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치 : 서울 성북구 정릉 3동 753
『경국사 사적기』에 의하면 670년 전 고려 충숙왕 12년(1325)에 자정율사(慈淨律師)가 창건하여 청암사(靑巖寺)라 하였습니다. 절이
위치한 곳이 청봉(靑峰)아래 있었으므로 청암사라 붙인 것입니다. 자정율사는 충숙왕으로부터 국존(國尊)으로 존경받았던 고려 후기의 스님입니다.
창건 이후 1330년경에 무기(無奇)스님이 머물면서 천태종의 교풍을 크게 떨쳤으며, 충혜왕 1년(1331)에는 부정축재로 거금을 모은 권신
채홍철(蔡洪哲)이 선방(禪房)을 증축하여 선승(禪僧)들의 수도를 적극 후원하였습니다.
고려말인 1352년에는 금강산 법기도장(法紀道場)을 참배하고 남하한 인도승
지공(指空)이 이 절에 머물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불교를 누르고 유학을 장려하는 정책으로 이 절은 퇴락하였습니다. 인종 1년(1545)에 왕실의
도움으로 중건되고 이듬해에는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대대적인 중창이 있었습니다. 절이 중수되자 성대한 낙성식과 함께
국태민안(國泰民安)을 발원하는 호국대법회를 열었습니다.
『경국사 사적기』에는 문정왕후의 중창 이후 『부처님의 가호로 국가에
경사스러운 일이 항상 있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청암사를 경국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 현종 10년(1669)에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을 복원하면서 부근의 약사사를 봉국사로 중창ㆍ개칭하고, 흥천사와 함께 정릉의 원찰(願刹)로 삼을 때 이 청암사도 원찰로
지정되어 경국사로 바뀌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절은 숙종 때 연화 승성스님, 영조 때 난암 의눌스님이 중수(重修)하였으며, 철종
때는 예봉 평신스님이 법당을 다시 세우고 고종 1년(1864)에는 고종의 등극을 축하하는 재를 열기도 하였습니다. 고종 5년(1868)에는
칠성각과 산신각을 새로 짓고 호국대법회를 열었는데 이 때 왕실에서 범종을 보시(布施)하였습니다.
일제 때인 1921년부터는
단청(丹靑)과 탱화 조성에 일가를 이루었던 보경(寶慶:1890~1979)스님이 60년간 주지로 머물면서 절을 새롭게 변모시켜 나갔습니다.
보경스님은 교학과 선지(禪智)를 두루 익히고 계율에도 철저하여 승가의 귀감이 되었고,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에서 민족의 정기를 살릴 수 있는
길은 오로지 민족문화의 전승에 있다고 생각하여 전통 불상조각과 불화화법을 익혀 대가를 이루었습니다.
1950년대에는 이승만대통령이
보경스님의 인격과 태도에 감화되어 몇 차례나 찾아왔고, 1953년 닉슨 미국 부통령이 방한하였을 때도 이 절을 찾아왔습니다. 그 후
지관(智冠)스님이 1979년에 주지를 맡아 활발한 포교활동과 절의 내실을 다졌습니다. 따라서 이 절은 고승대덕의 수도처이자 호국안민을 위한 기도
도량으로 전승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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