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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삶으로 드리는 기도
“이 글이 하느님 만나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되길…”
찬미 예수님.
‘학기말 증후군’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겨울 방학을 3주 남짓 남겨놓고 있는 지금, 그동안 쌓인 피로에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음을 계속 느끼는 요즈음입니다. 더구나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1학기 말보다는 한 해가 끝나가는 2학기의 마지막이 더 힘겹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방학만 와라!’ 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지요. 물론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다른 분들께 또다시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그래도 저는 방학이라도 있어서 길게 쉴 수 있는 여유가 있지만, 방학이 없는 훨씬 더 많은 분들께는 꿈만 같은 이야기, 배부른 소리 하는 것으로 들릴 테니까요. 그래서 다른 분들께는 죄송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힘든 걸 어쩌겠습니까? 제가 느끼는 힘겨움은 제 주관적인 상황 안에서는 나름대로 현실이니까요. 그래서 오늘 하루도 방학이 며칠 남았는지를 셈하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신문사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올 초에 말씀드렸다시피, 원래 이 지면의 글을 한 해 동안 연재하기로 계획하고 시작한 것인데, 글의 내용이 좋고 또 독자분들의 반응도 좋아서 조금 더 연장해서 써줄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이미 가을에 접어들면서부터 남은 연재 횟수가 몇 번인지를 헤아렸었습니다. ‘아, 이제 몇 번 안 남았구나. 이 일이 다 끝나면 부담이 훨씬 줄겠구나’ 하면서 연재가 끝나길 내심 기다리는 마음이었죠. 물론 그동안 글을 써오면서는 감사한 마음도 많았습니다. 글을 쓰면서 제 스스로 많은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고, 또 그러는 가운데 몇몇 분들께도 도움이 될 수 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글을 쓰는 부담이 적지 않았기에, 연재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랬던 저였기에 찾아오신 담당 기자께서 말씀을 꺼내셨을 때 제 첫 마음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거절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제는 더 풀어낼 것도 없고, 한 해 동안 쓸 계획으로 진행했던 것이라 내용 전개도 맞지 않고, 또 신학생 양성소임에 더 전념하기 위해서 다른 일을 줄이려고 하고…. 여러 이유를 대면서 연재를 계속하는 것은 어렵겠다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담당 기자께서 여러 좋은 말씀을 해주시면서, 조금 더 생각해보고 결정해주기를 부탁하시고는 돌아가셨습니다.
그때부터 제 고민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안에서 여러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들었던 것은 우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 내가 쓰는 글이 반응이 좋구나. 그럼 그렇지!’ ‘이런 반응이라면 연재를 계속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더 쓰겠다고 말씀드려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 안에서 일어난 과시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에 이어서 금방, 더는 못하겠다는 마음도 들었습니다. 사실 썩 좋은 글도 아니고, 또 이 글 쓰는 것 때문에 알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괜히 안 잡혀도 될 흉이나 잡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던 적도 종종 있었지요. ‘그래, 사람들의 반응이 좋다던 담당 기자의 말도 사실은 나를 격려하기 위해서 지어낸 말일 거야.’ 이제는 더 풀어낼 이야깃거리도 없다고 생각하니, 연재를 더 하려는 건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헛된 욕심일 뿐이다 싶었습니다. 제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자기비하의 욕구였습니다.
이렇게 저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과 또 스스로 자신 없어 하는 마음들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그런 고민을 하는 것조차 힘겨워졌습니다. 그리고는 더 고민할 것 없이 거절해야겠다고 마음먹으려던 순간, 거절에 대한 부담감이 크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또 간곡하게 부탁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절하면 제가 어떤 사람으로 비춰질까 하는 마음이 들었던 거죠. 담당 기자께도 또 신문사에도 좋은 사람으로 비춰지고 싶은 마음, 그래서 속으로는 힘겨워하면서도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응하게 하는 욕구, 비난/실패를 피하려는 욕구였습니다.
‘어떤 결정이 정말 하느님 마음에 드는, 그리고 교회를 위한 일일까’ 물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가졌던 마음, 그리고 앞으로 조금 더 연재를 계속한다면 어떤 마음으로 써나갈 수 있을지 물었습니다.
어쨌거나 제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라면, 힘들더라도 거절하는 게 더 좋을 겁니다. “어렵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말씀드리는 것이 어렵기는 해도, 그때만 지나면 나머지 시간들은 더 편안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쭐하는 마음이나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연재를 계속한다면, 이후의 시간들은 ‘내가 바보같이 왜 그랬을까’ 후회하며 계속해서 스스로를 탓하는 시간으로 보내게 될 것입니다. 제 자신을 탓할 뿐만 아니라 연재를 더 해달라고 부탁하신 분들에 대한 원망의 마음도 생길 수 있겠죠.
모두, 나 중심의 모습입니다. 내가 편하자고 거절을 하든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어서 수락을 하든, 모두 제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위하려는 모습인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 너 중심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께는 아니어도 그중 몇몇 분에게만이라도 하느님을 만나는 데에 작은 도움이라도 드릴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고 감사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군데군데 흠 잡힐 구석이 많은 글이라 하더라도, 그걸로 인해 안 드러날 수도 있었던 제 부족함이 드러난다 하더라도, 그게 지금의 제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그런 부족함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저라는 사람 전체가 다 부족하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닐 테니까요. 이런 마음이라면, 연재를 계속하더라도 그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겠다 싶었습니다. 물론 글을 써 나가다 보면 또 언제고 소재가 떠오르지 않아서 속을 끓일 때가 있을 겁니다. 마감 시간을 지키지 못하고 담당 기자님께 죄송하다는 연락을 드려야 할 때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때 내가 왜 거절하지 못했을까? 난 왜 이렇게 바보 같을까?’ 하는 자기비하와 자책감은 들지 않을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가 기꺼이 받아들인 선택이니까요. 이런저런 생각과 더불어 몇몇 분들께 의견을 구하면서, 결국 연재를 조금 더 이어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나 중심의 욕구들에서 벗어나 너 중심의 모습으로 건너가는 것, 그 여정에 있을 어려움을 알면서도 선택하는 것! 우리의 삶이 모두 다 너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일 안에서 그때그때 너 중심의 모습을 찾고 선택해 나가는 것, 이것이 우리 삶으로 드리는 기도가 아닐까요?
“정녕 주 하느님, 제 눈이 당신을 향합니다.”(시편 141,8)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나를 따라야 한다
하느님을 닮았기에, 내 사랑 당신을 향합니다
찬미 예수님.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도생활, 영성생활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나 중심에서 너 중심으로 파스카 하는 여정에 대해서 계속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너 중심, 너 중심 하며 그리로 가야 한다고 자꾸 말씀을 드리는데, 어떠세요? 정말 너 중심의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그렇게 살아가고 싶으세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더러 당신 뒤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시죠. 예수님 사신 모습처럼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하고, 그 버리는 것도 그냥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면서 하게 되는 것인데, 그 길을 정말 가고 싶으십니까?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지난여름 청년성서모임 연수에 지도봉사자로 들어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은총의 시간이었지요. 하느님 말씀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생명력에 취해 기뻐하는 청년들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그리고 그들 사이에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특히 제게 인상 깊었던 것은 연수생들보다는 연수 봉사자로 참가한 청년들 모습이었습니다. 학생들과 직장인으로 이루어진 그들은 두 달여의 준비 기간 동안 아낌없이 자신의 시간과 마음, 정성을 내어주면서 연수를 준비했는데, 그 준비 일정을 보고서 제가 깜짝 놀랄 정도였지요. 정말 이들이 무엇을 바라기에 이처럼 자신의 많은 것을 내어주면서 연수 봉사자로 참가하는 것일까, 준비기간 내내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준비기간 동안 그들의 달라지는 모습, 그리고 3박 4일의 연수를 함께 보내면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연수생들도 봉사자들도 다들 아름답게 빛나는 청년들이었습니다. 물론 각자의 모습, 사정이 다들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한에서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면서 그 안에서 빛나는 모습들이었지요. 그런데 연수생들이 체험한 사랑이 연수기간 동안 봉사자들을 통해서 또 서로를 통해서 얻은 ‘받는 사랑’이었다면, 봉사자들이 체험한 사랑은 자신 안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있는 힘껏 연수생에게 내어주고자 했던 ‘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을 받을 때도 사람이 아름답게 빛나지만, 사랑을 할 때, 사랑을 줄 때 훨씬 더 아름답게 빛난다는 것을 그들을 보며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체험을 우리는 일상 안에서 합니다.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고 이태석 신부님이나 마더 데레사 성녀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마음의 감동을 깊이 느끼게 되죠. 비록 그들과 똑같이 살 용기는 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런 삶이 정말 의미 있고 참된 삶이 아닐까 되묻고 동경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거창한 내어줌이 아니더라도, 어느 날 누군가에게 자신의 무언가를 내어주는 경험을 하게 될 때, 그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 뿌듯함과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신기해하면서도, 스스로를 기특해 하고 혼자 벅찬 마음으로 미소를 짓게 되죠. 다른 이에게서 무언가를 받는 것도 좋고 기쁘지만, 그보다 자신의 것을 내어줄 때 그 기쁨이 더 오래간다는 것을 종종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신가요? 만일 그렇다면, 왜 그럴까요?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지어졌고, 비록 원죄로 인해 그 닮은 모습이 훼손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금 그 모상성을 회복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열렸다고요. 그래서 우리 모두는 그 길을 가고 있다고요.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하느님을 닮은 모습’, 우리 안에 있는 모상성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초세기 교회의 교부들부터 시작해서 많은 신학자들이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과 해석을 내 왔지만, 사실 이 또한 하나의 신비인 만큼 우리 인간의 지성으로 온전히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조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저는 우리 안에 담겨져 있는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모습은 바로 너 중심으로 움직이려는 경향성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실은 이것도 너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전적인 ‘너 중심’ 자체시라면, 하느님과 비슷하게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우리 인간도(창세 1,26 참조) 너 중심의 모습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원죄 결과로 인해 인간이 너 중심의 방향성보다는 나 중심으로 움직이게 하는 욕구들에 더 끌리게 되었지만(죄로 기울어지는 경향),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본래 모습이 너 중심이신 하느님을 닮아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 곧 나 중심에서 너 중심으로 건너간다는 것은 그렇게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데, 가면 좋다니까 억지로 가는 여정이 아닙니다. 너 중심으로 파스카 해나간다는 것은 결국에는 우리의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자신에게서 벗어나다 보면 결국에는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는 것 아니냐고 물으시는 분도 계십니다. 그럴 것 같기도 하죠. 하지만 너 중심의 모습이 하느님께서 지어주신 원래의 우리 모습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자기 자신을 버리는 이 여정이 결국에는 본래의 ‘나’로 돌아가는 여정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에서 더 큰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생긴 모습이 그렇기 때문이라는 거죠. 나에게 주어지는 사랑, 나를 위한 사랑도 좋지만 그보다는 다른 이에게 내어주는 사랑을 할 때 훨씬 더 큰 기쁨을 느끼는 것이 원래 우리의 본모습인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따라 너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은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요한 14,27 참조), 세상이 주는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으로 인해 주어지는 행복(마태 5,3-12 참조)을 얻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가 원하고 자유롭게 선택하는 삶의 모습인 것이죠. 그렇기에 그 안에서 겪게 되는 십자가의 어려움도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이 주는 기쁨과 행복도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근원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덧없이 지나가고 그래서 ‘부질없게’ 느껴지는 기쁨이라는 것을 우리 마음 저 깊은 곳에서는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어떠십니까? 너 중심의 삶을 살고 싶으신가요?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싶으신가요?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삶의 방향 전환
하느님 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게 ‘회개’
찬미 예수님.
대림 시기 잘 보내고 계십니까? 대림 시기 하면 뭐가 제일 먼저 떠오르세요? 기다림? 깨어 있으라는 복음 말씀? 아니면 대림 시기를 훌쩍 건너뛰어 성탄절 분위기가 떠오르시나요? 여러 많은 것들이 생각되지만, 많은 분들의 말씀 중 하나가 아마도 ‘회개’가 아닌가 싶습니다. 대림 제2주일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회개하라’고 부르짖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을 듣게 되지요.
그런데 이 회개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언제, 어떻게 회개하면 되는 것일까요?
제가 부제 때의 일입니다. 겨울방학을 맞아 본당 사제관에서 지내고 있는데, 어느 날 주임신부님께서 시베리안 허스키 품종의 강아지 한 마리를 얻어오셨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주 작고 귀여운 새끼였죠. 사실 저는 어릴 때 큰 개에 물린 경험이 있어서 개를 무서워하는데, 이 강아지는 제가 보기에도 아주 귀여웠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이 강아지에게 ‘솔’이라는 이름을 붙이셨습니다. 음계 ‘도레미파솔~’ 할 때의 솔입니다.
그렇게 겨울방학을 솔과 함께 지낸 후, 학기가 시작되면서 저는 신학교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여름방학을 맞아 솔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궁금해하며 사제관으로 갔는데, 응당 있어야 할 그 작고 귀여운 솔이 안 보이는 겁니다. 그리고 사제관 마당에 웬 송아지만 한 개가 한 마리 떡하니 버티고 있었지요. 바로 솔이었습니다. 발육 속도가 워낙 빨라서인지 반년 만에 훌쩍 커버린 솔은 이제 사제관 안이 아닌 마당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래서 사제관을 드나들 때면 저는 영락없이 솔을 마주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솔은 반갑다고 달려드는데 제게는 그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가뜩이나 개를 무서워하는데, 솔이 달려들어 뒷발로 딛고 서서 앞발로 제 어깨를 짚고 제 눈앞에 커다란 머리를 들이대면 저는 기겁을 하고 도망치게 되는 거죠.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번 드나들 때마다 그러니 저도 적지 않게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래서 주임신부님이 안 계신 틈을 타 솔을 괴롭힌 적도 몇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죠. 솔이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넓은 설원에서 마음껏 달리던 야성이 그대로 몸속에 남아 있을 텐데 매일 좁은 마당에 갇혀만 있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그래서 하루는 주임신부님께 날을 잡아 솔을 데리고 같이 산책 나가시자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신부님께서는 당신도 그러고는 싶은데 걱정이 돼서 못 나가신다는 겁니다. 무슨 걱정이냐 하면, 이 개가 워낙 힘이 좋기 때문에 아무리 튼튼한 목줄을 매고 나가도 어느 순간 뛰쳐나가 버리면 감당할 엄두가 안 나신다는 거였죠. 그래서 못 데리고 나가시기는 한데, 혹시라도 솔을 데리고 나갔다가 놓치게 되면 다시 잡는 방법이 있다며 한 가지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어떤 방법이었을까요?
솔을 데리고 가다가 갑자기 확 뛰쳐나가면 줄을 놓칠 수밖에 없죠. 그런 상황이 일어나면 일단은 그 뒤를 쫓아갑니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자리에 멈춰 서서 “솔!” 하고 부르는 겁니다. 그럼 솔이 어떻게 할까요? 달리다 멈춰 서서 저를 쳐다보겠죠. 그럼 그때 저는 솔과 반대 방향으로 막 뛰어갑니다. 그럼 솔이 그래도 주인이라고 저를 쫓아서 달려오겠죠. 그런데 속도가 워낙에 빠르다 보니 어느 순간 저를 지나쳐서 다시 제 앞으로 내달릴 겁니다. 그럼 저는 조금 더 가다가 멈춰 서서 다시 솔을 부르는 겁니다. 그러면 달려가던 솔이 멈춰 서서 저를 돌아볼 테고, 저는 다시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거죠.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몇 번 하다 보면, 물론 저도 지치겠지만 솔도 지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속도가 느려지죠. 그렇게 느려진 솔이 옆을 지나갈 때 확 움켜잡으면 솔을 다시 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떠세요? 설득력이 있나요? 저로서는 한 번도 솔을 데리고 나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 방법을 실제로 사용해 볼 기회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론상으로는 그럴듯하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자녀로서 하느님을 만나겠다고, 하느님 계신 곳을 찾겠다고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계신 곳을 향해서 열심히 가고 있는데, 갑자기 저 뒤에서 “바오로야” “마리아야” 부르는 소리가 들리죠. 그래서 그쪽을 바라보면, 하느님께서 내가 가던 방향이 아닌 다른 쪽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 가던 방향을 돌려서 하느님 계신 곳으로 다시 열심히 걸어갑니다. 그런데 또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고개를 들어보면, 분명히 저쪽에 계신 걸로 봤던 하느님께서 이번에는 이쪽에 계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죠? 다시 방향을 돌려서 하느님 계신 쪽으로 가는 겁니다.다들 아시는 것처럼 ‘회개’라는 그리스말 ‘메타노이아’(metanoia) 어원은 ‘방향을 돌리다’라는 뜻입니다. 흔히 말하듯 나의 죄를 뉘우치고 아파하는 것만이 회개가 아니라, 하느님 계신 곳을 향해서 내가 가던 방향을 돌리는 것, 이것이 바로 회개의 참뜻인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대림 시기나 사순시기에만 할 것이 아니죠. 한 번 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그때그때 나의 생각과 판단과 행동을 하느님을 향해 돌리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회개의 삶인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계속해서 방향만 바꾸다 끝나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솔이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 달리면서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처럼, 우리도 계속해서 방향을 바꾸면서 조금씩 하느님께 다가가게 됩니다. 평생의 삶을 통해서 점점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방향을 돌릴 수 있을까요? 방향이 어딘지를 정확히 알아서? 내 힘으로 방향을 찾을 수 있어서? 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방향을 돌릴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찾겠다고 하면서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우리들을 하느님께서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할 일은 우리를 부르시는 하느님 목소리를 잘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때론 엉뚱한 길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래서 하느님께로부터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결국엔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께로 데려가신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음성을 듣고 그분을 향해 계속해서 방향을 바꿔나가는 것! 어떠세요? 회개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게만 느껴지지는 않으시죠?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나를 위한 최선? 너를 위한 최선?
평범하게 살며 ‘너 중심’ 하나씩 배워갑니다
찬미 예수님.
얼마 전에 혼배미사를 주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본당에서 사목생활을 하게 되면 함께 활동했던 청년들 혹은 어른 신자분 자녀의 혼배주례 부탁을 많이 받게 되지만, 본당을 떠나 생활한 지가 오래인 저로서는 굉장히 오래간만에 맡게 된 혼배미사였습니다. 그래서였는지 미사를 준비하는 마음이 설레기도 하고 또 약간 긴장되기도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결혼하는 신랑 신부가 정말 하느님 안에서 성가정을 이뤄서 행복하게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강론을 준비했습니다.
몇 번 되지는 않지만, 그래도 혼배미사를 주례할 때마다 강론 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출처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어디선가 읽었던 짧은 우화이지요.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옛날 옛적에 소와 사자가 살았습니다. 둘은 서로 너무나 사랑했지요. 그래서 집안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하면서 소와 사자는 죽을 때까지 평생을 서로 사랑하겠노라고,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소는 사자를 위해서 매일 같이 신선한 풀을 준비했습니다. 아침 이슬이 영롱하게 맺혀있는 신선한 풀을 대접하기 위해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야 하는 고단함도 마다하지 않았죠. 그런데 사자는 어땠을까요? 사실 사자는 풀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풀을 먹는 것은 사자에게는 오히려 고역이었죠. 하지만 사자는 참았습니다. 그것이 소를 위하는 사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사자는 또 나름대로 소를 위해서 매일 신선한 고기를 준비했습니다. 입안에 넣으면 씹기도 전에 사르르 녹아버리는 양질의 고기를 대접하기 위해서 매일 밤늦게까지 사냥해야 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죠. 그런데 소는 어땠을까요? 소 역시도 고기를 먹는 것이 싫었지만, 사자를 생각하며 참았습니다.
하지만 참을성에는 한계가 있죠. 둘은 마주 앉아 얘기를 시작했지만, 그 대화에서 나온 것은 서로에 대한 불만과 비난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둘은 헤어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헤어지면서 소와 사자가 서로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어떤 말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난 최선을 다했어”라는 말입니다.
어떠세요? 소와 사자가 최선을 다한 것이 맞을까요? 네, 어떤 면에서는 맞는 말입니다. 소는 소대로 또 사자는 사자대로, 신선한 풀과 고기를 얻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 애를 썼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왜 헤어지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소와 사자가 했던 최선의 노력이 상대방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한 최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해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해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결혼 생활을 해보지 않은 저로서는 그 생활이 어떤지 온전히 알 수 없지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참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지만, 삼십 년 가까운 또 때로는 그 이상 되는 시간을 각자 다른 환경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두 사람이 한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서로 부딪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드는 예로 치약 짜는 것을 이야기하죠. 양치질할 때 한 사람은 치약 뚜껑 가까이를 눌러서 짜고 다른 사람은 뒤쪽부터 꼭꼭 눌러서 짜는 것 때문에도 서로 다투기도 한다는 겁니다. 또 누구는 싱겁게 먹고 누구는 짜게 먹는 식습관도 다를 수 있죠. 부부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서로 맞춰가야 하는 부분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분들에서 상대방이 아닌 내가 선택의 기준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상황은 또 달라집니다. 물론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다는 기쁨도 크지만, 그때부터 부모의 거의 모든 삶은 아이를 중심으로 맞춰지게 됩니다. 하루의 노고 때문에 지친 몸으로 잠들었다가도 한밤중에 아이가 깨서 울면 달려가야 하죠. 친한 친구들이 모여 동창회를 할 때에도 아이가 어려서 참석을 못하기도 합니다. 아이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는 부모의 삶이 그 아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 돌보는 것을 아내에게 혹은 남편에게만 맡겨 놓고 나 몰라라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상대방이나 아이가 중심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살아간다면 이 가정은 어떻게 될까요?
결국, 너 중심의 삶입니다.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그 첫 순간부터 두 사람은 나 중심이 아니라 너 중심으로 살아갈 것을 요구받는 것입니다. 물론 언제나 너 중심으로 살아가지는 못합니다.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나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죠. 그런데 이런 나 중심의 움직임이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라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나 중심의 움직임이 점점 많아지게 되면 앞서 말씀드린 소와 사자의 이야기처럼 안 좋은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혼인성소의 삶은 기본적으로 너 중심으로 살아가게 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너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매일의 삶 안에서 계속해서 연습하게끔 하는 삶이지요. 나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그 안에서 상대방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을 것을 더 많이 요구받게 되는 환경인 것입니다. 나 중심으로 움직이고 싶은 마음과 너 중심으로 움직이라는 부르심 사이의 갈등을 계속해서 겪게 되고, 그 안에서 조금씩 너 중심의 삶으로 변화되어 가게 하는 아주 좋은 훈련의 자리인 것입니다.
물론 너 중심으로 살아가라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받은 소명이기에 사제나 수도자의 삶도 너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꼭 그렇지마는 않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수도자의 경우는 또 다르지만, 적어도 교구 사제는 혼자 살아가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그 안에서 너 중심으로 움직여야 할 필요성도 잘 못 느끼고 그래서 너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배우지 못할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 싶은 것입니다. 물론 많은 신부님들이 사목자로서 양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잘 살아가고 계시지만, 너 중심의 삶은 우리 신자분들께서 훨씬 더 잘 실천하며 살아가고 계시다는 거죠.
하느님을 따라 너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 뭔가 거창하고 대단한 삶이 아닙니다. 전혀 새로운 무엇이 아니라 이미 여러분께서 살아가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다만, 이러한 삶이 계속되어 우리 삶에서 나 중심보다는 너 중심의 모습이 더 많아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히브 10,24)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기도 생활 잘 하고 계십니까?
신앙인 삶 그 모든 순간은 하느님과 함께
찬미 예수님.
기도 생활 잘 하고 계십니까?
‘갑자기 웬 기도 생활 이야기인가’ 하고 궁금하게 생각하실 분이 혹시 계실까요? 이 연재의 제목이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죠? 그런데 어떠세요? 이 글을 보시면서 ‘아, 기도란 게 이런 거구나. 나도 이제 쉽게 기도할 수 있겠다’하는 마음이 드시나요?
기도를 제목으로 글을 쓰고는 있지만 실상 기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다룬 내용이 거의 없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라는 이 글의 전체 주제가 많이 흐려지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죠. 그래서 우리의 주제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이 글은 기도에 대한 이야기, 우리의 기도 생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전에 말씀드렸듯이,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이 이번 연재의 마지막 원고입니다. 그래서 연재를 마무리할 생각을 하면서, 그동안 다루었던 내용을 정리해서 남은 시간 동안 말씀드려야겠다고 계획했었죠. 그런데 연재를 늘이기로 정하면서는 계획을 바꿔서 또 다른 내용으로 지난 몇 주의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내용을 계속 이어나갈 텐데요, 그래도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적지 않은 내용을 다루었기 때문에, 한 번 정도는 지난 내용들을 정리해서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올 초에 처음으로 연재를 시작하면서, 제목을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로 정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서도 기도하는 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다루기보다는 신앙인의 영성 생활 전반에 대해서 다루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왜냐하면, 기도는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우리의 삶이라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끊임없이 기도’(1테살 5,17)하라는 성경 말씀 그대로 우리가 쉬지 않고 기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루 스물네 시간을 계속해서 기도하기 때문에 우리 삶이 기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 숨 쉬는 모든 순간,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 등의 모든 것이 늘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있기 때문이죠.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 곧 미사나 성체조배, 묵상기도 등 어떤 형식을 갖춘 모습만을 기도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것을 잘 해나갈 때 기도 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본연의 의미에서의 기도는 훨씬 더 넓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기도란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관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맺게 되는 모든 관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외적으로 맺게 되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내적으로 맺게 되는 나 자신과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라는 것을 우리 삶의 한 부분으로서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로 이해할 수 있고, 따라서 기도 생활을 잘 하고 있느냐는 물음은 결국 하느님과 함께 잘 살아가고 있느냐는 물음으로 바꿔 알아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분을 말씀드리면서 하느님과의 만남이 우리 삶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해 계속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기도는 곧 하느님과의 대화라는 것, 그리고 이 대화는 정해진 주제나 형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사소한 이야기들, 시시콜콜한 것까지도 다 나눌 수 있는 대화라고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사소한 모든 것까지도 다 알고 싶어 하시는 분, 그래서 늘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있니?” 하고 물으시며 우리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느님을 우리는 일상의 체험 안에서 만나게 되고 또 만나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그저 머리로만 알고 있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죠. 하느님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그럼으로써 사랑이신 하느님을 내 자신의 구체적인 일상 안에서 체험하고 느낄 때, 비로소 우리 안에 하느님의 ‘현존하심’에 대한 의식이 일깨워지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현존을 계속해서 느끼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영성 생활이라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영-썽’에 대해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시죠? 영성이라는 말 자체가 ‘물질적인 것을 넘어서는 영적인 것’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에, 영성 생활이라는 것도 눈에 보이는 차원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영적인 차원을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결국,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만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일상에서 알아차리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영성 생활이고 또 영적인 인간의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끊임없이 육적인 방식으로 움직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육적인 방식은 결국에는 자기 자신을 위하는 것, 곧 나 중심의 방향으로 움직이려는 경향성이죠. 신학적으로 보면 우리로 하여금 자꾸 죄로 기울어지게 하는 경향성인 사욕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영적인 방식, 곧 우리의 영의 차원에서의 움직임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을 따라서, 영의 차원에서의 움직임은 나 중심이 아닌 너 중심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죄 이후로 우리는 나 중심으로 움직이려는 욕구의 충동을 더 크게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나 중심의 욕구와 너 중심의 그리스도교적 가치 사이에서 늘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존적 긴장관계를 우리 삶에서 없앨 수는 없지만, 끊임없이 나 자신의 욕구를 성찰하면서 나 중심에서 너 중심으로 건너가는 삶, 이것이 바로 파스카의 삶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기준이 ‘나’ 자신이 아니라 내 앞에 있는 ‘너’가 되는 것, 그리고 근본적으로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죠. 이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참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너 중심의 모습이 하느님께서 지어주신 우리 본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자유롭게 파스카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기도 생활은, 내 삶의 모든 순간 안에 계신 하느님을 알아차리면서 하느님을 따라 나 중심에서 너 중심으로 건너가는 삶입니다. 나 혼자 그렇게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런 삶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가는 여정입니다.
이 여정을 잘 따라갈 수 있기 위해서, 다시 말해 기도 생활을 잘 할 수 있기 위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을 더 찾아보려 합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을 빕니다. 아멘.
[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굳은 살
끊임없이 갈구하며 주님을 만나는 시간
찬미 예수님.
지난주에는 지금까지의 내용들을 정리하면서, 결국 우리 신앙인의 삶 전체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가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 생활을 잘 하고 계시느냐’는 물음을 들을 때면 자신이 아침·저녁 기도를 잘 바치고 있는지, 하루에 묵주기도는 몇 단이나 하고 있는지, 평일 미사 참례는 몇 번을 하는지 등을 따질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하느님을 자주 기억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잘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말씀도 드렸죠.
초대 교회 교부였던 바실리우스 성인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형식적인 기도로 의무들을 채워서는 안 된다. 영적인 지향과 보다 넓은 애덕을 실천하면서 바치는 기도가 참된 가치가 있는 것이다. 탁자에 앉아 기도하고 감사하라.… 태양과 어둠의 빛에 감사하라. 끊임없이 기도하라. 그러면 온전히 하느님과 일치할 것이다.”(바실리우스, 「순교자 율리투스에 대한 설교」, 4) 기도 내지는 기도 생활을 여전히 좁은 의미로만 생각하고 계시는 분들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기도라는 것이 ‘지킬 계명’의 하나이기 때문에 당연한 의무감을 가지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있어서 하느님과 함께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 곧 우리 신앙인의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 있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방향성을 지니고 살아갈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기도의 열매를 얻게 됩니다. 곧 우리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바꿀 수 있게 되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삶과 존재가 변화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에 대해 계속 생각하다 보면, 좁은 의미에서의 기도 즉 염경 기도나 묵상 기도, 성체 조배 등 형식을 갖춘 기도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물음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기도가 결국 우리 삶이라고 한다면, 이런 형식적인 기도는 굳이 안 해도 되는 것일까요? ‘아침·저녁 기도나 묵주 기도, 성경 묵상 등은 거의 안 하고 지내지만 그래도 살면서 하느님을 자주 생각하니까 괜찮다, 나는 기도 생활을 잘 하고 있는 거다’라고 생각해도 괜찮은 것일까요?
제가 이탈리아에서 공부하던 때의 일입니다. 사제서품을 받고 본당에서 1년 남짓한 시간을 사제로 살긴 했지만, 이탈리아에서의 생활은 다시금 신학생으로 돌아간 듯한 시간이었습니다. 방학 때 개인적으로 현지 본당을 찾아가지 않는 이상 사제로서 신자분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거나 성사를 집전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죠. 대신에 매일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서 잘 알아듣지 못하는 수업을 따라가느라 긴장하고 또 남는 시간에는 도서관에서 앉아서 강의록을 해석하느라 힘들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좁은 의미’의 기도 생활에 소홀해졌습니다. 부끄러운 말씀이지만, 성무일도 기도를 빼먹기 일쑤였고 미사는 방에서 혼자 드리거나 아니면 거르고 지나가는 날도 있었습니다.
이런 날이 점점 많아지면서는 제 안에서 ‘아, 이러면 안 되겠다’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무너져 가는 제 영적 생활을 바로잡기 위해서 기숙사 경당에 가서 성체조배를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밤늦은 시간이어서 경당에는 마침 아무도 없었고, 등이 켜진 감실과 그 옆에 예수님의 ‘수난’성상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경당에 들어가서 차분한 마음으로 감실 앞에 있는 장궤틀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라도 다시 돌아오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이 일었습니다. ‘그래, 이거야!’ 그렇게 무릎을 꿇고 적어도 30분은 주님 앞에 머물다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장궤틀에 꿇은 무릎이 너무 아팠습니다. 다른 천이나 솜이 덧대어져 푹신한 상태의 틀이 아니라 그냥 맨 나무 그대로의 장궤틀이었던 것입니다. 이리저리 무릎을 움직여가며 버텨보려 했지만, 결국 저는 5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장궤틀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흐트러진 마음 그대로 방으로 돌아오고야 말았지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아, 시간을 지켜 주님 앞에 있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구나. 하다못해 무릎에 굳은살이라도 박혀 있어야 하는구나.”
물론 굳이 무릎을 꿇지 않고 의자에 앉아서도 성체조배를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기도라는 것, 곧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으로서의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영신수련 피정을 할 때 예수회 지도신부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하다못해 운동을 배우더라도 처음 한동안은 기초 자세를 연습하고 그다음 단계에 따라서 배워나가는 것이 필요한데, 어찌 된 일인지 기도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프로 선수처럼 잘 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에서 좁은 의미의 기도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대 데레사 성녀를 따라서, 기도가 ‘하느님과의 우정 어린 만남’이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이 우정은 그냥 쌓이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와의 우정이 쌓이기 위해서는 그만큼 시간이 필요하지요. 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과 시작부터 서로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습니다. 또 어린아이의 경우라면 상대방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자기 이야기를 주로 하게 됩니다. 대화를 해나가면서, 만남을 계속해 가면서 그 관계가 깊어지고 그 안에서 참다운 대화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가 우리 매일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일상의 구체적인 순간들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의식하고 그분과 함께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먼저 밀도 있게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 각자가 언제나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있다고 한다면, 그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는 성경을 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집중적으로 하느님을 만나고 함께 있는 시간, 좁은 의미의 기도의 시간이 없다면 ‘삶 전체가 기도’라는 말은 알맹이 없는 허울 좋은 껍데기로 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네? 결국 ‘기도’하라는 말로 다시 돌아가는 것 아니냐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미사 참례나 성경 묵상, 성체 조배 등 겉으로 보이는 행동은 같을 수 있지요. 하지만 그 속마음은, 주어진 계명을 지키려고 의무감으로 하는 마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더 알고 싶어서, 더 사랑하고 싶어서, 더 함께 살아가고 싶어서 원하는 마음입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원해서 하게 되는 모습인 것입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시편 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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