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유일까, 반교일까
조혜경
“제발, 수업 시간에 강아지는 데리고 오지 마세요.”
선생님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말투에도 짜증이 풍겼다. 간절한 애원에도 아이들은 아랑곳없다.
“야, 귀엽다. 이름이 뭐야?”
아이들은 서로 자랑을 하느라 바빴다. 궁금증을 해결하지 않고는 대화를 끝낼 수 없다는 듯 집요했다. 선생님은 수업을 시작할 수가 없다. 팬데믹으로 시작된 쌍방 화상 수업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선생님에게도 상당히 곤혹스러운 시간이었다. 화면 속 친구들은 손톱만 한 얼굴로 부산히 움직였다.
수업 시작 전, 절친을 찾아 미소라도 한번 주고받는 인사는 포기한 지 오래다. 모니터에 가득 찬 40개의 얼굴은 너무 작아서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선생님은 초조해졌다. 빨리 수업을 진행해야 대혼돈의 카오스가 끝날 것이다. 요즘 인기 있는 캐릭터나, 놀라울 만한 동영상을 보여주어야 했다. 주의가 환기되는 찰나, 수업으로 관심이 돌려질 수 있도록 작전을 잘 짜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중이 식기 전, 미리 열어둔 공유 화면을 클릭하여야 했다. 선생님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마다 2학년 학생들의 시선을 끌어모으기가 정말 쉽지 않았다. 고학년은 아예 엎드려 자는 학생이 많아 처음에는 깨우다가 이제는 포기했다는 동기 교사의 말이 실감이 났다.
순간, 지각생 시진이가 입장했다. 그는 주의해야 할 인물이다. 등교 때마다 꼭 극적인 등장을 한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은 머리를 붉게 염색한 고양이를 안고 나타났다. 모두 시진이네 고양이를 일제히 바라보았다. 호기심 많은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갔다.
금세 산만해졌다. 수업으로 긴장하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선생님뿐이었다. 마우스를 향한 선생님의 손가락에 힘이 옮겨간다. 새로운 난관이다. 아이들의 시선은 벌써 공유 화면을 떠나 채팅방을 오가고 있다. 서로 묻고 답하느라 손가락도, 굴리는 잔머리도 바쁘다.
‘아뿔사’ 호스트를 제외한 참여자들의 채팅 금지 설정을 깜박 잊었다. 화면 교실은 짧은 침묵이 흘렀다. 아이들은 고양이 때문에 선생님의 눈치를 살피는 것도 잊었다. 공유로 인하여 본 화면에서 사라진 선생님으로 아이들에게는 ‘선생님 없는 교실’이 되었던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교사들에게도 당황스러움으로 다가왔다. ‘독감처럼. 잠시 유행하는 질병이겠지.’ 여겼다. 그러나, 첫 환자가 나온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아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한두 달 만에 놀람의 시간이 지나고. 공포의 시대가 닥쳤다. 걱정 반 두려움 반으로 시작된 대유행 병은 많은 사람들의 생사를 넘나들더니, 해를 넘겼다. 끝을 알 수 없는 암울한 나날이 계속되자, 코로나 블루라는 우울증까지 동반되었다. 1년 만에 4, 5차로 이어지는 팬데믹은 감염 속도와 치사율에 대한 두려움보다 후유증으로 인한 불확실성으로 전 세계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다.
감염자의 통계도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밀도가 높은 교실 대면수업을 회피했다. 온종일 도맡아야 하는 가정 육아에 학부모들도 지쳐갔다. 아이들의 확진율은 아주 낮다는 확신으로 아이들을 밖으로 내몰기 시작했다. 갖은 핑계와 불만을 볼모로 잡았다. 아이들을 어린이집과 유치원으로, 학교로, 학원으로 보내야 한다고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가정 방문 과외는 늘었다가 오히려 줄어드는 양상을 보였다. 방문 과외교사들로 인한 아이들의 감염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도 아이들 환자는 증가하기 시작했다. 교육 당국은 아슬아슬한 몇 번의 벼랑을 건넌 후, 원격수업과 쌍방 화상 수업을 본격적으로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첫 단계에는 온라인 활용에 대한 교사들의 기대도 컸고, 열의도 대단하였다. 아이들의 원격수업 환경을 구실로 학부모와 학생들이 함께 수업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알기 전이었다. 학부모들의 개입은 IT에 미숙한 아이들을 도와주기 위함이었다. 수업을 시간 내내 지켜보는 학부모가 생기면서 감시받는 교사들의 긴장도가 높아졌다. 서서히 학생들의 흥미가 줄고 교사의 피로도가 증가했다. 마침내 원격수업이 틀이 잡혀가는 것도 잠시, 학생들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진행하는 수업 활동에 싫증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부 시간에 공부를 안 하는 각가지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반려동물을 하나씩 안고 수업에 참여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얼마 전부터 반려동물을 기른다는 것이 부와 여유의 상징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특히 고가의 우수 종은 우쭐한 자랑거리였다. 어른들은 동물들의 엄마, 아빠가 되었고, 아이들에게는 동생이 생겼다. 감옥 같은 팬데믹 세상에서, 심적 의지가 가능한 반려동물들은 아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산책로에서 너도나도 개 한두 마리씩 걸리거나, 유모차에 태우고 까꿍질하는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때론 살아있는 장난감으로 여기는 세태에 화가 나기도 했다.
병에 걸릴 것을 알면서도 썩은 물은 먹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한 달 1만 원으로 맑은 물을 보내자고 부르짖었다. 아이들이 절실히 원해서 개를 기르는 한 친구는 밤에 구토하는 개를 데리고 응급실 다녀왔더니, 별다른 처치도 없이 30만 원을 냈다고 푸념을 했다. 털 깎고 미용염색을 좀 했더니 55만 원이었다고 또 거품을 물었다. 그녀의 남편은 한 달에 한 번 하는 헤어 커트가 1만 2천에서 2,000원이 더 올랐다고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하는데 말이다.
반려동물들에게 공부를 시키겠다는 말인가? 신생아 출산율은 세계 최저 1위인 우리나라는 학생 수도 급감하고 있다. 교실이 남는 초등학교에 어린이집과 유치원, 중학교까지 하나로 합한 학교들이 등장했다.
이제는 반려동물 유치원을 공교육으로 수용하라고 국민청원을 넣는 것은 아닐까? 왈왈반, 양이반, 꼬닭반, 매끈반……. 차기 대선 주자는 반려동물 공립학교 건설과 의무교육을 추진하겠다고 공약을 걸지도 모른다. 자칭 앞서가는 정치가는 남는 교실을 반려동물을 위한 교실로 만드는 입법을 주장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양서류들이 모인 ‘매끈반’ 담임으로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싸움을 해결하지 않아도 되니 아직은 다행 중 다행이다. 다음 학기부터는 너도나도 반려동물 조련사 자격을 따야 하는 것은 아닐까?
1교시 수업 종료 전 3분을 가리키고 있다. 수업을 훔쳐보던 학부모들도 이 광경에 아연실색, 넋을 잃었다. 아이들의 수업 집중을 위해 모니터가 있는 방에서 반려동물을 데리고 나간 학부모도 있었다. 그러나 화면 교실은 이미 소풍 나온 들녘이었다. 쉬는 시간도 없이 아이들은 1교시보다 더 행복한 2교시를 향한 눈망울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빠른 손놀림으로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가 공간을 건너왔다.
첫댓글 원격 수업이 그림처럼 묘사된 글을 통해서 초등학교 교육 현장을 실감합니다. 선생님의 그 어려움이 충분히 짐작됩니다. 통제가 어려운 수업인데 반려동물까지 ...
학부모님이 다 보고 있는데 수업은 진행이 안 되니 진땀이 날 정도가 아니지요.
코로나 19가 진정되는 길밖엔 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네, 코로나19가 일반 감기처럼 여겨지는 시기가 오고 있지요. 그래도 학교현장과, 아이들의 심성은 많은 변화를 가져온 듯 합니다. 생활방식 조차도요.
아이들이 동물을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신비와 생명력과 애정의 발현이겠지요. 교실에 한 동물 키우기도 좋은 방법일 것 같아요. 무한 정을 받아도 줄 수 있는 대상이 없으니 말이예요. 우리 반은 고양이 기르기, 옆 반은 닭이,... 교실 동물 키우기가 하나씩 변행해서 먹이주기 관리하기, 특히 분면관리나 위생관리 같은 동물에 관한 공부도 하고 서로의 교감도 하는 그런 교실요. 그런데 문제는 아동이 너무 줄여들어 문제네요.코로나도 하나의 흘러가는 역사가 되고, 교실 환경도 바뀌죠. 원격수업이 앞으로의 온라인 수업으로 이끌어가는 계기가 될 것도 같아요. 인간은 줄어들어가는데, 잉여인간은 많아지는 아이러니, 내가 젊었을 때가 인간적이었다라는 말이 늘 맴도네요. 재미있는 교실 한토막 이야기 감사합니다.
그 어느 나라보다 우리나라 출산율이 수직적으로 하락하고 있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