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과 고단함 사이에서
나에게 새해는 3일 늦게 왔다. 대구에 살던 딸애가 지난 해 연말에 올라와 1월2일 날 이삿짐이 왔다. 같은 시간인데 나에게는 송구영신의 시간이고 딸애는 변화의 시간이고 손자손녀에게는 방학이라 노는 시간이 되었다.
서울에서 함께 살게 된다는 설렘과 주말 부부였던 딸 아이네가 한 집에서 일상을 살게 되었다는 안정감이 혼합된 고단한 날이다. 딸아이는 어른으로 자기집을 정리해야 하고 나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와 하룻밤 같이 자면서 서울 생활의 첫 발을 딛게 해준다.
무엇을 하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들을 다른 세계로 이끌어야 할 지 생각하는 나는 언제나 진지해서 고단하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명화캠프로 정했다.
어린이 명화감상 책을 펼쳤다. 먼저 본 적이 있는 그림을 찾아보라고 했을 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나 뭉크의 절규, 드가의 발레하는 소녀 등에 응답했다. 아주 약간이지만 선행학습이 되어서 확대하는데 효과적이다.
그 그림으로부터 호기심이 떠나지 않게 대답이 잘 나올 것같은 질문을 골라 하면서 흥은 돋군다. 첫장의 모나리자를 보면서 자기 나름의 감상대로 인정하고 표정을 흉내내보기로 했다. 그러면서 입꼬리를 강조해보고 눈도 주의깊게 보라고 했다. 침착해야 그러한 표정이 나올 것 같으니 심호흡도 시켰다. 누가 가장 표정에 근접했는지를 알아보기로 했다. 놀랍게도 아이들은 이끄는대로 열심히 따라 주었다. 두 손을 모으고 손가락의 표정까지 만들어가며 포즈를 취했다. 나는 열심히 사진을 찍은 다음 그들에게 나도 찍도록 안내하였다. 이는 적극 참여를 위한 유도이기도 하지만 저들이 사진을 다룰 수 있게 하고 편집을 통해 구도를 수정하는 것도 가르쳤다. 놀이를 통해 가볍게 스치며 알고가는 것도 긴 인생을 두고보면 바둑판의 한수 포석이 된다.
셋의 사진을 번갈아 보면서 스스로 자신의 포즈에 자평을 하기도 하였다. 놀랍게도 초등학교 3학년인 손녀는 감정이입을 하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명화를 벽지의 무늬보듯 보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알고 누가 그렸는지를 알게 하고 몸으로 익히면서 기억에 각인시키는 작업이다. 저들이 모르게 나는 점진적으로 심화해나갔다. 이렇게 차근차근 한 작품씩 순서대로 해나가다가 보니 아이들도 어느새 학습인지 놀이인지 잊어버리고 즐기고 있다. 심심할라치면 유머도 만들어 섞어준다.
“이게 뭐야. 할머니는 모나리자가 아니라 개나리자가 되어버렸네.”
까르르 한바탕 웃고 다시 드가의 무희,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 뭉크의 절규 사춘기, 세잔의 춤, 르느와르의 독서하는 소녀, 미켈란 젤로의 아담의 창조 동작 등을 감상하고 흉내내고 사진을 찍어 보여주고 동작을 비교하면서 무한 웃음을 생산한다. 나는 아이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뭉크의 절규는 가정사에 슬픈 사연이 있어서 그러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는 그림에 얽힌 이야기까지 들려주었다. 사춘기란 작품을 흉내내면서는 고추를 가리는 것이 포인트라고 말해 주기도 한다. 마지막에는 가장 자기다운 포즈 취하기로 마무리 했다.
이번에는 내면화 그리기다. 일단 눈을 감고 잠시 퇴행을 시켰다. 그리고나서 그리고 싶은 내용을 그리라고 했다. 한 눈을 팔까봐 내가 먼저 크레파스를 집었다. 아주 단순하고 명징한 이미지가 떠올라서 곧바로 그리기 시작했다. 지면 중앙에 추상적 이미지의 둥그스름한 꽃 세송이를 그렸다. 퍼런색과 붉은 색을 섞어 이중으로 그렸다. 놀랍다. 몇시간 전에 ‘정초의 생각 3제'란 글을 썼는데 부정의 들추임에서 긍정의 메시지를 찾아낸 글이었다. 그림에는 생각이 피어나는 과정까지 특성을 정확하게 그리고 있다. 생각에 생명을 부여하고 그러한 생각이 뇌에서 어떤 이미지를 가지는 지를 알 수가 있었다.
내가 그림을 그리자 손녀가 노랑색으로 거대한 나무 기둥을 그리더니 그 위에 펼칠 자리가 부족하다고 못마땅해 하기에 괜찮다고 장소를 옮겨 할머니 그림에 덧그려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실제로 내 그림을 넘어와 거대한 초록나무를 덮어 그렸다. 그림인데도 아이가 나의 영역을 침범한 것처럼 기분이 덜 좋았다. 그러나 이내 나는 생각했다. 아이들을 배려하여 중심을 내어줄 걸 무심결에 내가 중심을 점거하고 말았다는 후회가 따랐다. 무의식적으로 중심에 자신이 그리고 싶은 욕구가 있겠구나 싶었다. 자각하지 못했는데 타인 세우기, 새해 첫 깨달음이다. 해보지 않은 학습은 죽은 학습이다. 다음 날, 60년차인 손녀에게 중심에 그리고 싶었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진정으로 미안하다고 말했다. 놀랍게도 아이는 적극 긍정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이로 선택에 기득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이로부터 배웠다. 무엇이나 해보아야 부족함이 나타나고 그래야 새로운 방법을 강구하면서 성장한다는 말이 맞다는 것을 하루만에 증명하였다.
둘째 손자는 자기 앞의 빈 자리에 조금 전 명화놀이 한 내용을 낱낱이 그려 나갔다. 귀퉁이이든 중심이든 아랑곳 하지 않는 작은 아이는 태어난 둘째 자리를 그냥 인정하고 남은 자리에서 자기 삶을 꾸리는데 익숙하다. 손녀는 할머니 그림을 패러디 하여 그리면서 약간의 어둠인 밝은 회색과 빛인 노랑색으로 무지개를 그렸다. 처음 시도했던 노랑 둥치와는 다르게 가는 줄기를 그리고 꽃은 크게 그렸다. 말이나 그림이나 자신을 속일 수 없었다. 들어간 것이 나왔다. 정초에 설렘과 고단함 사이에서 깨달음 하나 건졌으니 신년 운수대통이다.
<2018. 1 아파트 신문 >
딸아이가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온 날이다.
설렘과 안정이 혼합된 고단한 날, 딸아이는 어른으로 자기집을 정리해야 하고 나는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와 하룻밤 같이 자면서 서울생활의 첫발을 딛게 해준다.
무엇을 하며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들을 다른 세계로 이끌어야 하는 나는 언제나 진지해서 고단하다. 소중한 시간을 그냥 줄줄 흘려서는 안 될 것같아 일단 아이들이 좋아하는 닭다리를 간장졸임으로 해서 먹인 다음, 샤워를 마치고 자리를 잡았다.
명화캠프로 정했다.
어린이 명화책을 구해 두었기에 관심을 유발 하기 위해 먼저 본 적이 있는 그림을 체크하였다. 호기심을 보였다. 그 다음 몸으로 새기기를 한다. 드가의 무희 흉내내기,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 레오나르도 다진치의 모나리자 표정만들기, 뭉크의 절규 흉내내보기, 사춘기 세잔의 춤 동작 등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어 보여주고 동작을 비교하면서 무한 웃음을 생산한다.
그런 다음 큰 모조지에 공동 내면화 그리기를 했다.
잠시 눈을 감자 내게는 아주 단순하고 명징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곧바로 그리기 시작했다. 지면 중앙에 위의 이미지를 그렸는데 그게 무엇인지 묘연하여 한참 생각하다가 놀랐다. 바로 정초의 '생각 3제'란 글이 그림으로 나타났다. 생각의 특성을 정확하게 그리고 있다. 생각에 생명을 부여하고 그러한 생각이 뇌에서 어떤 뉘앙스를 가지는 지를 알 수가 있었다.
내가 그림을 그리자 손녀가 노랑색으로 거대한 나무 기둥을 그리더니 그 위에 펼칠 자리가 부족하다고 못마땅해 하기에 괜찮다고 장소를 옮겨 할머니 그림에 덧그려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실제로 내 그림을 넘어와 덮어그렸다. 놀랍게도 그림인데도 기분이 덜 좋았다. 어떻게 남의 그림을 덮으면서 그리고 싶은지,,,,
그러나 이내 나는 생각했다. 아이들을 배려하여 중심을 내어줄 걸 무심결에 내가 중심을 점거하고 말았다는 후회가 따랐다. 일상에서도 내가 그렇게 살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러고 보니 며느리가 언젠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어딜 가나 어머니가 중심이 되어 있어요. 대단하세요."
이는 책임을 지고 있거나 중심을 잡고 진행하는데 익숙하다는 이야기라서 그런가보다 하고 듣고넘겼는데 자각하지 못한 부분을 오늘 본다.
새해 첫 깨달음이다. 물러나는 세대가 중심에 자리를 잡는 것보다 세대차가 나더라도 함께 하는 사람에게 먼저 어디에 그리고 싶은가 물어볼 걸 그랬다. 아마도 나이에 무관하게 두 장녀의 기질이 맞부딪쳤을 것같다. 다음 날, 다시 한번 그리면서 이번에는 공간 점유에 대한 견해를 묻고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하고 60년차인 손녀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아이의 심정을 적중했다. 놀랍게도 아이는 긍정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이로 선택에 기득권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아이에게 가르치는 좋은 기회가 되어주었다. 합리적으로 욕구를 풀어가도록 방법을 모색하였다. 무엇이나 해보아야 부족함이 나타나고 그래야 새로운 방법을 강구하면서 성장한다는 말이 맞다는 것을 하루만에 증명하였다.
둘째 손자는 자기 앞의 남은 자리에 제 생각을 차근차근 그려나갔다.
자기 생각을 내려놓느라고 아랑곳하지 않는 작은 아이는 태어난 둘째 자리를 그냥 인정하고 남은 자리에서 자기 삶을 꾸리는데 익숙하다.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
고흐의 해바라기
고흐의 침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지라 (ㅋㅋ)
드가의 무희
뭉크의 절규와 사춘기
손녀는 할머니 그림을 패러디 하여 그리면서 약간의 어둠인 밝은 회색과 빛인 노랑색으로 무지개를 그렸다. 처음 시도했던 노랑 둥치와는 다르게 가는 줄기를 그리고 꽃은 크게 그렸다.
두 아이가 이렇게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자라는 중이다.
발육 초기에는 암기에 특기를 가진 아이가 칭찬듣는데 유리하지만, 크게 창의적이지는 못하다. 반면 손녀는 중심에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놓쳐서 은근히 불만스러워 하더니 중심에 있는 할머니의 그림을 침범해도 좋다는 승인이 떨어지자 실컷 초록숲을 그리더니 꽃으로 그려냈다. 마지막에 노랑색꽃을 그려주어서 내가 기분이 좋아졌다.
포즈도 취해준다.드가의 춤사위이다. 발레를 잠시 배운
손녀가 가장 닮은 포즈
책 읽는 소녀 포즈
아담의 창조
자기다운 포즈 취하기
절규
자주 자기를 표현하여 보는 것은 자기를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도구가 되어준다.
배려하라고 말해준들 소용이 없고 구체적으로 배려하는 삶을 살 때 아이들은 그 것이 몸에 배고 인격체의 특성으로 자리잡을 것이기에 아이들이 정초에 나의 스승이 되어주었다.
내 동생들이 자라면서 가족의 중심에 있는 나를 보면서 손녀의 마음과 같은 심정이 되어보지 않았다는 보장이 없다. 올해는 중심에서 가장 자리로 서 주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것같다.
'타인 세우기' 훈련은 그림으로부터 출발되었다.
해보지 않은 학습은 죽은 학습이다. 머릿속 생각이나 가슴속 감정을 꺼내보는 일은 영신수련의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