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Luca Guadagnino)가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공포영화 감독 다리오 아르젠토의 1977년 작 '서스페리아'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든 작품이다.
원작의 그림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만큼 독창적인 아우라에 톰 요크의 음악 역시 기여하는 바가 크다.
'서스페리아'의 개봉을 기념하며 라디오헤드와 그 멤버들이 만든 음악을 사용한 영화들을 소개한다.
칸 영화제 신인상을 받은 '그린 파파야 향기'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베트남 감독 트란 안 훙(Trần Anh Hùng)은 두 번째 영화 '씨클로'는 일찌감치 라디오헤드의 음악을 영화에 사용한 사례 중 하나로 손꼽힌다.
전작의 음악을 만든 베트남 음악가 톤탓 티엣(Tôn-Thất Tiết)의 오리지널 스코어와 베트남 민요들로 채워진 가운데, 라디오헤드의 데뷔 싱글 'Creep'이 갑자기 등장한다.
주인공 씨클로의 누나가 클럽에서 유혹하듯 춤추는 장면이다. 언뜻, 어색한 춤사위를 위해 쓰인 것처럼 보인다. 적당히 음울한 분위기도 서로 어울린다.
하지만 머지않아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양조위(梁朝偉)의 얼굴이 비치면, 'Creep'이 애인을 팔아넘기려는 시인의 죄책감을 수식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유명한 후렴구 “나는 소름끼치는 놈이야. 기괴한 놈이지. 빌어먹을, 대체 난 여기서 뭘 하는 거지?”는 정확히 시인의 자괴처럼 들린다.
클럽을 나온 후에도 'Creep'은 오랫동안 시인을 따라다닌다.
알리시아 실버스톤(Alicia Silverstone) 주연의 '클루리스'는 90년대를 대표하는 하이틴 로맨스 영화다.
제작비의 6배가 넘는 수익을 기록할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의 히로인 셰어를 연기한 실버스톤의 의상은 현재까지도 패션 아이콘으로서 영향력을 자랑하고 있다.
발랄하기만 한 이 영화에 라디오헤드의 노래가 사용됐다.
쪼끔 굴욕적으로. 호화로운 방에서 립스틱을 바르던 셰어는 바깥에서 들리는 'Fake Plastic Trees'에 오만상을 구기며 “이게 웬 대학가에 청승맞은 노래야?” 투덜대더니 기어코 그 노래를 틀어놓은 이복오빠 조쉬(폴 러드)에게 “이 찔찔 짜는 노래 대체 뭐냐”고 쏴붙이고야 만다.
부잣집 딸에 학교에서 제일 인기 많은 고등학생이 듣기에 톰 요크의 애절한 노래는 그저 청승맞게 들릴 뿐이다.
앨범 [The Bends]에 실린 것도 아닌 어쿠스틱 버전이라면 더더욱.
'클루리스'가 개봉한 1995년에 발표된 또 다른 노래 'My Iron Lung'도 셰어의 친구들이 카페테리아에서 대화를 나눈 신에서 들릴 듯 말 듯 사용됐다.
제목 그대로다. 'Exit Music (For a Film)'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엔딩 크레딧에 흐른다.
바즈 루어만(Baz Luhrmann) 감독은 후반부 30분의 영상을 보내 '로미오와 줄리엣'을 위한 음악을 만들어달라 청했고, 라디오헤드는 클레어 데인즈(Claire Danes)가 머리에 45구경을 겨누는 모습을 보자마자 곡 작업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 톰 요크는 올리비아 핫세(Olivia Hussey) 주연의 1968년 판 '로미오와 줄리엣'을 울면서 보면서 두 사람이 처음 섹스를 나눈 다음날 아침 왜 함께 도망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며, 나쁜 일들이 닥치기 전 그들이 도망쳐야 한다는 노랫말을 썼다고 한다.
제목하며 가사하며 영화와 딱 들어맞는 노래였지만 정작 '로미오와 줄리엣' OST에는 'Exit Music (For a Film)'이 빠져 있다. 라디오헤드의 요청 때문이다.
당시 작업 중인 앨범의 무드를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곡이라고 느낄 정도로 애착이 대단했고, 결국 이듬해 발표된 라디오헤드의 걸작 [OK Computer]의 4번 트랙으로 실렸다.
로미오 아니,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Leonardo DiCaprio)가 노을을 등진 채 담배를 피면서 시를 써내려가는 신에 쓰인 'Talk Show Host'는 '로미오와 줄리엣' 사운드트랙에 수록됐다.
라디오헤드의 노래도, 톰 요크의 솔로곡도 아닌, 톰 요크가 목소리만 보탠 곡이다.
뷰욕은 '어둠 속의 댄서'의 주인공 셀마를 연기하고 사운드트랙 격의 앨범 [Selmasongs]까지 만들었다.
'I've Seen It All'은 셀마가 눈이 멀어가고 있음을 자기를 좋아하는 제프(피터 스토메어)에게 고백하며 부르는([어둠 속의 댄서]는 뮤지컬 영화다) 노래다.
영화 속에서 듀엣 했던 스토메어의 노래가 성에 차지 않았던 뷰욕은 앨범을 작업하면서 톰 요크를 초대했고, 4일 만에 새로운 버전을 완성했다.
나른하게 시작해 결국 폭발적인 감정을 토해내던 라디오헤드의 보컬과 달리, 'I've Seen It All'에서 요크는 내내 가벼운 읊조림만 얹었다.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뷰욕은 아카데미와 골든 골로브의 주제가상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하진 못했다.
저명한 음악 잡지 '롤링스톤' 기자 출신인 카메론 크로우(Cameron Crowe) 감독은 '클럽 싱글즈', '올모스트 페이머스' 등을 통해 연출력뿐만 아니라 발군의 선곡 감각까지 증명했다.
그 센스는 스페인 영화 '오픈 유어 아이즈'를 리메이크 한 '바닐라 스카이'에서도 빛났다.
주제가 'Vanilla Sky'의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는 물론 밥 딜런(Bob Dylan), R.E.M., 제프 버클리(Jeff Buckley), 시규어 로스(Sigur Rós) 등 기라성 같은 뮤지션의 명곡들이 빽빽하게 채워졌다.
백미는 단연 라디오헤드의 'Everything In Its Right Place'다.
저 위에서 뉴욕 맨해튼의 풍경을 내려다보던 시선은 데이빗(톰 크루즈)의 집에서 멈추고, 잠에서 깬 데이빗이 외출을 준비하는 모습 위로 노래가 흐른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풍경처럼 보이지만, 일렉트릭 피아노에 노래하는 톰 요크의 목소리에 더해지는 기계음이 그 안도감이 흩뜨려 놓는다.
곧이어 데이빗은 아무도 없는 세상을 깨닫는다.
요크는 [OK Computer]의 성공으로 정신없는 일정을 소화하던 중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전히 바닥나 있음을 깨달았던 경험을 토대로 이 노래를 만들었다.
'바닐라 스카이'의 오프닝에 배치된 'Everything In Its Right Place'는, 락 밴드의 편성을 벗어나 일렉트로니카 사운드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앨범 [Kid A]의 1번 트랙이기도 하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데뷔 이후 거의 모든 작품의 음악을, 한때 연인이었던 피오나 애플(Fiona Apple)의 프로듀서 존 브라이언(Jon Brion)에게 맡겨 왔다.
조니 그린우드와 협업을 시작한 건 '펀치 드렁크 러브' 이후 5년 만에 발표한 신작 '데어 윌 비 블러드'부터였다.
그린우드의 다큐멘터리 사운드트랙 [Bodysong]을 인상 깊게 들었던 앤더슨은 시나리오를 쓰던 중 그린우드가 34인조 오케스트라와 작업한 'Popcorn Superhet Receiver'를 듣고 새 영화의 음악을 청탁하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악곡과 [Bodysong]과 'Popcorn Superhet Receiver'에서 발췌한 곡들이 모여 '데어 윌 비 블러드'가 완성됐고, 그들의 협업은 영화/음악 팬을 두루 만족시켰다.
그리고 '마스터', '인히어런트 바이스', '주눈', 최근작 '팬텀 스레드'까지 영화사에 기록될 만한 두 명장의 파트너십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사운드트랙의 아트워크는 모두 그린우드의 아내 신 카탄(Shin Katan)의 작품이다.
'시카리오: 암살자들의 도시', '컨택트', '블레이드 러너 2049'로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감독으로 떠오른 드니 빌뇌브(Denis Villeneuve)의 출세작 '그을린 사랑'에선 라디오헤드의 5집 [Amnesiac]에서만 두 곡을 빌렸다.
폐허에서 머리를 강제로 깎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이어지다가 뚫어져라 카메라를 노려보는 소년으로 다가가는 오프닝은 전적으로 'You and Whose Army?' 속 정서의 흐름에 따라 편집돼 있다.
이 곡은 주인공 잔느가 어머니의 고향에 찾아가는 대목에서 다시 한번 쓰였다.
이라크에 군사적 개입을 부추겼던 토니 블레어 총리를 비판한 노랫말은 영화 속 레바논 내전에 공명할 수밖에 없다.
한편 보컬만 거꾸로 녹음한 후 전체 음악을 거꾸로 돌린 'Like Spinning Plates'는 어머니 나왈이 감옥에 갇혀 비명 소리를 이겨내고자 노래를 부르는 모습과 잿빛의 마을 풍경을 보여주는 대목에 놓여 극단으로 치달아가는 고통을 부풀린다.
빌뇌브는 첫 할리우드 영화 '프리즈너스'에서 라디오헤드의 2011년 앨범 'The Kings Of Limbs'의 트랙 'Codex'도 사용했다.
조니 그린우드가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음악만 작업한 건 아니다.
'시클로'의 트란 안 훙은 2009년 작 '나는 비와 함께 간다'에 라디오헤드의 음악을 3곡이나 사용한 데에 이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영화화 한 '상실의 시대'의 음악을 그린우드에게 맡겼다.
그린우드는 BBC 콘서트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빌려 여름과 겨울을 넘나드는 계절감을 끌어안았고, 평소 존경을 드러냈던 독일의 크라우트 락 밴드 캔(Can)의 명곡 3개를 사운드트랙에 포함시켰다.
2017년엔 2개의 영화음악을 발표했다. '팬텀 스레드'와 린 램지(Lynne Ramsay) 감독의 '너는 여기에 없었다'다.
한동안 오케스트레이션으로 영화음악을 만들어나갔던 그린우드는 '인히어런트 바이스'에서 다시 락 밴드 구성의 작법을 끌어왔고, '너는 여기에 없었다'에선 그 변화의 조짐을 한껏 밀어붙여 일렉트로니카 사운드까지 동원해 조니 그린우드 영화음악의 스펙트럼은 더 활짝 열어젖혔다.
라디오헤드의 [OK Computer]와 [Kid A]의 이행기를 떠올리게 하는 변화(이자 진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