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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대, 이곡지 부부는 아픈 몸을 이끌고도 원폭 2세 환우의 진상규명 운동을 했던 아들의 원력을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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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부터 수정아파트 3호동은 매일 나지막한 지장경과 금강경 독경 소리가 새벽을 열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없이 부두의 뱃고동 소리와 어우러져 아침을 알린다. 독경의 주인공은 김봉대 거사(74)와 이곡지 보살(71, 다보심).
이들이 그저 평범한 삶을 사는 불자 노부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 방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제 닳고 빛바랜 금강경 옆으로 가지런히 한 권의 책이 놓여 있다.
아들 의 평전『삶은 계속되어야 한다』(휴머니스트). 고 김형률 씨는 원폭 2세 환우회 초대회장이었다. 켜켜이 쌓인 인고의 시절이 그렇게 놓여 있었다.
34세의 나이로 5년 전 고인이 된 김형률 씨는 어릴 때부터 선천성면역글로불린결핍증이라는 지병을 앓았다. 그로 인해 폐의 30%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한 달에 하루 이상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2003년 그런 그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1945년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후유증을 지닌 피해자 2세임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원폭 2세 환우회를 결성했다. 초대회장을 맡아 국가를 상대로 자신과 같은 처지의 환우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오롯이 3년을 헌신했다. 그러다 악화된 병으로 2005년 5월 눈을 감고 말았다.
진상규명 헌신한 아들 병 악화로 사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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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김형률 씨를 잊지 못하는 노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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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보낸 3년 동안의 인권운동에는 항상 그의 부친 김봉대 거사가 함께했다.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리는 합천에서 원폭 2세 환자들을 찾고 그들의 권리 회복을 주장하기 위해 일본까지 오가는 강행군도 마다하지 않았다.
일반인도 감히 시도하기 힘든 일정이다. 심지어 아들은 환자였다. 그런 아들의 손발이 되기 위해 김 거사는 하루가 멀다고 묵직한 서류 가방과 약봉지를 챙겼다. 그렇게 아들과 남편이 집을 나설 때면 아내는 가슴에 멍울을 짊어진 심정으로 금강경을 읽고 또 읽었다.
이곡지 보살은 죽음을 무릅쓰고 히로시마를 빠져나온 원폭 1세대다. 합천이 고향인 그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고 여섯 살에 원폭을 만났다. 그의 집까지 자욱한 방사능 연기가 뒤덮었고 2층 집은 형체도 없이 내려앉았다. 집안에 있던 세 살 동생을 구할 겨를도 없이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겨우 피해 현장을 빠져나왔다. 고향 합천으로 돌아왔지만 만성 피부병과 등허리 종양 등 후유증은 내내 그를 괴롭혔다.
고통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김 거사와 백년가약을 맺은 후 먼저 태어난 두 아들과 딸은 건강했다. 하지만 이후 가진 쌍둥이 중 딸은 태어나자마자 생명을 잃었다. 그나마 목숨을 건진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병을 달고 살아왔으니 생채기를 도려내는 아픔의 연속이나 다름없었다. 그럴 때마다 법당을 찾아 기도로 마음을 다스리며 살아있음 자체만으로도 감사를 거듭했다.
김 거사 역시 아들의 고통을 대할 때마다 불심으로 극복했다. 결혼 초 사업의 실패로 어려움을 겪을 당시에도 김해 영구암에 한 달 동안 머물며 정근 기도를 통해 인욕과 하심을 온몸으로 익혔다. 김해 동림사 화엄 스님과는 유일하게 마을상좌 인연을 맺었던 그다. 아들 역시 집 인근의 부산불교교육원에서 6개월 동안 간사를 지내며 보살의 삶을 발원한 것은 김 거사와 이 보살의 신행을 자연스레 훈습한 것이리라.
노부부는 아들의 49재를 범어사에서 지냈다. 그리고 1년 동안 아들의 방을 법음으로 채워나갔다. 김 거사는 매일 새벽 4시 일어나 이 방에서 지장경을 읽으며 기도를 했고, 김 거사의 기도가 끝나면 이 보살이 금강경 독경을 비롯해서 다시 기도를 이어갔다.
경전을 펼칠 때마다 눈물이 쏟아졌다. 방문을 열기가 힘겨울 정도였다. 하지만 기도는 계속됐다. 그 과정에서 노부부는 억울함과 한탄 대신 소리 없이 아들을 도와준 인연들과 함께 남은 생의 열정을 아픔을 묵묵히 견뎌 온 수많은 원폭 2세 환우들의 다리가 되기로 발원했다.
금강경 독송하며 유지 잇겠다 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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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을 꺼내 추억을 더듬는 노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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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후 김 거사는 방광암 2기 진단을 받아 수술로 인해 새벽 기도를 회향했지만 지장보살 염불은 지속했다. 대신 새벽 기도는 이 보살이 맡았다. 김 거사는 치료 중에도 아들이 하던 연단에 섰고 인터뷰도 자청했다. 쓸 줄 몰랐던 컴퓨터를 배우고 이메일도 이제는 능숙하게 다룬다. 국회 특별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도 참석해 발언하는 일 역시 주저하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지자체 별로 2세들을 위한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어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원폭 2세에 대한 피해조차 인정하지 않습니다. 비록 제 아들은 이 세상에 없지만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보건복지부에 원폭 2세 환우를 정식 등록하는 일과 국회에서 특별법이 제정되는 그날까지 우리 부부의 활동은 멈추지 않을 겁니다.”
김 거사는 분명히 기억한다. 2004년 정부에서도 조사를 통해 생존해 있는 원폭 2세 7천여 명 가운데 2300명 이상이 원인모를 질병을 앓고 있다고 밝힌 결과를 말이다. 그리고 현재 원폭 3세 가운데서도 비슷한 사례가 발생하고 있는 현실에서 원폭 2세 환우는 반드시 규명되어야 한다는 것이 노부부의 간절한 서원이다.
원폭투하 65주기. 김봉대, 이곡지 노부부는 아들이 걸었던 길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오늘도 길을 나선다. 이 땅의 아픈 역사를 업처럼 이고 살아야만 하는 원폭 2세 환우들의 진정한 권리 회복을 위해서다.
“병고와 빈곤에 굴하지 않고 다시는 이 땅에 핵으로 인한 희생자가 없도록 눈물겨운 노력을 보여준 원폭 2, 3세 환우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제 아들 형률이가 언제나 말해왔듯이, 한국 원폭 2세 환우들의 삶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첫댓글 낙산사 취숙헌에서 스쳐지나갔던 여러 보살님과 홍련암 참배에 나섰던 많은 불자들을 보면서 밝고 원만한 가르침 만남에 새삼 감사하였습니다.
고난에 허덕이는 불자님들이 스승님의 가르침(?)도 없이 금강경 지장경을 매일 독경하시는 것은 생각의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보현행원을 하면 경계가 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만 지장경이나 금강경독경을 하면서 여러가지 경계에 힘들어 하시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그 시절에는 경은 다 똑같은데 하는 생각을 하였지만 부처님께서 중생의 근기 따라 맞춤 설법을 하셨다는 것을 새겨보면 범부중생들이 일과로 독경해야 할 경전 선택에 신중을 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원폭피해로 고통을 받고 계신 분이시라면,더 더욱 밝고 원만한 경전독경을 해야하지 않나 합니다. 고통받는 일체중생들이 밝은 부처님 법 만나 편안하시기를 발원합니다.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마하반야바라밀....._()_
연무심님,너무나 귀한 말씀 주셨습니다...원만한 경전,밝은 경전 공부가 아픈분들껜 적격입니다..제가 몸소 거쳐온 상황입니다..독송하면 좋다고 무조건 가르침없는,또 어두운분의가르침 으로 공부 하다간 정말 낭패를 당합니다..부디 우리 불자님들이 이런 사실을 알고 행해야 하는데 마음이 갑갑합니다..몸은 아직 따라주지않고(^^)마음은 천리 만리 앞으로 음박질 칠땐 입니다요.._()()()_
(밝은 공부를 하지않으면 "금강경"을 삶아 먹어도 아무런 소용없다)_ 보현쌤 어록
오직 밝은 마음으로 고잘미섬공.....내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