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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대중 문화의 시대
(1) 대중 문화란 무엇인가
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위에 인용한 시는 장정일 시인의 꽃의 패로디 이다. 이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깊은
의미가 무언지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면 어떤가. 이 시를 음미하면서 엉뚱하게도
누군가가 보고 싶을 때 그 사람이 단추만 누르면 살아나 내게 다가오는 라디오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단추만 누르는 정도의 노력만 기울이면 우리에게 쉽게 다가서는 것, 그게 바로
대중 문화다. 괜히 어렵게 이야기할 것이 없다. 네가 좋아하는 가수나 탤런트는
라디오나 TV의 단추만 누르는 것보다는 더 큰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것 역시
공부를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아니다.
대중 문롸의 범주에 하는 라디오, TV, 영화, 비디오, 잡지, 만화, 전자 오락
등의 내용물을 즐기는 일은 공부를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것들을 즐기기
위해선 깊은 생각을 하기 위해 이마를 찡그려야 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저 그
앞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모든 것이 머릿속에 쏙쏙 들어온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대중 문화는 그 정도다.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것이
바로 대중 문화다. 그런데 세상을 늘 즐기면서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리
싫어도 해야 할 일이 있다. 공부가 그렇고 일이 그렇다. 그래서 어른들은
자녀들이 대중 문화에 깊이 빠져드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어느 가정에서든 그런 문제를 가지고 부모와 자식간에 한 번쯤은 말다툼을
벌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논쟁은 비단 가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대중 문화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논쟁을
벌여왔다. 이제 그 논쟁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대중 문화의 뿌리를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우선 문화라는 말의 의미부터 짚고 넘어가자. 영어에서 문화(culture)라는
단어는 토양이나 식물을 경작(cultivation)한다는 데에서 유래하였으며, 이는
나중에 마음의 경작 이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문화는 흔히
지식, 신념, 예술, 도덕, 법, 그리고 그 밖에 사회의 구성원인 인간에 의해
획득된 능력과 습관 등을 포함하는 모든 것 으로 정의되어 왔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의 문화는 흔히 예술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며, 이는
소수의 귀족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가 신장되면서 그들도 문화 활동에 참여하게 되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보통 사람들이 참여하기 이전의 문화 활동은 귀족들이 주는 돈에 의존해
이루어졌으므로 예술가들은 귀족들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족했다.
귀족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그들의 문화적 취향은 비슷했으므로, 예술가들은
비교적 자신이 원하는 대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예술 활동은 경제적으로 관객의 입장료에
의존했기 때문에 늘 더 많은 관객을 끌어들여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른바 시장 논리 의 지배를 점차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더 많은 관객을
불러모으기 위해서는 예술의 수준이 낮은 사람의 취향도 만족시켜야 했으므로,
이는 불가피하게 예술의 하향 평준화 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한 보통 사람들을 가리켜 흔히 대중 이라고 부른다. 대중은 모든 신분의
사람을 포괄하며, 각 개인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고 사회 조직성을 갖지 않는
것으로 정의되어 왔다.
19세기 초 유럽의 귀족과 지식인들은 적어도 프랑스혁명 이후에는, 그러한
대중이 정치 무대에까지 등장해서 지배 계급으로 점차 변모해 감에 따라
구제도가 붕괴하고 전통적 가치마저 파괴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1850년대의 유럽과 미국에서는 이미 보통 사람들로 구성된 중산 계급이 별다른
무리 없이 사회에서 그들의 지배적 위치를 확립하게 되었다. 그러한 사회를
가르켜 대중 사회 라고 하는데, 이 대중 사회에선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로 대중 매체의 위력이 날로 커지고 있었다.
대중 매체의 기본 원칙은 대중 신문이 출현하고 널리 보급된 19세기 말경에
이미 확정되었는데, 그 원칙이란 전체 수용자의 수를 더욱 증가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 맞추어 매체의 내용을 꾸며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중의 존재 자체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던 19세기 귀족과 지식인들은 그러한
새로운 유형의 문화가 진실한 예술의 아름다움과 존엄성을 해치는 저급 문화
라는 이유로 혹독한 비판을 가하였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대중 문화는 흔히 저급
문화로 표현되고, 대중이 아닌 소수의 엘리트를 위한 문화는 고급 문화 로
부르게 되었다.
한편, 20세기의 대중 문화 비판자들은 대중 문화의 상업적 타락에 대해
경계심을 나타냈다. 그들은 대중 문화가 영리 추구를 위해 조직된 기업에 의해
이루어지며, 그로 인해 대중에게 영합하는 동질적이고 규격화한 상품만이 양산될
뿐이라는 점에 주목하였다.
대중 문화 비판자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좌파적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대중 문화가 대중의 정치로부터의 도피 를 부추기고 기존의 불평등한 사회
체제를 정당화한다고 비판하였다. 그러한 시각에 따르면, 대중 문화는 노동
계급의 수동성과 무관심을 조장하는 자본주의의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단호히 거부해야 할 아편 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대중 문화의 문제점들을 인정하면서도 대중 문화가 갖고 있는 장점에
더 주목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이념의 좌우를 막론하고 대중
문화를 매스 컬처(mass culture)'가 아닌 포퓰러 컬처(popular culture)'로
이해하고자 했다. 우리말로는 둘 다 대중 문화 로 번역되지만 그 숨은 뜻에는
큰 차이가 있다.
매스 컬처 에서 매스 는 한 집단의 구성원이나 개인을 나타내기보다는
무차별한 집합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경멸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매스 컬처 엔
상업주의, 획일성, 저속성 등의 부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 반면에,
일반적으로 넓게 확산되어 있으며 동의되고 있는 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포퓰러
라는 단어는 인기가 있다 와 민주적이다 는 두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요컨데,
포퓰러 컬처 라는 단어엔 대중문화의 민주적 성격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포퓰러 컬처 를 기존의 대중 문화 와 구별하기 위해 일부러
민중 문화 라고 번역해 부르기도 하지만, 이 민중 문화 라는 게념은 기존 사회
체제의 지배 문화 에 저항한다는 의미에서의 저항 문화 에 가까우며,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매스 컬처 나 포퓰러 컬처 를 모두 대중 문화 라고 부르고
있다. 똑같이 문화적 현상을 보더라도 그것을 부정적으로 보느냐 또는
긍정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매스 컬처 또는 포퓰러 컬처 라고 부를 구 있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저항 문화라는 개념은 크게 달라지고 있다. 지배 문화 대 저항
문화, 또는 대중 문화 대 민중 문화라는 식의 이분법적 분류는 우리의 문화
현실을 설명하는 데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예컨데, 10대들의 열광해 마지않는
대중 문화에도 기존 사회 체제에 대한 저항성이 어느 정도 담겨 있으며,
10대들은 그 저항성을 읽어 내고자 한다. 대중 문화의 주요 기능으로 비판받아
온 현실 도피 도 수용자의 의지가 앞선다면 능동적인 기분 전환 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한 개인에 의해 문화 상품이 소비되고 수용되는
과정과 상황이다.
대중 문화의 속성을 어떻게 보든, 오늘날의 대중 문화 논쟁은 과거와는 다소
다른 성격을 갖게 되었다. 똑같은 이름으로 불릴망정 TV가 출현하기 이전의 대중
문화와 이후의 대중 문화는 큰 차이를 갖고 있다. 게다가 뉴 미디어의 발달은
이른바 매체 폭발 을 일으키고 있어, 현대인은 오늘날의 대중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대중 매체를 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대중 문화를
대중 매체의 문화 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대중 문화의 여러 특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자본 논리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공산주의 국가에도 대중
문화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적어도 그 규모와 영향력에서 자본주의 국가의
대중 문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보잘 것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가 본격적인 개방을 하면서 밀어닥친 가장 크고 눈에
띄는 변화가 바로 미국 대중 문화의 범람이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분명하다.
대중 문화는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소비자의 주머니를 겨냥해서 만들어지는
문화이다. 그것도 더 많은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용의 주도한 마케팅
기법이 따라붙는 문화이다. 그것이 꼭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어느 가수가 10대
여학생들이 많이 사 줄 것을 기대하고 그들의 취향에 맞게 음반을 만들었다
해도, 그 음반을 산 여학생들이 지불한 돈에 상응하거나 그 이상의 만족을
얻는다면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다만 문제는 대중 문화를 이용하고 받아들이는 수용자들이 늘 현명한 건
아니며 대중 문화 상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그 점을 노릴 때가 많다는 데에 있다.
수용자들이 현명하다면 퇴폐적인 저질 대중 문화 상품이 큰 인기를 얻지 못해야
마땅하겠건만, 현실은 그렇지는 않다. 따라서, 대중 문화는 생산자들의 건전한
양식과 수용자들의 올바른 자세가 갖추어질 때에 비로소 우리 사회에 매우
유익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2) 고급 문화는 대중 문화와 어떻게 타협하고 있나
바흐의 음악은 스토코우스키에 의해 달콤하게 되었고, 비제의 음악은 로저스와
해머스타인에 의해 조잡하게 되었고, 성서는 진부한 산문으로 변색되어 매끈하게
다듬어졌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재미를 곁들여 달콤한 뮤직컬 코미디로
각색되었고, 프로이트의 심리학은 신문 독자에 대한 조언란이나 적당한 천박한
것으로 이용되었다.
미국의 학자 어네스트 반 덴 하그는 대중 문화에 의해 고급 문화가 타락한
예들을 위와 같이 들고 있다. 위의 글은 1950년대 말에 쓰여진 것이다.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타락이라고 부를 것도 없는 일에 괜한 시비를 걸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자 않을 것이다. 고급 문화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40년 전과 비교하여 가히 혁명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1992년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지에 미국의 문화 위기 를 선언하는 특집
기사가 실렸다. 그 내용인즉 고급 문화가 대중 문화에 짓눌려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 고급문화의 전당이라 할 케네디 센터는 92년도에 2백50만
달러의 적자를 냈으며, 미국의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맹은 연주 공연 가업 이
최악의 재정 곤란을 겪고 있다고 보고하였으며, 미국의 44개 춤 공연 단체 중
15%만이 적자를 면했고 나머지는 현상 유지가 어려운 실정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한 예술평론가는 그런 현상을 가리켜 관객의 죽음 이라 불렀다. 그 평론가는
대중과 고급 예술을 이어 주는 끈이 끊어지고 있다고 통탄하면서 이는 거대하고
고립된 TV 시청 대중의 예술로부터의 소외 라고 말했다. 우리 돈으로 4만 원이나
하는 마돈나의 누드 사진 집은 불티나듯이 팔리고 있으며 할리우드의 폭력물
영화가 사람들의 주요 화제 거리로 등장하는 가운데 고글 예술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으니, TV로 대표되는 대중 문화를 비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미국에서 고급 문화의 몰락은 미국의 대중 문화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시장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미국인들은 시장
중심의 윤리관에 투철하며 사회 분위기도 그 어느 나라보다 더 소비 지향적이다.
불론 고급 문화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대중이 고급 문화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일을 게을리 하였고, 대중화 의 가치에 지나치게
적대적이었다는 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어찌됐거나, 중요한 건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고급 문화의 쇠퇴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라는 점이다. 한 통계에 의하면 1910년대에는 클래식 음반의
시장 점유율이 세계 음반 시장의 85%를 차지했던 반면, 1990년대에는 12%로
떨어졌다. 미국의 경우는 더욱 심각해서, 클래식 음반의 시장 점유율이
세계평균의 3분의 1인 4%에 불과하다.
고급 문화의 일부 영역이 그나마 버텨 내고 있는 건 대중 문화에 이용되고
있는 기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CD의 대중화로 클래식 음반이
뒤늦게나마 다소 호황을 누리고 있는 것이 그런 경우일 것이다. 그러나 최첨단
매체의 힘을 빌리지 않는 공연 예술 은 전반적으로 극심한 불황에 처해 있으며,
많은 나라에서 정부의 보조금으로 연명해 나가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고금 문화는 점차 대중 문화와 타협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다.
시인이 광고 카피라이터로 일하거나 연극 배우가 TV에 진출하거나 하는 등의
장르간 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심지어는 클래식 음반의 디스크
재킷에 누드 그림이 등장하는 따위의 방법까지 동원되고 있다.
일부 나라에서는 고급 문화의 대중화를 국가 정책의 차원에서 봐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프랑스의 문화적 자존심이라 할 바스티유 극장이 연간
1억 달러에 이르는 적자를 메우기 위해 문화의 대중화 라는 구호를 내걸고 록
콘서트 공연을 허용하기로 한 것도 그런 변화의 하나다. 우리 나라에서도 고급
문화는 물론 전통문화까지 생존을 위해 대중 문화와 손을 잡는 일이 점차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대중 문화와 타협하려는 고릅 문화의 노력이 팝 아트(pop art)' 라고 하는
새로운 영역을 탄생시켰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미국의
미술가 앤디 워홀이 실크 스크린으로 찍어 만든 마릴린 몬로와 존 F.케네디의
얼굴들로 잘 알려진 팝 아트 는 영국의 미술 평론가 로렌스 알로웨이가
1950년대 초에 처음 사용한 용어이지만,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큰 관심을 끌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기존의 고급 문화 영역에서 대중문화에 대한 긍정적
반응이 가장 잘 나타난 경우라고 볼 수 있는 팝 아트 의 표현법에는 유화, 조각,
콜라주, 판화 등 시각 예술의 여러 작업들이 포함된다. BKQ 아트는 현실 자체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그래픽 디자인이나 대중 매체 가운데에서 발견되는
가공된 현실을 음미의 대상으로 삼을 따름이다. 따라서, 거기에서는 광고,
디자인, 회화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이는 현대 도시인들에게 자연이 거의 완전히 인공적인 것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도시에서 자연을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우리는 광고와
TV와 그 밖의 매체들로 가득 찬 숲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요컨데, 고급 문화의 환경 자체가 변화했다는 뜻이다. 그렇게 본다면, 팝 아트가
런던과 뉴욕 등 서구 소비 사회의 중심지에서 발생했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팝 아트가 처음 선보였을 때 일부 비평가들은 그것이 상업적
작가들의 작업을 모사하는 표절이라고 비난하였으며, 또 어떤 비평가들은 팝
아트가 피상적이며 퇴폐적인 예술 형식이라고 비판했다. 자본주의와 소비주의의
가장 좋지 못한 측면들을 재현하고 찬양하는 반동적 현실주의 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일방적으로 비판하기에 앞서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시대
상황을 좀 감안해 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50년대와 60년대 서구 소비 사회의
풍조를 극명하게 요약해 주는 표어는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였다. 영국의 선구적 팝 아티스트인 리차드 해밀턴이 50년대에 순수
예술가이기를 고집하는 것은 정신 분열증 환자처럼 자기 분열을 감내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고 말한 것도 아마 그런 시대적 상황을 무시하는 것에 대한
항변이었는지도 모른다.
같은 맥락에서, 팝 아트의 소비주의에 대한 찬양은 50년대와 60년대에 서구의
생활 수준이 괄목 할만큼 증진되었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또 팝 아트에는 어느 정도 우상 파괴적인 면이 있다. 그때까지 경시되던
상업적 예술을 사용함으로써, 고급 문화의 영역 속에 일종의 억압받던 것 을
복귀시켰다는 것이다. 팝 아트와 소비주의의 타협에 대해선 미국의 대표적 팝
아티스트인 앤디 워홀의 대담할 정도로 솔직한 견해를 듣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나라, 아메리카의 위대성은 가장 부유한 소비자들도 본질적으로는 가장
빈곤한 소비자들과 똑같은 것을 구입한다는 전통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즉, 여러분은 TV를 시청하면서 코카 콜라를 볼 수 있는데,
여러분은 혹은 대통령 또는 리즈 테일러가 그것을 마신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마실 수 있다. 콜라는 그저 콜라일 뿐 아무리 큰
돈을 준다 하더라도 길 모퉁이에서 건달이 빨고 있는 콜라와는 다른, 어떤 더
좋은 콜라를 살 수는 없다. 모든 콜라는 똑같은 것으로 통용된다. 리즈 테일러도
거렁뱅이도, 그리고 여러분도 그 점을 알고 있다.
영국의 미술 평론가인 존 워커는 대량 생산이 산업 사회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동일한 제품을 즐길 수 있게 하며 문화의 평준화와 사회적 관습의 통일을
가져오기 때뭉에 워홀의 견해에 타당성이 없는 건 아니나, 그의 정치, 사회적
이해는 지나치게 어설픈 데다 순진하기까지 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 워홀은
코카 콜라와 같은 청량 음료가 사회적으로 유익하고 필요한 것이냐는 문제와,
그것이 사회적 공익이 아니라 개인적 이익이라는 이해 관계에 따라 제조된다는
사실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워커는 워홀을 비롯한 팝 아티스트들의 팝 아트가 그것을 공격하는
사람들의 동의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모호하며 여러 뿌리가 뒤섞인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면서, 산업 서회에 맞는 상업 예술을 제작하기 위해 예술의 생산
방식을 산업화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워홀의
생각은 기존의 예술계 풍토에 비추어 이단적이며 불온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산업 혁명 이후 문인들과 사회 비평가들은 한결같이 기계를 예술에 적대적인
것으로 간주해 왔으므로 워홀의 관점은 엄청난 위협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워홀은 이제 더 이상 한 개인적 예술가로서 간주되지 않는다. 워홀 은
이제 한 무리의 상품에 붙여진 제조 상표인 것이다. 워홀도 자신의 작업을
비즈니스 아트 라고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즈니스 아트는 예술 다음에 오는 단계이다. 나는 스스로가 상업적
예술가이기를 주장했고, 이제는 비즈니스 즉, 사업 예술가로서 끝마무리를
지으려 한다. 사업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가장 매력적인 종류의 예술이다. 돈을
번다는 것은 예술이며, 일한다는 것도 예술이며, 훌륭한 사업은 최상의 예술인
것이다.
워커는 워홀이 예술의 상업적 차원을 간파한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워홀은
자본주의 제도 속에 존재하는 예술의 자본주의적 본성을 기꺼이 직시하려는
극소수 현대 예술가들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워커는 워홀이야말로
자본주의 리얼리즘 작가 라고 부를 만하다고 말하고 있다.
워커의 견해를 어떻게 평가하든, 우리는 문화의 권력 이동 만큼은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는지도 모른다. 고급 문화는 대중 문화에 포위당했으며 곧
점령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상황은 무시하거나 비판만 한다고 해서 바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중 문화를
숭상하자는 것은 아니다. 대중 문화의 현실적 위상과 무게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래야 대중 문화의 건전한 발전 방안도 논의되고 마련될 수 있다.
(3) 우리 나라의 대중 문화는 어떻게 발전해 왔나
우리 나라에서 대중 문화 라는 말이 최초로 사용된 것은 조선일보 1933년 4월
29일자 사설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대중 문화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본주의 대중 문화와는 거리가 있다.
우리 나라에서 진정한 의미의 대중 문화가 나타난 때는 경제 개발의 구호 아래
농촌이 해체되고 도시가 커지면서 교통, 통신, 교육, 대중 매체등이 발달하기
시작한 1960년대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960년대엔 전체 인구의 약 60%가 농촌에서 산 반면에, 1970년대에는 약
50%가, 1976년엔 그 비율이 완전히 역전돼 약 60%가 도시에서 살게 되었다.
도시에서 사는 인구의 비율은 90년대에는 무려 80%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한
도시화율의 증가 추세를 대중 문화의 성장 추세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대중 문화가 곧 대중 매체의 문화 를 의미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
나라에선 대중 문화 발전이 절대적으로 대중 매체에 의존해 왔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회, 정치적인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5.16 쿠테타로 집권한 군사
정권은 경제 발전을 국가의 제 1이념으로 삼고 다른 부문의 발전은 상대적으로
억눌렀다. 그런데 이러한 권위주의적 통제는 국민의 정치적 불만과 저항을
불러일으킬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사회 분위기가 억압적일수록 긴장을
풀어 줄 오락과 유흥에 대한 욕구는 더 커지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애초에 정통성에 문제를 안고 있었던 군사 정권은 경제 발전이라는
목표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국민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그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릴 수 있게 해 줄 수단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 가운데 군사 정권이
찾아낸, 가장 돈이 덜 드는 해결책이 바로 문화적 대안이라 할 대중 매체의 집중
육성이었던 것이다. 물론, 대중 매체를 정치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목적도
거기에 덧붙여졌다.
우선, 신문 보급 부수를 보면 1961년도엔 인구 1천 명당 33부 정도였으나,
이는 65년에 51부, 67년에 66부, 69년에 89부, 73년엔 98부로 늘어났다.
60년대와 70년대엔 언론 자유가 전혀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문들은 연재
소설 등과 같은 대중 문화적 기능에 큰 신경을 썼다. 특히 조선일보에 연재된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 은 독자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는데, 73년 단행본으로
출간돼 75년까지 40여만 부가 팔리는 대 기록을 세웠다. 별들의 고향 은 74년의
베스트셀러인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 시대 와 더불어 이른바 호스테스 문학 의
전성 시대를 탄생시켰는데 이는 신문들이 앞다투어 발행한 대중 주간지들에 좋은
시장을 제공해 주었을 뿐 아니라, 무료한 사람들을 만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대중 주간지들의 성격마저 규정했다. 즉, 대중 주간지는 아예 처음부터
무료해서 못 견뎌 하는 독자를 예상하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방향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아 우라 나라의 대중 문화 발전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건
활자 매체라는 것이 65년대에 1백만 대, 68년에 2백만 대, 70년에 3백만 대,
72년에 4백만 대, 74년에 5백만 대, 76년에 1천만 대, 78년에 2천만 대를
돌파하였다. 라디오는 60년대에 영화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오락 중심의 대중
매체로서 우리의 대중 문화 형성에 가장 중요한 오락 중심의 대중 매체로서
우리의 대중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63년 우리 가요사상 최초로 음반판매 10만 장을 돌파한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 등의 히트곡들, 그리고 60년대 후반의 남진, 나훈아 등의 활약에 힘입어
60년대는 우리 대중 가요사에서 흔히 황금기로 불리고 있는데, 그것도 바로
라디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60년대 중반 서울에는 KBS, CBS, NBC,
DBS, TBC 등 5개의 방송국이 있었다. 1965년의 한국연감 은 상업 방송국들간의
치열한 경쟁을 코미디 프로그램을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DBS에서 구봉서, 김희갑, 송해 등 코미디언을 업고 청취자들로부터 인기를
모으자 MBC측은 이에 도전을 하여 끝내 DBS로부터 구봉서를 탈취하고 다음에
송해도 끌어들여 배삼룡 등과 함께 강팀을 형성했다. TBC는 이에 경쟁하러
나서서 서영춘을 기르며 팬들의 인기를 제법 모았다.
영화도 인기를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 나라 영화의 최전성기가
1969년이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듯이, 60년대에 대중의 꿈을 사로잡은 매체는 바로
영화였다. 영화 관객은 69년 1억 9천 4백만 명으로 최고 기록을 수립한 이후
매년 13%정도 감소하게 된다. 71년에 1억 5천만 명, 73년에 1억 1천만 명,
75년에 7천 8백만 명, 77년에 6천 5백만 명, 그리고 90년엔 5천 3백만 명
수준으로 떨어진다. 1969년에 우리 국민은 1인당 1년에 극장을 6번이나 갔지만
이 수치는 78년에 2번, 84년에 1번으로 줄고 지금까지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지영 감독이 만든 영화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는 60년대의 의
청소년들에게 얼마나 마력적인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우리 나라의 TV방송은 1956년 6월 16일, 세계에서는 15번째로, 아시아에서는
필리핀, 일본, 태국에 이어 4번째로 시작되었다. 엄밀하게 보자면 그것은 우리의
방송은 아니었다. 그 주체가 미국의 다국적 젖자 기업 RCA였기 때문이다. RCA는
NBC-TV의 모기업으로서 NBC-TV를 일종의 판촉 수단으로 활용, TV 수신기를
판매해 지금과 같은 미국 TV문화를 형성한 실질적인 주역이다.
RCA 한국 지사 노릇을 했던 우리 나라 최초의 TV방송국 KORCAD는 사실상 우리
경제 수준에 비추어 너무 때 이른 것이었다. 다수의 국민들이 먹고 살기조차
힘들어하는 상황에서 TV수신기를 갖는다는 건 터무니없는 사치였다. 당시에
전국의 TV수신기 수는 3백 대 미만이었다. RCA는 TV수신기 대여 사업을 실시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KORCAD는 1957년 5월
6일 장기영에게 양도되어 대한 방송 주식 회사(DBC)로
재출발하였다.```````````````
1957년 9월 5일의 AFKN-TV개국은 한국의 TV시장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주한
미군을 통해 TV수신기를 유출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TV수신기 수는 58년에 7천대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DBC-TV는 59년 2월 2일 대
화재로 사라져졌으며, 그 뒤로 2년 반 이상이나 AFKN-TV 의 채널을 통해 하루
15분 -30분의 방송을 내보내는 데 만족해야했다.
5.16군사 정권은 정책 홍보의 수단으로 TV방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61년 12월
31일에 지금의 KBS-TV를 개국시켰다. 개국의 목적이 그러했던 만큼, 군사 정권은
미국에서 TV 수신기 2만 대를 수입하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63년
1월부터는 시청료 징수 및 광고 방송이 실시되었으며, 당시 TV 수신기 보급
대수는 3만-4만 대에 이르렀다. 64년 12월 7일에는 동양 TV방송(DTV)이
개국하였다(66년 8월 TBC-TV로 개명). 그리고 66년에는 KBS-TV가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하게되었다. 66년 당시 TV 수신기 보급대수는 5만-6만에
이르렀다.
적어도 66년까지의 TV방송 발달사는 웬만한 후진 국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중요한 사건들은 60년대 후반에 일어났다.
66년, 정부는 전자 산업을 부출 수출 육성 산업으로 지정하고 파격적인
재정지원과 면세 혜택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전자 산업 수준은 초보적인
것이었다. 58년부터 최초로 라디오 조립을 시작했던 전자산업은 68년에야 비로소
TV 수신기를 조립생산 하게 되었다.
정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69년에 전자 산업 육성법을 공포하였다. 또 69년
8월8일에는 MBC-TV가 개국하였다. 바로 이때부터 TV 수신기의 보급률은 가히
폭발적인 증가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67년-68년에 10만 대에 불과하던 TV
수신기는 72-73년에 1백만 대를 돌파하였으며, 75-76년에 2백만 대 돌파,
77-78년에4백만 대 돌파, 83-84년에 8백만 대를 돌파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거듭하게 된다. 전자 산업육성법이 공포된 69년이 한국 영화의 마지막
최전성기였다는 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시청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TV방송사들의 경쟁도 치열했다. 예컨대, MBC-TV의
사장은 71년의 연두사에서 최고의 시청률 을 금년의 목표 로 삼겠다고
공언했으며 그 결과는 모든 방송사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락성을
강화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당시에 TV의 인기는 대단해서, TV가 없는 집에는
가정부가 취업하지 않으려고 할 정도였다. 물론, 요즘엔 가정부라는 직업 자체가
거의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제법 잘산다 하는 중산층은 다 가정부를 두고
살았다.
TV는 70년대에 정부의 강력한 지원 하에 국민의 여가 생활을 책임지는 오락
매체로 육성되었다. 또한 경제 발전이 가속되면서 1970년 이후 방송 광고의 연
평균 성장률은 40%를 웃돌았다. 1972년 방송의 날 을 맞아 문공부 장관이 TV의
지나친 오락성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였지만, 방송인 스스로 반성하고 시정 할
것을 촉구하는 선에서 끝났다는 것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즉, 정부도 TV의
지나친 오락성 추구를 묵인하였다는 뜻이다.
60년대부터 80년대, 우리의 대중 문화는 대체로 국민의 정치로부터의 도피 를
부추기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물론 70년대의 대중 문화엔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이 어느 정도 담겨 있었지만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일부 영역에
불과했고, 그나마 80년대부턴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80년대 말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학가를 중심으로 사물놀이를 비롯하여 우리의 순수한 대중문화를
형성해 보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것이 그야말로 대중적 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6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대중문화를 관통하고 있는 한가지 주된
흐름은 미국과 일본 대중 문화의 수입과 모방이다. 특히 1957년에 개국한
AFKN-TV는 미국의 대중 문화를 국내에 전파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
70년대 후반부터 청소년이 대중 음악 분야를 중심으로 대중문화에서 큰 힘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78년 MBC-TV가 주최한 대학
가요제는 대학의 일부도 대중 문화 영역에 편입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중요한
상징이었다.
80년대는 대중 매체의 폭발기였다. 특히 80년 12월 1일부터 시작된 컬러 TV
방송은 영상 문화에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몰고 왔다. 컬러 TV수신기 보급은
컬러 방송 시작 1년여 만인81-82년 중에 무려 2 백만대를 돌파하였으며,
82-83년에 3 백만 대, 83-84년에 4 백만 대,85-86년에 5 백만 대에 이르렀다.
그리고 90년에 들어서 가전업체들은 컬러 TV 한 집 2대 시대 를 열기 위한
마케팅 공세를 치열하게 전개하기 시작했다.
대중 매체의 폭발은 광고비의 급증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국내 광고 시장은
88년 처음으로 1조 원대를 넘어선 후 89년 22.4%, 90년 27.8%,91년 16.5%, 92년
17.5%씩 고성장을 거듭해 왔는데, 93년 우리 나라의 총광고비는 모두 3조
1천9백79억 원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 신문이 1조 3천3백26억 원, TV가
8천9백47억 원, 라디오가 1천3백71억 원, 잡지가 1천2백39억 원을 차지했다. 그
밖에도 광고비의 규모를 따질 수 없는, 비디오나 만화 같은 매체들이 무시할 수
없는 산업적 규모를 형성해 가며 대중 문화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엄청난 산업 규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이루어진 대중 문화에 관한 논의는 대중 문화의 사회적 악영향과 대중 문화가
외래 문화의 전송로 노릇을 하는 현실을 비판하는 수준에 머물러왔다. 최근 들어
포스트모더니즘 의 간판을 달고 대중 문화를 긍정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긴 하나, 그것마저도 외국에서 유행하는 이론을 직수입한 가운데
우리의 실정을 정확히 살펴보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만족할 만한 수준의
대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 나라의 대중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형성되어 온 역사가 긴 데다 외국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다. 따라서, 대중의 주체성이 어느 정도 가미된 포퓰러
컬쳐 라기보다는 그렇지 못한 매스 컬쳐 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일부 서구
국가들에서 생성된 대중 문화 긍정론 을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 문화 긍정론 은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이른바 인구학적인 변화 때문이다. 즉, 미국 대중 문화를 섭취하면서 자라난
신세대들이 상당한 구매력을 갖고 대중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만큼,
대중 문화를 부정하기보다는 대중 문화를 인정하면서 대중 문화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는 편이 훨씬 더 현실적이라는 뜻이다.
방송사가 주체하는 대학가요제가 대학 캠퍼스에서 열릴 정도로 이제 우리
사회에서 대중 문화는 막강한 침투력을 자랑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대중
문화를 부정적으로만 보는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한, 사회 구조가
지닌 문제를 대중 문화가 반영하는 측면을 놓고 문제의 책임을 대중 문화에만
돌리는 것도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예컨대, 우리의 입시 지옥 문제를 그대로
방치한 채 우리 청소년들이 지나치게 대중 문화에 빠져들고 있다고 비판하는건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다. 대중 문화는 사회 각 부문의 관계 속에서
총체적으로 탐구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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