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공학도에서 재즈 피아니스트의 길 택한 남경윤
따돌림 받던 美 조기유학 시절 우연히 접한 키보드에 푹 빠져 대학 때 전공도 재즈로 바꿔
지난달 한국인 피아니스트가 미국인 드러머·베이시스트와 함께 한국에서 재즈 음반을 발표했다. 제목은 '전자공학도에서 재즈 피아니스트의 길 택한 남경윤트리오'. 16년 전 미국 뉴욕 거리를 방황하던 중학생이 이 트리오의 리더이자 피아니스트 남경윤(31·대구 계명대 뮤직프로덕션과 교수)이다. 그가 말했다. "어릴 때는 왕따, 커서는 그토록 싫었던 아이비리그 전자공학도, 지금은 행복한 재즈 피아니스트"라고.남경윤은 1993년 말 엄마와 함께 미국 뉴욕으로 조기 유학을 떠났다. 부족한 영어 실력과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1년 동안 단 한 명의 친구도 사귀지 못했다. 학교에서 그는 '벙어리'로 통했다. 왕따였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 귀국하겠다"며 눈물을 쏟았지만 부모님은 완강했다. 그때 벼락같이 건반이 다가왔다.
- ▲ 미국으로 조기 유학을 떠나 성공한 재즈 피아니스트로 돌아온 남경윤. 그는 최근 네번째 앨범을 발표했다. /사진작가 노승환 제공
끼가 터져 나왔다. 밴드를 이끌며 곳곳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뮤지컬 배우로 노래했다. 자작곡을 학교 오케스트라와 협연해 '올해의 예술가상'도 받았다. 어느새 그는 학교의 명물이 됐다. 한국의 손꼽히는 재즈 피아니스트는 그렇게 만들어져 갔다.
"처음 미국에 와서는 언어 장애가 극심했죠. 휴식처가 간절했는데 건반을 만나게 된 겁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바이엘 하권을 치다가 공 차는 게 더 재미있어서 그만뒀던 피아노였는데…. 운명인 거죠."
운명과 달리 대학은 코넬대 전자공학과에 갔다. 공부도 잘했지만 아버지 바람이 컸다. 아버지 남종현씨는 한국에서 잘 나가는 전자회사 CEO다.
그러나 기판과 회로 위로는 늘 건반과 음표가 어른거렸다. 1학년이던 1999년 그는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들로 생각하지 않으셔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음악을 해야 합니다."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그는 음악학과로 편입했다. 장르는 재즈를 택했다. "재즈는 늘 새로운 게 터져 나오는, 즉흥성이라는 마력이 있는 곳"이라고 했다.
2001년 코넬대 강당에서 열린 콘서트에 어머니를 초청했다. 기립박수를 보내는 관중을 보며 어머니가 말했다. "발전하는 모습이 보인다. 네 갈 길을 가라." 어머니는 귀국해 아버지를 설득했다.
내친김에 미시간대 재즈과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남경윤은 흑인 뮤지션들과 교류하며 재즈의 흥취에 빠져들었다. "여러 클럽을 돌며 한 해에 300회 공연을 한 적도 있었어요. 미시간 재즈계에서 보기 드문 동양인이니 제 존재는 늘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죠."
지금은 행복하다. 인정받는 재즈 뮤지션이 됐기에 그렇고, 부모님이 자랑스러워 하는 아들이 됐기에 그러하다. 그는 "처음에는 악몽 같았던 유학이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진로를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한국 재즈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어요. 빼어난 20대 연주자들이 즐비하죠. 한국에 오고 싶어하는 유명 재즈 뮤지션들도 많고요. 이 땅에서 재즈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