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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세존(釋迦世尊)은 한국사람이다
진실한사람3 2022. 10. 17. 08:40
제2부 東洋思想의 起源과 우리나라의 神仙道
弘益人間 光明理世
잃어버린 배달사상과 동양사상의 기원, 안창범, 국학자료원, 서울, 1997년 2월 p. 227-263
제1편
佛敎의 起源과 우리나라의 神仙道
本硏究의 不正에 대한 不正
종교인들 가운데는 무조건 제 신앙만을 옹호하고 다른 신앙을 무조건 배척하려는 경향을 지닌 종교인들도 다소 있다. 그래서 너무나 새롭고 이색적인 본 연구의 내용을 무조건 부정하려는 불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한 맹목적 무정에 대하여 그 부당성을 간략히 비판하고자 한다.
첫째, 본 연구에서의 주장은 거룩한 조사(祖師)나 유명한 학자의 주장이 아니라 평범한 종교사학자의 주장이라 하여 무조건 반대하기 쉽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석가불교는 석가모니의 독창도 아니고 인도의 바라문교에 연원을 둔 것도 아니라, 우리민족의 신선도에 그 연원을 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무리 불교사상에 박식한 조사나 학자라 하더라도 우리민족의 신선도를 모르면 불교 사상의 원류를 밝힐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평범한 종교 사학자의 연구라 하여도 무조건 부정함은 논리상 모순임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신선도에 대한 필자의 연구는 제1부에서 밝힌 바와 같다.
둘째, 본 연구는 너무나 충격적이고 새로운 학설로서 우리민족의 사상사는 물론 세계사룰 뒤엎는 문제라 하여 반대하기 쉽다.
예컨대, 중세까지만 하여도 천둥설이 통설이었으나 현재는 지동설이 통설이다. 그와 같이 세계문화는 신앙같이 믿던 통설이 무너지고 새로운 학설이 등장하면서 발전되어 왔다. 만약에 본 연구에서의 주장을 민족의 사상사와 세계사를 뒤엎는 새로운 학설이라 하여 부정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연구를 봉쇄하는 결과가 되어 진리탐구의 정신에 위배되며, 민족문화나 세계문화의 발전에 역행하는 처사임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 불교의 유적과 유물이 인도에 있는데 불교가 우리나라에서 기원되었다면, 어불성설이 아니냐 하고 반대하기 쉽다.
인도의 유물과 유적은 석가세존의 종교활동을 상징하는 것이며, 불교가 반드시 인도에서 발생하였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어느 사람이 거주하였던 집어 어느 곳에 있다하여 그곳을 그 사람의 출생지라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격이다. 따라서 인도의 유물과 유적을 근거로 본 연구에서의 주장을 무조건 부정함은 이론상 모순임을 이행하여야 할 것이다.
넷째, 고고학적 실종이 있느냐 하고 반대하기 쉽다.
고고학은 18~19세기부터 일부 학자들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나,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학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즉, 고고학은 아직도 걸음마 단계에 불과한 학문이다. 그러므로 고고학에 근거할 경우 하나를 인정하고 열을 부정하게 되면 근세사를 인정하고 고대사를 부정하게 된다. 그래서 영국*일본*독일 등 제국주의의 국가들이 식민지의 역사를 말살시킬 목적으로 이용하던 학문이다. 그리고 고고학은 기록이나 이론에 근거하므로 항상 그 뒤를 따를 수 밖에 없는 학문이다. 그러므로 고고학적 실증을 이유로 무조건 부정하여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다섯째, 본 연구에서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불자들의 신앙심이 흔들릴 것이 아니냐 하고 반대하기 쉽다.
불교를 신앙한다는 것은 석가세존의 인격과 그 가르침을 믿는 것이며, 인도를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본 연구는 석가세존의 인격과 그 가르침을 훼손시키는 것이 아니라, 불교의 발상지가 인도가 아니라 우리나라라는 것으로서 왜곡되었던 불교의 역사를 바로 잡는 것이며, 잃어버렸던 부처님과 민족사상을 찾아오는 것이며, 일그러진 민족혼에 생기를 불어넣는 작업이다. 따라서 불자들의 신앙에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고, 오히려 애국 애족심과 더불어 더욱 진실한 신앙심을 심어주게 되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석가세존은 원래부터 다른 민족이 낳은 부처님이 아니라 우리민족이 낳은 부처님이며, 불교도 원래부터 외래종교가 아니라 우리민족의 고유종교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내게 젖을 먹여 주는 부인이 남의 어머니가 아니라 내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어린이의 정서가 안정되는 것과 같은 격이다.
이상과 같이 볼 때, 본 연구에서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부정함은 하나의 기우에 불과한 것이며, 반대로 본 연구의 주장을 긍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민족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이 달라지고, 우리나라는 아시아 문화의 발상지로 인정받게 될 뿐만 아니라 세계의 석학들이 우리민족의 경제적 발전상과 아울러 그 사상이 위대함에 경탄하여 우리나라로 몰려들게 될 것이며, 우리민족은 세계무대에 위대한 민족으로 등장될 수도 있다고 믿는다.
아울러 민족적으로 긍지와 자부심이 생기고 희망찬 민족사가 전개될 수도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본 연구에서의 주장을 부정하기에 앞서 그 부족한 점을 자진하여 연구하고 보완하여야 할 것이며, 그 홍보에 적극 노력하는 것이 민족과 국가를 위한 국민으로서의 사명이라 생각한다. 적극적인 협조와 동참을 기대한다.
1.序論
제1부에서 상고시대의 우리나라에 고불(古佛, 한인*한웅*한검)이 있었고, 그 고불에 의하여 천일*지일*인일 삼신일체의 천도에 바탕을 둔 도*불*유*삼교일체의 신선도가 성립되어 외래종교가 전래되기 전에 상고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이미 있었음을 밝혔다.
이에 근거하여 우선 석가불교의 유래를 추적하여 본 결과 불교는 근본적으로 인도종교가 아니라 우리민족의 고유종교였다. 즉, 석가세존(釋迦世尊)의 씨족적 근원은 인도의 원주민도 아니었고 드라비다계도 아니었으며 아리아계도 아니라 단군족이었고, 그 출생지인 가비라도 네팔의 타라이가 아니라 백두산 남녘 기슭으로서 석가세존은 근본적으로 우리 민족이었다.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인 설산(雪山) 염부주(閻浮洲) 역시 빈도의 히말라야산맥 어느 곳도 아니고, 인도 중부의 부다가야도 아닌 우리나라의 백두산이었다. 초전법륜지(初轉法輪地)인 녹야원(鹿野園)도 인도 중부의 사르나드(Sarnath)가 아니라 제주도 한라산이었다.
또한 불경은 소승경과 대승경으로 나뉘어지는데, 소승경(4부아함경)은 석가세존이 직접 설하신 경전이지만 대승경은 우리나라 고조선에서 인도로 전승된 신선도의 경전이었다. 대승경을 기록한 범어(산스크리트어)도 상고시대 우리민족의 글자와 언어였다. 불교의 사상과 의식과 고유명사 및 전문용어에 있어서도 우리민족의 신선도와 일치되었다. 따라서 석가불교의 원류는 전적으로 우리나라의 신선도였다.
이러한 학설은 석가불교가 우리나라에 역수입(逆輸入)되어 1600여년 만에 처음 제기되는 문제로서 불교학자와 불자들에게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너무나 이색적이고 상식을 벗어나는 이설(異說)이라 할 수 있다.
이래서 본 연구를 주체적 애국적 대다수의 불자들에게는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북돋우는 일이라 하여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겠지만, 반면에 수도에만 전념하여 조국도 민족도 떠나야 한다는 극히 이상적인 불자들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생기지 아니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불교를 지나치게 믿던 나머지 인도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로 동경하고, 인도민족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민족으로 극찬하면서도, 제 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잘 모르고 제 민족에 대하여 관심이 그리 없는 극소수의 불자들에게는 석가세존이 우리민족이고 불교가 한국에서 나왔다고 할 경우, 무조건 거부반응이 생기고 불쾌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본서의 주장은 이를 불교의 신앙사회를 교란시키는 처사라 하여 지탄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널리 이해하고 냉정한 마음으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본 연구를 정독하시어 오해가 있으시면 그것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풀으시고 높으신 비판과 가르침이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Ⅱ. 釋迦世尊은 한국사람이다.
1. 석가세존의 탄생지인 迦毘羅는 白頭山 남녘 기슭이다.
석가세존이 한국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부터 풀어나가기로 한다. 이 문제는 석가세존의 탄생지 및 성장지가 어디이며, 씨족적 근원은 어디이냐 하는 문제로 나눌 수 있다. 첫째의 문제, 즉 석가세존의 탄생지 및 성장지가 어디냐 하는 문제부터 풀어나간다. 지금까지 석가세존의 탄생지 및 성장지를 인도 네팔의 타라이로 생각하여왔다. 그러나 석가세존이 인도에서 태어났다거나 네팔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을 어느 불경에서도 본 바 없다.
『장아함경』 대본경을 보면 “내 아버지는 정반(淨飯)이라 이름하는 찰제리의 왕족이요, 어머니의 이름은 대청정묘(大淸淨妙)이다. 왕이 다스리는 성은 가비라(迦毘羅)라 이름하였다. 부처님은 다시 계송으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는 찰제리, 이름은 정반, 어머니는 대청정묘(大淸淨妙)이다. 땅은 넓고 백성은 풍족하였으니 나는 거기에 태어났노라” 하였다. 이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일반상식이다. 그러면 가비라는 어디에 있는가?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파승사(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破僧事)” 제5를 보면, “설산 남녘 기슭 강가하(弶伽河) 곁이 거비라(가비라)선인이 사는 곳이니 거비라성(가비라성)과 멀지 않다”하여 가비라성이 설산 남녘 기슭과 멀지 않는 곳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석가세존이 설산에서 태어나고 거기에서 성장하였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께서도 가섭에게 말하기를 “까마득한 옛날 아직 이 세상에 여래가 출현하기 전에 나는 설산선인(雪山仙人)으로서 설산에서 살면서 보살행을 닦았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석가세존의 탄생지 및 성장지는 설산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다음은 설산은 어디에 있는 어떤 산인가의 문제이다. 『장아함경』 세기경과 “석가방지(釋迦方志)” 중변편(中邊篇) 제3에 의하면, 설산은 그 정상에 큰 못인 아뇩달지(阿耨達池)가 있고 사방으로 4개의 큰 강물이 흐르는데 모두 오른 쪽으로 들아 흐른다. 또한 설산은 3층인데 샘의 원천으로써 북쪽으로 큰 폭포가 흐른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상설된다.
우리나라의 백두산도 이를 설산이라 하고 그 정상에 큰 못인 천지가 있으며 거기에서 두만강*압록강*송화강*소하강 등 사방으로 4개의 큰 강물이 흐르고 모두 오른쪽으로 돌아 흐른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 회령도호부에 의하면 백두산도 3총이며 샘의 원천으로써 북쪽으로 큰 폭포인 천지폭포가 흐른다. 이에 대해서도 뒤에 상설된다.
이와 같이 불서의 설산과 우리나라 백두산의 특수성이 서로 동일하다. 그런데 인도 북부의 히말라야산맥 가운데는 그러한 산이 없다. 동아일보의 보도에 의하면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산상호수는 페루와 볼리비아 국경에 있는 티티카호와 소련의 레닌그라드 근처에 있는 라도카호라 하여 인도 히말라야산맥의 어느 산외 정상에도 큰 못(호수)이 없음을 확인하여 주고 있다. 이는 곧 설산이 백두산임을 확인하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석가세존의 탄생지이며 성장지인 가비라가 설산 남녘 기슭에 있었다는 불서의 기록에 틀림이 없다면, 그곳은 우리나라의 백두산 남녘 기슭이 틀림없다는 이론이 성립된다. 또한 『석가씨보(釋迦氏譜)에 의하면 가비라는 염부주 중의 한 지역으로 지구에서 가장 중앙이라 하였는가 하면, 세계의 중심으로 과거의 고불(古佛)이 모두 이곳에서 일어났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곧 염부주이며, 세계지도를 펴고 보면 비교적 백두산이 지구에서 가장 중심이다. 한웅*한검 등 과거의 고불도 백두산에서 일어났다. 따라서 석가세존의 탄생지인 가비라는 백두산 남녘 기슭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또한 가비라는 마갈타국에 속해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상고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백두산의 남녘과 동녙 그리고 북녘에 걸쳐 말갈국이 있었고, 어느 사학자의 말에 의하면 가비라성도 우리나라의 상고사에 나온다고 한다. 석가세존의 어머니는 그 친정이 고리국(槀離國)인데 우리나라의 상고사에도 고리국이 나온다. 또한 가비라의 기온을 보면 우리나라와 일치하고 인도와 다르다. 즉 “중아함경” 유연경에 의하면 “나(석가세존)를 위하여 여러 가지 궁전, 곧 봄 여름 궁전과 겨울 궁전을 지었으니, 나를 잘 노닐게 하기 위해서 였다”고 하여 가비라에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인도에는 건기와 우기만 있고, 봄*여름*가을*겨울의 4계가 없다. 이를 보아도 석가세존의 탄생지인 가비라는 인도(네팔)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에 반하여 네팔 당국은 가비라(迦毘羅)가 네팔의 타라이에 있었다고 한다. 타라이는 그 북쪽의 히말라야산맥을 설산이라 가정할 경우 거기에서 직선 거리로 약 55km나 떨어져 있어 설산 기슭이 아니었다. 또한 불서에 의하면 가비라의 곁을 강가하(항하의 지류)가 흐른다고 하였는데, 타라이 곁을 흐르는 강물도 없었다. 그 성의 넓이는 약 3,000평 정도로서 왕궁이라 하기에 너무나 협소하였고, 기록에 의하면 성문도 동서남북에 네 개인데 동서에 두 게뿐이어서 남북에는 없었다. 건물부지도 석가세존이 거처하던 세 체의 부지와 부왕과 모후께서 거처하던 건물부지 그리고 신하들의 사무실 그리고 시녀들이 거처하던 건물부지롤 생각하면 수십채를 넘는다. 그런데 다만 두 개 뿐으로 어느 하나도 기록과 맞지 않았다. 또한 근세조선 세조 수양대군의 저술인 “석보상절”에 의하면 석가세존이 입멸하여 화장하자, 여덟섬 너맡(8만 4천개)의 사리(舍利)가 나왔는데 이를 제천(諸天)과 용왕(龍王)에게 나누어주니 모셔다가 7보탑을 세웠다 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명기하기를 “인간 세상에 큰 탑이 넷이니, 가비라국 부처가 나신 곳에 하나와 마갈제국 성도하신 곳에 하나와 파날라국 녹야원 전법하신 곳에 하나와 구시국 열반하신 곳에 하나가 있더라”고 하였다. 즉 석가세존이 입멸하자 탄생지인 가비라에 석가세존의 사리불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네팔 당국이 석가세존의 탄생지라고 말하는 타라이에는 어떠한 불탑도 없었다. 석가세존이 직접 태어났다는 룸비니 동산도 동산이 아니라 평지였고, 거기에 아쇼카왕이 세웠다는 부러진 돌기둥만이 있었으며, 석가세존의 불탑은 없었다.
이상과 같이 네팔 당국이 석가세존의 탄생지라고 말하는 타라이는 어느 하나도 불서의 기록과 맞지 않았다. 그러므로 네팔의 타라이는 가비라성이라고 할 수 없다. 여기에서 자연적으로 석가세존의 탄생지인 가비라는 우리나라의 백두산 남녘 기슭에 있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된다. 더욱이 신라의 대문호 “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 대숭복사비명병서(大嵩福寺碑銘並序)에도 “석가세존은 우이(嵎夷, 해 돋이 땅)의 태양인데 서토(西土)에서 드러냈으나 동방에서 출생하였다”하여 석가세존의 탄생지는 인도가 아니라 동방해돋이땅에서 태어났음을 말하고 있다. 이아(爾雅)에 의하면 해돋이땅이란 동이족이 사는 동방을 지칭한다. 즉 석가세존은 동이족 나라인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문제가 남아있다. 이는 남북이 통일되는 날 불원 밝혀지리라 믿는다.
2. 釋迦世尊의 氏族的 根源은 檀君族이다.
석가세존의 탄생지인 가비라가 우리나라의 백두산 남녘 기슭이라면
당연히 그 씨족적 근원이 단군족 곧 우리민족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
런데 종남산(終南山) 도선(道宣)의 “석가씨보”에 의하면 불성(佛性)을 구담(瞿曇)*감자(甘蔗)*석가(釋迦)*사이(舍夷)*일종(日種)이라 하였고, 승우(僧祐)의 “석가보”에는 좀더 자세히 밝혀 주고 있는데, 구담을 사이라하고 사이는 외국의 귀성(貴姓)(놀찹)이라 하였다. 잠자는 묘족(苗族)의 후예라 하고 석가는 단종 찰제리(檀種) 刹帝利)라 하였다. 사이(舍夷)의 이(夷)는 동이(東夷)*서이(西夷)의 이(夷)이며, 사이는 외국의 귀성이라 하였으므로 사이는 인도의 원주민도 아니고, 드라비다계(系)도, 아리아계(系)도 아니라 외국에서 인도로 이주한 동이(東夷)나 서이(西夷)의 일파로서 넓게는 알타이족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석가세존은 알타이족
이라 할 수 있다. 우리민족도 주지하는 바와 같이 알타이족이다. 여기에
서 석가세존은 넓은 의미에서 우리민족과 같은 황인종이라 할 수 있다.
불상을 보아도 황인종이고, 불타의 32대인상(大人相)을 보아도 황인종이다.
묘족은 사전에 의하면 고몽고계인종(古蒙古系人種)이라 하였다. 영국의 인도 사학자 빈센트 스미스(Vincent Smith)도 석존몽고인설(釋尊蒙古人說)을 주장하였다. 우리민족도 몽고계 인종이다. 몽고의 원어는 몽골리아(Mongolia)이다. 몽고의 원어는 몽골리아(Mongolia)이다. “몽”은 "ᄆᆞᆼ"의 전음이며, “ᄆᆞᆼ”은 말(馬)의 고어이다. 골리아(golia)는 “고려”의 서구식 발음이다. 즉 몽골리아는 “말고려”란 뜻으로 말을 잘 기르고, 잘 다루며, 잘 타는 고려족이란 뜻이다. 고려는 왕건태조가 세운 근세 우리나라의 국명이기도 하지만 상고시대부터 불러오던 우리나라 지역에 대한 이칭이다. 따라서 몽고족은 원래 우리민족의 지류이다。 『단군세기』를 보아도 몽고족은 단군조선 제4세 단군 오사구(烏斯丘)의 동생 오사달(烏斯달(達)의 후손으로서 우리민족의 지류이다. 여기서 석가세존이 몽고계 인종이라면 곧 우리민족임을 알 수 있다.
단종(檀種)도 단군종족이란 뜻으로서 직접 우리민족을 가리키고, 찰제리(刹帝利)도 『삼국유사』에 신라왕을 찰제리라 하였으므로 우리민족을 가리키며, 일종(日種)은 광명을 숭상하는 태양족이란 뜻인데 우리민족도 광명을 숭상하는 태양족으로서 일종 역시 우리민족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어느 측면에서 보아도 석가세존은 근본적으로 우리민족이다. 더욱이 석가세존의 초상화를 보면, 그 모습이 동양적인 이목구비(耳目口鼻)에 그 복장이 인도풍(印度風)이 아니라 우리민족 고유의 한복선이다. 이를 보아도 석가세존은 한국사람임에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고, 우리 민족은 부처님을 낳은 민족이 된다.
Ⅲ. 釋迦世尊의 苦行成道地는 우리나라의 白頭山이다.
1. 釋迦世尊의 苦行成道地는 雪山이다.
석가세존의 탄생지인 가비라가 백두산 남녘 기슭이고, 또한 석가세존이 단군족의 후예라면 당연히 고행성도지 역시 우리나라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석가세존은 보살 당시 설산 염부주에서 6년 동안 고행하고 도를 성취하였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설산 남녘 기슭 니련선하(尼連禪河)에서 목욕하고 그 곁의 고석산(孤石山) 즉 가야산(伽倻山) 또는 가사산(伽闍山)에서 동방계명성(東方啓明星)이 나타날 때에 밝은 별을 보고 도롤 깨치었다고도 한다. 『우리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보면 석가세존께서도 가섭에게 직접 말하기를 “까마득한 옛날 아직 이 세샹에 여래가 출현하기 전에 나는 설산선인(雪山仙人)으로서 설산에 살면서 보살행을 닦았다“고 하였다. 그후 설산 총림방(叢林房) 중의 진귀조사(眞歸祖師)로부터 종지(宗旨)를 받은 것으로 기록은 밝혀주고 있다.
그러나 불서에서 말하는 설산이 인도에 없으므로 석가세존의 설산고행을 하다의 전설로 넘겨버리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과학적 근거도 없이 막연히 석가세존이 고행성도한 설산을 인도 북부 히말라야 산맥중의 어느 산으로, 염부주를 인도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백두산도 일명 설산이며, 백두산을 우리민족의 순수한 고유어로 표현할 경우, 그것은 히머리산, 히마리산(마리는 머리의 고어), 히마리야산이 되고, 히마리야산을 영어로 표기하여 발음하면, 그것은 히마리야산이 되며, 히말리야가 전음되어 히말라야(Himalaya)산이 된다.
염부주도 신주(神州) 또는 진단(振旦)이라 하는데, 우리나라의 백두산 일대 또는 천지일대(天池一帶)도 거기에서 신선도가 베풀어졌고, 신선과 성인들이 살았으므로 신시(神市) 또는 신주(神州)라 하고, 그곳은 불사약인 자연생 인삼의 원산지여서 진단(震檀*振旦*震丹*眞丹)이라 불리웠던 것이 후에 우리나라의 이칭이 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인 설산 염부주가 인도 북부의 히말라야산맥 어디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나라의 백두산과 천지주변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러한 경우 흔히 아전인수격(我田引水格)으로 해석하여 자기에게 유리한 쪽을 택한다. 그것은 학문하는 올바른 자세라고 할 수 없다. 학문은 어디까지나 미확정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어떠한 판단기준에 의하여 확정하여야 한다. 이때 인용하는 방법이 가설검증법(假說檢證法)이다.
가설검증법(假說檢證法)이란 어떠한 판단기준을 세우고 그 판단기준에 의하여 미확정적인 문제룰 확정하는 방법이다. 이 경우 판단기준은 불서의 기록 밖에 달리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불서의 설산과 염부주가 우리나라 및 인도의 그것 가운데 어느 것과 일치하느냐에 따라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가 확정되게 된다.
2. 雪山은 우리나라의 白頭山이다.
1) 설산의 특수성
그러면 판단기준으로써 설산에 관한 기록부터 알아보기로 한다. 『장아함경』 세기경에 의하면 설산의 정상에 큰 못인 아뇩달지(阿耨達池)가 있고, 거기에 용왕이 살며, 사방에서 네 개의 큰 강이 흐르는데, 동쪽으로는 항하(恒河)돕}(†트홍피〉, 남쪽으로는 신두하(新頭河), 서쪽으로는 바차하(婆叉河), 북쪽으로는 사다하(斯陀河)가 흐른다고 하였다. 또한 『석가방지』중변편(中邊編) 제3을 보면, 여러 전거를 들면서 좀 더 자세히 밝혀주고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염주부는 수미산 남쪽 해중(海中)에 있다. 3변이 비등하여 북은 넓고 남은 좁아(北闊南狹) 인면상이다 염부주는 진단(振旦)이니 신주(神州)라 한다. 염부주 중에 한 개의 큰 못이 있으니 아나타답다(阿那陀答多)라 하고, 당(唐)에서는 무열뇌지(無熱惱池)라 한다. 소위 불경에서 말하는 아뇩달지(阿耨達池)이니 못의 둘레는 800리이며, 4안(四岸)이 보물장식 같다. 정남에는 대단한 평지가 있다. 금강좌 동쪽은 경사를 이루는데 5,000리에 이른다. 또 못의 정남은 이 주(州)의 첨처(尖處)이며, 못의 북쪽에는 대단한 폭포(謎羅川)가 있어 북으로 나아간다. 설산은 3층인데 하수의 원천으로서 수지영부(水之靈府)이다, 사방으로 4대하(四大河)가 흐르는데 모두 오른쪽으로 돌아 흐른다.
이상의 기록에 의하면 설산의 정상에 아뇩달지가 있고, 거기에서 사방으로 4대하가 흐른다. 또한 염부주에도 아뇩달지가 있고 거기에서 사방으로 4대하가 흐른다. 그러므로 염부주와 설산은 같은 지역이며, 염부주는 설산 정상의 아뇩달지 주변을 가리키기도 한다.
2) 백두산의 특수성
다음은 우리나라의 백두산과 그 정상의 큰 못인 천지에 관한 기록이다. 「동국여지승람』 회령도호부에 의하면 기이하게도 설산과 같이 백두산도 3층으로 되어있는데, 그 정상에 큰 못인 천지가 있고, 못의 둘레는 80리라 하였다. 또한 백두산 친지에서 발원하여 두만*압록*송화*소하 등 4대하(四大河)가 사방으로 흐르는데, 모두 오른쪽으로 들아 흐른다. 천지의 북쪽 송화강의 출구는 달문(達門)인데, 거기에서도 아뇩달지에서와 같이 높이 68m의 큰 폭포가 북쪽으로 흐른다. 천지라는 뜻은 천연수 즉 생수를 의미하는데, 『열자』에는 천지를 귀허(歸虛)라 하면서 물은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목극등(穆克登)의 기록에는 백두산 정상에 못이 있는데 이를 용왕담 또는 천지라 하고 물은 북소리를 내듯 솟아난다고 하였다.
동아일보의 최근 보도를 보아도 천지에서 생수가 솟아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래서 백두산 천지도 하수의 원천으로서 수지영부(水之靈府)인 것이다 또한 천지의 물은 차고 맑으며 바다와 같이 넓으므로 백두산 정상에 앉아 천지를 내려다 보면 모든 고뇌와 번민, 오뇌와 신음이 사그러지는 듯 하니 최남선은 『백두산 근참기』에서 천지를 무열뇌지(無熱惱池)라 하였다. 또한 천지의 사위(四圍))도 이른바 화구벽(火口壁)이라는 것으로 어떤 것은 자색이고, 어떤 것은 흑색이며, 간색도 있고 잡색도 있어서 그 색채가 다양하다. 이래서 천지의 사위는 보물장식 같기도 하다.
천지의 모형을 보면 3변이 비등한데, 북은 넓고 남은 좁아서 인면상이다. 천지의 남쪽 벽상에 예각직암(銳角直岩)이 높이 솟아있고, 그 남쪽에는 동서로 개마고원이 펼쳐있는데 면적이 약 4만㎢의 대평지이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다.
3. 백두산과 설산의 동일성
이상의 기록을 근거로 염부주와 친지주변(신시), 설과 백두산 비교한다. 먼저 염부주에 관한 기록부터 인출하여 천지주변과 비교한다.
불서에 염부주를 진단 또는 신주라 하였는데, 백두산의 천지주변을 진단 또는 신주 또는 신시라 한다 염부주는 3변이 비등고 북은 넓고 남은 좁아 인면상인데, 백두산의 천지주변 모형도 3변이 비등고 북은 넓고 남은 좁아 인면상이다. 염부주에 아뇩달지가 있어 거기에서 사방으로 4대하가 흐르는데, 백두산 정상에도 천지가 있고 거기에서도 사방으로 4대하가 흐른다.
이상과 같이 불서의 염부주와 백두산 천지의 특수요건이 서로 일치한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염부주가 인도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백두산 천지주변 신시임을 말한다. 또한 『석가방지』를 보면 “염주부를 크게 3분하면 2분은 북쪽인데, 땅은 넓고 사람은 드물며, 흉노가 사는데, 도(道)에 힘쓰지 않는다. 1분은 남쪽인데 3면이 바다에 닿았고, 사람은 많으나 마음이 맑고 성인의 교화를 잘 받은 대성도(大聖都)라” 하였다. 아를 보면 만주*러시아의 연해주*한반도를 포괄하는 상고시대의 고조선 강역 전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또한 염부주는 해중(海中)에 있다고 하였는데, 해중은 수미세계 곧 신선이 사는 곳으로서 신시를 의미하고 넓게는 고조선 전체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볼 때, 염부주는 좁게는 백두산 천지주변 신시를 의미하며, 넓게는 상고시대의 고조선 강역 전체를 의미한다.
다음은 설산과 백두산의 비교이다.
설산을 히마리야산이라 하는데, 백두산도 우리민족의 순수한 고유어로 표현하면, 히마리야산이며, 한편 설산이라 한다. 설상이 3층인데 백두산도 3층이며, 설산의 정상에 큰 못인 아뇩달지가 있고 당나라에서는 이를 무열뇌지라 하는데, 백두산의 정상에도 큰 곳인 천지가 있고, 이를 최남선은 무열뇌지라 하였다 아뇩달지에서 사방으로 4대하가 흐르고, 그 하수는 오른쪽으로 돌아 흐르는 요하(繞河)인데, 천지에서도 사방으로 4대하가 흐르고 그 하수 역시 오른쪽으로 돌아 흐르는 요하이다. 아뇩달지 북쪽에 콘 폭포인 미라천(謎羅川)이 흐르는데, 천지의 북쪽에서도 천지폭포가 미라천을 이룬다. 이래서 아뇩달지는 하수의 원천으로서 수지영부라 하는데, 천지도 하수의 원천으로서 수지영부이다. 아뇩달지 정남벽상에 첨처가 있고 그 남방에 대단한 평지가 있다는데, 천지의 정남벽상에도 예각직암이 높이 솟아있고 그 남방에 약 4만㎢의 대평지인 개마고원이 있다. 아뇩달지의 못 둘레가 800리라 하였는데 천지의 못 둘레는 80리라 한다. 단위는 과거와 현재, 인도와 중국과 우리나라가 서로 다르므로 “8”이라는 숫자에 의의가 있는 것이다. 아뇩달지의 4안이 보물장식 같다는데, 천지의 4위도 형형색색하여 보물장식같다. 이상을 도표화하면 도표(6)과 같다.
이상과 같이 불서의 설산과 우리나라 백두산의 특수성이 서로 일치한다.
반면에 불자들이 성산으로 모시는 히말라야산맥의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봉이거나, 그 산맥 가운데 어느 산의 정상에도 하수의 원천인 큰 못이 없기 때문이다. 뿐더러 현장(玄奘)의 “대당서역기ː大唐西域記”를 비롯하여 어느 기록을 보아도 석가세존이 설산에서 고행하였다는 유적이나 기념물을 인도에서 일절 찾아볼 수 없다. 더욱이 학자들의 불교사서를 보면 석가세존의 설산고행을 허무맹랑한 전설같이 흘려버리고 있다. 그것은 인도 지역에 불서에 기록된 그러한 전설이 없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불서의 설산과 우리나라의 백두산의 특수성이 서로 일치하고, 인도에 그러한 설산이 없다고 할 때, 다음과 같이 연역할 수 있다.
1. 불서의 설산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다.
2. 염부주도 인도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백두산 천지주변이다.
3. 석가세존이 설산 염부주에서 6년 고행 끝에 그 남녘 기슭 가야산에서 성도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우리나라의 백두산 천지주변에서 6년 고행 끝에 그 남녘 기슭의 가야산(가야산은 우리나라의 ‘신교총화(神敎總話)'에도 나오는 산으로서 고유명사가 아니라 승려들이 수도하는 산을 의미함)에서 성도하였음을 의미한다.
4. 석가세존에게 종지를 넘겨준 진귀조사 역시 인도 사람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이다.
5. 석가세존의 탄생지인 가비라성도 우리나라의 백두산 남녘 기슭에 있었다.
6. 석가세존은 근본적으로 우리민족이다.
3. 印度의 부다가야는 釋迦世尊의 苦行成道地가 아니다.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가 우리나라의 백두산이라면 인도의 부다가야는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인도의 부다가야는 현재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로 되고 있다. 이제 그 부당성을 지적한다.
첫째, 부다가야의 지리적 조건이 불서의 기록과 맞지 않는다.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는 산악이다. 그런데 부다가야는 산악이 아니라 평지이다. 그리고 부다가야는 인도 중부에 가까운 곳으로 인도 북부의 히말라야산맥 중의 어느 산을 설산이라 할 경우 거기에서 1,000여리 이상이나 떨어져 있다.
둘째, 부다가야의 네란자라강은 불서의 니련선하가 아니다.
석가세존은 6년 고행 마지막에 니련선하(尼連禪河)에서 목욕하고, 가야산(가사산 또는 고석산)의 보리수 밑에서 성도했다. 니련선하는 종교용어로서 7강물이나 그 주변의 풍경을 나타낸 표현이다, 그 뜻으로 보면 강바닥에 깔려있는 모래가 보일 정도의 깨끗하고 맑은 물을 의미하며, 강변에 연이어 서 있는 병풍석은 마치 비구니가 줄지어 서서 기도하는 것 같은 선경을 의미한다.
인도의 부다가야 가까이에도 네란자라강이 흐른다. 네란자라강은 건기에는 말라 버리고 우기에만 흐르는 강으로서 맑지도 않고 강변은 흙과 모래로 된 얕은 언덕으로서 병풍석이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니련선하는 설산에서 동남해로 들어가는 항하의 지류로서 동쪽 아니면 동남쪽으로 흐르는 강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부다가야의 근교를 흐르는 네란자라강은 인도 중부의 데칸고원을 시발로 하여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강이다. 그러므로 부다가야의 네란자라강은 불서의 니련선하라 할 수 없다.
셋째, 부다가야에는 석가세존의 불탑이 없다.
수양대군의 저술인 『석보상절』에 의하면 고행성도지에 석가세존의 불탑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라는 부다가야에 석가세존의 불탑이 없다. 있다면 석가세존이 입멸하여 약 200년 후에 아쇼카왕이 세웠다는 돌기둥과 정사와 그후에 만들어졌거나 다른 데서 옮겨온 승려들의 불탑만이 있을 뿐이다.
넷째, 부다가야는 조작되고 있다.
부다가야는 가야에 부다를 붙인 명칭으로써 가야보다 후에 조작된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즉 가야를 힌두교의 성지로 만들면서 어쩔 수 없이 붙여진 명칭인 것이다. 그런데 부다가야의 불탑들은 다른 데서 옮겨온 것인가 하면, 정사의 작은 원판 자체가 근대의 위작이라는 학자(B.M.Barua)도 있으니), 부다가야의 유물과 유적들은 인도인의 긍지를 높이고 인도를 찾아오는 외국불자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하여 후대에 와서 조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이유에 의하여 인도의 부다가야는 석가세존의 고행성도지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도의 부다가야는 석가세존이 고행성도한 설산이 아니며 기록과 전혀 맞지 않는다, 그럼에도 볼구하고 이룰 믿는 우리나라의 승려들이나 불교학자들의 심리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더욱이 부다가야에 막대한 금액을 드리면서 절까지 지으니, 신앙이란 그렇게도 맹목적인가? 맹목적 신앙으로 어떻게 견성성불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통탄할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Ⅳ. 釋迦世尊의 初轉法輪地는 濟州道 漢拏山이다.
1. 釋迦世尊의 初轉法輪地는 波羅捺 綠野園이다.
석가세존은 원래 한국 사람으로서 우리나라의 백두산에서 고행성도 하였다. 이를 생각하면 석가세존이 먼 인도에까지 가기 전에 우리나라에서 먼저 법을 굴릴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석가세존의 초전법륜지(初轉法輪地)인 파라날(波羅捺) 녹야원(綠野園)을 현재의 중인도 베나레스시(Benares市)의 사르나드(Sarnath)라고 여기고 있다. 그런데 제주도 한라산도 신선과 사슴이 살던 녹야원이다. 여기에서 녹야원이 어디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러한 경우 인용하는 방법이 가설검증법으로써 불경이 그 판단기준이 된다.
『중아함경』 라마경을 보면, 석가세존이 성도한 후 파라날(波羅捺) 선인(仙人)이 사는 녹야원 가시도읍(加尸都邑)에서 교진녀(憍陳女) 등 다섯 비구들을 제일 먼저 만나고 거기에서 사제(四諦)의 법을 굴린 것으로 되어있다. 녹야원에 대한 자세한 기록으로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娑論』 제183권에 의하면 녹야원은 예로부터 선인이 사는 곳이라 하여 선인주처(仙人住處)라 하며, 예로부터 선인이 법을 설하던 곳이라 하여 선인논처(仙人論處)라 하고, 500선인이 공중을 비행하던 중에 인연을 잃고 그곳에 떨어졌다 하여 선인타처(仙人墮處)라 하며, 뭇 사슴이 서식한다 하여 녹림(鹿林) 또는 녹원(鹿園)이라 하고, 보리수가 많다 하여 보리수처(菩提樹處)라 하였다. 또한 수양대군의 저술인 『석보상절』에 석가세존의 사리 불탑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판단기준으로서 녹야원의 성립요건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 녹야원은 산악이다.
2. 녹야원은 녹림 내지 녹원이다.
3. 녹야원은 선인주처 내지 선인논처이다.
4. 녹야원은 선인타처이다.
5. 녹야원은 보리수처이다.
6.녹야원에 석가세존의 사리불탑이 있다.
7. 녹야원에 가시도읍이 있다.
이상의 일곱 가지 요건이 녹야원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필요조건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위의 일곱 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면 그곳이 곧 녹야원으로서 석가세존의 초전법륜지라 할 수 있으며, 만약 충족시키지 못하면 그곳은 녹야원도 아니고 석가세존의 초전법륜지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2. 波羅捺 綠野園)은 인도의 사르나드가 아니다.
그러면 인도 당국이 석가세존의 초전법륜지라고 주장하는 인도 중부의 사르나드가 녹야원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부터 먼저 따져 보기로 한다. 『불교사전』의 기록을 보면 “바라날은 중인도 마갈타국의 서북쪽에 있는 나라로서 별명을 가시라 하고 지금의 오우드 지방, 베나레스시(Benares市)에 해당하며, 석가세존이 성도한지 三七日후에 쉰딘후에 이 나라의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법을 설하여 교진녀 등 다섯 비구를 제도하고, 그후 200년이 지나서 아육왕(아쇼카왕)이 그 영지를 표시하기 위하여 두 개의 석주를 세웠다”고 하였다. 또한 다른 기록을 보면 “초전법륜의 땅은 현재 사르나드라고 불리며 베나레스시 북동쪽 약 7km되는 지점에 있다. 이는 '사랑가 나타(사슴의 왕)'를 생략한 말에서 유래한다. 이 지역은 경전에 ‘사슴동산이나 선인이 사는 곳’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 곳이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상의 기록과 현지답사를 근거로 인도의 사르나드를 녹야원의 성립요건에 대입시켜 보기로 한다.
1. 인도의 사르나드는 산악이 아니다.
녹야원이란 사슴이 사는 산악을 의미한다. 그런데 인도의 사르나드는 약 2,000평 정도의 평지였고 산악이 아니었다.
2. 인도의 사르나드는 녹림 내지 녹원이 아니었다
사르나드는 ‘사랑가나타(사슴의 왕)’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산악이 아닌 자그마한 들판으로서 사슴이 살만한 곳도 못되었고, 사르나드에 사슴이 살았다는 기록도 본 바 없다. 따라서 사르나드는 녹림 내지 녹원이 아니었다.
3. 인도의 사르나드는 선인주처도 아니고 선인논처도 아니다.
선인주처란 신선이 사는 곳으로서 이 역시 산 좋고 물 좋은 산악이어야 한다. 신선은 산악에 살고 평지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도의 사르나드는 산악도 아니고 거기에 신선이 살았다는 기록을 본 바도 없다. 즉, 인도의 사르나드는 선인주처도 아니고 선인논처도 될 수 없었다.
4. 인도의 사르나드는 선인주처도 아니다.
사르나드에서 500신선에 대한 어떠한 물증도 찾아볼 수 없었고, 그에 대한 전설도 기록도 본 바 없다. 따라서 인도의 사르나드는 선인타처가 아니다.
5. 인도의 사르나드는 보리수처가 아니다.
보리수는 산악이든 평지든 나고 자랄 수 있는 나무이다. 그리고 현재에도 보리수가 몇 그루 있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가부를 내릴 수 없다.
6. 인도의 사르나드에 석가세존의 불탑이 없었다.
불탑은 거의 돌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사람이 고의적으로 없애버리지 않는 한 몇 천년이고 그대로 남을 수 있다. 그런데 인도의 사르나드에 석가세존이 입멸하자 조성하였다는 불탑이 없었고, 있었다는 기록도 본 바 없다. 아육왕이 그 영지롤 표시하기 위하여 두개의 석주룰 세운 것도 석가세존이 초전법륜한 지 약 200년 후라 하였다 그외 스투파*불상*승원 등이 사르나드에 있으나 그것은 모두 B.C. 3세기 이후에 조성된 것들이었ek.
(7) 인도의 사르나드에 가시도읍이 없었다.
『종아함경』에 의하면 파라날에 녹야원이 있고, 녹야원에 가시도읍이 있다. 그런데 녹야원이라는 사르나드 자체가 약 2,000평 정도로서 그 속에 가시라는 도옵지가 존재할 수 없었고, 베나레스시의 별명이 가시라 하여 불서의 기록과 맞지 않는다.
이상과 같이 인도의 사르나드는 판단기준인 녹야원의 성립요건에 어느 하나도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인도의 사르나드는 녹야원이라 할 수 없고, 석가세존의 초전법륜지라 할 수도 없다. 더욱이 대성자이며 대각자인 부처님이 초전법륜한 곳을 입멸하여 200년 후까지 그대로 방치하였다는 것이나, 1794년 베나레스왕의 대신이 사르나드의 유적을 파괴한 것도 이유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사르나드를 녹야원이라 한 것은 석가세존 당시 또는 입멸 후 비유적으로 불리던 것이 후세에 이르러 인도인의 긍지를 높이고 찾아오는 외국의 관광객들에게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비유를 사실같이 조성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3. 波羅捺 綠野園은 濟州道 漢拏山이다.
파라날이란 글자의 뜻으로 볼 때, 파라날은 물결치는 나라 곧 섬나라를 의미하는데, 제주도가 바로 물결치는 나라 곧 섬나라이며, 녹야원이란 사슴이 서식하는 산악을 의미하는데 제주도 한라산에 사슴이 살았고, 정상의 연못에서 흰사슴이 물을 먹었으므로 그 연못을 백록담(白鹿潭)이라 한다. 그 서쪽은 녹산장(鹿山場)으로서 사슴이 놀던 들판이다. 또한 제주도 한라산에는 우거진 숲도 많고 공기도 맑으며 생수도 많다. 이러한 것만 보아도 제주도 한라산이 녹야원이 아니었던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과학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이제 제주도 한라산이 녹야원인가 아닌가 하는 성립요건에 대한 문제를 알아보기로 한다.
첫째, 제주도 한라산은 산악이다.
제주도 한라산은 1950m의 한국 제2의 명산이다. 이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로서 설명이 필요없다고 본다.
둘째, 제주도 한라산은 녹림 내지 녹원이다.
한라산은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로서 선산(仙山)이다. 선산이란 선인이 거처하는 산을 의미한다. 선인은 동물 중에서 그 품행이 고결하고 장생한다는 사슴과 벗을 한다. 그래서 사슴이 서식하는 곳에 선인이 살고, 선인이 거처하는 곳에 사슴이 서식한다.
조관빈의 『한라산기』를 보면 “한라산에 본시 사슴이 많았는데 매양 새벽과 저녁이면 사슴들이 백록담에 나와 물을 마신다. 어느 때 한 사냥꾼이 활을 들고 못가의 바위 뒤에 숨어앉아 기다리다가 문득보니 사슴의 떼가 몰려 나오는데 100인지 1,000인지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중에 가장 큰 사슴의 몸 빚은 희고 광채가 났다. 어이한 백발 노옹이 그 등 위에 올라탔었다. 사냥꾼은 활을 들러 쏘기는 커녕 그만 놀라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윽고 맨 끝으로 따라가는 작은 사슴 하나를룰 쏘았더니, 또 사슴을 타고 오는 신선이 있어 손가락으로 사슴을 점검하는 듯하므로 엽사는 가슴을 두근거리다가 다시 문득 보니 그들은 간 곳이 없었다”하여 한라산에 신선과 함께 사슴이 살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한라산 동쪽 허리에 사슴이 논다는 녹산장(鹿山場)과 아울러 소록봉(小鹿峯)과 대록봉(大鹿峯)이 있다. 한라산 서남쪽 안덕면에도 겨울이면 사슴이 내려와 서식한다는 녹하악(鹿下岳)이 있다. 이를 보면 제주도 한라산은 녹림 내지 녹원이었고, 동시에 선인녹원(仙人鹿園)이었다.
셋째, 제주도 한라산은 선인주처 내지 선인논처이다.
앞에서 한라산의 백록담에 신선이 나타났었다는 기록을 소개하였다. 『신종동국여지승람』에 의해도 정의*김녕*함덕에 신선이 많다 하였고, 한라산은 원산(圓山)이니 곧 바다 가운데 있다는 원교산(圓矯山)이고 그 동은 동무소협(東巫小峽)인데, 신선이 사는 곳이라 하였다. 『법주기』에도 박가범(薄伽梵) 부처 당시에 16존자의 한 사람인 발타라존자(跋陀羅尊子)께서 한라산 영실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제주도 한라산은 예로부터 신선이 살았다는 선인주처 내지 선인논처이다.
넷째, 제주도 한라산은 선인타처이다.
선인타처란 신화적인 아야기이지만 녹야원에 500선인과 관련된 어떤 물증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라산 서녘 기슭에 부처님이 왔었다는 불래악(佛來嶽)이 있고, 불래악 맞은 편이 영실(靈室)인데, 영실에 500개의 자연석이 우뚝 서 있다. 이 500개의 자연석이 마치 도(道)를 닦는 수도승 같아서 이를 500나한(羅漢)이라 부르고, 그곳을 수행동(修行洞)이라 한다. 그러므로 한라산 불래악 영실에 있는 500개의 자연석이 곧 500신선의 상징이라 할 수 있으니, 제주도 한라산은 선인타처인 것이다.
다섯째, 제주도 한라산은 보리수처이다.
보리수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동인도(東印度)에서 자라는 뽕나무과에 속하는 니무로서 키자 30m 쯤되고, 잎은 염통꼴로 끝이 뾰족하며 가죽바탕으로 윤이 나고, 꽂은 은두화로 무화과와 같은 열매가 열린다. 이 나무를 인도에서 보리수라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보리수과에 속하는 나무로서 제주방언으로는 ‘볼레낭’이라 한다. 키는 3m 정도이고, 잎은 타원형이며, 흰 비늘이 덮이고 어긋나게 나는데 빨간 물렁열매가 가을에 붉게 무르익는데 열매를 먹는다. 이 나무는 줄기를 잘라버려도 좀처럼 죽지 않고 새싹이 돋아난다. 이를 평하면 전자는 뽕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서 원래의 이름은 보리수가 아닌 것이다, 인도에서 보리수라 부르므로 보리수가 되고 있는 것이다. 후자는 보리수과에 속하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볼 때 진짜 보리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후자의 보리수과에 속하는 나무 즉 제주 방언으로 볼레낭이라 불리우는 보리수가 한라산 어디에도 많다. 그러므로 제주도 한라산은 보리수처이다.
여섯째, 한라산 존자암의 터에 상고시대의 불탑이 있다.
이원진의 『탐라지』에 존자암이 한라산 영실에 있다 하고, 김상헌의 『남사록』에 존자암은 고량부(高梁夫) 삼성(三性)이 처음 일어날 때부터 삼읍(三邑)이 정립될 때까지 있었다고 하였다. 이는 존자암(尊者庵)이 탐라국 초기부터 있었다는 것이다. 탐라국은 언제부터 있있는가? 『한단고기』 마한세가(상)을 보면, B.C.1596년 을유에 탐몰라인(탐라인)이 마한왕에게 말 30필을 바치었다고 하였다. 이는 탐라국이 B.C. 1596년 전부터 존재하였다는 것으로 존자암은 석가세존의 출생하기 이전부터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석가세존이 존자암에 을 수도 있었고 석가세존이 왔었기에 존자암의 산등성이를 불래악(佛來嶽)이라 부르는 것이 아닌가 한다. 제주의 민담(民譚)이나 무가(巫歌)에도 부처가 바다에서 제주에 왔다는 설화도 있다. 바다란 수미세계 곧 고조선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존자암의 터에 그 제작년대(製作年代)를 알 수 없고,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부도(불탑)가 있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이 불탑은 석가세존의 진신사리불탑(眞身舍利佛塔)이라 할 수 있다.
일곱째, 제주도 한라산에 가시리(加尸里;加時里)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주목에 한라산 동쪽은 동무소협(東巫小鋏)으로서 신선들이 살았다고 하였는데 그곳에 가시리가 있다. 가시리에 상가시리와 하가시리가 있고, 상가시리에는 노폭(路幅)이 7-8m되는 넓은 길이 있다. 이 길은 너무나 오래되어 그 길이 만들어진 년대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이를 생각하면 가시리는 그 역사가 극히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고, 탐라국 시대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이상과 같이 제주도 한라산은 녹야원의 구성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볼 때, 파라날은 제주도를 의미하고, 제주도 한라산은 녹야원이며 석가세존의 초전법륜지라 할 수 있다. 만약 이를 부정하면 인도의 사르나드도 녹야원이 아니니 석가세존의 초전법륜지는 허무맹랑한 전설이 되고 만다.
Ⅴ. 釋迦世尊의 古朝鮮 行跡과 遺蹟
삼국유사를 보면 부처님이 우리나라에 왔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예컨대 어산불영(魚山佛影)편에 따르면 “대정 12년 경자(1180) 즉 명종 11년에 처음으로 만어사(萬魚寺)를 지었는데 동량보림(棟梁寶林)의 장주(狀奏)에 이르기를 이 산 중에 기이한 자취가 세 가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부처영상의 서북쪽에 반석이 있어 항상 물어 괴어 끊어지지 않는데 이곳은 부처가 가사를 빨던 곳이라”하여 부처가 우리나라 경상남도 밀양에 있는 만어산(萬魚寺)에 이르러 거기에서 가사를 빨았다고 하였다. 또한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 제7권을 인용하여 “부처가 야건가락국 고선산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고선산의 고선(古仙)은 한인*한웅*한검이라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면 곧 고선산은 삼신산을 의미한다. 삼신산은 백두산을 말하므로 부처가 고선산에 이르렀다 함은 곧 부처가 백두산에 왔었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황룡사장육(黃龍寺丈六)편을 보면 황용사의 터는 석가와 가섭이 강연하던 곳이라 하였고, 그밖에도 경상남도 남해 금산 쌍홍문(雙虹門)의 안내간판에 석가세존이 그곳에 왔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에 대하여 지금까지는 무의미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앞으로는 의미심장하게 숙고하여야 할 것으로 본다.
돌이켜 생각하면 석가세존은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 사람으로서 한국 땅에서 고행하고 성도한 후 만리 길도 멀다 않고 인도로 건너가 혹심한 빈곤과 차별대우에 시달리는 서민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구걸행각을 하면서 일생을 보냈다고 생각할 때, 인도 사람이라면 누구든 석가세존의 조국인 우리나라를 은인의 나라로 받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신앙의 조국으로 생각하고 무척이나 동경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심국유사』 갸락국기를 보면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가 바다건너 우리나라에 와서 가락국의 김수로왕의 비(妃)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금관성 파사석탑기룰 보면 금관성 호계사의 파사석탑은 김수로왕의 비 아유타국의 공주가 서역 아유타국에서 싣고 온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만여리가 넘는 인도에서 공주의 몸으로 우리나라에 왔었다는 것은 굳건한 신앙이 아니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고, 석탑을 싣고 온 것은 신앙의 조국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신중동국여지승람』에도 “금불상 53구가 서역으로부터 바다 건너 한(漢)나라 평제 원시 4년(서기4년) 갑자에 금강산에 보내왔고, 이로 인하여 절(유점사)을 세웠다고 하였다. 그때는 중국에도 석가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이므로 인도인들이 우리나라를 숭모하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보내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밖에도 삼국유사 황룡사장육편을 보면 신라 진흥왕이 황룡사를 지으려 할 때, 서천축의 아육왕이 황철과 황금 및 일불이보살상(一佛二菩薩像)의 모형까지 보내와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주조하였다고 하였는데, 황룡사의 터는 석가와 가섭이 강연하던 곳으로 거룩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상과 같이 교통수단도 발달하지 아니한 그 때에 만여리가 넘는 인도에서 바다 건너 우리나라로 공주가 오고 불상과 불탑까지 보내왔다는 것은 예사일이 아닌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를 신앙의 성지, 신앙의 조국, 부처님이 나신 나라로 믿는 굳은 신앙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인도의 시성 타고르가 조선을 가리켜 아득한 예날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는 등불이었다고 하였던 것이 아닌가?
이제야 그 시(詩)의 의미를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