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창 33장 1-11절
설교제목 : 하나님의 얼굴
길 잃은 기수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건강하셨습니까? 봄의 길로 들어서는 입춘의 시간이지만 아직은 추위가 여전한 것 같습니다. 세계 경제와 정치적 상황은 살얼음판을 걷는 듯 위태하고 혼란하기 그지 없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길을 잃고 배회하는 듯 합니다.
다음 그림은 초현실주의 화가인 르네 마그리트(1989-1967)의 “길 잃은 기수(1926)”입니다. 르네 마그리트는 벨기에에서 양복재단사인 아버지와 모자 상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낸 그는 12세부터 그림을 시작했고, 1916년 브뤼셀의 왕립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하여 정규 미술교육을 받았고, 1922년에 조제트 베르네와 결혼했습니다. 마그리트의 초기작은 당시 유행했던 입체파와 미래파의 영향을 받았고,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고 종전 후 생계를 위해 디자이너로 활동했습니다. 1926년에 라상토르 화랑과 계약을 맺고 전업작가의 길을 걷으며 그의 개인전을 열었지만 혹평을 받았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위해 그는 예술의 중심지인 파리로 가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영향을 받았고 초현실주의 화가로서 이름을 얻게 됩니다. 집단적으로는 전쟁 후의 여전한 갈등상황과 개인적으로 작가로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던 어두운 시기였습니다. 그래서인지 1920-30년대 작품은 어둡고 다소 그로테스크한 작품이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길 잃은 기수”입니다.
이 작품에는 커튼이 양쪽으로 그려져 있고, 다섯 개의 기둥들로 이루어진 나무 같은 것이 흩어져 있습니다. 그 기둥에는 악보가 그려져 있습니다. 중앙에는 기수가 말을 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닥은 마치 천조각을 붙인 듯 여러 선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마치 말을 타고 달리지만 어딘가에 떠 있는 느낌마져 듭니다. 무대 위에서 아무리 달려도 허공을 달리듯, 마치 기둥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오늘 우리 세계를 닮아 있는 듯 보입니다. 어디로도 갈 수 없는 길잃은 마그리트 자신의 내면의 심상일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세계와 이 나라가 마치 다섯 개의 음표가 그려진 기둥 속에 갇혀 형국처럼도 보입니다. 권력충동과 정서적 광기로 광폭 행보를 벌이고 있는 트럼프와 한국의 대통령은 미친듯 역동적 본능적 충동인 말을 때리며 달려가고 있지만, 길을 잃은 채 제자리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듯 보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장자의 사상 중 하나인, 유지능지중지唯止能止衆止가 필요합니다. 오직 멈추고, 능함을 멈추고, 많은 것을 멈추는 것입니다. 멈춰야 보입니다. 어둠의 커튼이 드리워진 세계의 무대에서 아무리 말을 달리려해도 갈 수 없을 때 멈출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길을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브니엘의 해
야곱은 얍복 나루에서 홀로 남아 하나님의 사자와 밤새 겨루어,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받습니다. 위력적인 신성한 힘에 맞서 자신을 지키고 끝까지 견딜 때 존재의 변환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와의 씨름에서 이겼다는 주제는 자아가 개성화 과정에서 수동적인 상태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무의식의 내용들을 각성하고, 적극적으로 통합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Jung CG : Aion, 9ⅱ, p82.] 하나님과의 대면 이후에 그곳 이름을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도 목숨을 보존하였다는 의미로 ‘브니엘’이라고 명명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32장 31절에 야곱이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솟아 올라서 그를 비추었다”고 말씀합니다.
그 두려움과 불안의 밤에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나서 해가 솟아 올랐다는 표현은 신성한 체험 후에 새로운 의식의 출현했음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그를 비추었다는 것은 신성한 조명이 자아의식 속에 드리운 것임을 회화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해와 빛은 의식의 표상으로 새로운 여명은 무의식으로부터 떠오르는 새로운 의식의 탄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곱에게 새로운 의식의 탄생이 일어난 것입니다. 야곱의 주위 환경에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무언가 달라져 있었습니다. 야곱이 고개를 들어보니 에서가 장정 사 백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었음에도 두려움과 걱정을 호소하는 내용은 없고 오히려 맨 앞으로 나가서 형에게로 가까이 다가갑니다. 야곱의 내면에서 일어난 새로운 의식의 탄생은 두려운 삶의 환경을 넘어서게 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외부조건과 환경이 변화하면, 더 행복하고 의미있고 가치 있는 삶이 펼쳐질거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외형적인 조건이 내가 기대하는 대로 변화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고 걱정 근심이 없는 상태가 되지는 않습니다. 새로운 의식이 탄생하면, 걱정과 불안한 삶의 문제를 뚫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외적 변화라기 보다는 내적 변화입니다. 때로 기도의 목적은 기적적으로 외부 환경의 변화일 수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우리의 정신 안에 새로운 의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태산 같은 큰 문제가 내 안에 해가 떠오르면, 작은 산이 되고, 내가 그 문제보다 커 집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브니엘의 해가 떠올라 새로운 의식의 탄생을 통하여 인격이 확장되고, 변화되어, 삶의 어두운 조건을 뚫고 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내면의 진실
야곱은 다가오는 에서의 장정 사백 명 앞으로 맨 먼저 가까이 가서, 일곱 번이나 당에 엎드려 절을 하였습니다. 야곱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맨 앞에 서서,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절을 하였습니다. 이 일곱 번의 절은 지난날 과오를 반성하며 용서를 구하는 간절한 행위임과 동시에, 자신의 내면의 성장, 더 높은 의식성을 향한 움직임으로써, 자신의 그림자를 맞이함으로 개성화로의 발달로 나아가려는 시도일 수 있습니다.
그때 에서는 달려와서 그를 끌어안고서 입을 맞추며 함께 울었습니다. 진실한 마음의 행동은 너와 나의 마음 속에 박힌 응어리를 풀어줍니다. 내면의 진실이란 제목이 붙은 61번 풍택중부괘風澤中孚(상은 바람☴이고 하는 연못☱으로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 아래 연못을 움직이는 형국이다. 부孚는 어미새가 알을 품고 부화하는 것으로 진실함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새로운 생명으로 주위에 영향을 끼친다)에 대해 리하르트 빌헬름이 설명한 인상적인 대목이 있습니다.
“감정이 진실과 솔직함으로 표현될 때마다, 행동이 감성sentiment의 분명한 표현일 때마다, 신비롭고 광범위한 영향력이 발휘된다. 처음에 그것은 내적으로 수용적인 사람들에게 작용한다. 하지만 원은 점점 더 커진다. 모든 영향력의 뿌리는 자신의 내면에 있다. 말과 행동으로 진실하고 활기찬 표현을 할 때, 그 영향은 엄청나다. 그 영향은 단지 자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무언가의 반영이다. 이 영향을 고의적으로 의도한다면, 이것을 산출할 가능성을 파괴할 뿐이다.” [Wilhelm, R.(1950) : The I Ching or Book of Change, Princeton University Press, p.252.]
진실한 마음으로 형을 마주하려 했을 때, 그 영향이 형 에서에게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내가 구지 요란하게 드러내지 않아도, 내면의 진실함으로 감정을 진솔하고 솔직하게 표현하면, 신비롭고 광범위한 영향력이 발휘됨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
에서는 야곱이 데려온 사람들을 궁금해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가족들을 차례로 소개합니다. 그리고 오는 길에 만났던 가축떼가 무엇인지를 질문합니다. 야곱은 그 엄청난 가축들이 형님을 위한 선물이며 너그럽게 받아주길 간청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말합니다. “형님께서 저를 이렇게 너그럽게 맞아주시니,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 합니다.(33:10)”
야곱은 형의 얼굴을 보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듯 하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어떤 얼굴이길래 형의 얼굴을 보면서 그런 모습을 보았을까요? 확실한 것은 자신의 장자권을 빼앗은 야곱을 실수와 잘못을 품은 너그러운 얼굴일 것입니다. 용서와 그리움의 얼굴일 것입니다. 내담자를 만나면서 그분들의 얼굴을 자주 봅니다. 웃음끼 사라진 얼굴, 초조한 얼굴, 위축된 얼굴, 심지어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려하지 않는 분들을 만납니다. 그들에게 저는 미소를 드리려고 애를 씁니다. 저의 얼굴 빛에 살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하도록 그분들을 주시하곤 합니다. 우리는 어떤 얼굴을 보며, 어떤 얼굴을 내비치며 살고 있으신가요? 제가 여러 번 인용했던 함석헌 선생님의 ‘얼굴’이란 시를 다시 읽고자 합니다.
“그 얼굴만 보면 세상을 잊고, / 그 얼굴만 보면 나를 잊고. /
시간이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 / 밥을 먹었는지 아니 먹었는지 모르는 얼굴
그 얼굴만 대하면 키가 하늘에 닿는 듯 하고/ 그 얼굴만 대하면 가슴이 큰 바다 같애
남을 위해 주고 싶은 맘 파도처럼 일어나고, / 가슴이 그저 시원한,
그저 마주앉아 바라만 보고 싶은, / 참 아름다운 얼굴은 없단 말이냐?”
나의 얼굴이 누군가에게 참 아름다운 얼굴, 하나님의 얼굴이 내비칠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