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호(나남출판사 대표)
입원하신지 열흘째라 하셨다. 폐에 물이 차고 산소호흡기에 의존하셨지만 기억도 또렷하시고 유머로 위로하면 예의 파안대소 대신에 인자한 미소를 보이셨다. 가끔씩은 거인의 깊은 잠에 빠져드시는 것 같았다. 병원치료 모두를 거부하시고 당신의 의지 하나로 90노구를 다스리며 또 하나의 고독한 장정(長征)을 계속하셨다. 아내와 함께한 병문안에는 두 손을 꼭 잡고 고마웠다고 자꾸 말씀하셔서 참았던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오히려 지난 사반세기 동안《장정》전5권(광복군 시절부터 다시 대륙으로까지)을 출판하면서 저희들이 어른을 모시게 되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모르는데도 말이다.
현충일이 낀 연휴동안 이 시대의 큰 어른을 보내 드리면서, 한 시대가 이렇게 가는가 하는 허망한 생각에 몸을 혹사시켜서라도 무념무상해 보려고 시작한, 광릉 농원의 잡초 뽑는 일도 손이 가지 않았다. 금년엔 병이 돌았는지 이때쯤 수확하던 매실도 결실이 거의 없다. 눈꽃 속에서도 꽃을 피워내는 매화의 절개가 큰 어른의 상실을 미리 읽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본 유학생이던 청년은 학병(學兵)으로 중국 땅에 내몰린다. 고향인 압록강변 강계에서 독립군의 거친 말발굽 소리의 신화와 함께 성장했는데 아무리 세상이 하수상하다고 해도 제국주의 일본 병정으로 살 수는 없는 일이다. 학병 탈출 제1호로서 중경(重慶)의 임시정부를 찾아 중국대륙 절반을 관통해야 하는 6천리 장정의 길에 나선다. 장준하 동지와 돌베개를 같이 베며 후손에게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말자고 수없이 다짐한다. 생사를 넘나드는 천신만고의 장정 끝에 조국광복 무장투쟁의 요람인 김구 주석의 품에 안긴 것은 정의와 진리와 선(善)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역사(歷史)의 신(神)에 대한 굳은 신념 때문이었다.
조국이 광복되자 광복군(光復軍)은 개선장군처럼 서울에 입성해도 좋았다. 풍찬노숙의 투쟁에 대한 보상이라기보다도 다시는 이민족(異民族)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는 부국강병의 새나라 건설에 매진해야 할 자랑스러운 원동력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스승님은 입신양명의 화려한 유혹보다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원초적인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해 중국에 남아 공부를 더 하겠다는 일생일대의 고독한 선택을 한다. 일제(日帝) 36년간 중국에서 조국 광복에 헌신한 선열들의 기록을 청사(靑史)에 남겨야 역사의 수레바퀴가 올곧게 전진할 수 있다는 신념이 그것이다. 아무도 할 수 없는 이 일은 평생을 이어 계속된다. 임시정부 청사 복원, 광복지사 유해 송환, 독립군 무장투쟁 연구, 임시정부 정신을 헌법 전문에 명기, 아세아문제연구소 설립, 수천수만의 의연한 기상의 젊은 호랑이 양육 등이 그것이다. 사회과학원의 설립과 사상계의 뜻을 새롭게 한《계간 사상》의 창간과 언론활동이 그러하며, 중국 유명대학 11곳에 한국학연구소를 설립하여 한국과 중국의 미래를 담임할 엘리트를 육성한 원대한 사관(史觀)은 우리가 스승님의 그림자도 밟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도 꿈꾸던 우리 정부가 수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압축성장 잔치와 권력욕과 부정부패에 사욕을 채우기 위해 하이에나처럼 이전투구할 뿐인 그들이 어디서 왔는가 하는 음수사원(飮水思源)의 도량이 없음도 탓하지 않았다. 평생을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고 오직 역사의 신을 믿고 스스로 실천하신 것이다. 이제 생각하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 스승님이 바로 하나의 진정한 정부(政府)였다.
관존민비(官尊民卑)의 악습을 타파하는 길은 민간에 훌륭한 사람이 많아지면 해결할 수 있다는 스승님의 굳은 신념과 일관된 실천은 얄팍한 권력의 부나비들이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스스로 쌓아 올린 고고하고 우뚝 솟은 성채(城砦)였다. 아니 그 성채는 아는 이만 아는 마음에 아로 새겨진 웅장하고 하늘을 찌를 듯한 의기로 뭉쳐진 의병(義兵)총사령부인지도 모른다. 6․10 민주항쟁의 그 날짜에, 그 의병총사령관께서 영원한 안식을 위해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묻히는 국장(國葬)을 치렀다.
총장님, 스승님, 피는 나누지 못했습니다만 아버님! 저희는 어떡하라고 그렇게 홀연히 떠나셨습니까. 하늘을 우러르며 땅을 치는 통곡의 눈물을 그치고 어른의 큰 뜻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단호하게 마음을 다잡는 일이 어른을 보내드리는 일인줄 알겠습니다만, 벌써 가슴이 미어지도록 보고 싶습니다. 대륙을 말 달리던 광복군의 살아 숨 쉬는 역사의 신으로 항상 우리 곁을 지켜주십시오. 우리의 등불이나 봉화가 아닌 활화산(活火山)으로 바른 길을 인도해 주시고 못난 짓을 할 때에는 추상같은 회초리로 꾸짖어 주십시오. 우리 총장님, 스승님, 그리고 아버님!
조상호 머리 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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