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겪는 통과의례 중 가장 마지막 통과의례가 장례가 아닌가 생각한다.
흔히 상례와 장례를 혼동하기도 하고 상례를 장례에 포함시켜 그냥 장례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상례와 장례는 구분이 필요하다. 임종에서부터 발인까지의 의식이 상례이고 발인 이후의 의식이 장례이다.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전통적으로 매장을 행해온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 시대의 묘제도 매장을 했던 것으로 일려져 있다. 신석기 시대의 조개무지인 웅기 조개무지 내에서 발견된 신석기 시대의 인골이 동침( 시신의 머리의 방향이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태양숭배 또는 떠오르는 태양의 재생능력을 기원하는 의미로 보여진다. 청동기 시대가 되면서 사유재산과 계급의 분화와 더불어 경제력과 권력을 가진 정치적 지배자(족장 또는 군장으로 부른다.)가 등장했는데 이를 보여 주는 묘제가 지석묘(고인돌)이다. 고인돌은 작으면 수톤 일반적으로는 수십톤 큰것은 백톤(고창군 아산면 운곡리의 고인돌이 한반도에서는 가장 큰 고인돌로 거의 300통가까이 나가는 거대한 돌이다.)이상 나가는덮개돌을 몇킬로 멀리는 십킬로미터 이상의 거리에서 운반하여 제작했다. 지금이야 도로가 정비되고 무거운 물체릉 들어 운반할 수 있는 크레인이나 트레일러가 있어 고인돌의 제작이 쉽지만 제대로 된 도로도 없고 운반수단도 없는 당시에는 보통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선사시대를 연구하는 고고학자 중에는 현장고고학이라고 해서 당시의 모습과 상황을 재현하는 분야가 있다. 고창군에서 개최하는 고인돌축제 행사의 하나로 고인도 제작을 재현하는 행사가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몰캉한것이 학생들이라 고등학교 학생ㅇ들을 동원하고 총지휘는 한양대 사학과 교수와 전통문화 종합학교 교수로 재직하셨던 김병모 선생이 당당해서 소규모의 고인돌을 제작했는데 덮개돌을 운반하는데 동원된 인원이 톤당 6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통나무를 바위 밑에 깔고 그 위로 덮개돌을 운반하여 고인돌을 제작하였다.운곡리의 300톤 가까이 나가는 고인돌을 운반하기 위해서는 거의 1,800명 정도의 장정이 동원되어야 하고 이정도의 인원이 동원되기 위한 사회집단은구성원의 인구가 대략 일만명 정도로 이루어진 사회이고 이정도의 사회는 아직체계화되지는 못되었지만 초기국가(서강대학교에 근무하시고 한국사 연구의 입문서로 가장 대표적인 사서인 한국사신론을 저술하신 이기백교수는 성읍국가로 명명을 하시기도 했으며 이러한 성읍국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유적이 충남 부여시 조촌면 송국리유적이다.이유적은 1970년대 초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와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했는데, 처음에는 단순한 청동기 시대 주거지로 생각을 했으나 낮으막한 하나의 구릉을 거의 전체적으로 주거지가 밀집되어 대규모의 취락지로 밝혀졌고 목책과 환호등 방어시설까지 갖춘 청동기시대 출현하는 초기국가(성읍국가)의 전형적인 형태로 학계에서 추정하고 있다.
철기가 전래되면서 새로운 무덤 양식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현재까지 우리나라의 가장 일반적인 무덤형태인 널무덤(토광묘: 땅을 파고 시신을 목관에 넣어서 매장하는 방식과 독무덤(땅을 파고 시신을 독:항아리에 넣어서 매장하는 방식이다. 널무덤은 중국에서 북부지방을 통해서 한반도에 퍼져나갔다고 추정된다.(경남 의창 다호리에서 발견된 널무덤에는 여러가지 부장품과 함께 붓이 출토되어 철기가 중국에서 전래되면서 널무덤이라는 새로문 묘제와 함께 한자가 전래된 증거로 본다. 독무덤은 주로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남지방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두개 독을 뽀뽀시키는 형태로 붙여서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하여 매장하는 방식이다. 장례에 사용되는 독은 일반적인 독과는 다르게 독의 두께가 2센티미터 이상의 두꺼운 독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나도 지난 1984년 말에서 1985년 초까지 남원시 송동면 세전리에서 출토된 대형 옹관을 잡착제로 거의 10일이 걸려서 복원하여 전북대 부속박물관 세전리 특별전을 할 때 전시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아직은 정식 지표조사나 발굴조사 등의 학술조사를 실시하지 않아 개인적인 추정일 뿐이지만 오산에서 진등이나 금곡등 검산리를 갈때 뱀잔등이라는 길죽한 구릉을 넘어가는데 부안초등학교 3,4학년 무렵으로 기억나는데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잔디를 가져오라고 해서 잔디를 뜨기위해 몇몇이서 삽을 들고 검산 넘어가는 길 옆에 삽을 잔디를 뜨려고 삽질을 하면 보통 땅이 아니라 독이 삽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가 많이 났는데 당시에는 애무덤( 신장이 불과 30센티 내외의 영유아가 죽으면 작은 독에 넣어서 그 근처에 많이 묻어서 그렇다고 알고 있었고 그렇거니 생각 했지만) 지금와서 다시 생각을 해보면 어쩌면 애무덤이 아니라 독무덤일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고창지방의 또 하나의 특이한 묘제는 초분의 존재이다. 초분은 단순한 풀무덤이 아니라 장례를 두번 치루는 이중장의 풍습이다. 초분은 한반도의 서남해안 도서지방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묘제로 시신을 목관에 넣어 양지바른 야산 평탄한곳에 지표면 위에 놓고 짚을 덮고 이엉을 덮은후 초가지붕을 잇듯 새끼줄로 고정시키는 형태로 오산저수지 위에있는 쇠전고랑에서 질마재 가는 길에서 초등학교 3학년 무렵에 본 기억이 난다. 초분을 만든 후 3년 내지 5년 정도가 경과한 후 길일을 잡아 초분을 해체 하는데 거의 대부분의 경우 완벽하게 육탈이 되어있는경우가 많다.해체한 후 유골만을 수습해서 매장함으로 장례가 끝나는 이중장의 풍습이다. 이는 특히 섬의 특성상 장례기간내에 장례에 참여해야할 친족이 오지 못할 경우 우선 임시방편으로 초분을 만든 후 정식장례를 치루는 것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그밖에 특이한 장례 풍습으로는 북유럽 일대의 노르만족의 일파인 바이킹의 수장의 풍습과 티벳에서 행해지는 천장(조장이라고도 부르며 시신을 산위로 운구하여 티벳불교의 승려인 라마승이 시신을 토막내어 독수리에게 먹이는 장례 풍습이 있고 충칭에서 호북성 무한까지 내려오는 장강유람선을 타고 내려오다보면 까마득하게 높은 벼랑에 시신을 안치한 관을 매달아 놓은 현관의 풍습이 있다.
첫댓글 1. 무열이네 가족묘 맞은 편의 와룡리 서씨네 문중 선산에도 초분이 많았고 밤에 그 길을 지나 갈 때면 머리 끝이 송곳처럼 솟았다.
2. 마한 시대 상칠현 이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구현 마을에도 고인돌이 많았는데 70년도에 새마을 운동할 때 석공이 털어서 축대 쌓고 방구들로 썼음,
3. 우리 동네에서 탑들 지나 부안초 가기 전에 가막제(가막:검정색 바위, 또는 가마제로 추정)가 있는데 그 중간으로 오산 저수지 물이 흐르도록 수로관을 묻으면서 판 골짜기 양쪽 흙속에서 가끔씩 옹관묘가 보여서 아이들이 돌을 던져 깨뜨리면 머리카락이나 큰 뼈들이 나오곤 했음~!
*무열이 덕분에 우리 마을 주변의 장례 풍속을 더듬어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