았건만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고, 털어 말린 머리가 뜻대로 자리 잡았으며, 무심코 집어든 양말이 바지 색과 썩 잘 어울리는 데다 출근길 지하철이 기다리지 않게끔 맞춰 도착했다. 딱히 특별할 일 없지만 그런 소소함에 기분이 좋아서, 준비 부족한 기획안이나 심지어 계획안 했던 사랑 고백까지도 받아들여질 듯한 그런 날이 있다.
요절한 화가 최욱경(1940~1985)의 1977년작 ‘환희’는 꼭 그런 기분 좋은 날의 일기 같은 그림이다. ‘환희’라는 단어의 의미는 엄청난 큰 기쁨이지만, 그림 속 환희는 기쁨으로 충만하되 미쳐 날뛰진 않는다. 삶 속에서 맞닥뜨리는 환희도 그와 비슷하리라. 보드랍고 달콤한 노란색 사이로 즐거움의 조각들이 생의 찬미를 노래한다. 자유로운 곡선들이 춤추고 분홍, 보라, 연두 등 화사한 파스텔톤 색채들이 주변을 밝힌다. 간혹 짙은 어두운 색덩어리가 있지만, 음악으로 치면 묵직한 베이스 선율처럼 든든하기만 하다. 그림 중간중간에 오늘 만난 하늘 색, 노을 색도 보이니 반갑다.
최욱경 자신과 닮은 여성 인물이 등장하는 1968년작 ‘편안히(In Peace)’ /사진제공=국제갤러리 최욱경은 45세에 요절한 여성화가다. ‘한국적 색채 추상의 선구자’ ‘한국적 추상표현주의자’로 불리는 화가이건만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탓인지 미술사적 업적에 비해 덜 유명하다. 출판업을 하는 부친의 4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화가가 되고자 했고, 부모도 그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낙원동 집 마루에서 크레파스로 곧잘 그림을 그리던 최욱경은 한국전쟁이 터지던 1950년 그해 어머니 손을 잡고 당대 최고의 부부 화가 김기창·박래현의 을지로 화실에 갔고 처음 미술교육을 받았다. 최욱경의 1960년대 콜라주 작품 ‘무제’ /사진제공=국제갤러리 이화여중·서울예고를 거쳐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한 그는 재학시절부터 대담하고 솔직한 색채를 구사했고, 성격도 그림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전한다. 대학원 진학의 기로에서 대부분 화가들이 파리로 유학가던 그 시절 그는 미국을 택했다. 1963년 미술학교로 유명한 미시간주 크렌부룩아카데미에 입학해 서양화를 전공으로, 조각과 도자기를 부전공으로 공부했고 졸업 후에는 정신박약아를 위한 미술 교사로, 대학 강사로 일하면서 콜라주와 다양한 매체 실험을 병행했다.
최욱경의 그림은 ‘추상표현주의’로 분류된다. 추상표현주의란, 전쟁 후 인간이 경험한 분노와 공포, 경계와 희망이 뒤섞인 감정을 표현한 예술 전반을 가리킨다. 잭슨 폴록처럼 액션 페인팅을 하는 작가가 있었고 색면 추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화가도 있었으며 특정한 사물이나 대상을 다루지 않고 잠재의식을 분출하듯 그림을 그리는 경향 강했다. 미국에서 공부한 최욱경은 당시의 주류 미술을 흡수했으나 결코 미국식 미술에 함몰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만의 표현방식을 구축한 그는 1970년대에 한국의 단청, 민화 등의 전통적인 색감과 뉴멕시코에서 본 자연에서의 영감 등을 뒤섞어 본격적인 색채연구를 전개하며 더욱 풍성한 그림을 선보였다. 최욱경의 1966년작 ‘무제’ /사진제공=국제갤러리 최욱경의 1966년작 ‘무제’ /사진제공=국제갤러리 그러나 당시 한국 화단은 하나의 색조로 화면 전체를 뒤덮는 ‘단색화’가 주도하던 시기였기에 강렬한 색감의 최욱경은 이방인 같았다. 고독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 만의 그림 세계를 고집했다. 그 덕에 한국적 색채추상의 선구자 자리를 이견없이 꿰찼다. 작가 작고 후에 기획된 미술관 회고전에서도 이 같은 후기 색채 추상을 주목했다.
작고한 이경성(1919~2009)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예술가를 단·중·장거리형의 세 유형으로 나눠 “단거리형이란 20대에 요절하면서 자기의 할 일을 다하고 죽는 사람인데 흔히 천재라 불리는 사람이 이 부류”이고 “중거리형이란 30대 후반 그러니까 38세를 전후로 해서 죽는 사람들인데 비교적 많은 좋은 화가가 중거리형”이며 “장거리형이란 거의 90고령에 도달하는 장수의 예술가로서 30고개를 넘어서면 90고개에 직결”된다고 했다. 최욱경 작고 직후인 1987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회고전을 준비하며 이 전 관장은 “최욱경은 중거리의 생애로서 다른 사람이 90년에 할 일을 다하고 갔다”면서 “타고난 예술가, 천생 예술가로 감성이 예민하여 보통사람이 도달할 수 없는 깊은 곳까지 도달했다”고 평했다. 흔히 ‘예술은 고독의 소산’이라고 하는데 “고독할수록 더 확대된 시야로 세계의 미를 보고 그렇게 본 아름다움을 작품으로 실현한다”는 진리가 딱 최욱경의 얘기다. 최욱경 1974년작 ‘불합격품(Reject)’ /사진제공=국제갤러리 오방색의 강렬한 작품도 좋지만 흑백을 위주로 그린 작품들은 깊은 울림을 준다. 희고 검은 단 두 가지 색을 썼을 뿐이지만 작가는 소용돌이치는 붓의 흔적으로 폭발 직전의 감정을 격정적으로 보여준다.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면서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을 맞춘 듯 그림으로 그려냈다. 삼성미술관 리움의 상설전시실에 걸려있는 1977년작 ‘무제’를 두고 어떤 이는 큰 눈 껌뻑이면서도 콧김 내뿜는 소의 얼굴을 보았다고도 했다. 달과 바람과 꽃과 나무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듯하다. 이 작품은 1969년작 ‘레다와 백조’, 1976년작 ‘강강수월래’, 1977년작 ‘마사 그래함’처럼 많지는 않으나 주기적으로 등장한 최욱경의 흑백 회화 중 대표작으로 꼽힌다.
김영나 서울대 명예교수(전 국립중앙박물관장)는 최욱경을 회상하며 “1984년도의 작품들에서는 조금씩 충동적이거나 불편한 선(線)이나 색채가 보이고 구성에서도 흐트러짐이 발견된다.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은 여전하다”면서 “죽기 1,2년 전의 그의 작품에서는 생에 대한 환희나 자연에 대한 감동이 보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작품을 통해 신호를 보냈던 것일까? 1985년 여름, 최욱경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었다. 최욱경의 1984년작 ‘학동마을’ /서울경제DB 가장 미국적 사조인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으로부터 시작했으나 한국적 구도와 색깔, 재료의 독창성으로 한국적 정체성을 반영한 최욱경은 작고 후 떠들썩한 ‘고초’를 겪는다. 학을 즐겨 그리던 그가 세상을 뜨기 1년 전 그린 ‘학동마을’은 2007년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차장이던 시절 당시 전군표 국세청장에게 인사청탁성 뇌물로 건네진 혐의를 받아 세간을 시끄럽게 했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선 하나를 두고 붉은 색조가 지배적인 추상화인데, 학이 보이지는 않지만 날아오르는 그 기운이 생생한 그림이다. 2011년 4월 한상률 전 청장이 기소되면서 ‘학동마을’은 검찰에 압수돼 급기야 재판장에까지 나왔다. 당시 분홍색 보자기에 싸인 그림이 법정에 등장하자 변호인 측은 “전문가가 봐야겠지만 정말로 유명한 사람의 그림이 아니라면 그래도 살만한 그림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알만 한 미술계 전문가들은 ‘치욕’이라고 한 이 사건을 작가가 살아서 목격했더라면 까무라쳤을 일이다.
화가이지만 그녀는 문학적 감수성이 충만했고 그 일부를 작품 제목에 담았다. ‘나는 세 개의 눈을 가졌다’(1966년), ‘악몽은 견디기에 정말 너무 길다’(1975년), ‘한때 호색가가 기이한 꽃을 주었다’(1975년작), ‘미처 못 끝낸 이야기’(1977년), ‘산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나는 슬프다’(1983년작) 등은 제목 자체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 충만한 문학적 감수성의 파편으로 쓴 시 45편은 1972년에 ‘낯설은 얼굴들처럼’이라는 제목의 시화집으로 출간됐다.
그저 살아지는 나날들이지만, 그렇다고 사는 것이 녹록지만은 않다. 외롭고 고달플 때, 감정이 치솟고 온몸이 달아오를 때, 그럴 때면 불꽃처럼 그리고 꽃잎처럼 살다간 최욱경의 그림이 더욱 간절하다.
“…그래도 내일은,/ 다시 / 솟는 해로 밝을 것입니다./ 꽃피울 햇살로 빛날 것입니다. //
그리고 또, 내일들은….” (최욱경 시 ‘그래도 내일은’ 중에서) [출처] : 조상인 서울경제신문 기자 : <조상인의 예- 최욱경 '환희'> / 서울경제신문.2017. 7.28. 20. 김윤겸 '영남기행화첩' - 여름날 둘러본 영남 명승 열네곳... 선비들 휴가 여운, 화폭에 담다 서얼 출신 불구 관직에 오른 김윤겸 - 진주 찰방 부임 후 영남지역 둘러봐 부산 태종대서 거창·함양 계곡까지 - 실경의 감흥 농익은 화력으로 표현 조선 후기 화가 김윤겸이 영남지역 명승지 14곳을 돌아보고 그린 보물 제1929호 ‘영남기행화첩’ 중 첫 장 그림인 ‘몰운대’. /사진제공=동아대 석당박물관 한여름 무더위가 최고조에 올랐고, 여름 휴가철도 절정을 맞았다. 휴가지에서의 시원한 기억, 뜨거운 추억을 가슴 속이나 휴대폰 사진첩에만 넣어두기엔 아쉬움이 진하다. 그런 마음이야 조선의 선비도 다를 바 없었으니 진재 김윤겸(1711~1775)은 50대의 어느 여름에 다녀온 영남지역의 명승 14곳을 화폭에 담았다.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이 소장한 보물 제1929호 ‘영남기행화첩’이다.
그 첫 그림인 몰운대(沒雲臺)는 부산 다대포해수욕장 인근, 바다로 비죽 튀어나온 땅이다. 원래는 섬이었지만 낙동강 토사가 쌓여 육지와 연결된 곳으로 언덕 전체가 소나무 숲을 이루고 있다. 수묵으로 형태를 잡고 옅은 채색으로 푸른 기운을 담은 솔숲은 오늘날의 풍경과 꼭 닮았다. 언덕 위에 사람 둘이 섰고, 저 멀리 대마도가 보일 정도로 시야가 탁 트였다. 감기듯 말린 나선형 파도가 더위도 함께 쓸어간다. 두 번째 그림 ‘영가대’는 부산 진성 앞쪽에 있던 조선통신사 일행의 출발지이나 지금은 흔적없이 사라진 곳이다. 부산 풍경은 다섯 번째 그림 ‘태종대’에서도 볼 수 있다. 신선바위, 망부석, 병풍바위 등 특색있는 바위모양의 태종대 모습이 생생하다. 그림 오른쪽은 치솟은 기암괴석으로 왼쪽은 파도치는 바다로 과감하게 양분했다. 절벽 아래 너른 바위에 하염없이 달려와 부딪히길 반복하는 파도를 선비 둘이 넋놓고 바라보는 중이다. 그게 ‘나’였으면 좋겠다 싶은 이들이다. 조선 후기 화가 김윤겸이 영남지역 명승지 14곳을 돌아보고 그린 보물 제1929호 ‘영남기행화첩’ 중 다섯번 째 그림인 부산 ‘태종대’. /사진제공=동아대 석당박물관 화첩은 부산에 이어 경남 합천으로 향한다. 해인사 오르막길 옆 계곡을 그린 ‘홍류동’은 딱딱한 기암절벽을 부드럽게 감싸고 도는 물소리가 경쾌하고, 기세 좋은 산과 울창한 숲에 쏙 안긴 ‘해인사’ 풍경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 나온다.
이어 화가는 지금의 거창군 북상면 월성계곡 사선대를 가리키는 ‘송대’로 안내한다. 계곡물이 바위 곳곳을 희롱하듯 넘나들고, 중앙의 넓은 바위에서는 복건 쓰고 지팡이 짚은 유학자, 유건에 푸른 옷을 입은 유생 등이 자연이 준 특혜를 만끽하는 중이다. 거창 금원산의 ‘가섭암’은 시리게 푸른 색조가 유난하고, 인근 유안청 계곡을 그린 ‘가섭동폭’은 맑은 물의 흐름을 바라보고 앉은 인물의 태도가 더 인상적이다. 거창은 월성계곡 장군바위를 그린 ‘순암’까지 총 4폭에 등장한다. 김윤겸의 ‘영남기행화첩’ 중 4번째 그림인 합천 ‘해인사’ /사진제공=동아대 석당박물관 열 번째 그림인 ‘환아정’은 지금의 산청군 산청초등학교 주변인데, 이곳은 예부터 경관이 아름다워 우암 송시열(1607~1689)도 ‘산음현환아정기’로 예찬했을 정도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 지어진 환아정은 정유재란 때 소실됐고 재건된 것마저 1950년 쯤의 대화재로 완전히 사라졌다. 물결 하나없이 잠잠한 경호강을 내려다보는 환아정도 부럽지만, 맞은편 물가에 작은 오두막 한 채 짓고 살 수만 있어도 더없이 좋을 풍광이다.
함양은 제9면과 12~14면에 등장한다. 화림계곡 월연암을 묘사한 ‘월연’은 너른 바위 틈으로 굽이치는 계곡물 뿐, 화첩 중 유일하게 나무도 사람도 없는 그림이다. 열두번째 그림인 ‘사담’은 지금의 함양 연화산으로 추정되는 곳인데 계곡 사이 바위에 오른 세 사람은 정작 물이 아닌 딴 곳을 보고 있다. 물거품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던 모양이다. 휴전면 용유담 아래 부분을 그린 ‘하룡유담’은 두 갈래로 나뉘는 물길 사이에 오로지 혼자 뻗은 키 큰 소나무가 시선을 잡아끈다. 화첩의 마지막 그림 ‘극락암’은 휴가의 끝자락만큼이나 긴 여운을 드리운다. 왼편 절벽 위에 서상면 옥산리 백운산에 있던 절로 전할 뿐 지금은 사라진 극락암 앞으로 안개에 사로잡혀 한없이 아득한 산들이 펼쳐진다. 딱 이대로 시간이 멈춘듯한 광경이다. 김윤겸의 ‘영남기행화첩’ 중 6번째 그림인 거창 ‘송대’ /사진제공=동아대 석당박물관 김윤겸은 조선 중기 문인 김창업(1658~1721)의 서자로 태어났다. 학자와 관료를 많이 배출한 할아버지 청음 김상헌(1579~1652)이 이룬 명문가, 안동 김씨 집안의 자손이다. 원칙적으로 서얼 출신은 요직을 차지할 수 없었지만 17~18세기 숙종과 영·정조 때 ‘서얼허통’에 대한 주장이 받아들여져 서자 출신이 관직에 오른 사례가 있다. 김윤겸도 이 중 하나로 경남 진주의 소촌역(召村驛) 찰방을 맡게 됐다. 찰방은 역참을 관리하는 종 6품의 외관직 벼슬이다. 부임한 김윤겸은이 여름을 맞아 영남 지방 명승을 돌아본 후 남긴 그림이 바로 이 보물 제1929호 ‘영남기행화첩’이다. 김윤겸의 행적은 크게 알려진 바 없지만 겸재 정선의 화풍을 계승한 대표적 화가 중 하나로 꼽힌다. 겸재를 도화서에 천거한 김창집이 그의 큰아버지였으니 집안과 교분이 두터운 정선에게서 김윤겸이 직접 그림을 배웠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사물을 극도로 단순화시켜 간단하고 짧은 필선으로 묘사하고, 투명한 담채를 살짝 곁들여 추상미가 풍기는 그림을 그렸다. 딱히 출세하고자 했던 이가 아니었기에 그는 여행의 감동을 담아 풍경을 그리는 기행사경(紀行寫景)에 몰두했다. 간송미술관에 있는 ‘동산계정도’는 현재 전하는 김윤겸의 실경 작품 중 연대가 밝혀진 가장 빠른 시기, 서른일곱 살의 작품이다. 멀리로 삼각산 인수봉이 보이는 곳에 은거하던 선비 신평천과 그의 계곡 위 정자를 그린 그림이다. 산등성이를 두 세개의 묵선과 옅은 담채로 아련하게 그리고 붓을 뉘어 쌀 모양 점(미점·米點)으로 먼 산을 표현했으며 잔가지를 생략한 굵은 줄기로 나무를 그리고 태점(苔點)을 찍어 이끼를 표현하는 등 실제 경치를 압축해 개성 있고 과감하게 보여주는 수법은 청년기부터 만년까지 계속되는 김윤겸의 특징적 화풍이다. 김윤겸의 ‘영남기행화첩’ 중 11번째 그림인 거창 ‘순암’ /사진제공=동아대 석당박물관 남산인 목멱산 중턱에서 경복궁 뒷산을 바라보며 그린 ‘백악산도’, 한강 마포나루터가 보이는 곳에서 사대문 안 도성 쪽으로 바라본 청파동 실경을 그린 ‘청파도’ 등 서울의 실제 모습을 그린 그림은 명승지 위주로 감동을 그린 진경산수와 달리 근대적 시선으로 일상 풍경을 다뤘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1786년작 ‘봉래도권’에도 김윤겸의 개성이 뚜렷한데, 이 화첩 겉장에는 ‘진재봉래도권 완당장’이라 적혀있다. ‘추사’ 외에 ‘완당’을 호로 쓴 조선 말기 문인 김정희(1786~1856)가 소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윤겸의 ‘영남기행화첩’ 중 13번째 그림인 함양 ‘하룡유담’ /사진제공=동아대 석당박물관 이 영남기행 화첩은 적어도 예순 살 이후, 김윤겸 화풍이 완숙기에 접어든 이후의 작품으로 보인다. 채색이 맑아지고 수묵이 가벼워졌는데, 영남지방의 여행이 자극제가 된 모양이다. 미술사학자인 이태호 명지대 석좌교수는 “실경을 압축한 화면구성이나 가벼운 담채법이 특기할 만하고, 정선 이후 양식화된 경향에서 탈피해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성공적인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가”라고 평하며 “특히 바위 표현은 서구풍 수채화를 보는 듯하고, 표암 강세황과도 상통하는 듯한 양감있는 바위”라고 분석했다. 화첩 속 명승지 상당수는 김윤겸이 새롭게 발굴한 곳으로 아마도 자신의 화풍을 자신 있게, 맘껏 드러낼 만한 곳을 찾아낸 모양이다. 파랑이 유난히 맑은 그림을 보며 ‘여름날의 추억’을 어떻게 간직해야 할지 고심해봐야 겠다. [출처]:조상인 서울경제신문기자 :<조상인의 예-김윤경 '영남기행화첩'> / 서울경제신문, 2027, 8.4. 김윤겸의 ‘영남기행화첩’ 중 14번째 마지막 그림인 함양 ‘극락암’ /사진제공=동아대 석당박물관
21.이쾌대 '해방고지-군상1' - 가슴 벅찬 광복의 기쁨 화폭에...리얼리즘 회화의 진수 고전·낭만주의 등 서양미술 두루 섭렵 - 생생한 드로잉으로 韓미술사 한획 그어 1988년 월북작가 해금조치 풀린 이후 - 1991년 '이쾌대'전으로 세상에 알려져 농촌 배경으로 한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 서양화 그리는 한국인 화가의 정체성 표현 이쾌대의 1948년작 ‘군상1-해방고지’, 캔버스에 그린 유화, 181x222.5cm, 개인소장.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해방(解放)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외교권을 박탈당한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 주권을 완전히 빼앗긴 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1945년 8월 15일까지 꼬박 36년간 식민지배를 겪었다. 그 암흑 같은 시절에서 빛을 되찾은 날이 바로 광복절이다.
‘해방고지’는 그 기쁨의 순간을 그리고 있다. 제목에는 천사가 동정녀 마리아의 임신을 알리는 ‘수태고지’와 같은 작법이 쓰였다. 그림 왼편에서 맨발로 달려오는 하얀 한복 입은 두 여인이 해방의 소식을 전하는 중이다. 얼마나 좋았던지, 얼른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픈 마음에 여인은 옷섶 위로 젖가슴이 빠져나온 줄도 모른 채 숨 가쁘게 뛰고 있다. 화면 오른편 사람들이 일본이 패망했다는, 그래서 이제 해방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 있다. 분홍치마를 동여맨 아낙, 우람한 팔뚝의 장정, 벌떡 일어나 앉은 머릿수건의 여인 등 해방 소식을 들은 이들은 흥분하기보다는 결연하고 굳은 의지를 표정으로 드러낸다.
그들 뒤로 ‘진정 이게 사실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귀를 쫑긋 세운 사내의 크고 둥근 눈이 또렷하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 이쾌대(1913~1965) 자신의 얼굴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라파엘로 산치오(1483~1520)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을 그린 ‘아테네 학당’에서 검은 모자를 쓴 채 정면을 응시하는 자기 얼굴을 그려넣은 것처럼, 이쾌대 역시 역사의 목격자로서 자신을 그림에 숨겨뒀을지 모른다.
기쁜 소식이건만 그림은 결코 밝지 않다. 이미 참혹하게 죽어 흙빛이 된 시신 이를 붙들고 오열하는 사람, 분노로 뒤엉켜 싸우는 사람들이 그림을 에워싸고 있다. 이들의 희생과 고통이 밑거름되어 오늘의 해방을 얻어낸 것이리라. 화가의 애도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맥없이 주저앉은 반라의 어미 곁에서 발가벗은 채 젖 찾아 입 내민 아기가, 작지만 화면 중앙에 자리 잡았다. 희망의 씨앗이다. 그림 아래쪽으로 쓰러져 누운 사람의 몸 위로 울긋불긋 자라난 꽃나무와 그 사이로 뻗어나온 손이 이들의 모습을 떠받치는 듯하다. 그림의 주제는 뒤쪽 배경을 이루는 하늘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 해방 소식이 전해오는 왼쪽 하늘에서는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쏟아져 내리고, 이 빛은 오른쪽으로 향하며 폭격의 검은 연기와 가시지 않은 먹구름을 밀어내는 중이다. 저 멀리 밝은 들판을 향해 달려가는 소의 뒷모습에서 다시 일어서는 한국인의 기상이 감지된다.
이쾌대의 비운은 ‘월북화가’라는 꼬리표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작가가 근대미술사의 빛나는 업적은 묻혀있었고 이름조차 언급할 수 없는 긴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도 20여 년이 지난 1988년에 월북작가 해금 조치가 이뤄졌고 1991년 신세계 창립 29주년으로 신세계미술관에서 ‘월북작가 이쾌대’전이 열렸을 때는 “한국 근대미술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지난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는 대규모 회고전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가 열려 그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경북 칠곡군에서 태어난 이쾌대는 조부 이선형이 지금의 검찰총장인 금부도사를 지냈고, 아버지 이경옥은 창원 시장 격인 현감을 지낸 세도가 출신이다. ‘3만석꾼’ 대지주 집안의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가 자란 집은 “성처럼 높은 담장이 5,000여평을 둘러싸고 집 안에 교회·학교·테니스코트가 갖춰져 있었다”고 전한다. 일찍이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열 살 때 대구로 유학한 후 경성 휘문고보에 진학해 장발(1901~2001)에게서 그림을 배우고 야구선수로도 활약했다. 당시 ‘모던보이’가 그랬듯, 이쾌대는 이름만큼 쾌활한 멋쟁이였다. 이쾌대가 1951년 포로수용소에서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부인의 초상’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사랑에도 뜨거웠던 그는 아름다운 처녀 유갑봉(1914~1980)과 열애 끝에 스무 살에 결혼해 이듬해인 1933년 일본 제국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 시절 인물화에 몰두한 이쾌대의 모델은 모조리 유갑봉이었다. 아내는 그에게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렇다고 사랑에 눈 멀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조선의 전통미를 풍기던 여성상은 점차 강인한 민족성을 드러내며, 세련된 신여성과 주체적인 지식인으로 변화해 간다.
형인 좌익 항일운동가 이여성(1901~생몰년미상)의 영향을 받은 이쾌대는 해방 직후 좌익 성격의 미술단체에 가입했으나 회의를 느끼고 탈퇴해 중립을 표방하는 조선미술문화협회를 결성했다. 1946년부터 한국전쟁 직전까지는 개인화실을 겸해 미술학도 양성을 목표로 ‘성북회화연구소’를 운영했고 ‘물방울’화가 김창열, 차가운 돌에서 따뜻한 가족애를 끌어낸 조각가 전뢰진 등의 제자를 키워냈다. 사실적인 인체 표현을 연구하며 다빈치나 미켈란젤로가 그랬듯 ‘미술해부학’ 그림책을 남긴 것 또한 중요한 업적으로 꼽힌다. 이쾌대가 인체 묘사를 위해 1951년 무렵 작성한 ‘인체의 해부학적 도해서’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하지만 6·25전쟁이 일어나고 서울이 북한군에 점령당했지만 이쾌대는 병환 중인 노모와 만삭인 부인 때문에 피난을 떠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남은 서울에서 북한 지도부의 강요로 인민군 부역화가로 활동해야 했다. 그 바람에 서울 수복 후 체포돼 거제 포로수용소에 수감된다. 그는 포로수용소 안에서도 그리운 아내의 얼굴을 그렸고, 그 솜씨가 눈에 띄었던지 미군의 초상화도 그려줬다고 한다. 그러나 1953년 남북한 포로교환 때 그는 북을 택했다. 형이 이미 월북한 뒤라 정치적 위협을 느낀 결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북에서도 화가로도 활동했지만 형이 김일성을 비판하다 숙청된 후 이쾌대는 남북한 양쪽에서 ‘금기화가’로 낙인찍혔다.
홀로 네 자녀를 키운 이쾌대의 ‘뮤즈’ 유갑봉은 서울 신설동 집 다락방에 남편의 작품을 한 점도 잃어버리지 않고 숨겨 보관했다. 한옥이었기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곳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1950년 8월에 태어난 막내아들 이한우 씨조차 장성한 후에야 다락방 그림의 존재를 알았다고 한다. 이쾌대는 수용소에서 보낸 편지에 “내가 돌아갈 때까지 그림을 팔아서 생활하라”고 당부했지만 유 여사는 그림 팔라는 유혹을 뿌리치며 생계가 어려워도 그림을 지켜냈다.
‘해방고지’를 포함한 일련의 그림들은 모조리 그 다락방에서 나왔다. 이쾌대는 해방 직후 전성기의 필력으로 수십 명이 한 화면에서 꿈틀대는 2m 이상 대작 ‘군상’을 연작했다. 총 4점이 전하는 이들 그림은 일제의 잔재를 씻어내고 우리식의 미술을 시도한 역작으로 꼽힌다. 미술평론가 최열이 “해방공간의 시대정신을 보여주며 낭만주의의 격렬함으로 뒤엉킨 서사시”라 평한 이 그림들은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루이다비드, 낭만주의 대표작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역사화, 멕시코 벽화를 떠올리게 한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옷 벗은 마야’를 연상하게 하는 ‘누워있는 나부’나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을 생각나게 하는 ‘조난’ 등 이쾌대의 그림에서는 19세기 서양미술의 고전주의·낭만주의·사실주의가 어떻게 한국적으로 탈바꿈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쾌대가 1940년대 후반에 그린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72x60cm 크기 캔버스에 그린 유화, 개인소장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서양미술을 두루 섭렵한 것을 기반으로 우리 미술의 전통을 꽃피운 이쾌대라는 인물은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다빈치의 ‘모나리자’ 같은 구도의 이 그림에서 이쾌대는 평화로운 농촌을 배경으로 팔레트와 붓을 든 화가로 자신을 표현했다. 하늘을 닮은 맑은 파랑색 두루마기가 경쾌한 반면 표정은 진지하고, 굳게 다문 두툼한 입술과 큰 눈은 단단하면서도 예민하다. 중절모를 썼지만 한복을 입고 동양화 붓을 들었다는 점은 서양화를 그리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예술가로서의 소명의식을 분명히 보여준다. 해방의 기쁨을 쏟아내고 역사의 아픔 속에 묻혀 떠난 화가 이쾌대는, 그런 화가였다. [출처]:조상인서울경제신문기자:<조상인의 예-이쾌대 '해방고지-군상1'> /서울경제신문,2017.8.11. ` 북마크 되었습니다. 서버 접속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북마크 서비스 점검 중으로, 이미 Keep에 저장되었습니다. 서버 접속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북마크 서비스 점검 중으로, 이 __feed_info__ 마음에 드셨다면 카페회원들의 안전을 위해 iframe 태그를 제한 하였습니다. 관련공지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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