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면이 바다인 한반도에 거주해오고 있는 한민족은 주변세력의 정치,군사,문화적으로 끊임없이 상호 영향을 주고받아 왔습니다. 한민족은 한반도라는 지리적 특성과 주변강국의 독특한 정치적 이해관계를 지녀왔습니다.
그동안 한반도 국가들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접전에 수륙양면전(상륙작전)은 반드시 있어 왔습니다.
제해권을 장악하고 바다로부터 외국으로 진출할 힘이 있었을때는 강성대국이었으며, 역으로 외국의 세력으로부터 수륙양면전에 대한 대처가 미비했을때, 저지못했을때는 국권이 찬탈되었습니다.
역사를 쉽게 잊어버리는 어리석은 민족은 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아래는 개관정도로 작성했습니다.
[고구려,백제,신라/고려/조선의 상륙작전]
한반도는 그 지정학적(地政學的) 특성상 전통적으로 강대국의 이해가 교차할 수밖에 없는 지역이다. 역내(域內)국가 중 대륙국가들은 해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한반도를 그들의 전진기지로 삼았으며 일본과 같은 해양국가는 영토확장 및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일종의 교두보로 삼는 등 한반도는 주변강국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교량적 위치에 놓이게 되어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안보환경 하에서 무려 931회에 달하는 외세의 침략을 경험해야 했다.
이와 같은 수많은 외침 중에서 493회는 해상을 통한 침략으로서 단순히 해상전투가 아닌 수륙양면작전에 의한 침략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침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조들이 주변국가들을 상대로 실시한 여러 형태의 수륙양면작전, 즉 상륙작전의 기록들은 사료(史料)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현 시점에서 과거 우리 선조들이 실시했던 상륙작전을 역사적으로 재조명해 보는 것도 현재와 미래의 해병대 역할과 가치를 제고시키는 데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이와 관련한 우리나라 역사상의 상륙작전 기록들을 국방 정신교육원 장경모 교수가 제2회 해병대 발전 심포지엄(1996년 8월 7일)에서 '한국 해병대의 역사와 미래'라는 주제로 발표한 내용을 중심으로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고구려 상륙작전
고구려의 해상활동에 대해서는 광개토대왕 비문에 나타나 있는 다음의 문구를 통해 유추 해석해 볼 수 있다.
"6년 ****년(396)에 왕은 직접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여… 한강을 건너 군사를 보내 왕성을 압박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왕이 직접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였다는 것은 대규모의 상륙작전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했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에 대항하여 전쟁준비를 계속하였기 때문에 고구려는 백제에 일대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공격을 시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고구려군은 육상으로 임진강을 건너 백제의 여러 성들을 함락시킬 수 있었으나 해안을 따라 구축된 방언진지를 돌파한다는 것이 용이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육상과 해상으로부터의 동시공격을 시도하였다.
해상으로부터의 공격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광개토대왕은 육상을 통한 진두 지휘보다 해상으로의 공격에 직접 나서 아리수(한강)를 통한 상륙작전을 전개하여 백제의 수도 한성(남한성)으로 압박해 들어갔다.
이와 같은 수륙양면작전에 백제의 아신왕은 하는 수 없이 58개 성을 할양하고 왕의 아우와 10명의 대신을 볼모로 고구려로 보내었으며, 자신은 고구려왕의 노객(신하)의 되겠다고 다짐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고찰해 볼 때 396년 백제와의 전쟁에서 고구려가 크게 승리하는 데는 해상으로부터의 수륙양면작전이 큰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전쟁역사 기록에서 나타난 최초의 실질적인 해상기동으로, 이는 상륙돌격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왕이 이동이 용이한 육상보다는 해상을 택하여 직접 전투지휘에 나섰다고 하는 것은 당시 고구려의 해상활동이 일정한 체제를 갖추고 있었으며, 숙련된 함정 운용기술뿐만 아니라 육상전투까지도 수행할 수 있는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 전성기
광개토대왕 벡제 공격로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
고구려 당나라의 전쟁 (7세기 중엽)
고구려의 멸망
2. 백제의 상륙작전
백제의 해상전투력에 대해서는 『삼국사기』(권46) 최치원 열전을 통해서 유추 해석해 볼 수 있다. 최치원 열전에 "고구려, 백제의 전성시기에 강한 병력 100만이 있어서 남으로는 우월지방을 침노하고 북으로는 유연(북경 부근), 제, 노(산동반도) 지방을 뒤흔들어 놓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역사 문헌을 통해서도 입증되고 있다. 『송서』(권97) 백제전에는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하게 되자 백제는 요서를 점력하게 되었으며, 백제가 다스린 곳은 진평군 진평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양서』(권54) 백제전에도 "진나라 때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점령하게 되니 백제는 요서, 진평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록을 근거로 할 때 우리는 백제의 해상전투력도 막강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는 수준에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백제의 전성기
3. 신라의 상륙작전
신라는 백제 및 왜(倭)로부터 해상을 통하여 끊임없이 침공을 받아 왔기에 해상세력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러한 결과에 기인하여 신라 무열왕은 나·당 연합군을 편성하여 백제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자신은 육상병력을 이끌고 백제 땅으로 진격하면서 태자 법민에게는 하선 100여 척을 이끌고 당나라 수군과 연합하여 해상으로부터 백제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법민이 지휘하는 신라의 수군은 덕물도에서 당나라 수군과 합세하여 기벌포(현재의 금강)로 진격하여 백제의 수군을 격파하고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백제군의 해안방어를 돌파하면서 수도 사비성으로 진격하였다.
나·당 연합군에 의한 기벌포로의 해상공격은 백제의 충신 성충이 증언하였던 것처럼 백제의 존폐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관문을 붕괴시킨 것이었다. 이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한 해상을 통한 상륙돌격이 전쟁의 승패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는가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 백제 부흥운동과 나당전쟁
신라의 전성기
4. 고려의 상륙작전
고려의 상륙작전은 삼별초의 항전에 이어 제주도에서의 원나라 세력축출과 일본 대마도정벌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삼별초는 1270년 9월 전라남도 장흥에 상륙하여 관군을 격멸하고 그 지휘관을 포로로 하였으며, 수많은 무기와 군수물자, 군량을 노획하는 등 남부지방 일대를 지배 하에 넣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지상세력과 연계되지 않은 상륙기습으로 일시적이며, 일부 지역에 대한 승리였을 뿐 고려정부와 몽골 연합군의 공격으로 항전의 근거지였던 진도마저 포기하고 제주도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삼별초 항전군은 진도에서 철수하여 제주도에 상륙하여 새로운 항몽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1272년 3월부터 6월에 이르는 석 달 동안 전라남도 장흥군과 강진군을 기습공격하여 고려정부와 몽골 연합군을 소탕하고 조세운반선을 탈취하는 성과를 올렸으며, 11월에는 멀리 안남도호부(현재의 경기도 부천시)를 기습공격하여 부사를 생포하였으며, 몽골의 일본 침공 전진기지였던 합포(현재의 마산시)를 기습공격하여 함선과 군사기지들을 파괴하였을 뿐만 아니라 많은 군수물자들과 함선 20여 척을 노획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긴 삼별초 항전군은 만 1년 동안 서·남해안 여러 지역을 기습공격하면서 우리 민족의 강력한 항몽의지를 과시하였다.
삼별초의 항전은 해상을 중심으로 한 항전이었으며, 수도 천도, 항전의 근거지 이동 등에 따르는 철수작전과 상륙기습작전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상륙작전사에 큰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삼별초 항전은 섬과 해안을 끼고 우리나라의 지형적 특성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상륙기습작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공민왕 23년(1374) 8월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최영은 25,600명의 수륙군과 314척의 함선으로 제주도의 원나라 세력 토벌에 나섰다. 이들은 나주에서 집결하여 전투임무를 수립하고 행동방향을 결정한 다음 제주도를 4면으로 포위하여 공격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고려는 먼저 해안에 있는 함선들과 종심 깊이 전투성과를 확대하면서 진격을 거듭하여 제주도에서 항거하는 원나라 군들을 완전히 제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상륙군의 편성, 전투임무 부여, 행동방향 설정 등 사전의 치밀한 계획수립과 나주에까지 집결시킨 소요물자의 탑재단계, 나주에서 제주도까지의 이동단계, 돌격 등 현대의 상륙작전과 유사한 단계를 거쳤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1389년 2월 경상도 원수 박위의 지휘 하에 화포와 화전으로 무장한 100여 척의 함선으로 원정함대를 편성하여 대마도로 진격, 기습공격으로 적 함선 300여 척을 불살라 버렸으며, 항만의 시설들을 파괴하는 한편 수많은 적들을 살상하거나 포로로 붙잡았다. 또한 원정군은 대마도에 상륙하여 저항하는 왜구들을 소탕하고 그들에게 끌려갔던 동포 100여 명을 구출하여 개선하였다.
고려의 대마도정벌은 정규군을 편성하여 해상을 통한 대외공격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진다. 고려는 해상활동을 주된 세력 기반으로 하여 성장 발전하였으며, 후백제와의 전쟁, 삼별초 항전, 원나라 세력의 축출, 대마도정벌 등으로 상륙작전이 보다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특히 제주도에서의 원나라 세력 축출과 함께 대마도정벌은 철저한 사전계획에 의하여 수행되어진 것으로 오늘날의 상륙작전과 유사한 단계를 거쳤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지고 있다.
몽고 침입과 삼별초
고려말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
5. 조선의 상륙작전
고려 말기 대마도정벌로 왜구들의 약탈이 다소 주춤해졌으나, 조선의 건국과 함께 어수선한 정국을 이용하여 왜구의 약탈행위는 다시 빈번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은 강화된 수군세력을 토대로 고려말 이후 다시 대마도를 정벌할 것을 결정하게 되었다.
세종대왕은 이종무의 지휘 하에 박초와 이지실을 좌우군도절제사로 임명하여 경상, 전라, 충청의 함선 200여 척을 동원한 대마도정벌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 세종은 대마도정벌의 성공적 수행을 위해서 먼저 정보의 누설방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인식 하에 냉이포(핸재의 진해지역)등 남해안 연안지방에 와 있던 일본 상인 591명을 내륙지방으로 옮겨 노비로 삼았으며, 당시 조선에 와 있던 사절을 억류하였다.
그리고 영의정 유정현을 삼도도통사로, 참찬 최윤덕을 삼군도절 제사로 임명하여 전투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해안방어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병마도절제사, 조전병마사 등을 서해지방의 각도에 파견하고, 함선들의 배치 및 민간선박의 동원준비도 갖추었다.
이와 같은 전투준비가 이루어진 연후에 조선정부에서는 대마도 도주에게 연평곶에 침입하였던 자들을 체포하여 보내고 항복해 올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대마도에서 아무런 회답이 없자 세종은 함선 227척에 17,285명의 원정군으로 세종 원년(1419) 6월 17일 거제도를 출발하여 대마도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6월 20일 대마도의 두지포에 상륙한 원정군은 왜적선 129척을 노획하여 그중 109척을 불사르고, 왜적이 숨어 있었던 1,939채의 집들을 불사르고 114명을 살상하고 21명을 생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두지포에서 승리한 원정군은 왜적들을 모조리 소탕하기 위하여 내륙 깊숙이 진격을 계속하여 대마도 도주의 사죄를 받고 철수하였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대마도정벌은 조선수군의 위력을 과시하고 왜구들의 약탈행위에 경종을 울리는 데는 기여하였지만, 우세한 전투력으로 대마도를 완전하게 정벌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포기함으로써 이후 1510년의 삼포왜란, 1544년의 사량왜변, 1555년의 을묘왜변 및 1592년의 임진왜란 등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공하는 발판을 남겨 두었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조선 대마도 정벌 - 이종무 장군의 대마도 정벌 상상도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제작)
-이순신 장군의 상륙작전
임진왜란시 왜국의 수륙병진 전략은 이순신 장군으로터 좌절됩니다. 조선의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들 중 중요한 하나는 적의 수륙병진 전략을 좌절시켰기 때문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웅포해전:
웅포해전은 웅포의 좌해, 우해의 상륙양동(상륙기만)전술을 활용하였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장문포 왜성공략 상륙작전(상륙기습)
:본격적인 상륙작전 전술을 활용함
6. 열강의 칩입과 국권 강탈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침입경로
*프랑스해병대 - 병인양요
*미국해병대 - 신미양요
*영국해병대 - 거문도사건
러시아 접근과 거문도 사건
*일본 육전대 - 운양호 사건, 강화도 조약 (이후 일제강점)
운양호 사건 - 일본육전대
강화도에 상륙하는 일본군 육전대(해병대)
7. 광복후 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
한국전쟁시 대한민국 해병대 이동경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