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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1968년 중학교 2학년 시절로 생각된다. 어떤 교과목 시간에 공부하기 싫은 일부 학생들이 선생님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다. 견공(犬公)께서도 장소를 보아가면서 똥(糞)을 산다는 속담이 있듯이 그 선생님께서는 곧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아예 교탁 위에 걸터앉으신 선생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농담으로 하시는 말씀이 “이런 경우에는 급장이나 부급장 학생이 ‘왕누깔(10원에 5개를 살 수 있는 조청과 유사한 사탕)’이라도 사가지고 와서 드시라며 목에 기름칠을 해주어야 이야기가 순조롭게 나오지 않겠느냐”고 하시자, 급우들은 일제히 다음번에는 준비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일제(일제강점기) 때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중학교 교사인 어느 일본인이 일요일에 나이 어린 아들을 대동하고 빵집에 볼 일이 있는 터라 그곳에 들러 주인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갑자기 빵집 주인(1968년 당시는 오늘날처럼 “빵집 사장”이라 호칭하지 않고 “빵집 주인”이라고 호칭하였음)께서 일본인 교사에게 말하기를 상점에 전시된 빵 중에서 한 개가 없어졌다고 하면서 그 빵을 당신의 아들이 먹은 것 같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교사는 평소 아들에게 철저한 가정교육을 시켜왔던 터라 그것을 부정하고 싶었으나 어린 나이에 견물생심이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들에게 빵을 훔쳐 먹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아들은 빵을 훔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일본인 교사는 자기 아들이 두려운 나머지 잘못을 숨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들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라, 빵값은 아버지가 대신 지불하겠으니 걱정하지 말고 정직하게 말하라고 했더니, 아들이 말하기를 결코 훔쳐 먹은 일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빵집 주인은 아이가 거짓말을 한다며 빵을 훔쳐 먹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며 강경하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본인 교사는 아들에게 빵을 훔쳐 먹었느냐고 다그치며 물었더니 아들은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일본인 교사는 빵집 주인에게 아들이 거짓말을 했다면 뱃속에 아직 소화되지 않는 빵이 있을 것이라며 그 자리에서 일본인 교사는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던 기다란 칼인 일본도(日本刀:당시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때는 선생님의 권위를 위해 교사들도 칼을 차고 있었다고 함)를 칼집에서 뽑은 후에 아들의 배를 가르고 다시 위장을 잘라 그 속에 든 분비물을 확인하여 빵집 주인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물론 빵을 먹은 흔적은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정직을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 일본인 교사의 그와 같은 단호한 처사에 빵집 주인은 사색이 되어 손이 발이 되도록 일본인 교사에게 사죄하였다고 한다. 이야기를 끝마친 선생님께서는 위의 일화는 당시 신문에 보도되어 크게 화제가 되었으며 제국주의 일본이라는 나라는 비록 나쁘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불신을 받는 행동은 죽음보다도 더 치욕스럽게 생각하는 그러한 정신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며 이야기를 마치셨다. 당시에는 앞의 이야기가 필자에게 크게 감명을 주지 못하였는데 20세가 넘어서자 문득 그 이야기가 생각나면서 가슴 깊이 자리 잡기 시작했으며 한평생 잊지 않고 살아왔다.
《제2화》
이때(춘향이가 옥에 갇혀있을 때) 한양성 도련님(이몽룡)은 주야로 시서백가어(詩書百家語:시와 문장 그리고 공자, 맹자 등 제자백가의 말씀)를 숙독(熟讀:익숙하도록 읽음)하였으니 글로는 이백이요, 글씨로는 왕희지라, 국가에 경사 있어 태평과(太平科:나라가 태평함을 축하하고자 과거시험을 실시)를 보이실새, 서책을 품에 품고 장중(場中:과거 시험장 내부)에 들어가 좌우를 둘러보니 억조창생(億兆蒼生:수많은 사람들) 허다(許多:모두가), 선비 일시(선비들이 한꺼번에) 숙배(肅拜:임금에게 절을 함)한다. 어악풍류(御樂風流:궁중 음악) 청아성에 앵무새가 춤을 추고 대제학(大提學:정2품 벼슬) 택출(擇出:여러 개를 골라 냄)하에 어제(御題:임금이 하나를 정하여 직접 내린 과거시험의 글 제목)를 내리시니 “춘당춘색고금동(春塘春色古今同:‘춘당’은 과거시험을 실시하던 건물인 ‘춘당대’를 뜻하는데, 춘당대의 춘색 즉, 봄 경치가 ‘고금동’ 다시 말해, 옛날과 지금이 동일하다는 말로서 전체적으로는 ‘나라가 태평하다’는 뜻임)”이라, 이도령 글제(글의 제목)를 보니 익히 보았던지라, 왕희지 필법으로 조맹부체를 이어받아 일필휘지(一筆揮之:글씨를 단숨에 써 내림) 선장(先場:가장 먼저 답안지를 제출함) 하니 상시관(上試官:시험감독관) 글을 보고 자자(字字:글자 마다)이 비점(批點:답안지 문장 중에 잘된 곳에 찍던 둥근 점)이요, 귀귀(句句:구절 마다)이 관주(貫珠:뛰어난 구절에 표시하는 동그라미 표시)로다. 용사비등(龍蛇飛騰:용과 뱀이 어울려 꿈틀거리는 듯한 생동감 있는 글씨)하고 평사낙안(平沙落雁:하늘을 날던 기러기가 평평한 모래사장에 내려앉듯이 글씨의 끝부분의 획이 매우 정교하고 가늘게 마무리 지어진 모습)하니, 금세(今世:지금의 세상)의 대재(大才:큰 인재)로다.
이상은 1972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에 나오던 「춘향전」의 서두 부분인데, 54년 전에 접한 글인지라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았다. 그 이유는 위의 글을 신뢰하여 온 탓으로 인하여 나의 뇌 기능에 착오를 일으켜 객관적인 판단을 방해하였음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신문, TV 등 우리 사회의 언론도 이에 한몫을 톡톡히 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인재를 채용하는 과거시험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1)첫 번째는 군(郡) 단위의 지방에서 실시하는 향시(鄕試)에 합격해야 한다.(2)두 번째는 한양의 성균관(오늘날의 국립대학으로 전국에 1개소 뿐임)에서 주관하는 사마시에 합격해야 한다(3년마다 실시하며 생원 100명, 진사 100명을 합격시킴) (3)사마시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들만이 응시할 수 있는 식년시(원칙적으로 3년마다 실시)는 (4)1차 시험인 “동당시(250명 합격)”와 동당시에 합격한 사람만이 응시할 수 있는 2차 시험인 “회시(원칙은 33명 합격)”로 구분되는데, 회시에 합격하면,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말함. 회시에 합격한 33명은 다시 (5)면접 시험인 “전시(殿試)”를 치르는데 여기에서 최종 순위를 정하여 1등을 하면 “장원급제”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장원급제하면 9품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5품이나 6품의 관직을 바로 하사받을 수 있고, 전시에서 앞순위에 있으면 먼저 임용되고 뒷순위에 있으면 1년 정도 기다려야 관직에 임용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과정을 설명한 이유는 이러한 체제하에서 부정과 비리가 어떻게 행하여 졌느냐를 밝혀내는 재미도 솔솔하기 때문이다. 세종 임금 시절은 중국의 요순시대에 비유되는 조선의 태평성대다. 그런 연유로 후세 사람들은 “세종대왕”이라 칭하며 서울의 한복판에 동상을 세워 지금도 사람들이 기리고 있는 것이다. 정기적인 과거시험인 식년시는 3년마다 치르며 당해 연도의 초봄에 실시하는데 그 이유는 농번기를 피하기 위해서다. 필자의 18대조인 성균관 사성(현 서울대학교 학장급) 정 종소께서는 세종 29년 1447년 봄에 실시한 식년시에서 33명 중에서 10등으로 급제하셨다. 그리고 필자의 9대조인 정 중기(1685~1757)께서는 영조 때인 1727년 증광시(춘향전의 태평과와 유사함)에 응시하여 1차 시험인 ‘동당시에 1등’하고, 2차 시험인 ‘회시에 다시 장원’을 하여 문중에서는 “대장원(代壯元:연이어 장원함)”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진작 문과 방목(문과급제자 명단)에는 43명 급제자 중에서 36등으로 급제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아드님인 필자의 8대조인 죽비공 정 일찬(1724~1796) 선조의 문집에 의하면 부친께서 문과에 장원하여 조랑말을 타고 한양 성내를 행진하였으며 당시의 일화를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필자는 논리적으로 생각하기를 회시 장원이 엉터리이거나 아니면, 문과 방목이 엉터리이거나 두 가지 중에 어느 하나는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확인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객지 생활을 해온 필자와는 달리 유년 시절부터 한문을 배우고 또한 고향마을 어른들로부터 들은 식견도 풍부한 연상인 분께 사실관계 여부를 질문을 해보아도 답변을 회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수년 전에 문중에서 경북 안동 소재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 보관한 자료가 책으로 발간되었다는 소문을 접하고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아 한 권을 입수하여 살펴보니, 회시에 장원한 것도 사실이고, 과거시험 급제자들이 받는 홍패(합격증서)에도 병과 00등으로 기재되어 있어 문과 방목 역시 엉터리가 아님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두 가지 상반된 결과를 조합시켜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다. 고민 끝에 마침내 양자를 포괄하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과거시험에서 필기시험인 동당시와 회시의 답안지에는 응시자의 성명과 출생 연도, 출생지, 본관, 그리고 부친과 조부, 증조부 등의 이름과 그들이 벼슬을 역임한 경우에는 관직명을 기재토록 하되, 상시관(시험관)이 채점을 함에 있어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하여 인적 사항은 노출되지 않도록 조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33명 안에 일단 진입하면, 면접시험 즉 전시(殿試)를 통하여 학과시험 성적과는 무관하게 합격 순위를 다시 정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면접시험은 학과 시험과는 달리 응시자의 인적 사항이 공개된 가운데 평가를 하였던 것이다. 그와 같은 연유로 개국공신의 후손이거나 권문세가의 자녀 및 후손들은 면접시험 성적이 상향 조정되어 전체적으로 선순위로 급제하여 유리한 조건에서 관직 생활을 하도록 배려하였으며, 조선 건국에 반대하는 등 요시찰 가문의 후손들은 학과 시험인 동당시와 회시에 장원하여도 면접시험에서 저조한 성적을 받아 종국에는 끝부분에 가까운 등위로 급제하게 된다는 사실을 현대인들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소설인 춘향전이 무의식 속에 관념으로 정착되어 있고 또한 TV나 신문 등 현대 언론 역시 수십 년 동안에 걸쳐 그렇게 보도하여 왔기 때문이다. 장원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인식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시절만 하더라도 절약과 검소함을 미덕으로 삼았고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그렇게 교육시켰다. 그 당시 실례로 드는 것이 독일 사람들은 상의 양복의 소매 뒤꿈치에 별도의 가죽으로 된 천을 제봉틀로써 꿰매어 오래도록 입고 지내는데 학생들은 그러한 검소함을 본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는 당시 우리 사회의 유행가 가사에도 등장하는데 가수 김상희의 노래 ...... 단불 옷에 넥타이 두 개, 언제나 변함 없죠..... 흘러간 노래, “단불 신사”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심리란 것이 초창기에는 원칙을 고수하다가 세월이 지나가면 원칙에서 점차 멀어져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선조 초기에는 문과 과거급제자를 원칙에 입각하여 33명을 엄선했으나 시대가 지나면서 33명을 초과한 인원을 합격시키기도 하였던 것이다. 위의 예시인 1727년 증광문과는 43명을 급제시켰던 것이다. 여기에 오묘한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순박한 사람의 입장에서 판단하면 34~43등 사이에 속하는 응시자의 시험성적이 지극히 미묘한 차이여서 모두를 급제시켰거나 아니면 관직의 자릿수에 대한 수요와 공급을 감안하여 증원하여 합격시켰다고도 생각할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원칙을 파괴하고 10명이나 증원시켜 합격시켰다는 것은 그들 10명 중에는 당시 권문세가의 후손들이 상당수 있었을 것이며 그들은 회시에서는 억지로 겨우 급제하였으나 면접시험인 전시에서 고득점을 얻어 종국적으로는 선순위로 급제하여 보직 발령도 1년을 기다리지 않고 조기에 임용되었다는 것이다. 경북 영천 출신으로서 조선 건국을 반대한 포은 정몽주 선생의 방계 후손인 매산 정 중기 선조께서는 문과 시험을 치르면서 조정에서 당신의 가문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선조께서는 문과에 급제한 후 1년간 기다리던 동안에 때마침 충청도에서 역모 사건인 “이인좌의 난”이 발생하여 한때는 그 세력이 막강하여 영남의 남쪽 지방 사람들은 상주 등 영남의 북부지방 쪽으로 가는 통행마저 차단되었다고 했다. 경북의 경주, 영천, 포항 등 남쪽 지방과 경북의 북부지방에서는 안동을 제외하고는 경북의 북쪽 지방 사람들은 대다수가 이인좌의 난에 동조했다고 전해 진다. 이때 매산 정 중기 선조께서는 자신의 스승이며 횡계마을에 거주하셨던 지수 정규양 선생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셨고 자신은 그 참모가 되어 지역의 선비들을 규합하여 관군과 공조를 펼치면서 이인좌의 난을 토벌하였다고 한다. 조정에서 추락한 가문의 위상을 변화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 같은 창의는 후에 조정에서 영남 사람들에 대한 관직을 제한하자는 여론이 팽배할 때, 매산 정 중기 선생께서 관직에 계시면서 “영남인 소”를 제기하면서 관직 제한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방패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사람들은 자신을 지켜주는 것은 문(文)이 아니라 무(武)라는 의식이 팽배하였는바 조정 역시 이에 호응하면서 조선 초기와는 달리 조선 후기에는 무과 급제자를 수백 명에서 어떤 경우에는 1,000명 가까이 급제시켰다고 한다. 급제자가 많으면 거기에는 각종 비리가 횡행하기 마련인지라, 문과 역시 과거시험은 형식에 불과하고 각종 부조리와 매관매직이 일상화되었던 것이다. 필자의 고조부 만제 정치건(1825~1875) 선조가 그 희생자 중에 한 사람이다. 영남에서 한양에 유학하여 5년가량 과거시험에 도전하였으나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평소 자신보다 실력이 하위인 사람들이 매관매직으로 관직에 천거되는 것을 바라보며 “젖은 북과 절반 담긴 술 항아리”에 비유하여 글을 써서 풍자하기도 하였으며 가까이에는 연하인 조카가 사헌부 감찰로 봉직하였는데 이를 지척에서 바라본 고조부 정치건 선조의 심중은 어떠했으랴. 선조께서는 대부분의 재산을 장남에게 상속하는 당시의 제도는 문제가 있다며 시를 읊으면서 그것을 주창을 하였으나 사회적 고정관념이 깊이 박혀 있는 터라 주변의 선비들이 이에 호응해 주지 않았다는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결국 간과 쓸개에 열을 발산하는 딱딱한 염증이 생겨 고통에 시달리다가 50세에 타계하셨는바 세상을 떠나시기 1년 전에 쓴 자신의 몸속에 있는 ‘세균과의 대화’ 형식으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자신의 인생 전반을 성찰한 수필이 인상적인데. 선조께서 세상에 등을 돌린지 35년 후에 조선은 결국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정치건 선조의 출생지인 “영천읍지”에서는 선조에 대하여 평(評)하기를 학문에 성실하였으며 따뜻한 인정을 지니고 있어 주변의 동료인 선비들이 존귀하게 여겼다고 했다.
《제3화》
1970년대 말에 공무원 교육을 받으면서 관계자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인데 어느 공무원 채용시험의 경우 관련 시험지 등 모든 서류는 보존기간이 1년이라고 했다. 그 당시에는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렸는데 최근에 문득 생각해 보니 당시 “정부 공문서 보존기간”에 의하면 일상적인 평범한 내용이 수록된 공문서는 보존기간이 1년이고, 그 다음은 중요도에 따라 3년, 5년, 7년, 10년, 준영구, 영구보존 문서로 구별되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무원 채용시험이 일상적인 평범한 문서로서 그 보존기간이 1년이라는 사실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보존기간이 1년인 서류는 다음 해 연초에 문서고에 이관하여 보존하지도 않고, 문서를 생산한 부서의 사무실에서 당해 연도 말까지 보관하다가 곧장 폐기시키기 때문이다. 이 같은 처사는 혹여 공문서 폐기 그 자체가 합법을 빙자한 증거인멸의 수단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오래전에 선거를 앞두고 두 후보자 간에 TV 토론이 있었다. 어느 후보자가 상대방인 후보자에게 밧줄을 타고 깊은 우물에 내려가 밑바닥 청소를 하고 있는 사람이 존재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평소 그 사람과 사이가 좋지 않아 살해할 목적으로 지상에 고정시켜 놓은 밧줄을 낫으로 끊어버려 우물 청소를 하는 사람이 지상으로 올라오지 못하고 기아로 사망한 경우에는 이를 살인죄로 의율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니, 인권 변호사 출신인 상대 후보자께서 하신 말씀이 밧줄을 끊는 것이 어떻게 살인죄가 되느냐고 따지는 것이었다. 형식적으로 그냥 던져본 질문인지, 답변을 하는 후보자께서 그것을 알면서도 모르는체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필자는 그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인권 변호사치고는 법률 지식이 꽝이기 때문이다. 속으로 생각하기를 저런 사람이 어떻게 사법고시에 합격하였을까? 혹여 컨닝구 해서 사법고시에 합격하였나? 라고 의심할 정도인데도 이튿날 언론에서는 그 말에 대한 추가 보도는 없었던 것으로 생각난다. 비유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그 말은 방아쇠만 당겼을 뿐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형법상 행위론에는 (1)인과적 행위론 (2)목적적 행위론 (3)사회적행위론이 있는데 우물 속에 사람이 있는 줄 알면서도 그를 살해하고자 밧줄을 끊어버려 우물 속에 갇힌 사람이 기아로 사망했다면 감금죄는 살인을 하기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써 살인죄에 흡수되기 때문에 살인죄만 성립한다는 판례가 존재하며 또한 밧줄의 절단과 사망과의 사이에 인과관계가 충분히 인정되기에 살인죄의 성립에는 영향이 없을 것이다. 사회적행위론에 의하더라도 밧줄을 끊거나 방아쇠를 당기는 행위가 지니고 있는 그 행위의 사회적 의미성을 감안하더라도 범죄가 성립에는 영향이 없기 때문이다. 내란죄, 외환죄, 여적죄 다음에 형법상 법정형이 가장 중한 범죄가 강도 살인, 강간 살인, 방화 살인죄이다. 위의 죄는 옛날에 주로 마적단에 의하여 자행되던 범죄들이다. 조선시대 같으면 그러한 사람이 가족 중에 있다면 족보에서 제거하고, 친족관계를 의절하거나 마을에서 내쫓았을 것이다. 그리고 제정신을 가진 선비라면 남 보기가 부끄러워 마구간 모서리에 대가리를 처박고 자결을 하였을 것이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하얀 도화지처럼 깨끗한 어린아이의 뇌 프로그램에는 단정하고 질서정연한 그림을 그려놓거나 거기에 추가하여 주변환경과 조화로운 그림을 입력해 놓아야 하는데 못된 교사들이 어린아이의 깨끗한 뇌 프로그램에 ‘황칠이’를 해놓아 그렇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4화》
중국 고사에 진나라 하동태수 ‘등유’라는 사람은 전시(戰時)에 아들과 조카 중에서 하나만을 살려야 하는 상황에 놓이자 아들을 포기하고 조카를 살림으로써 그것이 귀감이 되어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공평성을 판단함에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그 말인즉슨 일반적으로 공평성을 판단함에는 객관적인 기준에 근거하여 판단하여야 하나 자기 자신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련된 경우에는 객관적인 판단을 하더라도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판단에는 주관이 개입되었을 것이라고 의심을 하면서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뜻을 갖춘 선비라면 자기 자신에게 손해가 되도록 공평성을 판단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2017년도에 “전모록(鐫慕錄)”이라는 제하의 고서를 번역하였는데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필자의 6대조 형제분은 4형제 이신데 각각의 식솔들을 거느린 채 방을 달리하여 입구(口) 자 모형의 한옥에 함께 살았다고 했다. 종손이신 백씨께서는 앞에서 모범을 보이고 뒤에서 후견인이 되어 형제들을 챙긴다는 뜻으로 앞 건물과 뒤 건물에 거주하였고 나머지 형제들은 좌우에서 날개가 되어 백씨를 보필함으로써 집안을 발전시킨다는 취지에서 좌우 건물에 거주하였는데 한마디로 설계도에 의한 맞춤형의 삶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모든 가정사는 형제분이 토의하여 결정하였고 어떠한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 사전에 예측하여 대비하였으며 4형제는 함께 외출하고 반드시 함께 귀가하였으며 학문 또한 함께하였다고 했다. 모두가 온화한 하얀 얼굴에 흰 눈썹과 하얀 수염을 지녔기에 고장의 선비들은 4형제분에게 “상산사호(商山四皓)”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특히 백씨께서는 마을의 서당에 가면 반드시 중앙 건물의 동쪽 창가에 정좌하였으며 한 번 자리에 앉으면 장시간 흐트러짐이 없었다고 한다. 집안의 청소 및 정리 정돈은 물론 손님을 맞이하는 예법에는 조금이라도 흐트러짐이 없도록 본인은 물론 식솔들을 통솔하였으며 공평성에는 조금이라도 허점이 없었기에 한 집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복종하였다고 한다. 또한 지역에서 자존심이 강한 선비들이나 사대부들의 모임을 다스림에도 하늘처럼 통달했다고 전해졌다. 그런데 그러한 백씨께서도 부인들을 다스림에는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종부인 백씨의 부인과 셋째인 숙씨의 부인 사이에 해결이 불가능한 갈등이 상존하였던 것이다. 중씨의 부인은 병약했고 막내인 계씨의 부인은 시집 온지 얼마되지 않아 시집의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종부는 현숙하고 올곧은 성격을 지녔고, 숙씨의 부인은 교묘한 말로써 시부모님의 환심을 샀는데 결론적으로 보면 숙씨의 부인이 종부인 백씨의 부인에게 항의하는 하극상을 일삼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손인 백씨께서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하극상을 일삼은 제수씨의 잘못을 인정하여 친정으로 보내야 하나 그렇게 하면 주변의 다른 선비들이 백씨에게 자신의 부인을 보호하고 아우의 부인을 내쳤다는 의혹을 받을 소지가 있기 때문에 공평성을 판단함에 있어, 아들 대신 조카를 구한 진나라 하동 태수인 ‘등유(인명)’의 판단을 모범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은 손자까지 있는 50이 넘은 자신의 부인을 친정으로 보냈고 그 후 5년 후에 친정으로 간 부인은 세상을 떠났고 처가와는 소식이 단절되었는데 그러고 나서 20년 뒤에 백씨께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위의 번역을 통하여 필자는 새로운 깨우침을 받았던 것이다. 2000년 전에 공자께서 가정사를 운영함에 있어 여인들에게 왜 칼자루를 쥐어 주지 않았는지 그 참뜻을 알 것 같기도 하였다.
필자가 7살이거나 초등학교 1학년쯤으로 기억된다. 당시 집성촌인 산중마을에살면서 죽마고우들과 어울려 마을의 이곳저곳을 놀기 삼아 돌아다니기도 하였지만 더러는 혼자서도 다니면서 은행나무 밑에서 은행을 줍거나 바위틈에 있는 다람쥐들과 눈을 맞추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약간의 피곤함을 느껴 인근에 정자가 있었던 터라 정자의 옆쪽에서 중앙 마루 쪽으로 가려니 계절은 여름철이라 흰색 한복을 입은 마을 어른들 다수가 모여 담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를 본 마을 어른 한 분께서 정자는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곳이지 아이들이 오면 않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필자는 중앙마루에서 보이지 않는 뒤쪽 툇마루에 앉아 있는 것은 괜찮겠지 하면서 조용히 툇마루에 앉아 있는데 정자에서 어른들의 손발이 되어주는 30대인 아재뻘인 사람이 끝까지 필자를 정자에서 쫓아내는 것이었다. 필자는 당시에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고 또한 그것을 이해할 수도 없었는데 2017년도에 전모록이란 제하의 고서를 번역하면서 당시의 그와 같은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6대조 할머니와 동서가 되는 사람과의 갈등에서 비롯된 감정이 후손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보다 상세히 말하면 필자는 가계도 상으로는 종손인 백씨의 아우 즉 중씨의 후손이나 중씨의 부인께서 병약한 관계로 인하여 슬하에 자녀가 없어 백씨의 차남이 중씨가의 장남으로 양자를 들었기 때문에 혈통으로는 종손인 백씨께서 필자에게 6대조가 되시나 가계도 상으로는 백씨의 아우인 중씨께서 필자의 6대조가 되는데, 당시 정자에 있었던 어른들은 모두가 숙씨 선조의 후손들이며 정자 역시 숙씨께서 생존 당시 사용한 학구지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기관이 특정 집단의 구성원들로만 운영된다면 어떠하겠는가. 그 결과는 뻔할 뻔자일 것이다. 지금은 ㅅ위원회와 ㅅ처가 문제지만 이러한 현상은 점차 다른 부처까지 확산될 것이다. 사조직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정점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선두 주자가 바로 TV 방송 분야이다. 가수, 탈랜트, 코메디언 등은 이미 세습화가 이루어져 있고, 그 분야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은 사돈에 팔촌까지 화면에 등장하며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는 태아마저 TV에 출연하고 있다. 가만히 지켜보면 그들 사이의 규율은 70~80년대 군대의 규율을 뺨치는 정도다. 그런데도 그들 각자의 도덕이나 윤리성은 최하급이다. 상당수가 이혼한 경력이 밥 먹듯이 있고 게다가 이혼을 자랑삼아 이야기하기도 하고 남자들은 여자처럼 화장을 할 뿐만 아니라,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어마나”라고 놀라는 표정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한 남자 연예인이 친구의 장모되는 사람과 결혼식장에서 지루박 이라는 춤을 추지 않는가 하면, 건강이 나빠 죽음 직전에 직면한 사람과 속세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여 인간이 싫어 산속에 들어와 외로움과 고통에 시달리다가 겨우 생존한 사람, 다시 말해 그들이 말하는 소위 자연인에게 방송을 주도하는 연예인이 속세에 두고 온 부인에게 자연인이 되기를 허락해 준데 대하여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방송을 통하여 해주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그 프로를 주도하는 작가가 여성이며, 자연인이란 프로그램를 통하여 소위 ‘여성인권운동’을 병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억한다. 1960년대 폐병으로 인하여 홀로 산장에 기거하며 노래를 불렀던 “산정의 여인”을 세상 사람들이 동정하였건만, 밤이 되면 지척을 구분하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인간 세상과 동떨어진 곳에 홀로 사는 사람에게 속세에 있는 “부인에게 감사하고 사랑한다”라고 강요하는 것은 어린애 사타구니에 붙어 있는 밥풀때기를 뜯어 먹는 치사한 행위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여성인권운동은 지금은 그 한도를 초과하여 이제는 브레이크가 고장이 났고, 과식한 탓에 배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것이 공통된 인식이다. 어떤 행위가 옳은 일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도덕의 대원칙은 ‘전체에 접목시켜 보는 것’이다. 내가 어떠한 행위를 하였을 때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도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 행동이 이 세상에 바람직하면 그것은 옳은 행동이 되고, 바람직하지 않다면 그러한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컨대 1980년대에 발생한 “광주사태”가 되었던, “광주민주화운동”이 되었던 그와 같은 행위가 서울을 비롯한 인천, 대구, 부산, 대전, 원주 등 전국에 확산 되었다면 그것이 대한민국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는가, 아니면 손해가 되었는지를 판단하여 옳은 일인지 잘못된 것인지를 구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배려라는 달콤한 언어가 숨기고 있는 실체 즉 불평등을 간파하는 안목을 길러야 할 것이다. 자신을 절제할 줄 모르고 출산이라는 책임은 다하지 않으면서 근시안적 사고방식으로 하루살이 삶을 즐기면서 세상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세상을 운영하는 칼자루를 맡겨서는 안될 것이다. 담 너머에 있는 풍경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키가 큰 사람은 그냥 서서 볼 수 있으나 카가 작은 사람에게는 높은 디딤돌을 준비해 주어 모두가 더불어 담 너머에 풍경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실질적 평등”이라고 하면서 한때는 권장하였던 것이다. 지금은 어떠한가? 디딤돌을 딛고 있던 사람이 담장 위에 올라가 밑에 서 있는 사람의 머리를 향하여 냄새나는 썩은 오줌을 갈겨 대고 있는 것이다. 7~8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필자는 시내 모처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시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필자보다는 5~6세의 연상으로 보이는 여성분도 수강생 중에 한 분이었는바 동료인 다른 수강생의 말에 의하면 그 여성분은 시내에 있는 명문 여고 출신이라고 했다. 연령이 만만치 않았는데도 기억력은 좋았고 다방면으로 재능을 보여주었다. 강의가 끝나고 식사를 하는 사적인 자리에서 하는 말씀이 여고 동창회에 나가 보았더니 여자 동창 중에 연하인 남자 애인이 없는 사람이 없고 그것도 요일마다 연하의 애인을 바꿔가며 지내는 여고 동창도 있다고 했다. 남편들은 모두가 과거에 사회에서 의미가 있는 자리를 지니고 있었기에 경제적인 여유도 있고, 남편들이 나이가 많아 이제는 부인의 외출을 터치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20~30년 전만 하더라도 여성인권운동을 하는 여성들이 TV에 출연하여 환갑이 넘은 조선시대 대감들이 15~16세 되는 여자아이를 품고는 회춘을 했다며 그들의 비인간성을 입에 거품을 물고 비판했으며, TV 연속극에서 남성 배우가 여성 배우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 있는 방송을 못하도록 했으며, 남자들의 기(氣)를 죽이기 위하여 건강을 무기로 삼아서 남성인 배우가 영화나 드라마에서 담배를 피우며 거드름을 피우는 모습이 꼴 보기 싫다며 모자이크로 처리해 달라고 요구하여 사회적 분위기를 바꾸어놓은 후에 이제는 그 짓거리를 자신들인 여성들이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중세 시대에 유럽으로 팔려 가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은 식당이나 술집에 가면 남자들은 일터로 가고, 여성들이 귀족 행세를 하면서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으며,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호칭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남자 노인들에게는 “그 남자”라고 호칭하면서, 동남아 며느리와 고부간의 갈등만을 일삼는 속 좁은 할머니에게 방송국에서 외국 여행을 시켜주면서 “여사”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무슨 양심이 있으며, 공평성이 존재하랴. 결론적으로 2000년 전 공자께서 우려했던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제5화》
며칠 전의 일이다. 시내에 나갔다가 어느 가게에 들러 물건을 구입하려고 하는데, 60~70대의 할머니들이 줄을 지어 계속해서 가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 이유가 궁금하여 확인해 보았더니 로또 복권을 사는 것이었다. 젊은 사람이라면 다소 이해가 되지만 예상치 못한 신기한 풍속이기에 필자 나름대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늙어서 경제적 어려움을 타계하기 위하여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로또복권을 구입하는 것일까? 현시점에서 우리 사회의 제반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소위 말하는 “대박 문화”가 이끌어 온 한탕주의의 본색이 표면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옛날처럼 굶어 죽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인가. 옛 선비들은 재수 없는 날보다 더 재수 없는 날은 이유 없이 덕을 보는 날이라고 말했다. 마음을 비우는 동일한 행위일지라도 배가 부를 때 마음을 비우는 것보다는 배가 고플 때 마음을 비우는 것이 더 어려울 것이다. 현재의 한국 사람들은 “먹방”이라며 방송에서도 음식을 먹는 프로그램이 유행하며, 그와 병행하여 과거에는 “부엌때기”라며 천시하던 요리사를 그럴법하게 보이려면 영어로 사용하여야 멋이 있어 보이는지라, “세프”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남자들을 부엌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랑꾼”이라는 고상한 용어를 사용하면서 외모를 높이 숭상하면서 자신의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랑”을 표방하면서 상대방인 배우자를 찾아 나서는 사냥 방송을 즐기고 있으며 또는 노래와 춤을 지나치게 부추기기 위해 가요대전을 이 채널 저 채널 가릴 것 없이 365일 계속해서 이어져 가고 있는가 하면 “맛집”이라하여 연예인들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마치 돼지처럼 쳐 먹는 방송을 미친 듯이 자행할 뿐만 아니라 개나 고양이에게는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먹이면서 진작 인간인 자신은 라면으로 끼를 때우는 방송도 선보이고 있다. 한마디로 음식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방송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남녀 한 쌍에게 방송국에서 해외여행을 주선해 주고 그들이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싸움하는 방송을 방영함으로써 시청자들에게 불쾌감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심리학자 메슬로우의 인간심리 5단계 중에서 짐승들만이 집착하는 식욕, 성욕 등 ‘기본적 욕구’에 방송이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과 행동은 천박스럽게 하면서도 연예인인 자신을 “공인”이라고 자칭하는 것이다. 그 공인이 공인(公人)인지 아니면 공인(共人)인지 또 다른 공인(工人)을 뜻하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공적인 일을 하는 공무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공무원은 일을 많이 하든 조금 적게 하든 공적인 일을 하면서 월급을 받는 사람인 반면에 연예인은 자신의 재능을 보여주고 능력에 따라 금전을 받는 자기 사업을 하는 것이다. 여러 사람을 즐겁게 하는 사람이 공인이라면 여러 사람을 먹여 살리는 농부 역시 공인이 되기 때문이다. 사회의 풍속 전반을 말아먹는 장본인을 공인(公人)이라고 불러서는 안될 것이다. 예부터 공무원은 경제적인 수입보다는 공적인 일을 수행한다는 ‘일의 가치성’에 역점을 두고 한평생을 봉사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형사소송법상의 공적 의무를 망각한 변호사는 이미 순수한 법률 장사치로 돌변하였고, 교수들은 학칙을 개정하거나 수시시험이라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교수의 자녀들에게는 입학시험 면접 시에 가점을 주도록함으로써 대학이나 대학원 입학에 유리하도록 조치를 해두고 있고, 의사들은 주인 없는 의료보험금을 더 챙기고자 이리떼가 되어 과잉 진료를 일삼고 있으며 지역의료보험센터에서는 일반 국민에게 질병인 암에 걸린 위험성이 심각하게 높다며 문자 메시지로 건강검진을 받도록 수시로 협박과 위협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건강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돈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괘심하다는 것이다. 히포크라데스 정신을 외면한 의사들은 자신을 으뜸으로 여기고 환자들을 자신의 밥으로 생각하면서 그들의 생명은 자신이 좌우한다는 오만함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으며 특정 환자에 대하여 전산상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공유하면서 혹시 있을 오진 시의 민형사 사고에 법적으로 공동 대응하는 시스템을 갖추어 놓고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사기꾼들이 박실박실 들끓고 있어 전화 한 통 마음 놓고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친족관계, 가족관계 마저 모두가 허물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공(公)과 사(私)를 구분할 줄 모르는 막돼먹은 세상에서 사람들 모두가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고 있을 때 자신만이 맨정신으로 살아간다는 고대 중국의 문장가 굴원의 심정이 지금의 나와 같은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