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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게 만나다] 신은 인간을 포용하는 존재
엔도 슈사쿠, 「깊은 강」
엔도 슈사쿠 생애 마지막 장편소설인 「깊은 강」은 1993년 그의 나이 70세에 출간되었다. 책이 출간되자 일본 문학계는 엔도 슈사쿠 문학의 집대성이자 최고의 작품으로 유명한 그의 소설 「침묵」을 능가한다고 평가했다.
잃어버린 것을 찾아 떠나는 여행
「깊은 강」은 13장으로 구성되어 각 장마다 등장인물의 삶과 행적, 그리고 인도 관광 목적을 뚜렷이 구분하고 있다.
평범한 샐러리맨이던 이소베는 아내와 과묵하고 굴곡 없는, 평이하지만 안온한 삶을 산다. 그러다 아내가 죽고 난 뒤 이소베는 내세를 굳게 믿던 아내의 소원인 환생을 이루어주고자 인도 여행을 떠난다.
학생 때 같은 대학교 신학생인 오쓰를 유혹하고 버린 나루세 미쓰코는 오쓰에 대한 알 수 없는 미련으로 그의 뒤를 쫓는다. 그래서 오쓰가 유학 간 프랑스 파리로 신혼여행을 떠나고, 그곳에 남편을 남겨둔 채 오쓰를 만나러 리옹으로 간다.
오쓰와 만난 미쓰코는 “신은 존재라기보다 손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을 베푸는 덩어리입니다.”라는 오쓰의 말에 자기와는 이미 동떨어진 차원의 세계로 들어가 있는 그를 발견하게 된다.
동화작가 누마다는 기르던 구관조가 죽자 야생동물 보호지역을 찾아 인도 여행을 결심한다.
또 전쟁 중에 미얀마 정글에서 부대를 이탈한 기구치와 스키타가 있다. 스키타는 굶주림을 참다못해 죽은 전우의 인육을 먹는다. 일본으로 돌아온 스키타는 그 기억을 잊으려고 술로 세월을 보내다 생을 마감하게 되고, 기구치는 숨진 전쟁 동료의 영혼을 위로해주고자 아픈 과거를 가슴에 안고 인도 여행단에 끼어 갠지스 강까지 오게 된다.
이렇게 각기 저마다 아픈 상처를 안고 인도 바라나시에 도착한 일행 앞에 인도 수상 간디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는 아름답지도 않고 위엄도 없는, 그저 성자였다
새벽 4시. 오쓰 신부가 일어나 몸을 닦고 세수를 하고, 혼자 미사를 올린다. 마지막 기도를 마치고도 오쓰 신부는 계속 무릎을 꿇고 있다. 리옹 수도원에서도 오쓰 신부는 예수님과 마주할 때만이 평온함을 찾을 수 있었다.
날이 밝아오자 오쓰 신부는 질퍽하고 더러운 거리를 돌아다닌다. 오쓰 신부가 찾는 것은 귀퉁이에 웅크린 채 헐떡이며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인간의 모양새를 하고도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인생들이며 갠지스 강가에서 죽는 것만을 마지막 소망으로 삼고 간신히 갠지스 강가에 당도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있는 곳을 오쓰 신부는 잘 알고 있었다. 그곳은 사람의 눈이 닿지 않는 좁은 벽 틈으로 밖의 빛이 겨우 새어 들어오는 장소였다.
벽에 기댄 노파가 눈에 들어오자 오쓰 신부는 자루에서 알루미늄 컵과 물병을 꺼내 물을 따라 노파의 입에 컵을 갖다 대고 물을 흘려보낸다. 노파는 힘없는 목소리로 “강가…”라고 말한다.
오쓰 신부는 포대기를 자루에서 꺼내 노파의 자그마한 몸을 싸서 업는다. “강가….” 노파는 오쓰 신부의 어깨에 전신을 내맡기고 똑같은 말을 울먹이며 되풀이한다. 일을 끝낸 오쓰 신부가 걸으며 기도한다.
“당신은 등에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언덕 골고타를 올랐습니다. 저는 지금 그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화장터가 있는 마니카르니카 가트에서는 이미 연기 한 줄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갠지스 강의 성자
항상 튀는 행동으로 동료 여행객을 당황케 했던 산조가 사진기를 들이대고 인도인의 주검을 찍었다. 그 순간, 화장터로 내려가는 계단 부근에서 비명이 울렸다.
웅크리고 있던 힌두교도들이 일제히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며 내달리기 시작했고 동양인 한 명이 허겁지겁 달아나고 있다. 일본 관광단의 일행인 산조였다.
그러자 시신을 나르고 휴식을 취하던 오쓰 신부가 뛰쳐나와 유족 앞을 가로막고 서서 진정시키려 애쓴다. 하지만 격앙된 유족들은 가로막고 선 오쓰 신부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패고 발로 차댔다. 그 사이에 산조는 강변 뒤쪽 미로로 도망쳤다.
수상의 암살로 신경이 곤두선 힌두교도가 오쓰 신부에게 분노를 퍼부었다. 화물차에서 부려지는 짐짝처럼 가트에서 굴러 떨어진 오쓰 신부는 그대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미쓰코가 모여든 사람들 사이로 오쓰 신부를 보고 소리쳤다.
“이 사람이 아니에요. 이 사람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오쓰 신부가 가늘게 눈을 떠 미쓰코를 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목은 오른쪽으로 뒤틀린 채.
“정말 바보야. 하느님 때문에 일생을 망치다니. 당신이 하느님의 흉내를 냈다고 해서 증오와 에고이즘밖에 없는 세상이 바뀔 턱이 없잖아.”
미쓰코의 절규처럼 오쓰의 행적은 하느님의 흉내만 냈을 뿐일까?
오래전 일본 나가사키 성지로 순례를 갔었다.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엔도 슈사쿠 문학관이 앉아있는 소토메 마을에 세운, 작은 비에 새겨진 비문은 아직 내 눈에 그대로 담겨있다.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 푸릅니다.”
[뜨겁게 만나다] 주님! 저는 사랑밖에 아무것도 몰랐나이다
리처드 하디, 「無에의 추구 - 십자가의 성 요한의 생애」
어느 인간이든 내면 깊숙이 들여다보면 상처 없는 영혼이 없습니다. 어떤 이는 그의 이름만 떠올려도 살얼음 조각에 베인 듯 싸한 아픔이 전해오는 이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이번에 소개할 책 「無에의 추구」 주인공인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그렇습니다.
사순 피정에서 시 한 편을 만나다
어느 해 봄 사순시기에 전교가르멜수도원에서 피정을 했습니다. 그때 수녀님께서 읽어주신 시 한 편이 제 가슴을 긋고 지나갔습니다. 처음엔 눈을 감고 수녀님의 낭랑한 음성에 끌려 시 속으로 빠져들었는데 점점 가슴에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얼음 조각에 베인 듯 싸하고 아린 통증이. 어느 순간부터는 눈물샘이 터져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습니다.
저를 울린 시는 최민순 신부님께서 번역하신 십자가의 성 요한의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본 수녀님이 피정이 끝날 무렵 저에게 책 한 권을 건넸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생애를 다룬 「無에의 추구」란 문고판형 책자였지요. 저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분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저 스페인의 ‘신비주의 수도사’라는 정도밖에….
여느 해 사순시기 같았으면 커피를 끊거나 금요일 아침을 굶는 것으로 금욕적인 실천 한 가지를 행하며 지냈을 터인데 그해는 그냥 책만 읽기로 했습니다. 하루에 많은 분량을 읽지 않고 묵상할 수 있을 만큼만 조금씩 읽어갔지요. 대개의 평전이나 전기문이 그렇듯이 출생에서부터 성장, 죽음까지를 한 권에 망라한 책이었습니다.
교회 개혁운동과 시련 속에서
요한 예페스는 여덟 살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그의 집안은 개종자로서 유다계 혈통이 들통 날까 봐 유랑생활을 하였다.) 때문에 열세 살 때부터 빈민들을 위한 특수병원 ‘라 부바’에서 간호조무사로 일하며 근근이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살라망카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곧바로 예수의 성녀 데레사 수녀와 손잡고 교회의 개혁운동에 뛰어듭니다.
그동안 호의호식하며 온갖 특권을 누렸던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 거친 베옷을 입고 맨발로 고행의 삶을 살자고 외치니 사달이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일 먼저 그가 속했던 공동체에서 반발과 비난이 빗발쳤습니다. 급기야는 동료수사에게 보쌈을 당해 톨레도수도원으로 끌려가 종탑 꼭대기 방에 갇혔습니다.
온갖 모욕과 폭력이 쏟아졌습니다. 식사 때마다 식당 입구에 꿇어앉게 하고 동료수사들이 지나가며 가죽 회초리로 등짝을 치거나 빵 부스러기를 바닥에 던져주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널빤지 몇 조각을 이어붙인 다락방에서의 감금생활이 길어지자 등짝 상처에서 피고름이 묻어나고 추위와 배고픔으로 인한 육신의 고통이 극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고 긴긴 밤 상처를 감싸고 오직 ‘임(하느님)’만 생각하며 시를 지었습니다. 이때 주옥같은 신비주의 시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어둔 밤’, ‘영혼의 노래’ 등 스페인 전통시의 최고봉 걸작들이.
육체의 고통이 깊어갈수록 임과의 긴밀한 대화에 빠져든 요한 사제. 교회 개혁의 선구자였던 그가 보여준 무구한 신앙심에 저는 그만 책장을 덮을 때가 많았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깊어지면 저토록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는 백오십 센티미터도 안 되는 작은 체구로 모진 시련을 견디다 1591년 12월 13일 자정을 넘기고, 조과경을 바치는 새벽 종소리를 기다리며 평온하게 숨을 놓습니다. 마흔아홉의 생애를 다락방에서 마친 것입니다.
성인의 고행을 좇아
저는 이 책을 읽고 그 봄 내내 몸살과 어지럼증을 앓았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몸이 회복되면서 어렴풋이 하느님 곁에 가까이 갔었던 느낌이 들었습니다. 성인의 고행을 좇으며 특별한 체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뒤 ‘십자가의 성 요한’에 관한 책들을 모조리 찾아 읽었습니다. 책 속에서 우연찮게 만난 그가 지금은 나의 사표로서 영감을 주고 신앙의 길잡이 노릇을 해줍니다.
제 책상 앞에는 엽서 크기만 한 노란색 이콘 하나가 걸려있습니다. 제가 십자가의 성 요한을 존경하는 것을 알고 스페인 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사다준 그림입니다. 당신이 감금되어 있던 톨레도수도원 벽에 나타나셨던 예수님의 형상을 직접 그린 것으로 그때 받아 적은 “생의 황혼녘에 너를 사랑으로서 심판할 것이다(A la tarde te examinaran en el amor).”라는 글귀가 새겨진….
제겐 고약한 버릇이 있습니다. 좋아하는 인물이 생기면 집요하게 파고드는 습관. 처음엔 그의 사상을 좇다가 나중엔 내밀한 사생활까지. 그리고 그의 영혼의 실핏줄까지도 캐어보고 싶은 욕망이 발동합니다.
이렇듯 요한 예페스에 대한 관심도 깊어져 그의 성장기를 추적하다 부모를 알게 되었고 집안의 가계와 민족의 역사까지도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시를 원문으로 읽고 싶어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어쩌다 보니 스페인 역사와 문화에도 빠져버렸습니다.
이 세상 마지막 날, “예, 예, 주님! 저는 사랑밖에 아무것도 몰랐나이다.” 하고 대답할 수 있었으면….
[뜨겁게 만나다]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하지 못하면
미치 앨봄,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며칠 전 딸한테서 전화를 받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는 순간 들린 건 손녀의 대성통곡하는 소리였다. 이제 만 4년 3개월인 손녀는 정말 슬프게도 울었다.
“아빠, 죽는 이야기하다가 할아버지가 먼저 죽는다고 하니까 나현이가 우네.”
딸은 손녀의 울음에 당황했는지 쩔쩔매면서 이야기했다.
“나현아, 울지 마. 할아버지는 돌아가셔도 나현이 마음속에서 같이 살 거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손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참 난감했다. 네 살배기 어린이에게 죽음을 어떻게 설명할까? 죽음이라는 화두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삶과 죽음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준 책
작년 10월에 만기가 된 보험을 대신할 보험을 들려고 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보험회사가 고혈압이 있다는 이유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하거나 불리한 조건의 보험을 제시했다. ‘보험 불가입’이라는 현실에 맞닥뜨리고 나니 남은 생에 대한 불안감이 확 밀려왔다.
‘나이가 더 들어 아프면 보험 혜택도 없이 병이 들면 어떡하나,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으면 어떻게 되나, 암보험은 있으니까 그래도 다행이다.’ 등의 생각을 하던 참에 손녀의 눈물은 다시 한번 죽음을 되새기게 만들었다.
죽음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겪어야 할 숙명적인 사건이다. 식물의 죽음에 비해 동물의 죽음은 시체라는 부산물을 남겨 미생물이나 짐승의 밥이 된다. 사람 또한 다르지 않아 거창한 영결식을 거쳤든 아니면 소박하게 장사를 지냈든 흙이 되는 과정을 밟거나 화장하여 재가 되어 땅속에 묻히거나 물이나 바다, 산에서 흩날리기도 하고, 수목장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장사를 지낸다.
육체는 흙이 되지만 영혼은 천국이나 연옥, 지옥으로 간다. 죽자마자 가는 것인가? 아니면 구천을 맴돌다가 가는 것일까? 억울한 영혼은 구천을 헤맨다는데, 연도를 바치면 빨리 천국으로 간다고 하는데 맞는 말일까?
미치 앨봄이 지은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은 삶과 죽음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만들어준 책이었다. 죽어 다섯 사람을 만나야 비로소 천국으로 간다는 건 비종교적인 발상이지만 다섯 사람을 통해 주인공 에디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에디의 과거로의 여행에서 만난 다섯 사람 중에는 에디라는 주인공이 생전에 만난 사람도 있고, 만나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모두 에디와는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신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고, 에디에게 상처를 준 사람도 있다.
죽은 뒤 만난 다섯 사람
놀이기구의 추락으로 위험에 빠진 어린이를 구하고 죽은 에디가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에디 때문에 죽은 남자였다. 야구공을 잡으려고 도로에 뛰어든 어린 에디를 피하려던 남자는 에디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길가에 서있는 트럭에 부딪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에디가 두 번째로 만난 사람은 필리핀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혀 굶주림과 노동에 시달리다 적군을 죽이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지뢰를 밟아 부하들을 구하고 전사한 대위였다.
세 번째로 만난 사람은 에디가 미워하는 아버지였다. 무뚝뚝하며 폭력적인 아버지는 에디의 반항에 섭섭하여 말도 하지 않는 관계로 발전한다. 에디는 아버지를 사랑하지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은 자신을 발견한다. 아버지는 친구를 구하려다 물에 빠져 익사했지만 에디는 술주정으로 바닷물에 빠져 병이 들어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네 번째 만난 사람은 에디의 사랑하는 아내 마거릿이었다. 경마장에 있는 남편을 데리러 가던 마거릿은 한 소년의 술병 떨어뜨리기 장난 때문에 부상을 당했다가 살아난다.
다섯 번째 만난 사람은 어린 소녀였다. 필리핀에서 적군을 죽이고 불을 지를 때, 불에 타죽은 소녀였다. 불붙은 막사 안에 누가 있음을 알고 머뭇대다가 대위의 재촉에 그냥 빠져나오는 바람에 소녀는 죽는다.
이 세상에서 천국을 맛보아야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수많은 사건을 겪는다. 자의든 타의든 선의를 베풀기도 하고, 악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법을 어기기도 하고, 남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기도 하며, 때로는 오해와 편견으로 상대방을 미워하거나 자신을 괴롭힌다.
이 책은 천국이나 지옥을 그린 소설이 아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을 통해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곧 현재의 삶이 죽음과 연결되고 있으며,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죽음의 세계에서 천국을 맛볼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통해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책이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에게 “오늘 나와 함께 천국에 있으리라.”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죽음의 문턱에 들어서자마자 천국이나 지옥으로 직행하는 것 같지만, 이 책에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만나는 사람, 행위와 감정을 세상을 떠나 다섯 사람을 만나고 나서 비로소 천국에서의 생활, 평화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세상에서 천국을 맛보지 않으면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다.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삶을 살면서 가족이나 이웃에게 피해를 준다면 천국은 그 어디에도 없을 듯하다.
[뜨겁게 만나다] 주님과 만나는 연습
마르틴 부버, 「나와 너」
당뇨와 고혈압, 고지혈증을 관리하려고 30년 전부터 날마다 산책을 합니다. 그때마다 늘 예수님과 대화합니다.
산책을 할 때면 주한 미군의 ‘이글FM’ 팝송을 듣는데 지난해 8월 21일 토요일 오후 2시, 그날은 레이디 가가의 히트곡들을 방송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레이디 가가의 노래 좋아하시나요?”
“나야 모든 노래, 어떤 음악도 다 좋아하지. 아버지께서 즐기라고 만드셨으니까.”
“저도 좋아합니다. 레이디 가가가 직접 피아노를 치며 부르는 ‘You And I’를 제일 좋아합니다. 지금 나옵니다. ‘You’는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도 들었어. 뉴욕의 한 카페 디너쇼에서 그 노래를 처음으로 부르더군.”
등산길에서 갑자기 쓰러져
등산길 입구의 운동장을 지나 언덕의 층계를 오르는데 갑자기 심장이 멈춰 저는 쓰러졌습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는 했으나 예수님의 힘에 이끌려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하늘은 산들바람에 캉캉을 추는 아카시아 잎들로 가득했고 그 사이사이로 보이는 늦여름의 뭉게구름은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희미해지는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주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 왜 저를 버리려 하시나요?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으니 살려주세요. 그렇지만 제 소원이 아니라 예수님 뜻대로 하십시오.”
“내가 왜 멀쩡한 너를 버려? 사람들은 스스로 나를 잊고선 버림받았다고 불평하지. 난 사람들을 절대 버리지 않아.”
이 말씀이 들리자 머리가 맑아지며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일어나 내려가 몸을 씻고 병원에 가거라. 이 이상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네가 있는 곳에는 어디든 내가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명령에 힘들게 한 걸음 한 걸음, 세 번이나 쉬면서 집에 와 몸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앰뷸런스를 불렀는데 10분이 넘게 오지 않아 택시를 탔습니다. 토요일 오후라 길이 막혀 택시는 도로에서 꼼짝도 못했습니다. 숨 쉬기는 점점 힘들고 정신이 오락가락했습니다. 다시 주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 도와주세요.”
“심호흡을 하며 네가 배운 마르틴 부버의 ‘정신의 본질’과 ‘나와의 만남’을 기억하여라.”
그때 택시는 반대편 차선으로 달려 쓰러진 지 2시간 만에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습니다. 심근경색이라 임시심장박동기(TPM)를 달고 중환자실에 입원했습니다. 의사는 쓰러진 순간부터 병원에 온 과정을 듣더니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라 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봤습니다.
독일 유학 중 주님을 만나다
오래전 독일에서 공부할 때 신학교수법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독일 학교의 정규교과인 종교 수업을 잘 운영하려면 신학교수법을 들어야 했고, 그 교육과정에 학교 현장실습 6개월이 포함됩니다. 그 가운데 4주간은 ‘하느님과의 만남’을 연습하는 영성훈련 기간입니다. 예수님은 그때 저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날을 기억하고 계신다니 눈물이 났습니다.
그렇습니다. 1953년 전쟁이 끝난 해 여름, 저는 어머니를 따라 이웃동네에 있는 움막집 감리교회에 다녔는데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른 채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믿는 시늉만 하며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독일 유학 중 신학교수법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처음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주님과의 이 만남은 독일 주교회의가 인가한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의 만남의 원리에 따른 하느님과의 대화’를 연습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마르틴 부버는 1923년 80쪽 분량의 작은 책 「나와 너」(Ich und Du)를 발표하면서 만남과 상담치료의 시조가 된 유다인 학자입니다.
참된 삶의 가치는 그분을 만나는 것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되어있습니다. 나와 너의 기본개념, 인간의 정신, 절대자인 하느님에 대한 해설과 하느님(신)을 만나는 신비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책을 배우며 당신을 만난 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부버는 “나는 하느님으로 인하여 존재하여 ‘나’가 되며 나의 참된 삶의 가치는 그분을 만나는 것”이라 했습니다.
자신의 온 존재를 다하여 하느님을 만날 때 사람은 살아 숨을 쉴 수 있다는 부버의 말이 절절하게 떠오르며, 예수님의 말씀에 또다시 감사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당뇨, 고혈압, 고지혈증 등 노인 종합병원인 저는 심근경색까지 겹쳐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지만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두렵지 않았습니다. 독일어로 시편 23편을 몇 번이고 암송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
신학교수법 강좌에서 부버의 육성 녹음된 테이프(이미 사망한 뒤여서)로 「나와 너」의 해설과 시편 강독을 들었습니다. 만남의 영역은 자연과 어울리는 삶, 사람과 만나는 삶, 그리고 절대자인 신의 옷깃을 잡고 이를 놓지 않는 삶이라 했습니다. 부버의 “위험이 있는 곳에 주님과의 만남의 구원이 있다.”는 내용은 저에게 참신앙을 굳건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오늘도 저는 살아있습니다. 영구심장박동기(PPM)를 왼쪽 가슴 위에 달고 말입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알렐루야.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