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려실기술 별집 제16권
-지리전고(地理典故)
-주(州)와 군(郡)
○ 강원도 : 동북쪽과 동쪽은 바다이고, 동남쪽은 경상도와 경계이며 남쪽은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이고, 서남쪽은 충청도와 경계, 서쪽은 경기도와 경계이며 서북쪽은 경기ㆍ황해도의 경계이고, 북쪽은 함경도와 경계이다. 26고을이다. 동도 9고을, 서도 17고을 본래 예맥(濊貊)의 땅인데 한4군(漢四郡) 때에 임둔(臨屯)이 되었다가 뒤에 고구려와 신라가 차지하게 되었고, 신라가 통합하여 명주(溟州)ㆍ삭주(朔州)의 두 주를 두었다. 말기에 궁예가 점거하였다. 고려 때에는 삭방도를 두었다. 성종이 화주(和州)ㆍ명주 등의 군ㆍ현으로 삭방도를 만들고 춘주(春州) 등의 군ㆍ현에 예속시켰다. 뒤에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라고 고쳤고, 춘주(春州) 등의 군ㆍ현은 비로소 춘주도 혹은 동주도(東州道)라고 불렀다. 명종 때 명주도(溟州道)를 강릉도로 고쳤고, 동주도를 교주도(交州道)라 하였다. 뒤에 또 교주도를 고쳐 회양도(淮陽道)라고 부르고, 강릉도를 고쳐서 강릉삭방도라고 불렀다. 우왕 때 비로소 강릉도를 분할하여 교주도와 합하여 드디어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라고 불렀다. 충주의 관할인 평창군(平昌郡)을 교주강릉도에 예속시켰으며, 공양왕은 철원ㆍ영평(永平) 등의 현을 옮겨서 경기에 예속시켰다. 태조 을해년에 강원도라고 개칭하였다. 정종 때 영춘(永春)과 영월을 서로 교환하였으며, 태종 때 가평(加平)과 조종(朝宗)을 분리시켜 경기도에 예속시키고, 경기도의 이천(伊川)을 강원도에 예속시켰다. 세종 때 철원과 안협(安峽)을 도로 강원도에 예속시켰다.
○ 동도 강릉 : 성이 있다. 본래 예국(濊國) 철국(鐵國) 또는 예국(蘂國)이라고도 한다. 이니 한 무제의 한4군(漢四郡) 때에는 임둔(臨屯)이었다. 고구려 때에는 하서량(河西良)이라고 일컬었는데 하슬라주(河瑟羅州)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는 소경으로 하였다가 뒤에 명주(溟州)로 고쳤다. 고려 태조는 동원경(東原京)이라고 이름했다가 뒤에 하서부(河西府)라고 일컬었다. 명주목으로 고쳤으며, 경흥도호부로 올렸다가 다시 강릉부로 고쳤다. 본조에서도 이를 그대로 하였다. ○ 임영(臨瀛)ㆍ동온(東溫)ㆍ명원(溟源)ㆍ예국 이하는 이곡(李穀)의 <염양정기(艶陽亭記)>에 나온다.ㆍ철국(鐵國)ㆍ도원경(桃源京)ㆍ북빈경(北濱京)이라고도 한다. ○ 1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30리이다. ○ 연곡(連谷)은 속현이다. 고구려의 지산현(支山縣)이니 양곡(陽谷)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명주의 영현(領縣)이었다. 우계(羽溪)는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우곡현(羽谷縣)이니 옥당(玉堂)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삼척군의 영현이었다.
○ 양양(襄陽) : 고구려 때의 익현현(翼峴縣)이니 이문(伊文)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는 익령현(翼嶺縣)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양주(襄州)로 올렸다가 덕령현(德寧縣)으로 낮추었으며 다시 양주(襄州)라 일컬었다. 태조 정축년에 부로 올렸다. 임금의 외향(外鄕)이다. 태종 때 양양으로 고쳤다. ○ 양산(襄山)이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50리이다. ○ 동산(洞山)은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혈산현(穴山縣)이니 신라 때 동산(洞山)이라 고쳤다.
○ 삼척 : 성이 있다. 실직국(悉直國)이니 신라 때 실직주군주(悉直州軍主)를 두었다가 뒤에 삼척군으로 고쳤다. 고려 때 척주(陟州)로 고쳤다. 뒤에 현으로 낮추었다가 또 군으로 올렸다가 태조 계유년에 부로 올렸다. 목조(穆祖)의 외향(外鄕)이다. ○ 직주(直珠)라고도 한다. ○ 12면, 서울과의 거리는 6백 32리이다. ○ 죽령은 고현(古縣)이다. 고구려 때의 죽현현(竹峴縣)이니 신라 때 죽령이라고 고쳤다. 만경현(滿卿縣) 만경현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때의 만방현(滿芳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ㆍ해리현(海利縣) 고구려 때의 파리현(陂利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등으로 되어 있다.
○ 평해(平海)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근을어군(斤乙於郡)이다. 고려 초기에 평해군으로 고쳤다. ○ 기성(箕城)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0리이다.
○ 통천(通川) : 고구려 때의 휴양군(休壤郡)이니 금뇌(金惱)라고도 한다. 신라 때 금양(金壤)으로 고쳤다. 고려 때 현을 두었다가 통주(通州)로 올렸다.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통천군으로 고쳤다. ○ 금란(金蘭)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40리이다. ○ 임도(臨道)는 폐현이고 고구려 때의 도림현(道林縣)이니 조을포(助乙浦)라고도 한다. 벽산(碧山)도 폐현이며 고구려 때의 토상현(吐上縣)이니 신라 때 제상(堤上)으로 고쳤다. 운암(雲巖)도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평진현(平珍縣)이니 변현(邊縣)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편검(偏儉)이라 고쳤다.
○ 고성(高城) : 고구려 때의 달홀(達忽)이니 신라 때 달홀주군주(達忽州軍主)를 두었다. 뒤에 고성군으로 고쳤다. 고려 때 현으로 고쳤다. 세종 때 군으로 올렸다. ○ 풍암(?巖)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9리이다. ○ 간성(杆城) : 고구려 때의 변성군(邊城郡)이니 가라홀(加邏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수성군(守城郡)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간성현으로 고쳤으며, 뒤에 군으로 올렸고 고성(高城)을 겸임시켰다가 조금 후에 다시 분할하였다. ○ 수성(水城)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5백 55리이다.
○ 울진(蔚珍) : 성이 있다. 고구려 때의 우진야현(于珍也縣)이니 고우이군(古?伊郡)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울진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현으로 낮추었다. ○ 선차(仙?)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8백 85리이다. ○ 해곡현(海曲縣) 고구려 때의 파조현(波朝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이 있다.
○ 흡곡(?谷) : 고구려 때의 습비곡현(習比谷縣) 곡(谷)을 탄(呑)으로 쓰기도 한다. 이니 신라 때 습계(習磎)로 고쳤고, 고려 때에 흡곡으로 고쳤다. 선조 병신년에 폐읍하였다가 무술년에 다시 두었다. ○ 학림(鶴林)이라고도 한다. 3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0리이다.
○ 서도(西道) 원주 : 고구려 때의 평원군(平原郡)이니 신라 때 북원소경(北原小京)을 두었다. 고려 태조 때 원주로 고쳤다. 뒤에 낮추어 일신현(一新縣)으로 하였다가 조금 후에 이전대로 하였다. 또 정원부(靖原府)로 올렸다가 익흥부(益興府)로 고치고, 성안부(成安府)로 고쳤으며 다시 원주목으로 하였다. ○ 평량경(平?京)이라고도 한다. ○ 20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82리이다. ○ 주천(酒泉)은 속현이다. 학성(鶴城)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때의 주연현(酒淵縣)이니 신라 때 주천(酒泉)이라 고쳤다.
○ 회양(淮陽) : 고구려 때의 각련성군(各連城郡)이니 가혜아(加兮牙)라고도 한다. 신라 때 연성(連城)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이물성(伊勿城)이라고 부르다가 교주(交州)로 고쳤다. 회주목(淮州牧)으로 올렸다가 회양부로 낮추었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80리이다. ○ 화천(和川)은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수왕천현(藪往川縣)이니 신라 때 수천(藪川)으로 고쳤다. 남곡현(嵐谷縣) 고구려 때의 적목진(赤木鎭)이니 사비근을(沙非斤乙)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단송(丹松)으로 고쳤다. 이 있다. 질운(?雲)은 고현이고 고구려 때의 관술현(管述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희령(稀嶺)도 고현이다. 고구려 때의 저수현현(猪守峴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춘천 : 본래 맥국(貊國)이었는데, 신라 때 우수주(牛首州) 우두주(牛頭州)라고도 한다. 를 설치하고 군주(軍主)를 두었다가 수약주(首若州)로 고쳤는데 오근내(烏斤乃)ㆍ수차약(首次若)이라고도 한다. 뒤에 삭주로 고치고, 광해주(光海州)로 고쳤다. 고려 태조 때에는 춘주(春州)라고 하였다가 안양부(安陽府)로 올렸다. 태종 계사년(1413, 태종 13)에 춘천군으로 고쳤고 을미년에 부로 승격시켰다. ○ 수춘(壽春)ㆍ봉산(鳳山)이라고도 한다. ○ 11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5리이다. ○ 기린(基鱗)은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기지군(基知郡)이다. 난산(蘭山)은 고현이다. 고구려 때의 석달현(昔達縣)인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 철원(鐵原) : 고구려 때의 철원군(鐵圓郡)이니 또는 모을동비(毛乙冬非)라고도 한다. 신라 때 철성(鐵城)이라고 고쳤다. 궁예가 와서 도읍을 정하고 태봉(泰封)이라고 이름하였다. 고려 태조 때 동주(東州)로 고쳤다. 뒤에 현으로 낮추었다가 또 목으로 올렸으며, 철원부로 고쳤다. ○ 육창(陸昌)ㆍ창원(昌原)이라고도 한다. ○ 9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21리이다.
○ 영월 : 고구려 때의 내생군(奈生郡)이니 신라 때 내성군(奈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때 영월군으로 고쳤다. 숙종 기묘년에 부로 올렸다. 단종을 복위하였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7리이다.
○ 이천(伊川) : 고구려 때의 이진매현(伊珍買縣)이니 신라 때 이천으로 고쳤다. 광해군 초년에 부로 올렸고, 인조 계해년에는 도로 낮추었다가 숙종 정묘년(1687, 숙종13)에 다시 올렸다. ○ 화산(花山)이라고도 한다. ○ 10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0리이다.
○ 정선(旌善) : 고구려 때의 잉매현(仍買縣)이니 신라 때에 정선으로 고쳤고, 고려 때 군으로 올렸다. ○ 삼봉(三鳳)ㆍ주진도원(朱陳桃源)ㆍ침봉(沈鳳)이라고도 한다. ○ 4면,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0리이다.
○ 평창(平昌) : 고구려 때의 욱오현(郁烏縣)이니 우오(于烏)라고도 한다. 신라 때 백오(白烏)로 고치고, 고려 때에는 평창으로 고쳤다. 뒤에 군으로 올렸다가 도로 현(縣)으로 낮추고 태조 임신년에 다시 군으로 올렸다. 목조(穆祖)의 왕비 효비(孝妃)의 고향이다. ○ 노산(魯山)이라고도 한다. ○ 5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0리이다.
○ 금성(金城) : 고구려 때의 모성군(母城郡)이니 야차홀(也次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익성(益城)으로 고쳤다가 뒤에 금성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는 현으로 낮추고 또 도령(道寧)이라고 일컬었다. 본조에서 다시 금성이라고 하였다. ○ 금양(金壤)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70리이다. ○ 통구(通溝)는 속현이다. 통구(通口)라고도 쓴다. 고구려 때의 수입현(水入縣)이니 매이(買伊)라고도 한다. ○ 기성(岐城)은 폐현이다. 고구려 때의 동사홀군(冬斯忽郡)이다.
○ 평강(平康) : 고구려 때의 부양현(斧壤縣)이니 어사내(於斯內)라고도 한다. 신라 때 광평(廣平)으로 고쳤고, 고려 때 평강으로 고쳤다. ○ 평강(平江)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40리이다.
○ 금화(金化) : 고구려 때의 부여군(夫如郡)인데 신라 때 부평(富平)으로 고치고, 고려 때 금화로 고쳤다. ○ 화산(花山)이라고도 한다. ○ 7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20리이다.
○ 낭천(狼川) : 고구려 때의 생천군(?川郡)인데 야시매(也尸買)라고도 한다. 신라 때 낭천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 현(縣)으로 하고 양구를 겸임했다. 본조에서는 도로 분할하였다. 인조 갑신년에 폐읍하였다가 효종 계사년(1653, 효종 4)에 다시 설치하였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5리이다.
○ 홍천(洪川) : 고구려 때의 벌력천현(伐力川縣)인데 신라 때 녹요(綠繞)로 고쳤고, 고려 때에 홍천으로 고쳐 현을 두었다. ○ 6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0리이다.
○ 양구(楊口) : 고구려 때의 양구군인데 요은홀차(要隱忽次)라고도 한다. 신라 때 양록(楊麓)으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양구(楊溝)로 고쳤다가 양구로 고쳤다. 뒤에 낭천과 병합하였다가 태조 계유년에 도로 분할하였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10리이다. ○ 방산(方山)은 속현이다. 고구려 때의 삼현현(三峴縣)인데 밀파혜(密波兮)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 삼령현(三嶺縣)으로 고쳤다.
○ 인제(麟蹄) : 고구려 때의 저족현(猪足縣)인데 오사회(烏斯回)라고도 한다. 신라 때 희제(?蹄)로 고쳤고, 고려 때 인제로 고쳤다. 4면, 서울과의 거리는 3백 67리이다. ○ 서화(瑞和)는 속현이다. 서화(瑞禾)라고 쓰기도 하며, 서성(瑞城)이라고도 한다. 고구려 때의 옥기현(玉岐縣)인데 신라 때 치도(馳道)로 고쳤다.
○ 횡성(橫城) : 고구려 때의 횡천현(橫川縣)인데 또는 어사매(於斯買)라고도 한다. 신라 때 횡주(橫州)로 고쳤고, 고려 때에는 횡천이라고 일컬었다. 태종 갑오년에 홍천(洪川)과 발음이 비슷하다고 하여 횡성으로 고쳤다. ○ 화전(花田)이라고도 한다. ○ 8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0리이다.
○ 안협(安峽) : 고구려 때의 아진압현(阿珍押縣)인데 궁악(窮岳)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안협(安峽)으로 고쳤다. 태종 갑오년에 경기도의 삭녕과 합쳐서 안삭(安朔)이라고 부르다가 병신년(1416, 태종 16)에 도로 이전대로 하였다. ○ 3면, 서울과의 거리는 2백 20리이다.
[譯: 민족문화추진회. 원문의 내용이 길어 편의상 글을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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