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같은 농산물이라도 팔아야 산다-농촌에서의 생존전략
새로 농사를 시작하는 분들중 삼분의 일이 귀농인이라 합니다. 하지만 5년이상 농사를 지속하는 비율은 또 얼마나 될까요? 전국귀농운동본부 박용범 사무처장은 3년이 고비라 했습니다. 3년이 넘어가면 지속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겠지요. 농촌진흥청이나 농식품부에서 직간접적인 귀농지원책을 이어가는 것도 크게는 ‘지속가능한 농업‧ 농촌’을 위해서일 겁니다. 오늘 많은 분들이 이 자리에 모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중 누구도 개별 귀농인이 맞닥뜨리는 가장 큰 어려움,농산물 판매에 대해 시원스러운 답을 해주기 어려울 겁니다. 그야말로 답이 없는 문제입니다. 제 경우도 그랬습니다.
귀농후 처음 2년간은 동네에 들어오는 <순회수집상+택배+방문객 대상 농장직판(소매)+거리판매(소매)+도매(도시 수퍼)> 등 계절과 품목별 생산량에 맞추어 다양한 방법으로 팔았습니다. 이중 순회 수집상에게 파는 것은 판로가 없는 농가에서 이용하는 방법이지만 수취가� 제일 낮습니다. 98년도 기준으로 들깻잎, 고구마순, 고추순(잎)이 4kg에 천원이었습니다. 당시 도시 대학생의 커피숍 아르바이트 시급이 2천 5백원 안팎인 바 농산물 판매금액을 시간당으로 계산하니(초보 귀농인 일량 기준) 대략 천원이었습니다. 농산물을 넘기기가 아까워서 중단한 대신 씀씀이를 더 줄이고(부식자체 조달+각종 보험금 해지)택배와 거리(5일장)판매에 주력하였습니다. 3년차부터 지역의 유기농 생협에 가입하여 지금까지 이어왔으며 해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대략 총수확량 대비 50~70% 가량을 생협에 출하하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농장 직판과 택배를 하고 있으며 택배건수는 연간 2백건 정도입니다. 현재 생협에 내는 품목은 쌀, 무, 생강 등으로 전보다 많이 줄였습니다.
저희는 지역내에 생협이 있어 비슷한 조직이 없는 선후배 귀농동료보다 판매가 수월한 편이었습니다. 그래도 소비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생산의 감(感)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량은 꾸준히 직거래를 해왔습니다. 선별을 꼼꼼히 하고 작물에 따라 토질을 고려해 재배하니 생협에 출하한 농산물(고구마, 감자, 완두 등)의 평가에서 최고 점수를 받아왔습니다. ‘상품이 나쁘면 어쩔 수가 없다’라는 마케팅의 금언처럼 가능한 소비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고구마의 는 이밭 저밭 실험한 끝에 3년만에야 원종(原種)의 맛을 재현했고 균일한 품질을 위해 해마다 같은 자리에만 심게됩니다. 고객중 어떤 이는 저희 농산물이 떨어졌을 때 믿을만한 다른 농가를 추천해주어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인증사양은 같을지 몰라도 ‘그맛이 안난다’는 겁니다.
썩지않는 마늘 신화를 만들어내다
지금은 얼마 안되지만 전에 유기농 마늘 작목원이었을 때는 한 해 4백평 이상 심기도 했습니다. 저희 마늘의 특징은 오래 두어도 썩지 않는다는 겁니다. 비결은 수확후 한 두 달 가까이 비닐하우스에서 햇볕과 바람으로 충분히 말리는 겁니다. 한여름 기온이 올라가면 차광막을 치고 더 말 린후 해가림 공간으로 이동합니다. 이 과정없이 수확후 바로 처마에 매달았을 때 장마가 길어지면 감모율이 수직으로 올라갑니다. 건조과정에서 다른 비용은 들지 않습니다. 고온기에 마늘이 햇볕에 데지 않도록 신경쓰면 이듬해 심을 때까지 싱싱한 마늘을 고객에게 보낼 수 있습니다. 생협의 소비자들조차 “이런 마늘은 처음 봤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재배과정에서도 화학비료를 치지 않으니 그만큼 조직이 더 단단해질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수확후 관리를 제대로 해주면 상품성이 크게 올라가고 매니아층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대개 없어서 못팔게 되지요. 마늘뿐만 아니라 감자, 고구마, 당근도 마찬가지입니다. 뿌리 채소류는 모래참흙 땅에 두둑을 높이 만들어 물이 잘 빠지게 하고 적기에 수확해서 알맞은 방법으로 갈무리해두면 없어서 못팔지 남아서 썩히는 일은 없습니다. 참고로 저희는 고구마는 이층 다락방에 두어 이듬해 늦은 봄까지 보관해 팔고 감자, 당근은 수확즉시 저온저장고로 옮겨 수분 증발을 막아서 상품성을 유지합니다. 성정이 찬찬한 아내가 농산물 관리를 하고 있어 품질로 인한 문제는 거의 없는 편입니다.
제일 많이 재배하는 벼(쌀)도 3월까지는 컨테이너 창고에 보관하되 이후에는 저온저장고로 옮겨 보관합니다. 4월이 시작되면 기온이 올라가 미질이 급격히 떨어지므로 방아를 찧은뒤 포대와 비닐로 2중 포장을 하여 5℃ 이하에서 보관합니다. 균일한 품질을 위해 이듬해 7월까지 보낼 수 있는 양만 보관하고 햅쌀이 나올 때까지 다른 곳에서 구입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무우 배추도 수확물의 크기와 상관없이 맛이 좋기로 정평이 난 품종만을 재배하여 공급하자 한때 “배추에 꿀쳤냐?”, “깍두기 담그려고 샀다가 전부 생으로 깎아먹었다!” 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지는 읽는 분들이 더 잘 아실겁니다. 저희와 같은 재배방식-소량 다품종 직거래 판매-를 꿈꾸시는 분들은 무엇보다 농산물의 맛에 제일 신경을 써야한다는 겁니다. 과거 서울의 큰 수퍼와 도매거래를 할 때도 저희 배추는 일반 시장의 배추에 비해 외관이 좋지 않았습니다. 포기당 3kg 이상이 나가는 품종을 심을 수도 있지만 색깔과 고소한 맛을 고려해 속노란 배추만 고집했습니다. 크기도 작고 벌레 구멍도 많았음에도 매년 수퍼에서 두 말없이 사준 것은 오로지 맛과 소비자들의 평가때문이었습니다. 저희가 공급한 배추는 수퍼에서 마이크 들고 떠들 일이 없습니다. 실한 놈으로 두어 포기 쫙 갈라놓으면 소비자들이 노란 고갱이를 어느새 다 뜯어 먹습니다. 당장 입에서 요구하는데 안 살 도리가 있습니까? 1톤 트럭으로 한 차 가득 가져가서 절반은 수퍼에 풀고 나머지는 미리 주문한 가구에 배달을 하거나 차위에서 직판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어느 해는 한 주 내내 김장거리를 꾸려 서울로 출퇴근한 적도 있습니다.
직거래를 하다보면 별별 소비자를 다 만나게 됩니다. 보내주는 대로 감사히 드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굉장히 까다로운 분도 보게 되지요. 드문 예지만 생산자의 밭에서 직접 수확해가야 직성이 풀리는 분도 있습니다. 또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자주 하시되 맛이나 상태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고객도 만납니다. 지금 저희집 고객중에도 한 분 계시는데 저희 부부는 지명(地名)을 넣어 ‘00아줌마’라 부릅니다. 이런 분들은 예민한 대신 충성도가 대단히 높습니다. 품질 평가위원이라 부를만한 분들과 3년 이상 거래를 유지할 수 있다면 해당 농가의 농산물은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겁니다.
제가 아는 분중에는 직거래를 하던 소비자께서 임종시에 “내가 가더라도 00이네와 거래를 끊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셨다고 합니다. 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소비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농가만의 강점(unique selling point)을 구축한다면 판로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희도 처음 2년간 일륜차로 도심의 골목을 누빌 때 유기재배를 했다고 해도 절대로 ^^ 믿어주지 않던 고객들이 3~4년이 지나자 흔쾌히 받아들이는 모습을 봤습니다. 낯모르는 소비자와의 신뢰형성은 시간이 해결해줍니다.
귀농후배가 제시한 새로운 판매전술-꾸러미 운동
소비자와의 직거래야 저희도 경험이 많지만 3년전 홍성으로 온 한 귀농 후배는 선진국에서 한 발 앞서 제시한 CSA(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 ; 공동체 지원농업 혹은 소비자가 지원하는 농업)에 기반한 꾸러미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익히 아시는 것처럼 농가에서는 일정 주기로 도시 가구의 먹거리를 종류별로 챙겨 택배로 보냅니다. 저희는 많아야 다섯 가지 이내 혹은 단품위주로 공급했지만 후배는 매주 열 가지 내외의 채소를 박스에 담아 보냅니다. 간혹 지역의 가공품(유기농 요구르트와 식혜, 우리밀빵)을 넣을 때도 있습니다. 농산물 생산은 아랫집 할머니와 공동으로 하고 부족한 것은 귀농 선후배에게 부탁도 합니다. 귀농 첫해 경제적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듬해 꾸러미를 시작하고서는 안정되었습니다. 3년차인 올해는 오히려 우리보다 나은 것 같습니다.
후배가 성공을 거두자 많은 이들이 따라해서 이제는 새내기 농부들의 필수 코스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가만히 지켜보니 꾸러미의 장점이 참 많습니다. 농가의 형편에 따라 공급주기와 수량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어 어느 누구라도 가능합니다. 이웃과 함께 할 수 있고 가공품 판매로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고 정착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농촌에서 이웃이 내 농산물을 팔아주는 것만큼 고마운 일이 또 없으니까요. 신세를 지면 더한 것을 내어주는 보은의 문화가 뿌리깊은 곳이 시골입니다. 아마 농산물을 팔아드린 대신 얻는 것들이 더 많을 겁니다. 때로 밭도 매주시고 없는 모종도 이것 저것 챙겨주시고 도시의 아들딸이 사온 것들도 나눠주시겠지요. 농촌에서 이보다 흐믓하고 광경이 더 있을까요?
꾸러미 운동의 더욱 큰 의미는 유통조직이 없는 지역에서 귀농인이 기댈만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점입니다. 전에는 귀농 교육시에 “조직이 없으면 지역에서 작게라도 시작해보라”고 했지만 힘든 일이어서 속으로는 미안했지요. 지금은 “꾸러미로 시작해보라”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귀농 관련 일을 하는 지자체나 행정에 계시는 분들에게도 반가운 소식일 겁니다. 지자체의 택배비 지원만 일정부분 뒷받침 된다면 귀농인들의 경제적 자립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CSA를 잘 꾸려내면 기존 유통라인의 횡포를 줄일 수도 있고 지역 농산물의 판매촉진은 물론 생산자 소비자 모두에게 이득이 됩니다. 귀농인외에도 지역내에 작목반이나 영농조직이 없어 개별화되고 분산된 지역민들을 엮어내는 마케팅 전략으로 제시 할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어느 후배 농가는 시장(市場)의 기준을 거부하고 “내가 생산하는 농산물은 농약이나 비료는 물론 멀칭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제시하는 기준은 시장의 그것과 다릅니다. 당근을 예로 든다면 엄지 손가락 굵기부터 공급할 것입니다. 때로는 못생기거나 벌레먹은 것들도 갈 겁니다. 그래도 동의하신다면 저를 따르십시오. 대신 블로그를 통해 여러분에게 공급하는 농산물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라는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그이는 이런 농사나 공급방식이 재미있다고 합니다. 재미나게 짓는 농사, 이들 부부가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큽니다. 당장에 다른 농부들이 따라하기는 어려운 방식이나 저나 뒤따르는 이들에게는 큰 도전이 됩니다.
끝으로 꾸러미 운동은 공급주기외에도 다양한 변형이 가능합니다. 한 주는 생채소, 다른 한 주는 농산물을 가공하여 조림이나 장아찌로 보낼 수도 있고 농한기에 푹 쉬고 싶다면 잠시 중단해도 됩니다. 기왕에 조직된 작목반이나 영농법인도 탄력적인 대응이 가능합니다. 진작에 어느 단위농협에서도 소포장팀을 꾸려 시작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꾸러미 소비자를 농가로 초청해 농촌체험이나 지역 관광과 연계할 수도 있겠지요. 아직은 미완(未完)의 유통형태인만큼 농가마다 스스로의 아이디어를 더해 빈 곳을 채워가면 됩니다.
꾸러미 운동은 효율만을 추구해 단작위주로 규모를 키워가는 시장지향 농업의 한계와 폐해를 극복하고 소농, 가족농이 미래에도 지속할 수 있는 기반과 근거를 제시한 하나의 혁신입니다. 아니 물품의 유통이라기보다 먹을거리에 기반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채널, 소통(疏通)에 가까워 보입니다. 꾸러미에는 자연스레 서로의 이야기(story)가 덧입혀질 터이니까요. 생협이 커지면서 희미해진 캐치프레이즈-얼굴과 얼굴을 아는 관계, 먹을거리를 공유하는 한 식구(食口)의 꿈. 부디 꾸러미가 명절에 고향을 찾은 자녀의 손에 들려준 어머니의 보따리처럼 농산물 유통의 현실과 이상의 교차점을 관통하는 궁극의 푯대였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농가단위 가공농산물의 판매비중이 점점 늘어나는 현실을 감안해 자칫 꾸러미 농가가 식품위생법 등의 규제대상이 되지 않도록 법적, 제도적 검토가 뒤따랐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