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과 소방 당국은 27일 오전 밀양 세종병원 1층 응급실에서 합동 감식을 실시했다. 경찰은 발화지점이 1층 응급실 내 탕비실 천장이며, 전기 합선이 원인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망자 37명 중 사인이 불분명한 4명은 부검을 할 계획이다. 송봉근 기자
27일 오전 경남 밀양의 한 장례식장. 화환이 놓이고 조문객이 오가는 옆 빈소와 달리 이희정(35)씨 빈소에는 상복을 입지 않은 가족들만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이번 화재로 숨진 37명 중 가장 젊은 희생자인 이씨는 지난해 12월 길을 가다 차에 치여 왼쪽 다리를 심하게 다친 뒤 세종병원 2층에 입원해 있다가 화를 당했다.
마흔다섯에 간호사 꿈 이뤘는데
“병원에 무슨 일 생겨” 마지막 전화
퇴원 당일에, 입원 하루 만에
사고 당한 환자들도 끝내 숨져
이씨는 가족들에게 전화 한 통 못 하고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이씨의 남편 문모(47)씨의 두 눈은 토끼 눈처럼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현실이 믿기지 않는 듯 멍하니 먼 곳만 바라볼 뿐이었다. “스물두 살에 결혼한 뒤 힘들어도 참 열심히 살아 왔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고 토로하며 얼굴을 감싸 쥐기도 했다. 옆에 있던 이씨의 어머니도 주먹으로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문씨와 이씨는 열두 살 차이의 띠동갑이다. 문씨는 지인 소개로 이씨를 처음 만난 순간 한눈에 반해 몇 달을 구애했다고 한다. 문씨가 휴대전화에 저장해 놓은 가족사진에는 부부가 서로 볼을 맞대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아내와의 첫 만남을 얘기하는 문씨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14년 전 결혼한 부부에게는 올해 14세로 중학생이 되는 아들이 하나 있다. 엄마는 아들의 초등학교 졸업식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부부에게 이 졸업식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문군이 태어날 때부터 뇌병변 장애를 앓아서다. 행동이 불안정해 지속적인 보살핌이 필요한 아들이었다.
장애인 시설에 맡기라는 주변의 권유도 많았지만 이씨는 10년 넘게 식당에서 일하며 아들을 곁에 두고 통원치료를 해 왔다. 지인들은 “일하랴, 아들 돌보랴 힘든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이씨는 늘 웃음을 잃지 않는 쾌활한 모습이었다”고 기억했다.
2년 전 부부는 교육을 위해 아들을 특수시설에 맡겼다. 엄마에게 유달리 매달리던 아들은 27일 아침에서야 엄마의 사고 소식을 들었다. 이씨 어머니는 “손자가 엄마 소식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걱정돼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며 눈물을 훔쳤다. 그는 “손자가 충격을 받지 않아야 할 텐데 걱정”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씨가 입원한 뒤로 세 식구가 함께 지내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사고가 난 세종병원에는 보조 침대가 없어 보호자가 머물기 힘들다. 그래서 주말이 되면 이씨가 외출해 남편·아들과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일주일에 세 번씩 밀양과 서울을 오가며 화물차를 운전하는 문씨에게 아내의 주말 외출은 힘든 일의 피로를 잊게 하는 큰 즐거움이자 낙이었다. 아들도 엄마가 집에 오기만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문씨는 이젠 그런 주말이 다시 올 수 없다는 게 믿기질 않는다고 했다.
문씨는 아직 장례 절차를 밟지 못하고 있다. 사체검안서가 나오지 않아 입관도 하지 못한 상태다. 문씨는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며 상복을 입지 않다가 27일 오후에서야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문씨는 “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잘살아 보자고 다짐하곤 했는데…”라며 “아내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오래오래 같이 있자고 꼭 말하고 싶다”며 울먹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합동분향소인 밀양문화체육관을 찾아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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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잠깐” 황급히 전화 끊은 뒤 소식 끊겨
2층 책임간호사였던 김점자(48)씨는 환자들을 대피시키다 차마 빠져나오지 못하고 변을 당해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김씨의 남동생 병수(45)씨는 “20년간 간호조무사로 근무하다 3년 전 정식 간호사가 됐다며 좋아하던 모습이 엊그제 같다”며 오열했다. 미혼이었던 김씨는 부모님을 평생 모셔 왔고 지난해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엔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왔다.
김씨는 지난 26일 오전 7시35분쯤 어머니에게 전화해 “병원에 무슨 일이 난 것 같다”고 다급하게 말한 뒤 전화를 끊었고 이후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김씨 여동생에게 병원에 급히 가보라고 했지만 여동생이 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불이 번져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퇴원 예정일에 사고를 당한 희생자도 있었다. 박모(92)씨는 폐에 물이 차 세종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이날 퇴원을 기다리다 화를 입었다. 박씨의 딸들은 “살아 있게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라며 울음을 참지 못했다. 문추자(70)씨는 세종병원에 입원한 지 하루 만에 참변을 당했다. 문씨의 아들 남성민(43)씨는 “10년 전 교통사고를 당해 거동을 전혀 못하다 보니 차마 빠져나오지 못한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