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성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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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 가 본 학생 있나요?”
뉴욕에 도착하니 학창 시절 영어 선생님의 질문이 생각난다. 책 표지에 나와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보며 뉴욕은 자유의 성지라고 했다. 자유의 여신상 유래부터 맨해튼, 브로드웨이, 센트럴파크 등 자세히 소개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선생님 말씀 듣고 뉴욕을 평생 동경하며 살아왔다. 국립외교원 연수나 국제교류업무를 담당하면서 세계의 주요 도시를 대부분 다녀보았으나 공교롭게 뉴욕은 가 보지 못했다. 아내의 회갑을 축하하고 학창 시절 소원을 풀 겸 길을 나섰다.
현직에서 물러나니 자유롭다. 어디에 얽매이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서 좋다. 한때 해외 출장 일정이 잡히면 두려워한 적도 있었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국제교류단체를 방문하거나 무역사절단 지원업무를 수행하느라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사실 직항이 없는 아프리카나 남미로 가게 되면 곤욕을 치른다. 비좁은 비행기 안에서 오래 버티기도 힘들지만, 현지에서 머무는 숙소나 식당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미국이나 유럽은 직항이 많고 숙소나 식당 등이 편리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다녔다. 기내에서 영화를 서너 편 보니 자유의 성지 뉴욕이다.
지인은 학생운동을 하다가 자유를 찾아서 미국으로 일찍 건너갔다. 그는 그곳에서 영어를 배우고 지리를 익혀서 동서를 횡단하는 화물차 기사가 됐다. 그간 도로변이나 주차장에서 숙식하며 거지처럼 지내더니 허드슨강 가까이에 집을 지었다. 때마침 집을 준공하였다고 초청하여 들렸다. 아담하게 꾸며놓은 정원의 꽃이 미소를 지으며 반기고, 아늑한 풀장은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숲속에 상쾌한 공기가 폐부를 시원하게 마사지하고,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며 안부를 물어오는 듯했다. 그는 화물차 기사로서 성공한 듯 얼굴에 미소가 그득하다.
자유의 성지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다양한 민족이 제 방식대로 삶의 가치를 누리며 살아간다. 911테러로 세계 무역센터인 쌍둥이 빌딩이 사라졌으나 언제 그랬냐는 둥 잊힌 모습이다. 시내 어디를 가나 활력이 넘쳐 보인다. 오벨리스크처럼 우뚝 솟은 건물, 거미줄 같은 지하철이나 도로에 사람이 붐빈다. 다양한 인종 속에 자유가 깃들어 보인다. 백인도 백인 나름, 흑인도 흑인 나름, 황인도 황인 나름이다. 얼굴색이 미묘하게 약간씩 다르다. 몸에 걸치고 다니는 옷차림이나 얼굴에 바른 화장이 다르고, 귀나 코, 입술에 피어싱한 모습이나, 울긋불긋한 머리 스타일이 모두가 제각각이다.
걸인도 남다르다. 남루하고 초라한 행색이 아니다. 알록달록한 정장을 차려입은 연예인 같다. 소문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려고 가다가 황당한 일을 겪었다. 걸인이 맡겨놓은 돈처럼 내놓으라고 하여서 난감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일 불을 건네니 손사래 친다. 오 불, 십 불…, 결국, 삼십 불을 건네고서야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매직 카펫을 타고 시공을 초월하여 날아다니는 알라딘(뮤지컬)의 주인공처럼 자유스러워 보였다.
인간만이 아니다. 동물도 자유를 누리고 산다. 아내 회갑 날, 센트럴파크로 가는 길이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새벽에 숙소에서 일어나서 시내로 들어왔다. 지하철에 몸을 실으니 센트럴파크역이다. 다른 도시의 지하철에서는 보지 못하는 낯선 풍경이다. 쥐가 한두 마리가 아니다. 식당 이곳저곳에서 서생원이 머리를 내밀어서 놀랐다. 그러나 그들은 눈을 곱게 감고 태연하게 지나간다. 우리 같으면 혐오스러워서 잡아치웠을 텐데.
쥐의 천국이 지하철이라면 개의 천국은 공원이다. 꿈에 그리던 센트럴파크에 들어서니, 사람이 산책하는 공원인지 반려견을 운동시키는 공원인지 알 수 없다. 덩치 큰 젊은이가 크고 작은 수십 마리의 개를 몰고 나타난다. 행여 개에 물리 까봐 두려운 마음에 가던 길을 멈추고 잔디밭으로 피했다. 멀리 바라보니 거리의 악사도 산책로에서 한참 벗어난 곳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다. 산책길에 개들이 계속 몰려와서 젊은이에게 물었다. 그는 개를 운동시키는 아르바이트 학생이었다. 영화 속에 보았던 센트럴파크가 아니다.
자세히 보니 자유가 몸살을 앓고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이를 반대했다. 지인이 소망하여 선택한 화물차 기사나, 다양한 민족이 어울려서 제 방식대로 살아가는 모습은 아름다운 자유의 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극장가에서 돈을 강요하는 걸인이나, 지하철이나 센트럴파크에서 동물이 누리는 자유는 나의 소중한 권리를 침해하는듯하여 우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진정한 자유란 무엇일까. 사전을 뒤져보니 두 가지 자유가 나온다. 하나는 인류가 보편적으로 누리는 의지대로 할 수 있는 프리덤(freedom)이고, 다른 하나는 자의적인 의지로 행해지는 자유로부터의 억압을 막고 모든 이의 권리를 생각하는 리버티(liberty)가 있다. 미국의 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이하여 프랑스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기증했다. 그곳에 새겨진 영문을 읽어 보니 리버티로 적혀있었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는 다른 이의 권리를 생각해야 하는 자유 아닐까.
첫댓글 유병덕 수필가님
올려주신 수필 작품<자유의 성지에서>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