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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세계사』
세계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거기서 배울 점이 무언인가를 생각해 보고, 본받아야 할 것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고민해 보기 위해서일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것이 가짜거나, 거짓이거나 미스터리 역사라면 배우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 모른다. 널리 알려진 철학자 ‘볼테르*’는 “존경할 만한 자라도 경제적 물주들이 반기지 않을 것 같으면 비방하는 만담꾼 정도”라고 치부하기도 했는데, 역사의 주요 사건 중에도 모순된 허위 정보로, 편향된 견해로, 미로처럼 전하는 것, 가짜역사가 아주 많다. 이것들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현대의 우리는 안개 속을 조금씩 헤쳐나갈 수밖에 없다.
이 책 저자 ‘그레이엄 도날드’의 생각이기도 한 이 말은 역사와 말의 의미, 일반적인 편견에 대한 많은 책들을 저술한 그는 영국의 박물학자이다.
* François-Marie Arouet Voltaire 프랑수아마리 아루에 볼테르 : 프랑스 왕국 철학자, 소설가, 시인, 역사가, 계몽사상가. 18세기 유럽 문학계의 최고 유명 인사이자, 당대 계몽사상을 대표하는 인물로, 평생을 ‘종교의 광신과 배타성’을 타파하기 위해 싸웠으며 ‘종교적 관용’을 뜻하는 똘레랑스를 프랑스 정신 일부분으로 만든 사람이다.
책은 제1부 「허위 날조의 역사」에서 가짜와 공상이 낳은 미스터리 스캔들 28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커다란 분쟁을 유발한 사건들도 미스터리 같은 경우가 많다. 세계사를 이렇듯 재미로 공부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면서 책 속으로 들어가 본다.
‘잔 다르크’는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 왕위 다툼을 놓고,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간 지속된 전쟁, 즉 「100년 전쟁」을 끝낸 프랑스 영웅으로 묘사되는 인물이다. 그녀의 영웅담은 책으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당사국도 아닌 우리나라 어린이들도 다 아는 이름이다. 그녀는 프랑스 본국도 아닌 로렌 지방의 작은 공국(公國)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전쟁에 가담하고 장군이 되어 전쟁을 이끌었다는 이야기는 프랑스 역사책 어디에도 없다. 19세기 나폴레옹 시대에 ‘꿈속에서 어떤 목소리를 들었고 환영을 보았다’는 어느 작가의 젊은 처녀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널리 퍼지면서 영웅으로 만든 것이다. 잔 다르크는 19세기에 지어낸 인물이며, 그게 아니라고 해도 기껏 궁에서 주는 임금을 받으면서 깃발을 들고 군대를 따라다니던 수많은 처녀들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잔 다르크가 1431년 이후까지 생존했다는 기록은 있다. 하지만 그것도 1749년에 기록된 것이고, 1855년에야 처음 발표되었다. 어쨌든 잔 다르크의 이름과 국적에서부터 그녀의 공적, 재판,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기 때문에 그녀의 이야기는 진위성 여부를 믿기는 어렵고 많은 의혹에 쌓여있다.
‘닌자’라고 하면 일본의 무예자, 암살자 등으로 알고 있는데 공중으로 높이 뛰어올랐다가 아래로 쭉 내려와 맨손과 부러진 젓가락만으로 수십 명의 적들을 죽이는 닌자 영화는 우리뿐만 아니라, 서양인에게도 신기한 모양이다. 그러나 전형적 닌자는 보통의 일본 여성으로, 그들은 대부분 가사 일로 보냈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검은 도복을 입고, 살금살금 다니는 치명적인 암살자라는 개념을 갖게 되었을까?
옛날부터 일본인은 자신들을 ‘니폰’또는 ‘니혼’으로 불렀다. 둘 다 ‘태양이 떠오르는 곳’을 의미하는 상형문자(日本)의 음독이고, 제팬은 중국에서 기원한 지명이다. 여행업을 부흥시키고 싶었던 일본인이 일부러 채택하여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중국은 일본이 작고 순종적이라는 의미에서 倭라고 칭했는데 그 말이 외교적 문제를 일으키자 중국어 지푼으로 쓰다가, 중국과 교역하던 서양인들이 일본에 대해 왜나 지푼이라 불렀던 것이 제팬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서양 문화가 쓰나미처럼 일본에 몰아닥치자 서양식 식단으로 단백질 섭취량이 늘어나며 일본인의 몸짐도 커졌다. 심지어 50년 만에 15㎝가 커졌다고 한다. 그러나 콜라, 햄버거, 감자튀김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서양인들은 일본의 많은 역사적 측면들을 오해하고 있다.
닌자란 말은 19세기 영어 사용자 층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시노비 노 모노조’(忍びの者-잠입자)라는 일본어 훈독이 너무 길어 그냥 忍과 者를 합쳐 발음한 것이다. 8세기 초, 일본에 처음 등장한 시노비는 주인집에 드나드는 손님들의 신상이나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정보를 팔 의향이 있는 하인들, 요리사, 정원사, 가정부, 첩 등을 일컫는 말이었다. 시노비들은 ‘손에 피 묻히는 일’은 하려 들지는 않았을뿐더러 그런 일을 시킬 만큼 미덥지도 않았다. 이 때문에 중요한 일은 사무라이가 투입됐다. 자객이나, 완곡한 표현으로 ‘어둠 속의 잠입자’로 불렀지, 시노비라거나 닌자는 아니었다.
자객이 다른 출입자들의 눈에 띄지 않은 채 어떤 장면에 들어가야 할 경우, 그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진 의미로 가부키에서 검은 옷을 입었는데, 이로 인해 살인청부업자들은 검은 옷을 입고 잠행한다는 개념을 갖게 되었다. 닌자들 무기의 진짜 모조품은 마치 영국 기사들이 살인을 위해 휘둘렀다는 철퇴처럼 그저 현대의 발명품일 뿐이다. 표창도 자객이나 건달들에 의해 사용되었다는 수많은 역사적 문헌이 실제로 존재하긴 하지만, 무기의 성능이 날카로운 꼬챙이나 양날검 정도일 뿐이었다. 영화에서는 그렇다 쳐도 일본인이든 유럽인이든 실제 악인의 가슴에 꽂힐 만큼 세게 칼이나 표창을 던질 수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냥 추적자를 따라오지 못하게 중단시키고자 던진 것일 것이다.
무사 道에 대한 모든 상상의 개념들은 대개 일본 작가이자 외교관이든 니베토 이나조의 「부시도」개념에서 지어낸 것들이다. 일본 정신이라는 부시도는 20세기 이전 일본 문학에 몇 번 등장하지만, 그보다는 모노조(무사의 고어)와 쯔와모노(병사)같은 용어들이 더 자주 등장한다. 포악한 사무라이의 대나무 갑옷을 뚫을 수 있기도 하다는 가라데는 일본의 봉건시대에 개발되었다. 가라데가 일본 역사 초기부터 있었던 무술이 아닌데, 그것은 당나라 소림사 승려들이 고대 독립국 류큐 왕국의 오키나와 섬을 방문했을 때 소개되어 수 세기 동안 중국 공수도로 알려져 있었다. 일본인들은 새로운 취미와 명칭으로 중국과는 연관 없어 보이려고 맨손(空手)이라는 이름으로 무술을 지칭해 바꾸었다.
닌자와 관련은 없지만, 햐얀 얼굴에 매우 세련된 의상을 차려입고 고수입에 성 노예를 연상하는 게이샤(藝人)는 잘못된 인식이다. 일본에서 이런 인식은 무지의 소치고, 모욕적인 것으로 여긴다. 더구나 게이샤는 원래는 모두 남성들이었으며 지금도 소수가 남아 있다.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이 성매매와 관련된 적은 결코 없었다. 숙련된 게이샤가 되려면 최소 5년을 무보수로 예능을 연마해야 하는데, 18세기까지도 개인적으로 고용되는 남자 예능인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음악, 시, 음담패설 같은 형태로 찻집 등에 모여 소집단에게 유흥을 제공했다.
남자든 여자든 게이샤에게 돈을 주고 잠자리를 하자는 것은 서양에서 사적으로 오페라 가수로 기용된 디바에게 똑같은 서비스 제공을 기대하는 것과 같다. 1770년까지도 도쿄에서 남성 게이샤가 여성의 2배로 여전히 우세했다. 현재 시세로 따지면, 5년간 게이샤 수업을 받는데 드는 돈이 35만 파운드(한화 5억 5천만 원), 공식적인 찻집에서 이들의 노래 몇 곡을 청해 들으면 1,500파운드(한화 240만원)를 지불해야 한다. 쉽게 꿈꿀 수는 없어 보이는 돈이다.
『동방견문록』이라는 책은 허풍쟁이로 알려진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이고, 회고록인 『백만 가지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다. 이것을 어떤 회의주의자는 『백만 가지 허풍』이라고 하기도 한다. 폴로는 제노바와 베니스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중국에서 오랫동안 체류하다 돌아왔으며, 1296년 아나톨리아 해안에서 제노바 사람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동료 수감자인 낭만주의 모험작가 ‘루스티첼로’에게 자신이 불러주는 대로 책을 쓰게 했는데, 그것이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라고 불린다.
그는 죽기 직전에도 “내가 본 것의 절반도 쓰지 않았어! 사람들이 내 말을 믿지 않을 거라 생각했으니까”라고 떠벌였다고 한다. 그가 중국에 가지 않았다는 것은 곳곳에서 밝혀지고 있다. 당시 20대 후반이던 그가 쿠빌라이 칸이 기독교에 관심을 갖자 그레고리 10세 교황 사이에 중재자 역할까지 맡았고, 3년 동안 양저우(楊州) 지역을 통치하기도 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실제가 아니며, 마르코와 폴로 집안 사람들이 중국에 갔다고 쳐도 그의 말대로 칸을 알현한 최초의 유럽인이 아니었으며, 그가 칸과 교황을 중재했다는 주장에 대해 중국 쪽, 바티칸 쪽 어디에도 그에 관한 기록은 없다. 마찬가지로 양주시의 기록에도 폴로 가의 통치에 대해 아무 언급이 없다.
당시 중국인들은 손님을 집으로 데려가 접대하기보다는 찻집으로 데려갔기 때문에 차에 대해 언급이 없는 것도 이상하다. 그의 주장대로 칸의 관리였다면 다른 관리들로부터 초대를 받거나 상대방도 폴로로부터 초대받았을 것인데, 그런 내용이 전혀 없고, 양저우에 관하여도 기념물 하나 기록된 것이 없다. 폴로가 체류했을 때는 중국 기록에 그의 이름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그가 그 나라 땅을 밟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많은 역사학자들의 주장이다. 폴로는 흑해보다 더 멀리 나간 적이 없으며 흑해 근해에서 동방 무역상들을 통해 돈을 벌면서 거기서 만난 이들에게 주워들은 이야기를 글로 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는 것이다. 17년이나 중국에서 보내면서 돌아올 때 중국 물건 하나 안 가져왔다는 것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학교에서는, 특히 미국 학교에서는, 여전히 아메리카 대륙은 제노바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에 대륙을 발견하고 동시대인인 ‘아메리고 베스푸치’를 기려서 그의 이름을 지명에 붙였다고 배우고 있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땅을 밟아 본 적이 없다. 그는 죽을 때까지 거기를 서인도라고 생각했다.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러시아인으로, 2천 년 전에는 북아메리카 알레스카와 러시아와 연결되어 있었으며, 시베리아 부족들은 쉽게 아메리카 그 땅을 거닐 수 있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반세기 전에 유럽의 바이킹들이 뉴욕주 허드슨 유역에 왔었다는 것이 2017년 조사에서 발견되었음에도 모든 신대륙 발견의 영예는 어떻게 콜럼버스가 거머쥐게 되었을까? 그 답은 영국과 신흥국가 미국 사이에 대서양을 가로질러 피어오른 적대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19세기 초 미국 의회는 워싱턴을 새로운 수도로 확보해 두고, 그곳을 ‘콜럼버스 특별구’라는 명명했다. 의회는 새로운 국가정체성을 지닌 채 영국 왕실과는 거리 두기를 간절히 원했다. 독립된 미래를 추구하고자 항해에 나섰던 콜럼버스를 승격시켜 모든 것을 콜럼버스화 했다.
콜럼버스 대학, ‘콜럼버스 만세’에 이어 1942년 콜럼버스 항해 300주년을 기념행사에서는 콜럼버스 만세를 사실상의 國歌로 지정했다. 하지만 아이티 섬의 경우, 콜럼버스가 도착할 당시에만 해도 약 50만 명의 아라왁 족이 살고 있었으나, 2년이 지나자 절반 이상이 죽거나 옥에 갇혔다. 더불어 그들이 요구하는 금을 못 내면 윤간과 신체 훼손을 당했다. 현재 미국의 21개 주에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기념일 축제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으며, 29개 주에서는 ‘원주민의 날’로 바꿔 기념하고 있다.
태평양 저 아래, 아이티섬에는 ‘모아이 석상’이라 불리는 미스터리가 있다. 루파누이라 불리는 이들이 여기에 정착한 것은 대략 700년 경으로, 유럽인이 여기 처음 발을 들인 것은 1722년 부활절 일요일 실수로 배에서 내린 네덜란드 탐험가 ‘자콥 로즈번’이다. 당시 불모의 이 섬에는 주민 2,000여 명이 굶주리고 있었고, 이상하게 생긴 수백 개 석상이 해안가에 둘려져 있었다. 채석장에는 미완의 상태로 있거나, 운송 중 파손된 것을 포함하여 모두 1,100개가 넘었다. 궁금한 것은 이것들을 어떻게 섬 중앙에서 해안가로 옮겼을까 하는 것이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러 개의 나무통 위를 미끄러지는 설매에 올려 옮겨졌다고 믿었다. 그러나 볼록한 도로를 내려오다 보면 중심부의 지지력이 약해져서 나무통이 부러지기 때문에, 굴림 나무통과 썰매의 방식을 이용하려면 도로가 평평해야 했기에, 허점이 발견된 것이다. 2011년 미국의 두 남자가 현장에서 석상을 옮기는 실험을 해 봤다. 현지인들은 그들이 뒤뚱뒤뚱 걸었다고 하지만, 그것을 믿기는 어렵다. 아무튼 네덜란드인이 섬에 도착하자, 석상 만드는 일은 중단되었다. 원주민들이 해안에 석상을 늘어놓은 것은 아마도 침략자들을 물리치고자 한 의도였지만, 석상들이 그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자 섬 주민들은 그것을 더이상 숭상하지 않게 되었고, 조상님이 자신들을 버렸다면, 자신들도 그것을 버리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클레오파트라’는 독사에 물려 자살한 것이라고 한다. 맞는 것일까? 아니다. 그녀는 알렉산드대왕의 이복형이었던 프톨로마이오스의 후예다. 알렉산드가 죽고 마케도니아가 멸망하자, 부사령관이던 프톨로마이오스는 고대 이집트로 진격해 그곳에서 ‘헬레니즘 왕국’을 건설하고 왕이 되었다. 왕의 칭호인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5세부터 쓰기 시작했다. 이후 15명의 여왕과 후궁들이 이 칭호를 사용했다. 우리가 아는 문제의 클레오파트라 7세는 프톨로마이오스 12세의 딸로, 이름은 ‘테아 필로파토르’였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여신’이란 뜻의 그리스어다.
클레오파트라 죽음과 관련해서는 그녀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있고, 거기에 이집트 코브라가 그녀의 오른쪽 팔뚝 위를 두르고 올랐다가 가슴께로 내려오는 모습의 동상에서 볼 수 있는데, 이는 옥타비아누스가 만들었다. 이것은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굴복시킨 왕조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엉뚱한 쪽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는 남자들을 노예로 만드는 흑마술 섹스를 사용한 사악한 마녀로, ‘음탕한 복수의 여신’으로 윤색했다. 이야기는 부풀려져 뱀이 그녀의 방에 있는 무화과 바구니 속에 몰래 들어간 것으로 그려졌다. 이 그림은 외설스러운 풍자이다. 뱀의 성적 상징은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로마에서는 무화과도 똑같이 강력한 성적 상징이었다. 특히 1607년 셰익스피어는 베스터 셀러『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쓸 때 플라타르코스의 『영웅전』을 기초로 삼았는데, 1579년 간행된 『영웅전』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클레오파트라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모차르트를 죽인 것은 정적인 살라에리였을까, 아니면 매독 때문일까? 음악의 천재로 알려진 모차르트는 8세에서 19세 사이에 이미 그가 작곡한 교향곡의 절반을 작곡했다. 질투심에 눈이 먼 ‘안토니오 살라에리’에게 살해되었다는 이야기는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실화처럼 그려졌다. 살라에리는 1750년생으로 모차르트 보다 6살 연상이다. 두 사람이 만났을 당시 살라에리는 비엔나의 카펠미아스트(지휘자)라는 확고한 직책을 가진 단연히 당대 최고의 음악가였다. 그 둘이 개인적 원한이 있었다는 특별한 증거는 없다.
신체적으로 건강하지 않았던 모차르트는 매독, 장티푸스, 천연두, 기관지염, 폐렴과 세 차례의 류마티즘을 겪다 1791년 11월 급작스럽게 쇠락해 졌으며, 당시 35살로 고열, 구토, 이중 요실금, 심한 발한 등과 방에서는 심한 악취가 났다고 한다. 그후 2주 만에 몸 전체가 심하게 부풀어 오르더니 의식불명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누군가는 독살에 의한 죽임이라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으나 증거는 없다.
아무튼 살라에리는 앙심과 시기심에 사로잡혀서 젊은 천재를 죽였다는 소문에 괴롭힘을 당했다. 그것은 너무 많은 전기에 머리가 텅 빈 여자로 묘사되는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는 남편이 사망한 몇 년 후 아들 프란츠를 살라에리에게 보내 개인교습을 시켰는데, 살라에리가 남편을 죽였다면 도저히 가능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여러 언어를 구사할 줄 알고 수준 높은 소프라노였던 그녀는 모차르트 사후에도 유럽 전역에서 추모 콘서트를 관리하고, 남편의 작곡 목록을 보호함으로써 그의 죽음이, 명성이 되도록 했다. 1979년 ‘피터 샤퍼’는 푸시킨의 희극을 토대로 《아마데우스》를 완성했는데, 영화화된 이 희극은 전형적인 두 주인공의 모습을 우리들 머리 속에 각인되게 만들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누가, 왜, 어떻게 만들었을까? 4500년 전, 나일강 서쪽 기자 외곽에 세워진 것 중에 가장 높은 것이 147m, 제4왕조 케옵스 왕이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은 거의 4천 년 동안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인공 구조물로 알려졌다 14세기 링컨 대성당이 158m에 이르자 최고자리를 내주었으나, 1549년 첨탑이 폭풍우로 쓰러지면서 다시 지위를 되찾기도 했다. 피라미드는 대부분 2.5톤 정도의 석회암 벽돌이지만, 화강암 벽돌의 경우 15톤에서 70톤에 이르는 것도 있다. 벽돌은 동물이 끄는 수레를 이용해 운반했을 수 있었겠지만, 무게를 지탱할 차축이 필요했을 것인데, 당시는 청동기시대로서 수레의 차축이 굴러가자마자 휘어지거나 부러졌을 것이다.
지금까지 가장 인기 있는 건설 방법은 작업 집단을 크게 4개 조로 나눠 첫째 조는 채석장에서 석회암 벽돌을 절단하여 모양을 만들고, 두 번째는 나무 롤러나 황소가 끄는 썰매를 이용하여 벽돌을 현장으로 끌어오고, 거기서 세 번째 조가 피라미드를 쌓을 측면에 엄청난 경사대를 쌓아 올린 뒤 벽돌을 끌어 올려 네 번째 조에 전달하면 마지막 조가 지렛대를 사용하거나, 직접 굴려서 벽돌의 위치를 잡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끝나면 측면의 경사대를 제거하고 구조물이 드러난 상태에서 기와판을 입혀 마감했다는 것이다.
입구, 회랑, 석실 내부 천장 등에 쓰인 화강암들은 채석장에서 깎인 다음 나일강을 따라 800㎞ 가량 이동되었고, 그 다음에는 인공 운하를 따라 건설 현장에서 가까운 지점까지 운송되었을 것인데 이 마지막 운반에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피라미드 하나를 만들려면 약 20년이 걸렸으므로 이를 위해서는 하루에 400개 이상의 벽돌을 제작하고 설치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최소 연인원 10만 명, 하루에 2만 이상이 동원되었을 것인데, 건설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학설은 최근에 나왔다. 프랑스 물질 과학자 다비도비츠는 석회암 가루와 잡석을 채석장인 와디에서 운송해 와서 나일강물이 흘러들어오는 거대한 웅덩이에서 녹여진 다음 나트론과 섞었다는 가설을 세웠다. 나트론은 이집트에서 풍부하게 발견되었던 천연 소다 가루로 미라의 방부제로도 사용된 것이다. 그 강물이 증발되고 나면 제작자들 손에는 석회석 시멘트 형태가 남게 되고, 이제 가루는 바구니에 담겨 구조물 위로 옮겨져서 기름이 칠해진 얇은 나무틀에 넣어진다. 이 초기 단계 벽돌들을 태양 아래 놓고 말리면 그것들이 틀 주조를 위한 틀 역할을 하고, 새 벽돌들이 놓일 때마다 수축으로 인해 공예적인 이음매 같은 1∼2㎜의 선이 남게 된다. 이것이 바로 벽돌 사이에 선이 생기게 된 과정이다. 다비도비츠는 실험단계를 넘어, 이런 방식으로 몇 개의 석회암 벽돌을 만든 다음 피라미드에 보이는 동일한 이음매를 재현했다. 그가 제작한 벽돌들은 육안으로 보면 전혀 석회암과 구별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방식-돌을 쪼개서 옮겨 쌓았을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이야기로 벽돌을 쌓은 것이 피라미드다.
피라미드 다음으로 억척을 낳는 구조물이 있다면, 그것은 영국 북부에 있는 스톤헨지일 것이다. 중세까지 힘센 거인이 이것을 지었다고 하고, 숭배와 제사의 장소로 보았으며, 1960년대는 거대한 계산기로 인식되기도 했다. 지은 지 9,000년이 된 이것에 대한 억측은 시대별로 달랐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서는 영국 문화재청의 보호를 받게된다. 1933년 사업으로 큰돈을 번 ‘알렉산드 케일러’가 막대한 부로 여기 땅을 통째로 사버렸다. 그리고 그는 5,000년 전 모습을 재건하기 위한 프로젝트에 착수했는데, 이로서 스톤헨지는 원래의 모습이 변형되었다.
이 기념물의 모습은 수천 년 전 모습과 20세기 상상력이 복원한 결과물이 되어 버렸다. 시대에 따라, 유행에 따라서 바뀌듯 스톤헨지의 최근 추측은 그것이 그냥 돌기둥으로만 원형으로 배열해 놓은 것이 아니라, 실제 건물로서 사용된 적이 있다는 주장이다. 지붕을 쉬우면, 1년 내내 건물로 쓸 수도 있는데 왜 돌기둥만 빙 둘러놓고, 염소 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빙빙돌며 춤을 추었겠는냐는 것이다. 외부 구멍에 들어간 목재 기둥들이 완성된 구조물을 애워 싼 일종의 외부 베란다 역할을 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붕의 이엉이나 목재 지지대는 이미 오래전에 썩어 없어졌기 때문에 적어도 당분간 지붕이 있었다는 이론은 추측의 영역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남아메리카는 스페인 사람들이 처음 발견하였고, 그들이 이주해 원주민을 동화시키고 지금은 스페인어를 주로 쓴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곳을 방문하게 되면 두렷한 아일랜드의 영향에 궁금증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하는데, 그만큼 아일랜드 문화가 뿌리 깊게 깔려있기 때문이다. 부조화해 보이는 인물로 칠레의 ‘베르나르도 오히긴스(1778∼1842)’가 있는데, 그의 동상이 여러 개 서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일랜드 서부 ‘카운티 슬라이고’출신으로 스페인 통치에서 칠레를 해방시킨 독립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최고의 지휘관이다. 아르헨티나에도 아일랜드식 술집과 음식점이 아주 많으며, 성페트릭 기념일마다 축하 행사가 열린다. 또한 리우 데 자네이루의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그리스도상도 아일랜드와 연결이 있다.
1500년대 초에 스페인과 아일랜드 남부 카운티들은 강력한 동업조합을 결성하였으며, 이로 인해 비교적 덜 알려진 아일랜드 디아스포라(집단이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1519년 헤르난 코르테즈가 멕시코를 침공하고, 1520년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남아메리카 침공하여 이들은 쉽게 이곳을 점거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피사로가 1526년 갑자기 페루에 상륙해 그 땅을 점거한 것은 아니었다. 해적이던 그는 이미 몇 차례 그곳을 다녀간 적이 있었는데, 파나마에 있을 때 페루에 금이 풍부하다는 것을 접했다. 하지만 1524년 페루 침공은 원주민에 의해 좌절됐다. 그는 페루에 남은 용감한 부하들과 더불어 선박 3척과 포병 180명으로 35,000명이 넘는 토착 군인들과 싸워 이겼다. 그리고는 집채 아니, 방 크기의 금을 착취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