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은 서울에 있는 집 한칸 마련하려고 열심히 일에 매진했던 치열한 나이. 나도 그 틈바구니 속에서 몇 년간의 고달픈 계약직 생활을 거쳐 마침내 정규직이 됐다. 하지만 정규직이 된 바로 그 해 난 회사를 그만뒀다. 가족, 친구들은 모두 말렸다.
"이제 막 정착했는데, 앞으로 뭐먹고 사려고 그만두는거야?"
"너 결코 적은 나이 아니잖아. 도전도 젊을때나 가능한거야"
"직장생활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 별로 없어. 다 돈 벌려고 하는 거지"
친구들의 조언은 현실적이고 직설적이었다. 취업난 속에서 몇 년을 쉬다 다시 정착하는 건 쉽지 않다. 젊고 스펙좋은 청년들이 수두룩한데, 나처럼 경력 단절녀를 뽑아줄 회사는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난 심장이 멈출 것처럼 힘들고 괴로웠다. 원치 않는 인간관계가 주는 고단함, 끝도 없는 터널 속에 갇힌 듯한 압박감속에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친구들 말이 맞다. 편하게 사는 사람 없다고.
그렇지만 친구들의 조언을 뒤로 하고 떠났다. 그리고 2년 동안 쉬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냥 쉰건 아니고 여행을 떠났었지만.
평일 아침의 햇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람소리를 듣지 않고 일어나는 일이 얼마나 설레는 일인지 느꼈다. 용기를 내지 않았으면 얻지 못했을 행복의 시간이었다.
물론 이 행복의 댓가로 내 통장은 잔고가 바닥났고 빈털털이가 됐다. 그러나 영화 <리틀포레스트> 속 혜원이의 말처럼 '잡초는 마음속의 걱정처럼 계속 뽑아내도 계속 자라' 듯이 사표를 냈던 내지 않았던 계속 걱정을 달고 살았을 것이다. 그럴 바엔 내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어떻게 다시 자리를 잡을까라고 불안했던 일이 민망하게도 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뒤 곧바로 취업이 됐다. 그러고 보면 걱정은 계속 자라나는 잡초처럼 해도 해도 끝이 없기에 미리 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불안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듯 하지만, 직접 부딪히면 또 그렇지만도 않다. 오히려 걱정은 나의 행복을 방해하는 훼방꾼이다.
<리틀포레스트> 촬영지 혜원의 집, 소박한 삶이 그립다
시험, 연애, 취업 어느 것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상에 지친 주인공 혜원은 잠수하듯이 고향으로 떠나온다. 그곳에서 오랜 고향 친구들도 만난다. 그들도 모두 서울 생활의 회의감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들이다. 혜원은 시골집에서 머물며 직접 키운 농작물로 한끼 한끼 음식을 해먹고 친구들과 평범한 일상을 공유한다. 계절이 바뀌며 평범한 시간이 흐를 수록 혜원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용기를 얻게 된다.
20년전이었으면 결코 인기가 없었을 것 같은 영화다. 초고속 경제성장을 이룬 우리나라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일은 인생의 패배자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각종 영화제를 휩쓸며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아마 우리 스스로 혜원이라는 인물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살다보면 자존감이 떨어지고 상처를 받고,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하지만 결국 새로운 출발점에 서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당장 경제적인 문제는 어떻게 해야하나' 라는 두려움이 들지만, 혜원이는 이렇게 말한다. '잠시 쉬어가도 괜찮아'
인생이 힘들때는 가끔 쉬어가도 되지 않을까
영화의 흥행만큼이나 <리틀포레스트> 혜원이의 집 또한 군위 최고의 여행명소가 됐다. 낙동강 물줄기가 조용히 흐르고 있는 평범한 마을이 영화속 분위기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마을입구에 주차하면 바로 혜원이의 집이다. 군위에서 가장 유명한 여행지답게, 평일 이른 아침인데도 아담한 한옥집은 이미 여행자들로 북적댄다. 혼자 온 여행자들은 혜원이처럼 툇마루에 앉아 포즈를 취하고 셀카를 찍고 있다.
영화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아담하고 평범한 집이다. 영화 촬영지라는 안내문이 없다면 보통의 시골집이라고 그냥 지나쳤을 공간이다.
오히려 가공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영화를 좀 더 현실적으로 만들어줬다.
평범한 시골 마을 분위기
리틀포레스트는 '자신만의 작은 숲'이라는 뜻이다. 일상에 지친 혜원은 자신만의 공간에서 위로를 받았다.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혜원이가 자연속 재료로 소박한 음식을 해먹던 주방. 요리는 힐링이다.
투박하지만 자유로운 움직임의 지붕살
소박한 공간이 주는 안정감
툇마루 문을 열면 혜원이가 직접 키운 농작물로 음식을 만들던 정갈한 주방이 나온다. 혜원이는 이곳에서 직접 재배한 배추로 된장국을 만들고 막걸리를 만들고 라일락 꽃을 따서 튀김요리를 만들었다. 혜원이가 요리하는 모습은 식욕을 자극한다기보다 마음속 위안을 준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는 값비싼 음식은 아니지만, 자신을 위해서 정성스럽게 요리하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행복하고 위로가 되는 행위인지 알게 된다.
혜원이의 집 뒷편으로는 평범한 시골동네 그대로다. 한바퀴 거닐어보자. 영화속에 등장했던 오구처럼 누렁이 한마리가 계속 내 뒤를 쫓아온다. 집 담벼락마다 영화속 풍경이 파스텔톤으로 소박하게 그려져있다. 환하게 웃고 있는 혜원이의 모습이 아름답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벽화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누렁이도 걸음을 멈추고 함께 벽을 응시한다. 매일 보는 풍경일텐데도 누렁이에게는 또 새로운 모양이다.
새로운 삶이 필요하다. 각자 자기만의 '작은 숲'을 의미하는 '리틀포레스트'처럼 나의 숲을 다시 만들어야 할 것같다.
혜원이의 말처럼 잠시 쉬워가도 괜찮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