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
☆ 2012년 12월24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
[청주] 주객 전도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사무 7, 1 - 5. 8ㄷ - 12. 14ㄱ. 16
† 복음 : 루카 1, 67 - 79
★ 다윗 임금이 나탄 예언자에게 주님의 집을 지을 계획을 말한다.
이에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다윗을 임금으로 뽑아 세웠음을 상기시키시며,
이스라엘이 앞으로 굳건해질 것임을 약속하신다(제1독서).
★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다고 예언한다. 그분께서는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분이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사제와 수도자는 날마다 시간에 맞추어 ‘성무일도’를 바칩니다.
동트는 새벽을 주님과 함께 맞으며 시작한 하루를 지내는 동안 내내
주님과 함께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즈카르야의 노래’는
아침 기도 때에, ‘마리아의 노래’는 저녁 기도 때에 바칩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는 일어서서 바치는데, 이는 미사 중 복음을
낭독하기 전에 일어서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경건하게 맞이하려는 자세이지요. 다리가 불편해
지팡이를 짚고 다니던 한 원로 사목자의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그분과 함께 피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제들과 함께
성무일도를 바치는데, ‘즈카르야의 노래’ 순서 때 그분도
지팡이에 의지한 채 힘겹게 일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옆에서
보기에 너무 안쓰러워 그냥 앉아서 기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가 끝난 뒤 “다리도 많이 불편하신데 기도하실 때 그대로
앉아서 하시지요.” 하며 인사드렸더니,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사제로 살면서도 젊어서는 기도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어.
그러다가 사제 생활 50년이 넘은 이제야 기도하는 것이 좀
익숙해졌고 기도의 의미도 알 것 같네. 지난 사제 생활을 가만히
되돌아보니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서 살기도 많이 했지. 이러한
나에게 주님께서 다가오셔서 빛을 비추시어 나의 어둠을 몰아내
주셨어. 넘어진 나를 일으켜 주시기도 했지.
마음의 평화를 비로소 주님 안에서 찾은 거야. 그렇게 고마운
분께서 내 손을 잡아 일으켜 평화의 길로 인도하시려고 오시는데
어찌 그냥 앉아 있겠나?”
훗날 제가 할 고백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일 미사 -
◈ [수원]
오산 성당 홈페이지: http://cafe.daum.net/ca-osan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청주] 주객전도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2년 다해 12월24일 대림 제4주간 월요일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셨다.>
+ 루카 1,67-79
주객전도
주객전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주인과 손님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뜻으로, 사물의 선후, 경중, 본말이 서로 뒤바뀌었음을 말합니다.
국가의 지도자는 지도자의 위치가 있고 권위와 모두를 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백성은 백성의 자리가 있고 지도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라고 하는 이들의 권위가
사라진지 오래고 그러니 존경과 사랑도 없습니다. 백성이 더 크게
나라를 걱정하고 지도자는 자기의 잇속에 매여 있습니다. 각자의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알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전국 교수 625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전체의 28,1%
(176명)가 2012년을 표현하는 사자성어로 ‘거세개탁’
(擧世皆濁; 들 거, 세상 세, 다 개, 흐릴 탁)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온 세상이 모두 탁하다’는 뜻입니다. 온 세상이 모두 탁해
지위의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바르지 않아 홀로
깨어있기 힘들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명박
정부 끝자락에 윤리와 도덕이 붕괴하고 편법과 탈법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고, 검찰과 법원은 법을 오. 남용해 정의를 우롱했고,
대통령은 내곡동 부지 문제 등 탐욕의 화신임을 보여줬다.”고
말합니다. “개인 및 집단 이기주의가 팽배해 좌우가 갈리고 세대
간 갈등, 계층 간 불신과 불만으로 사회가 붕괴, 방치되고 있다.”
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의 어둠이 짙어질수록 우리의
소명은 더 간절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어둠을 밝히는 하나의 등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즈카르야의 노래는 이스라엘을 해방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부분과 하느님의 예언자로 태어난 아기의 장래를 축복하는
부분으로 구별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푸시는 해방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를 그대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덕분에 이스라엘은
원수들의 손에서 벗어나 떳떳하게 주님을 섬기며 주님 앞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원수들 손에서 구원된”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한평생 거룩하고 의롭게 주님을 섬기도록 해 주셨습니다
(루카1,75). 이것이 해방의 시작이요, 마침입니다.
하느님의 예언자로 태어난 요한이 제 몫을 감당하여 주님의 길을
닦고 알려주는 것도 “하느님의 크신 자비”(루카1,78)덕분입니다.
시작도 마침도 모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요한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나 이제 특사를
보내어 나의 행차 길을 닦으리라”(말라기3,1). “사막에 길을
내어라”(이사40,3).고 외치는 소리가 될 것입니다. 예언의 말씀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마침내 요한은 오시는 주인의
길을 닦고 자신은 그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만한 자격도 없다는
겸손을 잃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주인의 행세를 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나서 큰일입니다.
주객이 전도되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자기
몫을 알고 그것에 충실했습니다. 이번에 선출된 대통령당선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권력은 백성에게 있다.”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것은 시작도 마침도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무엇을 하든지
주님께 의탁하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에 헌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안에서 아기 예수님을 기쁘게 만나 뵙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마산] 노래하는 마리아
장미꽃에서 장미 향기가 나오고, 국화꽃에서 국화향기가 납니다.
소나무에서 솔향이 나고, 향나무에서 향나무 향이 납니다.
불 켜진 촛불은 스스로를 태우며 환한 빛으로 주위의 어둠을 밝히고
스스로를 불사르는 향은 악취를 몰아내고 방안을 향기롭게 합니다.
가슴 가득 하느님의 사랑을 담고 있는 마리아의 입에서 찬미 노래가
나옵니다. 성모의 노래(Magnificat)는 입에서 나오는 노래가
아닙니다. 옹달샘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듯 가슴에서 흘러넘치는
노래입니다. Magnificat은 온 몸과 삶으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한 마리아의 가슴은
노래하지 않고 견딜 수 없습니다.
마리아는 꽃이 되고 향기가 되어 하느님의 큰 사랑을 노래합니다.
이제 당신이 Magnificat을 노래할 차례입니다.
행여 입술로만 노래할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만 노래할 생각일랑 하지 마십시오. 탐욕과
미움과 원망으로 가득한 가슴으로 부르는 노래는 노래가 아닙니다.
오늘 당신의 말 한마디와 미소가
당신의 손길과 발걸음이 Magnificat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 마산 교구 강영구 신부 -
◈ [인천]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얼마 전에 약속이 있어서 전철을 타고 약속 장소로 가고 있었습니다.
운전을 하지 않다보니 여유 있는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지요. 창밖을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생각도 할 수 있었고, 또한 책도 읽을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아무튼 한참을 이동해서 약속 장소에 도착해
보니, 저와 만나기로 한 몇 분은 이미 나와서 저를 반겨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분이 저의 얼굴을 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세요.
“신부님, 얼굴이 뭐 묻었어요.”
그러면서 제게 그분이 가지고 있는 손거울을 보여주십니다. 이
손거울에 비춰진 제 얼굴에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숯검정 같은
것이 묻어있었던 것입니다. 닦으면서 도대체 어디에서 묻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전철 안에서도 사람들이 제 얼굴이 힐끔힐끔
쳐다보던 것을 기억해보니 꽤 일찍부터 묻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더군요.
사실 생각해보면 내 얼굴을 직접 볼 수 있는 도구들이 많았습니다.
거울도 있고, 휴대전화를 이용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거리의
쇼윈도에 비춰진 제 얼굴을 볼 수도 있으며,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을 보고 눈치 챌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얼굴에 무엇인가가
묻었으리라고 상상도 못했기에 오랫동안 검은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묻히고 돌아다녔던 것이지요.
스스로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자신이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를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나를 왜 쳐다보는 거지? 내게
관심 있나?’라는 식으로 엉뚱한 착각 속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주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것 역시 이러한 착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래서 제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자기는 옳고 남은 틀리다는 주장만을 펼치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인 즈카리야는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라고 시작하는 주님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십니다. 사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잉태하리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서 그런 일이 생길 수 없음을
이야기해서 결국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지요. 그러나 세례자 요한의
이름을 짓는 데에 있어 하느님의 뜻을 그대로 따르면서 다시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면서 했던 찬미의 노래가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즈카리야의 노래’인 것입니다.
자기의 뜻만을 주장했을 때에는 침묵하게 만드시는 하느님. 즉,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 주님을 드러내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자신을 온전하게 되돌아 볼 수 있으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주님을 맞이할 날도 이제 하루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최선을 다해 살아, 주님을 찬미하는 기쁜
성탄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산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배우는 데 그 에너지의
9할을 소진한다. 그리고 나머지 1할로 그 말을 살아 낸다(문진영).
어느 신부님의 방에서 화재가 났어요. 대림초를 켜놓고 기도하다가
졸아서... ㅋㅋㅋ
나의 기준이 반드시 정답은 아닙니다.
어제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이번에 부제서품을 받는 신학생에
관한 것이었지요. 즉, 부제서품을 주면 안 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은 “가톨릭도 별 볼 일 없군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알고 계신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또한 오랫동안 성소
담당자들이 판단해서 내린 결정임을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저의
말을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고 이렇게 간단히 말할 뿐이었습니다.
“알았어요. 가톨릭도 별 볼 일 없어요.”
가톨릭은 2,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직접 세우신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를 과연 별 볼 일 없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요?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별 볼 일 없다는 판단,
자기 기준이 곧 주님의 기준이라는 것일까요?
나의 기준이 반드시 정답은 아닙니다. 주님의 뜻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한가지의 예를 들어보지요.
사과 10개가 있습니다. 이 사과를 10명의 사람에게 어떻게 나눌
때 공평할까요? 우리의 기준은 하나씩 나누면 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나눔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주님의 나눔은 배고픈
사람이 더 많이 가지는 것이 공평한 것입니다.
나의 기준을 보편화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항상 주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겸손한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우리
역시 오늘 복음의 즈카리야처럼 일상 삶 안에서 주님을 찬미하는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분
즈카르야가 부르는 노래에서 우리 눈길을 끄는 것은 ‘찾아오시는
하느님’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는 찬가의 초반과 마무리에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1,68),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1,78)라고 하면서 자신의
아들로 태어날 아기 요한이 바로 그 ‘찾아오시는 주님’에 대한
예표임을 고백합니다.
사실 간절히 주님을 기다린다고 하면서도 실은 일상 안에 매몰되어
‘오신다고 하더라, 오실 거야. 오시겠거니…’ 하는 미지근함에
젖어들기 쉽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1,6)이었던
즈카르야도 충실한 사제였지만, 안일함을 지니고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믿음이 부족했던 그가 깨닫게 된 것은 하느님이 당신
계약을 기억하시고,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즈카르야는 그분의
오심을 통해 자신이 포함된 이 백성이 하느님을 거룩하고 의롭게
‘섬기도록’ 해주시려는 것임을 고백합니다. 자기 신원의식을
깊이게 된 것입니다. 아기의 아버지이자, 예언직을 행하는 사제로서
선포하는 즈카르야의 찬가 마지막 단락은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모든 이를 향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누구를 기다리는지요? 아니, 기다림이 있기는
한지요? 세상의 어둠은 짙어지고, 그러기에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그분, 주님을 기다림은 더욱 깊어지는 성탄 전야입니다. 참 빛이신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 곧 어둠과 그늘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이
‘찾아오시는 하느님’, 그분이 주시려는 생명에로 나아와 참된
평화를 얻어 누리기를 간절히 빌어봅니다.
- 이정훈 신부(서울대교구 청년 성서모임 지도신부) -
◈ [수도회] 희망을 주는 동반자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수도원에 입회를 했습니다. 어린 나이였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온전히 깨닫기에 아직 미숙한 사람이기에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이 기쁘면서 조금 불안했습니다. 부르심에 “예” 하며
응답했지만 수도 생활을 잘 해나갈 수 있을지 하느님께서 어떻게
이끌어 주실지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수도원에 입회한 후 참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당신의 부르심을 전하는 형제들의 모습 안에서,
그들의 격려와 사랑안에서 불안과 두려움은 믿음과 감사로 변화되고
형제들이 있기에 지금도 부르심에 “예” 하고 응답하며 하느님
안에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도 어린 처녀가 하느님의 힘으로 아기를 잉태했다는
소식을 듣고 믿음으로 응답했지만, 어찌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그 소식을 듣고 누구와 이야기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성모님은
천사가 알려준 친척 엘리사벳에게 가서 그 소식을 다시 확인받습니다.
그 순간 성모님의 입에서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확인하고 그 구원사업의 협조자로서 그분을
찬미하는 성모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 안에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때로는 우리를 흔들리게 하지만 그 순간 함께할 수 있는 동반자를
찾으십시오. 그리고 또한 내가 그러한 희망을 줄 수 있는 동반자가
되어준다면 우리 삶이 하느님 안에서 더욱 풍요로워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 황지원 신부(작은 형제회) -
◈ [전주] 참된 믿음의 여인 한나
한나는 젖을 뗀 사무엘을 데리고 주님의 성전에 찾아가 하느님께
감사의 제사를 올린다. 그녀는 사무엘이 태어난 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이며 자신의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임을 잘 알고
있다.
사실 오랜 기간 동안 자식이 없어 브닌나로부터 당한 온갖 고통과
수모를 생각할 때, 어렵게 얻은 자식을 하느님께 바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나는 그 아들이 하느님의
것임을 굳게 믿고 있었기에, 자신이 서원한 대로 사무엘을 하느님께
도로 바친다. (이러한 한나의 신앙을 어여삐 보신 하느님께서는
한나의 그 정성과 신앙을 기억하시고, 그녀에게 사무엘 외에 세
아들과 두 딸을 더 허락해 주셨다 : 2,21).
한나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감복했기 때문에 사무엘의 한평생을
온전히 주님께 맡긴다. 사무엘의 봉헌은 일시적인 위탁이 아니라
영원한 봉헌이다. 그녀는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왔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욥 1,21), 하느님께 대한 서원의 존엄함을 깨닫고
있었다(시편 15,4). 그리하여 그녀는 모성애를 뛰어넘는 헌신적인
결단을 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어여삐 들으시고
사무엘을 주셨으므로, 그녀도 하느님께 사무엘을 봉헌한다.
한나는 참으로 믿음 깊은 여인이다. 그녀는 하느님께서 간절히
구하는 자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점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실망하지 않고 참고 기다리며 하느님께 간구하여
사무엘을 얻었다. 신앙은 결코 실망하지도, 성급해 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
(로마 8,25)는 사도 바울로의 말씀처럼 신앙은 곧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신앙은 자신이 아무런 힘도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무기력하고 미약한 존재임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필요로 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해야만 하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다.
신앙은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깨닫는 것이다. 자신의
탄생과 삶과 늙음, 그리고 죽음까지도 모두가 은총임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신앙인은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1테살 5,16-18)라는 사도
바울로의 권고대로 살아간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임을
깨달았을진대 어찌 기뻐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으며 기도하지
않을 수 있으랴!
신앙은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이 주님의
힘이요 은총임을 알면서 어찌 자신을 봉헌하지 않을 수 있으랴!
삶의 일부인 시간을 봉헌하고, 노력의 대가를 봉헌하고, 자신의
삶 전체, 생명과 죽음까지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는 것이
신앙이다.
한나는 참 신앙인이었다. 그녀는 그녀가 누리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임을 깨달았다. 그러기에 그녀는 자신의 분신인
사무엘을 낳기 전에도 그를 온전히 봉헌하기로 서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이에게서 젖을 떼자마자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였다. 그녀는 아이가 없어서 고난을 당할 때에도 참고
기다릴 줄 알았을 뿐만 아니라 아이를 낳은 후에도 결코
겸손함을 잃지 않았고,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깨달아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는 참 신앙인이었다.
이처럼 믿음 깊은 한나는 곧 예수님을 강생하도록 적극적으로
협력하신 성모님을 보여주시는 예표이다. 한나와 성모님처럼
믿음 깊은 여인이 곧 오시는 주님을 준비하며 맞이하는 참
신앙인임을 생각하고, 오늘 우리도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신앙인,
자신을 아는 겸손한 신앙인,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신앙인이
되자.
- 전주 교구 경규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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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Merry Christma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