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플러스코리아]안재세 전문위원=
* 서세동점 이후 과대포장된 서양중심사관, 한민족 노예화를 획책한 일제식민사관, 화하독존의 대중화사관, 왜곡·축소·비하된 자멸사관(自蔑史觀)을 떨쳐버리고, 현생 인류 세계사의 중심에서 민족적 특성을 시종일관 유지하며 역사의 격랑을 헤쳐 온 한민족의 주체적 시각으로 세계사를 재정비하는 시도의 하나입니다. 뜻있는 분들의 더 많은 연구와 보충을 통한 보다 체계적인 세계사 골격 정비가 완성되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
바. 로마의 등장
그리이스의 뒤를 이어서 지중해의 강자로 등장하게 되는 로마는, 그리이스의 유민들이 이태리 반도에 흘러 들어가서 살던 중에 발생한 조그만 도시국가로부터 출발했다. 로마의 시조는 보통 로물루스로 알려져 있으나, 또 다른 로마의 건국설화에서는, 그보다도 수백년 앞선 트로이전쟁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호머의 서사시인 '일리아드'에 소개되어서 유명해진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난 후, 트로이의 장수인 아이네이아스가 그 부친 및 아들과 함께 트로이를 탈출하여 지중해를 헤매이다가, 아프리카 북쪽 해안의 강력한 해양국가인 카르타고에 표착했다. 카르타고의 여왕은 그를 환대했으나 아이네이아스는 다시 항해길에 나서서 북쪽으로 향하여 이태리반도의 라티움에 상륙했다. 그는 그 곳에서 부하들과 함께 도시를 건설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 원주민들과 같이 지내어 가게 되었다.
그로부터 왕위가 계승되어 열여섯번째 왕이 누미토르였는데, 누미토르의 동생인 아물리우스는 형의 왕위를 찬탈하고, 누미토르의 딸인 조카 '레아 실비아'를 국가의 신인 '베스타'의 무녀(巫女)로 만들어 후환을 없애려고 했다. 무녀가 된 실비아는 수풀에 물을 길러 갔다가 군신 마르스와 만나서 쌍동이를 낳았는데, 이들이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였다. 아물리우스는 노하여 쌍동이를 광주리에 넣어서 티베르강에 버렸는데, 강기슭에 걸린 광주리를 발견한 늑대가 쌍둥이를 젖먹여 키우던 것을 어떤 양치기가 데려다가 길렀다. 이 쌍동이는 나중에 성장하여 아물리우스왕을 죽이고 외할아버지인 누미토르를 왕으로 복위시킨 후 각각 다른 지역에서 새 도시 건설에 착수했다.
그러나 레무스는 반대자들에 의하여 살해당했고(혹은 형제끼리 골육상쟁을 했다고도 함), 로물루스는 각 지역으로부터의 도망자 및 망명자들을 받아들인 결과 인구가 매우 급속히 증가했다. 따라서 로물루스의 진영에는 많은 남자들이 있었으나 그에 반하여 여자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었는데, 그 부족한 여성들을 보충한다는 게 이웃 나라인 사비니를 침략하여 사비니의 여성들을 대거 납치해 가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렀다. 이와 같이 로마는 그 시작부터 살벌한 골육상쟁과 처녀약탈 등으로 얼룩진 기묘한 역사를 전개해 나아갔다.
이태리 반도에는 로마인 말고도 여러 종족들이 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반도 북부의 곡창지대를 차지하고 있던 에트루리아인은 원래 소아시아반도로부터 이주해 왔으며, 그들 나름대로의 훌륭한 문명을 꽃피우고 있었다. 에트루리아인의 세력은 막강했으므로 로마초기의 미약한 실력으로는 그들과 상대가 되지 못했다. 로마의 왕 중에서도 적어도 두 명은 에트루리아인이었을 정도로, 에트루리아인들은 로마에 대해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기전 6세기에 가장 세력이 강했던 에트루리아인들은 서기전 6세기 말엽에는 로마인들에게밀려나기 시작했다.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인이었던 왕을 쫓아낸 후 로마귀족 중에서 임기 1년의 집정관 (콘술) 두명을 선출하여 집정하는 공화정치를 마련했다.
로마인들은 초기의 왕정시대부터 귀족들로 구성된 원로원과 시민대표로 구성된 민회를 운영했는데, 민회보다는 원로원쪽의 세력이 더욱 강한 편이었다. 귀족들은 평민들이 귀족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여러가지 제도적 수단을 마련했으므로, 자연히 귀족과 평민사이에는 갈등과 대립이 발생했다. 서기전 495년에는 드디어 쌓였던 모순이 폭발하여, 평민들은 로마시의 동북쪽 5키로미터 지점에 있는 '몬스 사케르'산에 별개의 공동체국가 건설을 시도했다. 이에 놀란 귀족들은 평민들과 타협해서, 평민들만으로 구성된 민회와 대표자를 승인하고, 그 제도는 나중에 평민회와 호민관 제도로 변천해 갔다.
호민관의 권리는 막강해서 집정관 및 원로원의 결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한 로마의 국방력은 중장비 보병에 의해 유지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로마의 농민들이었으며, 스스로 중장비를 마련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로마의 농민들은 그만한 재력을 지니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통치자들은 농민들에 대해 세심한 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의 정복사업을 가능케 했던 강력한 중장비보병의 문제는 곧 로마의 사회문제이기도 했다.
사. 로마의 발흥과 포에니 전쟁
서기전 396년에 당시 로마의 강적이던 에트루리아인의 최대세력인 베이이가 함락됨으로써 로마는 이태리 반도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그 10여년 후인 서기전 386년에는 중앙유럽에서 막강한 세력을 떨치던 켈트인들의 대이동의 여파로, 이태리 반도로 들이닥친 켈트인들에게 로마시가 점령당하는 사태도 발생했으나 간신히 이를 물리쳤다. 평민출신의 호민관들 중에는 빈민구제를 위해 애쓴 지도자들도 있었으나 이들의 대부분은 일종의 새로운 귀족으로 변신하게 되는데, 이러한 새로운 귀족들을 벌족(閥族:노빌레스)이라고 불렀다. 이들 벌족들은 권세와 재물을 함께 움켜쥐고 약 300여년간 그 세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계속되는 이태리 반도내의 전쟁을 통하여 영토는 확대되어 갔으나 빈부의 격차가 점점 벌어졌고, 마침내 평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러한 모순은 계속 되풀이되었으며 그에 대한 해결책도 비슷하게 되풀이되었다. 그 해결책이란 다름 아닌 끝없는 정복전쟁에 의한 영토획득이었다. 논리부재의 정복전쟁은 '로마시민의 권익증진'이라는 미명하에 합리화되었다.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많은 나라들이 빽빽하게 들어 차 있던 지중해 지방에서 계속적인 영토확장을 꾀하던 로마는, 당시에 지중해 세계의 최강자로서 군림하던 카르타고와 맞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카르타고는 지중해는 물론 대서양, 인도양까지도 진출하면서 아프리카 연안에 많은 식민도시들을 거느리고 있던 큰 세력이었다. 카르타고는 농업·상업 등이 골고루 번창하던 부유한 나라였으며 귀족이 중심이 된 공화국이었다. 카르타고에 비하면 국력이 빈약하기 짝이 없던 로마가 카르타고보다 우세한 점은 바로 터무니없는 정복욕뿐이었다. 시칠리아섬의 내분을 핑계삼아 전쟁을 확대시킨 로마는 약 15년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시칠리아를 장악하고 일단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카르타고인들은 이로 인해 로마에 대한 경계심과 극도의 적개심을 품게 되었으며, 두 나라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양립할 수 없는 철천지 원수지간이 되어 버렸다. 특히 지중해의 최대 요충지인 시칠리아섬을 잃은 카르타고는 경제적 파탄지경까지 겪게 되었으며, 이러한 경제적 곤경은 더욱 더 로마에 대한 복수심을 유발했다.
이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으로, 카르타고의 용장 하밀카르는 카르타고의 식민지였던 이베리아 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여 카르타고의 국력을 보충하면서, 복수를 위한 군사력 증강을 시도했다. 그의 아들 한니발은 로마에 대한 승리를 일생의 목표로 삼고 강군을 양성하여, 마침내 지중해 동부에서 일어난 로마와의 패권경쟁을 기회삼아 험준한 알프스산줄기를 넘어 로마를 공략했다. 불시에 허를 찔린 로마는 연전연패하는 판국이 되었다. 그러나 카르타고의 얼빠진 귀족들은 한니발의 인기를 떨어 뜨리려고 한니발에게 아무런 원군도 보내지 않았고, 때마침 카르타고를 습격한 로마장군 스키피오의 대군을 막기 위해 한니발이 이태리반도에서 철수함으로써, 카르타고는 로마에 승리할 수 있는 아까운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서기 302년에 북아프리카의 자마에서 벌어진 두 나라의 결전에서 카르타고는 마침내 패망하여 로마의 속국처럼 되어 버렸고, 오십년간 막대한 배상금을 매년 로마에 물어내야만 하였고, 20척을 제외한 모든 선박을 로마에 빼앗겨 버렸다. 로마는 알렉산더 이후에 약화된 마케도니아를 공략하고, 소아시아 반도의 셀리오코스 왕조와도 겨루어 승리하는 등 승승장구하여, 수많은 노예들과 전리품들이 그칠 사이 없이 로마에 흘러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로마인들은 카르타고가 다시 부흥하는 것을 꺼려서 카르타고를 완전히 지도상에서 지워 버리려고 별렀다. 약자에 대하여 일종의 집단가학증에 빠져 들어가기 시작하는 로마인들을 부추겨서 '카르타고 멸망'을 주장하고 다닌 자는 자신의 도덕성에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던 웅변가 카토였다. 광신적인 카르타고 타도론자들에 의하여 크게 고무된 로마의 욕심 사나운 시민들은, 마침내 이솝우화에 나오는 바와 같은 늑대의 논리를 드러내어,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아 카르타고를 총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들 로마인의 조상이 늑대젖을 먹고 자란 것과 그 근본 정서에서 과히 무관하지 않았을 카르타고 섬멸전쟁에서, 카르타고는 변변한 장비도 없이 4년간이나 농성한 끝에 결국 멸망의 비운을 맞이하였고, 살아남은 카르타고인들은 모두 노예로서 다른 지역에 팔려가 버렸다.
이로써 약육강식적인 늑대의 본성을 드러낸 로마는 지중해 연안 대부분의 지역을 수중에 넣고 약소국들을 협박하거나 굴복시켜 갔다. 그칠줄 모르는 침략야욕에 발동이 걸린 로마는 또한 숱한 노예들을 양산해 내었는데, 델로스섬의 가장 큰 노예시장에서는 하루에도 수만명의 노예들이 매매되었다. 멀쩡하게 평화롭게 살고 있던 양민들을 별 이유도 없이 공격하여 그 재산을 다 약탈하고, 양민들을 하루 아침에 노예로 팔아 먹음으로써 마치 암세포가 번져가듯 살쪄 간 로마의 전통은, 근세에 들어와서 다시 한 번 '제국주의'로서 부활하게 된다.
* 참고 : 카르타고 멸망 당시에 로마의 침략자들은 50여만권에 달하는 귀중한 인류의 보배인 서적들을 함께 불태워 버림으로써 지중해세계의 야만화를 가속시킴. 자. 로마의 타락상▲ 로마의 전쟁-로마는 보병 위주로 싸웠다-그래서 아시아 기마유목세력인 훈족에게 굴복당하여 조공을 바치게 된 것이다. © 편집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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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랄한 침략전쟁을 통해서 끝없이 노예를 만들어 내었던 로마는, 노예들을 인류 역사상 가장 악랄하게 다루기도 했다. 한 번 노예가 되면 거의 대부분이 죽을 때까지 노예생활을 해야 했고, 그 자손들까지 노예로서 살 수밖에 없는 일이 흔했다. 노예의 종류도 다양하여 광산노예·농장노예·군선젓는 노예·일반 사무직에 종사하는 노예 등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노예는 로마시민의 가학성 욕구를 만족시켜주기 위하여 서로간에 사생결단을 해야 하는 검노(검투사)들이었다. 또한 아무런 희망도 없이 단지 죽는 날까지 온갖 학대와 모욕을 당하며 살아가는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노예들은 수차례 반란을 시도하기도 했다. 서기전 130년경에 시칠리아섬에서 발생한 노예봉기와, 서기전 73년 이태리반도 남부에서 발생한 스파르타쿠스의 봉기는, 로마사회의 인간성 말살적인 타락을 고발한 노예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중요한 사건들이었다.
시칠리아의 노예봉기를 전후하여 등장한 호민관 그락쿠스형제는, 타락일로를 치닫는 로마사회를 구제해 보고자 빈민과 평민들을 위한 많은 개혁을 시도했으나, 오히려 욕심 사나운 귀족들과 원로원세력에 의하여 피살되고 개혁은 좌절되었다. 그대신 로마는 이태리 반도의 전 주민들에게 로마시민권을 부여함으로써 침략정책 수행을 더욱 원활히 해 나가는 보다 야만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마리우스·술라 등의 독재자들에 의하여 공포정치가 계속되면서 로마의 도덕적 타락은 더욱 심해졌다.
약 40년에 걸친 공포정치 시대가 지난 후 등장한 폼페이우스·크랏수스·케사르(시저) 등도 로마사회의 인류문명적 발전에 별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지중해연안의 소아시아·북아프리카·시리아·팔레스타인 등지를 점령한 로마는 더욱 세력을 밀쳐서 동쪽으로 나아가려 했지만, 서아시아의 각 나라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서 더 이상의 팽창이 불가능하게 되자, 이번에는 유럽지방의 서부지역과 북부지역의 야만부족들을 정복해 나아갔다. 지금의 프랑스 지방인 갈리아 지방을 거쳐서 대서양 연안에 이른 로마의 정복자들은, 드디어 도버해협을 건너서 지금의 영국섬(브리타니아)에 이르름으로써, 명실공히 유럽세계의 거의 전 지역을 정복한 대지배자로서 군림하게 되었다.
서기전 약 3,4백년동안에 급성장하며 '발전'해 간 로마노예사회는 부유층 및 통치집단들의 사치와 방탕이 극에 달하여, 노예로 전락한 피지배 민족들과 사회하층을 이루고 있던 평민들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지는 호화로운 귀족들의 생활의 이면에서는 동물보다 못한 삶을 억지로 죽지 못해 이어 가는 숱한 민중의 희생이 뒤따랐던 것도 여느 야만사회와 다를 것이 없다. 이렇게 죽지 못해 마지못해서 어거지로 복종하며, 인간다운 삶을 모두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숱한 민중의 슬픈 운명을 바탕으로 하여 강압적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었던 소강상태를, 후세의 몰지각하고 무감각한 서양의 역사가들이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고 하며 굉장히 문물이 아름답던 시대로 오해하고 있던 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