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가장 유명한 가르침은 산상수훈이다.
말 그대로 예수님은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설파하셨다.
그분은 이 땅의 쓰레기 매립지 한복판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중이었다.
세상 기준으로 볼 때 그것은 차베스의 아이디어처럼 비상식적이었다.
당연히 사람들로서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위가 아래고, 쓰레기가 보물이라는 게 말이 되는가?
예수님은 나의 끝에 이르렀을 때 그분 안에서 진정한 삶을 발견할 수 있다는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역설을 전파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상의 나라에서 내려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올라가는 것이다.'
이 얼마나 혁명적인 가르침인가. 이 새 나라에서는 새로운 법이 다스리는데
그 법은 하나같이 낡은 법과 상반된다. 그런 의미에서 일부 신약학자들은
예수님의 이 선언을 "대역전"(Great Reversal)이라 부른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예나 지금이나 반직관적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외적인' 규칙이나 법에 관한 말씀을 하신 게 아니다.
이것은 시대의 흐름에 관한 말씀도 아니요 로마의 전복을 암시하는 말씀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은 삶의 '표면'일 뿐이다.
예수님은 조금 더 깊이 들어가, 우리 내면을 다루길 원하셨다. 내면이야말로
표면을 형성하는 근원이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내적 작업으로 시작된다.
예수님은 매우 특이한 역설 목록으로 설교의 포문을 여셨다.
여기서는 그중에서 네 가지를 집중적으로 파헤칠 것이다.
이것은 얼핏 황당하게 들리지만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곱씹을수록
서서히 이해되는 것들이다.
예컨대, 예수님의 첫 번째 진술은 전혀 뜻밖의 사람들에게 궁극적인 상을
약속하고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53)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혹시 이 말에 환호성을 질렀는가?
'야호! 나는 완전히 파산했으니까 복 받은 거야!"
그러다 문득 예수님이 잘못 말씀하신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부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시려다가 말이 헛나온 게 아닐까?
실제로 부자들은 부유하다는 의미로 '복 받았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지 않는가.
물론 ‘심령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돈에 관한 말씀을 하신 게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복 받은 삶은 어디까지나 부족한 게 아니라
넘치는 삶인데, 특히 예수님이 여기서 ‘가난한'으로 사용하신 단어가
'파산'으로도 번역되는 단어라는 점을 감안하면 말이다.
'심령이 파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완전히 파산해서 내놓을 게 하나도 없는 자는
복이 있나니 생각할수록 충격적인 말씀이다. 나의 끝에 이르러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절감할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는 내 잔고가 0이 될 때
시작된다.
내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다니. 이 세상의 논리와는 철저히 대치된다.
쫄딱 망한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세상이 자기 손바닥 안에 있는 것처럼
굴지 않는다. 모든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거들먹거리지도 않는다. 그의 심령은
시궁창에 처박혀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런 심령을 칭찬하신다.
더미 속의 저 남자야말로 복 받은 사람이란다.
세상은 늘 자신감을 내비치라고 가르친다. 요컨대, '심령이든 뭐든 부유하라!',
'쓰레기 더미 위가 아니라 세상의 꼭대기에 서라!'라고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잔고가 '0'이 될 때 시작된다.
내놓을 거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을 때 비로소 전진하기 시작한다.
이 얼마나 혁명적인 개념인가
- 카일 아이들먼 저, ‘나의 끝, 예수의 시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