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몽아! 또시가!
넘 감동적인 글이라 퍼왔다! 좀 길지만 일거 보그라!
안동 출신 조정래(태백산맥 작가가 아님)씨는 자신을 어주자(어쭈구리한 者)라고 부른다. 이 분 글을 읽고 김동길 교수님께서 극찬하셨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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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성북동 어주자(魚舟子) 집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보나마나 이 꼭두새벽에 오는 전화는 어주자씨 어메 아니면 아부지 입니다.
“여보세요?”
“낫다(내다)” 전화통을 울리는 목소리는 역시 예상 했던 대로 어주자 어메다.
“어메 왜?”
“니 언제 시골 오노?”
매달 두 번은 가던 고향을 지난달은 바빠서 4월 초에 한번 내려가고 못 갔다.
“왜 무슨 일 있닛껴?”
“니 한번 오마...너 외숙모 살던 방을 정리도 하고 먼 옷(수의)도 갖고 올랏꼬”
“외숙모님 거처 한 던 방을 아직도 정리 안 했닛껴?”
“그래......”
“며느리하고 애들은....”
“가들(그아이들) 어디 너거 외숙모한데 코뻬기라도 보이나?”
“.............”
어주자 외숙모님은 내 글에 자주 등장하는 신양동 원뜰에서 태어나서 십리 떨어진 새 터 마을 어주자 외삼촌에게 시집오시어 고생고생 하신 분이다.
외삼촌은 초성이 낭낭하여 듣는 이가 좋아하니 이집 저집 나이 드신 어른들이 부르면 “장화 홍련 뎐” 소설책을 들고 달려가 여러 노인들 앞에서
그 소설책을 구성지게 읽어주기로 유명하셨던 분인데 6.25 이후 궁핍한 생활을 못 넘기고 배도 많이 굶다가 결국 결혼 3년 만에 아들 하나와 젊은 외숙모를 남겨놓고 병으로 먼저 돌아가시고 남은 외숙모가 이집 저집 호미자루 품을 팔아서 아들 하나만 믿고 청산과부로 오만 고생하며 살아 오셨는데 몇년전부터 거동이 불편하여 하루 종일 천장만 처다보고 누워 계시는 분으로 올해 연세가 83세 이시다.
며느리 성격이 너무 별나서 같이 못 살고 집에서 보따리 하나만 들고 나온 외숙모님을 우리 어메가 울웅골 마실에 방을 하나 얻어서 살게 하시였는데...명절이 돌아와도 며느리에게 따뜻한 국 한 그릇 못 얻어먹은 지가 20년이 넘었다.
그래도 그 외숙모님은 자신이 움직일 수 있던 제 작년 까지 이웃 집 밭일을 해드리고 받은 품삵을 모아서 며느리에게 갖다 주려고 며느리 찾아 갔다가 집에 아무도 없고 수도 옆에 빨래꺼리가 있으면 일일이 며느리 속옷을 이녁의 손으로 빨아서 마당에 걸어주고 돌아오시는 참으로 착한 분이시다.
그러던 분이 세월을 이기지 못하시고 3년 전부터 거동이 불편해져 스스로 대소변을 잘 못 하실 때 우리 어메가 절뚝거리시며 우리 마을에서 울웅골 까지 오르내리시다가 결국 어메도 관절로 힘이 들어 할 수 없이, 000 집이라하는 모 시설로 모시고 가서 두고 온 분이다.
하기 좋은 말로 "시설에 모셨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엄연히 자기 핏줄이 살아 있고 먹을것이 부족한 것도 아닌 이 자가용 시대에 그런 시설로 모셨으니 머-언 옛날 찬바람 부는 깊은 산속에 있는 고려장에 버려진 노인과 크게 다를봐 없는 신세 아니신가?
그날 시설에 맡기고 돌아 서 던 날 늙으신 어주자 어메가 엉엉 울었던 날이기도 하다.
그때 곧 돌아가실 것 같았던 외숙모님은 대소변이 스스로 안 되지만 다행이 아직 도 살아 계신다.
지금 경북 봉양에서 온 키 작은 여인(54) 그리고 말 못하시는 60세 아주머니와 한 방을 쓰시는데 외숙모의 대소변은 일일이 말 못하시는 그분이 도와주시고 이런저런 잔심부름은 키 작은 여인이 해준다.
키 작은 여인(난쟁이)은 참 귀여운 얼굴이고 아직 어린아이 같고 심성이 착하디 착하다.
알고 보니 어주자와 띠 동갑이다.
그분은 외숙모처럼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은 분이 아니고 오빠, 언니가 자주 면회를 온단다.
어쩌다 이 어주자가 시설에 있는 외숙모님을 방문하면 그 키작은 여인이 자기가 외숙모 약을 타서 제시간에 먹여 준다는 이야기를 자랑 하였다.
그저 그 키 작은 여인이 외숙모에겐 며느리, 손녀딸보다 (시설에 맡겼다 하여도 단 한번도 찾아 온 적 없다) 그리고 가물에 콩 나듯이 찾아가는 이 허우대 멀건 어주자 보다 천배 만배 외숙모에겐 더 좋은 피붙이라고 생각 들어 그 이후에 가면 한번씩 어주자가 다정스레 그 키작은 여인을 안아 드리는데 안아주면 그래도 여인이라서 그런지 나이 54살인데도 부끄럼을 타고 얼굴이 아이처럼 밝아지는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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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어메 전화를 받고 성북동을 출발하여
눈물나도록 신록이 우거지는 이화령 고개를 넘고 y(예천)읍을 지나
고향 마을에 들어서니 마을은 늘 여느 때처럼 텅 비어 있었다.
다들 고추 묘를 내는 철이라서 밭에 나가고 없는 것이다.
누가 오월은 계절의 여왕이라 했지만 이웃 젊은이들이 농가 빚으로 다들 야반도주하고 그저 늙은 노인들만 사는 시골 마을은 그저 오월이 잔혹한 달이다.
봄볕이 좀 따가운가?
옛말에 "따가운 봄볕 솥아지는 밭일은 며느리 시키고,
선선한 가을볕에는 딸을 밭으로 내 보낸다"는 호된 시집살이의 감정 깔린 우스개 말이 있는데 이젠 봄볕에 내보낼 미운 며느리도 없고 얼굴 탈까 걱정하던 딸도 없는 세상이요, 그저 육신이 늙어 손자 데리고 놀아야 할 나이 많고, 등 굽은 어르신들이 마을에 일손이 없으니 오월이면 하루 종일 농사 일로 모두 땅에 엎어져 있어야하니 요즈음 세월 시골에 사시는 노인들에게 오월은 참으로 고된 달이다.
밭에 나가서 어메를 태우고 마을을 나서서 P(풍산)읍을 지나고 경운기 겨우 지나갈 좁은 다리를 지나서 울웅골 마을로 들어서자 마을 초입에 있는 느티나무 그늘 아래 늙으신 할매들이 꽤 여러분 모여서 봄나물을 다듬고 계셨다.
지난번 아픈 외숙모를 모 시설에 맡기고나서, 미처 외숙모 살던 방을 아직 정리도 못했던 것이다.
마을길이 요리조리 굽고 좁은 길이라서 차가 결국 외숙모가 셋방 얻어 살던 집 앞까지 못가고 골목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서 외숙모 살던 집을 찾아가니 주인 할매가 집에 없었다.
본채에 할매 한분이 40살이 넘도록 아직 장가도 못간 아들과 살고 있고 그 아랫채에 우리 외숙모가 수십년 째 세 살이를 하셨던 집이다.
마당에 토종닭이 서너마리가 멀거니 우리를 보고 마당 앞에는 뿌리 체 뽑아놓은 양파가 아무렇게나 널려져 있고 대문 옆 나무 판데기로 삐닥하니 만들어진 개집에는 이제 갓 젖 떨어진 듯한 누렁 똥개 새끼 한마리가 어주자를 처다 보고는 꽁지를 살래살래 흔들고 있다.
원래 개는 낮선 사람이 보이면 컹컹 짖어야 하는데 우째 아이들도 보이질 않는 시골이다 보니 똥개 새끼마져 외로운가 꽁지만 흔들고 짖지도 아니한다.
그리고 마당 앞 쪽에는 거름 무더기가 있는데 그 뒤쪽으로 개 멀구 싹이 제법 많이 올라오고 수도 물 돌아 나가는 담장 밑에는 토란도 벌써 중키를 넘기고 있었다.
“할매 계시니껴?” 몇 번 불러도 안에서 기척도 없으니 어메가
“야야 옆집에 가서 물어보자”하신다.
그런대 옆집에도 사람 기척이 없다. 앞집에도 사람이 없고 뒷집에도 인기척이 없다.
“어메 여기 기다려 아까 마을 입구 나무그늘 아래 노인들 한데 가서 물어보께”
하고는 뛰어서 조금 전 지나오면서 보았던 나무그늘 아래 할매들에게 달려 갔다.
봄나물 다듬던 할매들이 뛰어오는 나를 처다 보신다.
“어르신들 나물 따듬닛껴?”
“야..뉘집에 오싯니껴?”
“조짜(저기) 앞에 살구나무 집 할매는 어디 가싯니껴?”
“누구 말하닛껴?”
“왜 있잖닛껴.. 혼자 아랫방에 신양 할매 살던 집 있잖니껴”
“아 그 할매 조끔 전에 아들 오토바이 타고 읍내 약 타러 나갔니더”
“금방 오니더 여기 않으소...어디서 오싯니껴?
머리카락이 백로 깃털보다 더 하얀 할매가 나를 처다 보고 묻는다.
할매들이 다듬는 봄 파에서 나오는 매운 냄새가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거랑 뚝을 따라 올라온 봄바람을 타고 코를 벌름거리며 회두리치게하고 퍼져나갔다.
“바래미요”
“옷 지절이나 인물 봐서는 시골 사는 양반 아잉꺼 같으더만, 바래미서 왔니껴”
“아이씨더 살기는 서울 사니더.. 바래미 동네는 부모님만 사니더”
어주자는 읍네 나가신 주인 할매도 기다릴 겸 할매들 옆에 걸터 앉았다.
경운기 한대가 물 뿌린 담배 싹을 한 차 싣고 탈탈거리면서 지나가는데 경운기 몰고 가시는 농부의 얼굴은 봄볕에 타서 그저 검붉고 목에 힘줄마져 튀어 올라 있었다.
“할배들은 다 어디가고 할매들만 이래 모여 있니껴?”
“여기 다 영감 없는 사람들이씨더”
“왜요..할배 젊은 여자하고 도망 갔니껴?”
"벌써 도망갔뿌랫지.. 하늘 나라에 젊은 색시 많은지 벌써 죽어뿟지“
“아이고 그러잇껴? 할배들 참 나쁘더어, 이래 고운 할매들 놔비두고 우째 눈을 깜니껴?”
“글케 말이씨더, 젊어서 힘좋타꼬 그리 나데든 양반도 고마 어느날 저 산으로 갔뿌데” 한 할매가 호호 하시면서 어주자 우스개를 받아 넘긴다.
“점빵 집 어딧껴 내 음료수라도 사옴시더, 할매들 뭐 마실라닛껴?”
“여긴 점빵 집 없니더”
"점빵도 없는 이런 마을 에 우에 사닛껴? 고마 이런 시골에 외롭게 살지말고 도회지 아들 딸 한데 가시지요"
뻔한 헛소리를 걸어 보았다..
"아이고 요즘 도시 며느리들 늙어빠진 시골할마이 가면 좋아 하니껴..."
"말이야 구담댁이 말이 맞지"
옆에 할매가 거들었다.
"내속으로 놓은 자식이야 어마이 혼자 사는것 딱해서 오라칼지 모르지만...
안만캐도 들온 며느리는 늙은 시어마이 가면 눈치 안줄싯껴?
이번에는 이가 하나도 없을것 같은 할매가 말씀 하셨다.
"그저 움직일때 까정 여기서 살다가 까짓거 들누만 시설인가 뭔가 카는데
가지 우린 도시사는 자슥들 한데는 절대 안갈끼시더어"
갑자기 할매들이 한마디 씩 다 하시고 시끄러워 졌다.
괜히 가슴에 못을 건드린 느낌이다.
그때다, 한 할머니가 읍내 쪽을 응시하면서
“주인 할마이 저게 오니더!
조금 있으니 과연 얼굴이 둥굴둥굴한 아들(전에 인사를 나눈 적이 있다)이 오토바이 뒤에 할매를 태우고 울웅골 다리를 건너오고 있었다.
주인 할머니는 어메를 보시자 무척 반기신다.
“하이고 왔닛껴?..내사 할매가 우째 벌써 돌아 가셨는지.. 궁금했니더..
할매 아직 살았닛껴? 돌아 가싯니꼐?
수십 년 한 집안에 살던 정이 있어 만나자 말자 어주자 외숙모님 소식을 묻는다.
“언니 아직 살아 있니더...나도 언니 살던 살림을 정리하로 올라캐도 다리가 아파 못 왔니더..방 늣게 치워서 죄송하더어”
“할매는 어디 있니껴?”
“좋은 시설에 가 있니더...좋아요..대소변도 다 받아주고 목욕도 일주일에 한번 하고”
“아이고 글케 요즈음은 그래도 그런 시설이 있다카이 나도 더 늙으면 그런대나 갔으면 하니더”
주인 할매가 마당에 양파 줄기를 낫으로 자르고 있는 아들 얼굴을 한번 처다 보더니 말씀하신다.
아마도 장가도 못가는 아들이 그저 원망스럽고 돌봐줄 며느리도 없으니 노후가 걱정 되시는 모양이다.
외숙모 방은 불편한 몸으로 혼자 살았던 노인네 방 같지 않게 깔끔했다.
이불 보따리며 옷 보따리며 깨끗하게 세탁하시어 포개 놓았는데 어주자 어메는 그저 속옷 몇 불만 시설에 계시는 외숙모에게 갖다드리려고 챙기시고 나머지는 다 한곳에 보관하여 두었다가 외숙모 돌아가시면 태우자고 하셨다.
어메가 이리저리 옷 보따리를 풀어 제치면서 무엇을 열심이 찾으셨다.
“어메 뭐 찾는데?”
‘야야 먼 옷이 어디 있노?
(먼옷=수의: 먼 하늘나라로 갈 때 입는다하여 이 고장에서는 수의를 먼 옷이라고 부른다)
“먼 옷은 꼭 챙겨 가야 한데이....젊어서 고생고생하면서 좋은 옷 한번 못 입어본 언니인데
마지막 가는 날은 옷이라도 좋은 것 입고 가랏꼬 내가 지난 해 언니하고 먼 옷 하러 가서
내가 쎄웠다(주장하다)“
한참을 뒤지니 틀 뒤쪽에 있는 박스에서 삼베로 만든 먼 옷이 나왔다.
"먼 옷 찾았다!"
어메가 외숙모 먼 옷을 챙기면서 또 흘쩍거리신다.
우리 친정 오래비 일찍 죽고
이날 이적까지 며느리 한데 따뜻한 밥상 한번 못 받아보고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는데 어느 누구 마지막 가는 우리 언니 먼 옷 해줄 사람 없니더..이 옷도 몇해 째 당파 밭에 엎드려 일해주고 받은 품삵으로 마련한 옷아이껴.
"맞니더어 맞니더어" 주인 할매가 어메 한(限)소리에 맞장구를 치신다.
그러면서 우리 언니는 불쌍타 불쌍타 하시니
주인 할매도 그동안 외숙모님과 한 지붕에 사신 이야기를 하시면서 같이 눈시울을 적신다.
언젠가 내가 세운상가에서 중고로 사드렸던 텔레비젼은 주인 할매에게 드리고 전기밥솥이니 냉장고니 그런 것도 다 주인 할매에게 사용하시라 하였다.
조금 남은 참기름은 어메가 챙기고 정지칸 한쪽에 실거미줄을 솔박 덮어쓰고 있는 연탄은 주인 아들보고 주인 안 부억으로 옮기라 하였다.
그리고 하이타이, 뜯지 않은 치약도 모두 주인 할매에게 드렸다.
다만 외숙모가 입던 옷은 모두 한 박스에 담아서 집 뒷 칸에 두고는 어메가 말씀 하시기를
“고마 우리 언니 죽고 나면 내가 하루 내려와서 저 옷은 다 불에 처될태니 그때 까증만 맡겨 두시더”
“에이고 그라소 맹엥 산 사람 옷은 아직 태우면 안되낀게 할매 죽거든 와서 태우소, 그라소”
좁은 방 빼곡히 쌓여있던 살림 살이를 다 들어내고 마지막으로 빗자루를 들고 방을 쓰는데 어디서 해묵은 종이 카네이션이 뚝하고 떨어졌다.
“어메 왠 카네이션이로”
“아 그 꽃이 아즉도 있나? 이리 조봐라!”
붉은 종이 카네이션은 이미 여러 해 지난 듯 빛이 바래었다.
“아이구 야야 이거 니가 4년 전에 외숙모한데 사준 그 카네이션잇다!”
“그때 사준거 아즉 있닛껴?”
“그래 제 작년 어버이날 장터에서 너거 외숙모 만났는데 언니가 이 꽃을 달고 다니드만...
"그럼 그 이후에 아무도 외숙모 한데 캬네이션 사준 사람 없닛껴?
"그넘의 씨종들(외가집을 말한다) 언제 저거 시어마이 한데 꽃 달아줄
씨종들이 더나!
평소 점잖한 어주자 어메도 그 말을 토하실 때는 울화가 터지는지 "씨종들"이라 하셨다.
"어에노(우짜노) 올해 어버이날 달게, 먼 옷 갖다 줄 때 이 카네이션도 같이 갖다 줄까?”
“..............내 버리뿌소!”
"왜 갖고 가자!"
어주자도 은근히 화가 치미니 내손으로 사드린 해 묵은 캬네에션을 버리자 하였다.
어메 물음에 어주자는 답을 아니 하고 그저 먼옷 보따리를 차에다 실었다.
오! 해묵은 캬네이션 하나.....
이제 이방에 살던 외숙모가 돌아가실 것 같아 먼 옷 챙기는데
방바닥에 뚝 떨어진 종이로 만든 빛바랜 캬네이션 하나.....
그까짓 4년전 이 어주자가 사드린 카네이션이 이제 천수를 다하여 돌아 가실것 같은 이판에 무슨 소용 있는가?
돌이켜 생각하면
해마다 외숙모 살던 이 마당에도 오월이 오고
그리고 어버이 날이오고
이집 저집 이웃 집 할매들 집에는 도시로 나갔던 아들 딸들이
선물 보따리와 함께 붉은 캬네이션 사들고 골목이 비좁게 차들이 들어 왔을 터인데....
유독 어주자 외숙모 만이 홀로 이방에 사시면서 어버이 날이 밝아와도
어느 개미 새끼 한마리 찾아오지 아니하고...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피붙이..
그래도 내새끼 들이라고 그 누구에게도
"못내 섭섭다 섭섭다" 말 한마디 내 비치지 아니하시고
홀로 방안에 점점 가벼워 지는 육신으로 쭈그리고 않아 계시다가....
결국....아무도 방문 두두리는 이 없으니 수년전 그저 시누이 아들이 정없이 무심코 사준 그 해묵은 캬네이션을 다시 꺼내어.....
먼지 털어내시고 손 보아서
50년 넘게 수절하신 해맑은 당신 가슴에 당신 손으로 스스로 캬네이션을 다시꼽고는 방안에 홀로 있기 이웃들에게 민망하여 차들로 비좁은 골목길을 빠져 나가시어....시골 장터에 별 할일없이 돌아 다녔을 그때를 돌이켜 생각하니
그저 이 무식한 놈 가슴도 저려 옵니다.
그저 배웠다는 이 어주자란 놈도 무지허게 무정한 놈이요.........
한마디로 직일 넘이더이다!
저렇게 홀로 오래도록 사시게하시고 덜컥 젊은 나이에 세상 버리신 외삼촌도
...야속하시다 참으로 야속한 분이시다 생각이 들던 날이 였나이다.
외숙모님!
말못하는 아지매와 키작은 처녀와,시설에서 함께 사시는 것이....
울웅골 외방에서 혼자 우두커니 어버이 날 맞으시면서 해묵은 캬네이션 꺼내 다실 때보다 훨씬 행복하시리라 믿지만.....
그래도 산목숨 죽기전에 꿈에도 보고싶은 내 새끼들 앞세우고 행여나 며느리 손에 붉은 생화 갸네이션 들고 시설에 단 한번이라도 찾아오기를.....
아니면 관절로 다리 불편한 우리 어메 아들들 앞세우고 시루떡 해서들고
찾아올까.....
그저 눈을 시설 대문 입구 쪽으로고정 시키시고
멍하니 기다리시지는 아니하시겠지요?
아니시면 원장님이(50대 젊은 여성) 어버이 날 아침에 달아주는 생생한 생화 갸네에션보다 비록 시누이 아들이지만 이넘이 먼-길 달려가서 캬네이션 하나
가슴에 달아 드리는것이 마지막 소원이신지요?
가실날 까지 천상 여자로서 입다물고 있지 마시고...
83세 긴긴세월 청상과부로 홀로 사시면서 가슴속에 멍으로 박혀있는 소원이 계신다면
그름아 구름아 하는넘이 어버이 날이 다가오니
외숙모 먼 옷 챙기다가 떨어진 캬네이션이 생각나서 두 시간 컴프터에
붙어 않아서 이글을 적어보다.
외숙모님은 지난번 방문 때 혹 세상 버리시면 외삼촌 옆에 묻지말고
화장해서 깨끗한 곳에 뿌려 달라고 하셨다.
우리 형님하고 상의를 해야겠지만 아무래도 외숙모님 뼈는 내가 추수려야 할것 같다.
첫댓글 산다는거 ...... 인간이란 ...... 아직은 젊다고할 우리에게도 머지않아 도래할....... 많은걸 생각케하는 글이로다/
서바, 뒤늦게 일거밧다/어린시절 어머님께 옥단츈뎐을 일거주던 기억일랑 한마을에 사시던 외할매 생각이나 가슴이 뭉클해 졌다/ 무심한 이놈도 나이 탓인지 요즘은 작은일에도 자꾸만 가슴이 저리는구나/이 조은글 내게 보여줄라고 장시간 고생한 네 정성이 갸륵코나/어주자의 외숙모님의 건강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