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 선생이 하회마을에서 병산서원까지 걸었다는 문헌의 기록은 없으나 풍악서당을 지금의 병산으로 옮긴 해가 1572년이니까 그때를 전후해서 적어도 한 번 쯤은 서애 선생이 지금 내가 걷는 길을 걸었을 것이라고 미루어 생각해 본다.
약 3km의 아스팔트 포장 도로가 끝나고 흙길이 시작됐다. 산허리를 잘라 차가 다닐 수 있게 넓힌 도로는 그 옛날에는 아마도 숲 속 좁은 오솔길이었을 것이다. 구불거리는 흙길 왼쪽 옆은 낭떠러지고 멀리 낙동강이 흐른다. 강은 곳곳에 푸른 생명을 키워내고 품고 흐르고 있었다. 3km 정도의 흙길을 걸으니 병산서원이 나왔다.
배롱나무 붉은 꽃잎이 만개해 은은한 향을 내뿜고 있었다. 촉촉하게 내리는 빗방울이 꽃잎에 매달려 영롱하게 빛난다. 배롱나무 꽃들의 인사를 받으며 만대루로 올라가는 길, 그 옛날 서애 류성룡 선생의 발자국 위에 내 걸음을 포갠다. 작고 아담한 건물 몇 채가 전부지만 옹골차고 당당한 기풍이 번진다. 아마도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이겨낸 한 사람의 기운이 서려 있나 보다. 비에 젖은 만대루 기와가 은은하게 빛나는 시간, 오래된 것들이 미래에 더 빛나는 까닭을 생각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