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4월 21일,
파업에서 유혈폭동으로 … 사북사태 발발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급격한 근대화와 도시화의 물결이 휩쓸고 있었지만, 탄광만은 예외였다.
‘막장 인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찾던 곳이 바로 탄광이었다.
막장은 갱도의 막다른 곳을 의미하는 말이다. 힘든 작업으로 인해 광부들은 도시 노동자들에 비해 약간
높은 임금을 받았지만, 열악한 작업환경에 시달려야 했으며, 생필품의 부족으로 인해 물가도 다른 지역보다
30% 정도 높은 편이었다. 툭하면 터지는 것이 갱도 매몰 사고였고, 운이 좋아야 기적적으로 구출되는
일들이 빈발했다. 작업 중 미세한 탄가루를 계속 흡입하다가 진폐증에 걸려 사망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사북 탄광은 당시 채탄량 연간 160만t에 종업원 수가 3000명이 넘는 국내 최대의 민영 광산이었다. 이는
전국 채탄량의 9%에 달했다. 당시 정부는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로 인해 석탄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석탄산업 육성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상황은 열악했다. 방음이 안 되는 스티로폼 벽에
천장이 허물어진 사택에서 겨울에는 수돗물이, 휴일에는 전기가 끊긴 채 생활했다. 사장 친인척으로
구성된 ‘암행독찰대’가 사생활을 감시했다. 회사는 채탄량을 축소 계산해 임금을 낮췄다. 광부들
사이에서 어용노조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다.
당시 탄광 노동자들은 1979년 10·26 사건 이후 민주화 흐름에 맞추어 노조를 중심으로 임금 인상을
추진했다. 그런데 사북탄광촌 어용노조 지부장이 회사측과 짜고 그해 노조원의 임금인상률을 노조측이
요구하던 42.75% 가 아닌 20% 로 몰래 서명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기 때문에 분노한 노조원들이
지부장에게 몰려가 임금인상 경위 등을 추궁하며 4월 17일부터 농성에 돌입했다.
그러던 중, 4월 21일 오후 5시쯤 광부를 가장해 농성장에 잠입했다가 신분이 탄로 나 지프차를 타고
도망치던 경찰이 수십 명의 노동자가 앞에 있는데도 그대로 질주, 4명의 광부들을 다치게 한 사건이
일어났다. 사망자는 없었지만 동료가 죽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탄광촌에 퍼지자 흥분한 노동자들이
몰려들어 경찰과 충돌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농성이 유혈폭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에 노동자들은 임금 30% 인상과 상여금 400% 지급, 어용노조 지부장 사퇴 등을 요구하면서 거의 전원이
들고 일어나 노조 사무실과 광업소 사무실, 정선경찰서 사북지서 등을 점거했다.
정선경찰서와 이웃 장성·영월 경찰서 병력이 총동원되고 서울에서 500여 명의 기동경찰이 급파되었다.
대규모 경찰 병력이 투입됐지만 저항하는 6,000명의 시위대를 당해내진 못했다. 경찰관 1명이 숨지고
경찰과 광부 160여 명이 부상하는 등 양측 모두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광부들은 고한과 증산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막고 경찰의 진입을 막았다. 기자들이 취재를 했으나
합수부에서는 기사조차 내보내지 않았다. 23일 급기야 공수부대가 사북에 투입된다는 정보가 항쟁
지도부에 들어왔다. 절대절명의 시간. 당시 강원도지사와 도경국장이 지도부와 협상을 시작했다.
그 시간 공수부대는 원주에 있었으며 투입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항쟁 지도부는 동원탄좌에
1000여점의 소총과 사북 전체를 날리고도 남을 다이너마이트 60여톤이 있다며 공수부대가 투입되면
모두가 공멸할 것이라고 협상단에게 알렸다.
4월 23일 낮부터 시작된 광부 측과 정부 측 대표의 밤샘 협상은 노조 집행부 사퇴, 상여금인상 등
11개항의 협상안을 타결짖고 다음날 새벽1시가 되어서야 끝을 맺었다. 지도부는 억류해 놓았던
노조지부장 이재기의 부인인 김순이씨를 경찰에 인도하고 사태 수습에 나섰다. 24일 오전이었다. 상황은
그렇게 끝나는 듯싶었다. 광부들은 다시 일터로 돌아갔으며 사북거리는 평상시의 모습으로 수습되었다.
1980년 4월 사북항쟁 당시 사북읍을 점거한 광산노동자들과 가족들의 저항은 나흘 동안 계속됐다.
1980년 4월 22일 강원 정선군 사북지역 탄광노동자들이 철길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당시 김순이 노조위원장 부인에게 린치를 가하는 장면
그러나 경찰은 일체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합의를 어기고 항쟁 지도부들을 하나씩 파악해 나갔다.
정선경찰서에 수사본부를 차린 경찰은 비밀리에 항쟁 가담자들을 확보해나갔다. 이와 함께 서슬 퍼른
전두환 신군부는 4월 24일에야 조간신문을 통해 사북사태를 언론을 통해 국민들에게 알리기 시작한다,
‘광부 700여 명 유혈난동’, ‘무법 휩쓴 공포의 탄광촌’ 등 자극적인 제목을 통해 사회의 불안감을 조성했다.
합동수사본부는 2주 후인 5월 6일부터 잡아들이기 시작해 140여 명의 광부와 부녀자들을 연행했고, 5월
17일에 전국으로 확대된 계엄령과 함께 무자비한 고문 수사 끝에 28명을 군법회의에 회부시켰다. 출감한지
3년 이내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한 이가 3명이나 된다고 하니 당시의 고문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뒤 2008년 4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이 사건과 관련해 “계엄 당국이 과도한
공권력으로 노사정 합의를 일방적으로 무시함으로써 지역공동체를 파괴하고 공권력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다. 국가는 당시 연행·구금된 관련자와 가족들에게 인권침해와 가혹행위에 대해 사과하라”고 권고했다.
나아가 2015년 2월 11일 서울고법 형사6부(재판장 김상환)는 사북항쟁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각각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과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이원갑(75)씨와 신경(73)씨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씨 등은 광산노조 본부에 요구사항을 전달하거나 탄원서 제출 등에 관해 논의했을 뿐
계엄포고령이 금지한 불법 집회를 했다고 볼 수 없다. 특히 경찰과 광부들 사이에서 중재하는 역할을
담당해, 소요를 선동한 점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 경찰과 군검찰이 20여일간 불법 구금하고
물고문과 구타로 받아낸 허위 자백은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