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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신앙 찾기] 문이 열리면 더 이상 ‘방’이 아니다
여섯 식구가 한방에서 살아야 했던 어린 시절 나는 내 방을 갖는 것이 소원이었다. 나만의 공간이 매우 절실했던 그때의 방은 내게 ‘자유’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영화 ‘룸’(레니 에이브러햄슨 감독)을 보면 누군가에게 ‘룸’, 곧 방은 자유가 아닌 감금의 의미, 그것도 끔찍한 폭력과 존재 부정의 의미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세상의 전부, 그야말로 ‘소우주’임을 목격하게 된다.
반인륜적 실화에 토대를 두다
엄마 조이(브리 라슨)와 아들 잭(제이콥 트렘블레이)은 세 평이 조금 넘는 작은 방에 산다. 아니 감금되어 있다. 칠 년 전 한 남자에게 납치되어, 이 작은 방에 갇힌 당시 열일곱 살 소녀 조이는 이제 스물네 살이 되었고, 그 사이 아들 잭을 낳았다. 조이에게 잭은 그녀가 이 지옥 같은 현실을 견디는 유일한 희망이다.
잭이 다섯 살이 된 지금까지 모자는 서로 의지하며 산다. 일주일에 한 번 납치범 닉이 장을 봐주고 드나드는 게 전부인 이 좁은 방에서 조이와 잭은 가짜를 진짜라고 상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나 잭이 커가면서 더 이상 비좁은 방에 가두어 둘 수 없고, 또한 닉이 잭을 위해 하거나 나쁜 영향을 줄 것 같은 우려가 커지자 엄마 조이는 잭을 바깥세상으로 내보내기로 결심한다.
이 영화는 캐나다 작가 엠마 도노휴가 쓴 소설 「룸」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소설의 기본 토대는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프리츨 사건인데, 요제프 프리츨은 친딸을 이십사 년 동안이나 지하 방공호에 가두어두고 자식을 일곱이나 낳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이 알려지게 된 것은 2008년 딸이 낳은 첫째 아이가 혼수상태에 빠지자 병원에 데려갔는데 이를 수상히 여긴 의사가 신고해서였다. 이 참담한 사건은 세상을 충격에 빠뜨렸다.
영화는 납치와 감금, 가족 성폭력과 출산, 탈출과 같은 극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영화는 이처럼 무겁고 자극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를 선정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은 지양한다.
영화가 선정성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고 도입한 장치는 바로 잭의 해설과 ‘시점 쇼트’(등장인물의 시점으로 보는 장면)이다. 영화는 잭의 해설을 통해 다섯 살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을 이야기한다. 아이의 해설이라 해서 단순히 천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잭은 아이의 시점에서 바라본 세상, 그 우주의 충만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좁디좁은 방에서만 살아 바깥 ‘진짜 세상’을 알지 못하는 잭에게 이 좁은 방은 그대로 훌륭하고 멋진 우주이다. 이 우주에는 엄마 조이와 탁자, 설거지대, 가짜 거북이와 뱀 등이 존재한다. 그러나 엄마 조이는 잭이 언제까지나 이 ‘가짜 세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조이는 잭을 탈출시킬 결심을 하고 탈출방법과 대처행동을 잭에게 가르친다. 그리고 양탄자에 싸인 시신으로 위장하여 잭을 세상으로 내보낸다. 잭은 난생 처음 ‘진짜’ 하늘과 ‘진짜’ 나무를 본다. 아이의 시점 쇼트로 보이는 세상은 높고 컸다.경찰의 도움으로 잭은 갇혀있던 창고에서 엄마 조이도 나오게 한다(조이가 갇혀있던 방은 창고를 개조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탈출이 목적일 때의 시나리오는 이 지점이 절정이고, 그 다음부터 이야기를 정리하는 흐름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룸’은 여기까지가 전반부이고 후반부에서는 인물들의 세상 적응기를 다룬다. 오히려 영화의 진정성은 후반부에 함축되어 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납치범 닉은 전반부에 잠깐 그 모습이 나오는 정도이고, 그가 재판을 받을 것이라는 소식 외에 그에 대한 정보나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 영화의 목적이 참담한 범죄에 대한 단죄나 처벌에 있기보다 범죄의 피해자가 어떻게 희망을 찾아가는지에 더 집중하기 때문이다.
세상이라는 또 다른 ‘감옥’
방 바깥으로 나온 조이와 잭에게 세상은 오히려 낯설고 두려운 곳이다. 언론은 두 사람을 쫓아다니고,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조이의 부모는 이혼을 했고 아버지는 쉽사리 잭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조이는 칠 년 전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이미 세상은 변했고 변해버린 세상에서 (가족까지 포함하여) 조이는 당혹스러워한다. 조이의 당혹감은 방에서 잭과 함께하던 행동을 부인하거나 배척하고(엄마 가슴으로 파고드는 잭을 뿌리치는 행동 같은), 잭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과 담담하게 대처하는 어머니에 대하여 신경질적인 비난을 퍼붓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조이의 행동은 조급함에서 비롯한다. 방에서 벗어나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줄 알았고, 자신이 잃어버린 칠 년 세월의 간극을 메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은 또 다른 ‘감옥’이었다.
세상의 시선은 조이 모자에게서 어떻게든 ‘비정상성’을 찾아내고 자신들과 분리해서 보려 한다. 조이는 방송국에서 취재를 하면서 범죄의 피해자인 자신이 오히려 아들 잭을 끔찍한 환경에 방치한 무책임한 엄마로 비난하는 시선이 있음을 감지하고 절망하여 급기야 자살을 시도한다.
조이는 건강과 정서적 안정을 위해 병원에 입원하고, 잭은 혼자 남아 세상과 마주한다. 외할머니 집에서 ‘진짜 개’를 본 잭은 ‘진짜 세상’을 실감하고 서서히 외부세계에 마음을 연다. 새 친구도 만난다. 그리고 조이가 돌아온다.
잭과 조이는 함께 방을 보러간다. 조이에게 방은 진저리나는 고통의 공간이었으나, 잭에게는 비록 가짜 세상이었을지라도 그의 소우주였던 곳이다.
다시 찾아간 방은 이제 예전같지 않다. “문이 열려있으면 더 이상 방이 아니예요.”라는 잭의 대사는 진짜 세상을 경험한 그에게 방은 더 이상 그의 우주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잭은 방과 작별한다. 이제 조이와 잭은 그들의 진짜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희망은 ‘감금’되지 않는다
‘룸’은 세상에서 격리된 모자의 세상 적응기이자 희망에 대한 영화이다. 조이 모자가 놓인 감금이라는 끔찍한 상황에서도 그들의 희망은 ‘감금’되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더 허핑턴 포스트’의 지적대로 “우리의 삶이 더 크고 빛날 수 있게 해주는 영화”가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린아이의 순수함과 같은 믿음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는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그래서 회의와 냉소에 빠지기 쉬운 어른보다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상상하며 이를 굳건히 내면화하는 어린이가 더 신앙인의 자세에 가깝다는 뜻이 아닐까?적어도 ‘룸’에서 진정 강인한 존재는 엄마 조이가 아니라 어린 아들 잭이다. 잭은 자신에게 주어진 ‘감금’이라는 최악의 환경조차 자신의 놀이터로, 우주로 받아들이고 상상했다. 그것이 비록 ‘가짜’일지라도 의심하고 부정하고 그것 때문에 상처받지 않았다. 그래서 잭은 방 밖의 세상에 더 빨리 적응하고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 속 신앙 찾기] 나의 산티아고
‘부엔 까미노!(Buen Camino)’는 ‘좋은 여행이 되길.’ 또는 ‘당신의 앞길에 행운이 함께하길.’이란 의미로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스페인어 인사말인 ‘올라!(Hola)’와 함께 가장 많이 주고받는 말이다.
프랑스의 생 장 피드포르부터 스페인의 산티아고에 이르는 800km의 순례길을 42일의 여정 동안 걸으며 담은 영화 ‘나의 산티아고’는 여행을 꿈꾸는 이는 물론 신앙과 나 자신을 찾는 많은 사람에게 희망과 시작의 손짓을 화면에 가득 담아서 미소를 짓게 하는 작품이다.
내일, 나는 계속 걸을 수 있을까
독일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희극인 하페(데비드 슈트리조 분)는 무대 위에서 과로로 쓰러져 수술을 받는다. 무조건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조언에 긴 휴가를 맞지만 집안에서의 휴식은 낯설고 답답하기만 하여 갑자기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른다.
서른여섯 살의 예술가이며 애연가, 희극인인 하페는 이렇게 낭만의 순례자가 된다. 무언가 멋질 것으로만 생각했던 순례의 길은 쏟아지는 폭우와 허름하고 불편한 숙소, 소음으로 말미암은 불면의 밤, 호감을 보이면 경계심으로 되돌아오는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 등 즐거움보다 고통으로 가득 채워진다.
뛰어난 통찰력으로 동료들에게 큰 힘이 되지만 동료들과 가까워지기를 거부하며 무엇보다 혼자 걷고 싶어하는 스텔라(마르티나 게덱 분), 하고 싶은 말은 참지 않고 내뱉고야 마는 철없지만 귀여운 잡지 기자 레나(카를리네 슈허 분)와 순례의 처음부터 좌충우돌 부딪히는 하페. 과연 이들은 자신이 세운 목표를 달성해 가며 순조롭게 완주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을 연출한 줄리아 폰 하인츠 감독은 여성 감독으로 이 작품에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인물 여행을 통해 그의 진심어린 용기와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원작, 이 작품을 이끄는 또 하나의 힘
주인공 하페는 순례의 여정을 보내며 얻게 된 깨달음을 수첩에 기록했고, 그것은 이 영화의 원작이 된 「그 길에서 나를 만나다(나의 야고보 길 여행)」로 세상에 알려졌다.
영화의 실제 주인공이며 이 책을 쓴 하페 케르켈링은 독일에서 이십 년 이상 지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연예인이다. 희극인이며 사회자, 가수이며 작가로 활동하는 만능 연예인인 그는 산티아고 순례의 경험을 통해 얻게 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고민하고 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 그리고 길에서 만나고 헤어진 친구들과의 일상에 대한 경험을 책 속에 오롯이 담았다.
그리고 이러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나의 산티아고’는 감동적인 드라마나 모험만을 자극하는 단순한 여행 영화가 아닌 진정한 사색의 영화로 관객을 사로 잡는다.
또한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화면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하며, 많은 생각과 떠남의 용기와 희망을 선사한다. 이 모든 것은 원작에 담긴 매력적이고 탄탄한 메시지를 기초로 하고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은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하페의 얘기에 귀 기울이게 된다. 그것은 웅성거리는 소음이 아니라 진심을 담은 대화로 관객의 가슴을 강하게 자극한다.
순례 도중 느끼는 그의 긴장감, 포기하고픈 절망은 물론 사람들 앞에서 부려보는 허세와 객기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웃음과 눈물, 걱정과 안도감까지 자아내게 한다.
“사람들은 속죄하려고 순례한다지만 내가 보기에는 다들 죄를 지으려고 순례하는 것 같아.” 영화 속 레나의 말처럼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의 속내를 솔직히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솔직한 얘기는 작품에 독이 되었을까? 아니다. 오히려 어느 순간 ‘하페’라는 인물에 몰입해, 화면 안에서 함께 순례길을 걷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광활한 자연 속에서 마주하는 나 자신, 속물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 자신을 마주하며 미소짓기도 한다.
올여름, 아시시 성지를 순례하시는 교황님
많은 가톨릭 신자는 이스라엘이나 로마로 성지순례를 한다. 물론 다른 곳으로 순례를 하는 이도 있다. 일반 신자들뿐 아니라 성직자들도 순례의 길을 떠난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올여름에 순례를 떠날 예정이다. 교황청 새복음화촉진평의회에 따르면, 오는 8월 4일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과 영성이 살아 숨 쉬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 지방의 아시시 성지를 순례하실 계획이라고 한다.
이번 순례는 오노리오 3세 교황이 포르치운쿨라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아시시의 용서’라는 전대사를 베풀 수 있도록 허락한 지 800년이 되는 것을 기념하려는 것이다. ‘작은 몫’이라는 뜻의 ‘포르치운쿨라’는 아시시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있는 작은 경당이다.
프란치스코와 작은 형제들이 공동체 생활을 처음 시작한 장소인 이곳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서 교황님은 개인 기도를 바친 뒤 연설하신다. 그 기간이 짧건 길건 모든 순례는 참여하는 이들의 마음과 몸을 치유하고 신앙적 영성을 새롭게 채우는 시간이다.
순례의 치유는 우리 곁에서도 가능하다
여름방학이나 휴가를 맞은 우리가 이 작품을 보고 나면 산티아고 순례에 대한 열망이 커질 것이다. 하지만 유럽이라는 실질적인 거리감, 만만찮은 여정과 비용에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그냥 주저앉아 부러워하기만 할 것인가?
그렇게 실망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곁에도 수많은 성지가 있으니까. 그곳을 찾아가 조용히 걸으며 상념에 잠겨보는 것은 어떨까? 또 주위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순례, 핵 없는 세상을 위한 순례 등이 그것이다.
이도 저도 다 복잡하고 어렵다 싶으면 가장 가까운 성당에 찾아가 십자가의 길을 걸어보자. 또한 가톨릭 교회에서 마련한 것은 아니더라도 국토 대장정 등 다양한 순례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순례의 길을 한 걸음씩 성실하게 내딛다보면 힘들고 고달픈 길은 어느새 지나가게 된다. 우리의 인생도 순례와 마찬가지 아닐까?
산티아고의 순례는 사람의 힘을 모두 빼앗아갔다가 몇 배로 돌려준다. 영화 속 주인공 하페도 순례를 시작할 때는 호텔을 고집하고, 인증도장을 받으려고 버스를 타고 이동했지만, 조금씩 변화해 어느새 줄에 매여있는 개와 물을 나누어 마시게 된다.
“기도하지 않는 자에게 신은 올 수 없다. 선택권은 우리에게 있다. 누구든 신과 나름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하지만 진정 사랑하는 자만이 지속적인 관계가 가능하다.”
[영화 속 신앙 찾기] 선택의 윤리에 대해 질문하다 - 아이 인 더 스카이(Eye in the Sky)
요즘은 하루가 멀다 하고 테러 관련 소식이 전해진다. 군사시설이나 정부기구 등에 대한 테러에서 이제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테러가 무차별적으로 자행되고 있다. 테러는 그 명분이 무엇이든 비열한 행위임에 틀림없다. 관련자뿐 아니라 주변의 무고한 이들까지 희생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테러는 폭력을 통하여 목적을 관철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미 생명의 존귀함을 해치고 공포를 퍼뜨림으로써 명분도 가치도 잃어버리게 된다. 폭력은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되기 어렵다.
물론 테러를 둘러싼 정치역학이나 국제관계는 단순하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테러가 결과적으로 폭력의 악순환을 부추기고 공포를 조장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드론 전쟁에 대한 질문
‘아이 인 더 스카이’(개빈 후드 감독)는 테러와의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자살 폭탄 테러를 저질러 많은 인명을 살상한 테러 조직을 수년간 추적한 영국정부가 미국과 케냐와 공조하여 이들을 체포하려는 작전이 영화의 줄거리다.
이 작전의 수행에서 인상적인 것은 테러리스트는 케냐에 은신해 있고, 작전 지휘관은 영국에 있으며, 미사일 발사할 조종사는 미국 공군기지에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테러리스트의 은신처에는 작전과 관계된 이들이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보통 합동작전이라 하면 같은 공간이나 전장에서 이루어지는 공조 형태를 연상하는데, ‘아이 인 더 스카이’에서의 합동작전은 지리적으로 먼 거리에 있으며, 현장에 작전요원이 없는 가운데 각자 화면 앞에서 회의를 한 뒤에 작전 명령을 수행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전 관계자들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것은 바로 ‘드론(drone)’이다.
드론은 무선전파로 조종하는 무인 항공기로서, 영국이 군사용으로 개발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서 최초로 사용하였다. 그 뒤에 드론은 정찰과 정보수집, 감시, 첩보 등 다양한 용도로 전쟁에 이용되면서 현대식 전투 양상을 바꿔나간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재 1만 개 이상의 군사용 드론이 전쟁에 투입되어 있다고 한다.
영화 ‘아이 인 더 스카이’에는 다양한 형태의 드론이 나온다. 미사일을 탑재한 공격용 드론과 새 모양의 작은 감시용 드론, 곤충 모양의 초소형 감시용 드론 등이 그것이다. 이제 전쟁은 인간이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효율적으로 그러나 너무도 비정하게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을 발휘할 수 있는 시대인 것을 이 영화에서 확인하게 된다.
영화에서는 드론을 통하여 상대를 감시하고 정보를 수집하며 대처방안을 결정한다. ‘아이 인 더 스카이’에서 세 국가의 합동작전은 화면 앞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전쟁방식은 자칫 현실을 게임화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게 한다.
버튼으로 조정하고 결정하는 순간,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의 무게를 얼마나 느낄 수 있을까?
영상기술이 고도로 발달하여 현장감을 생생하게 전달한다지만 직접 현장에서의 체험을 대체할 수 있을까? 적어도 자신은 안전한 상황에서 상대의 생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릴 때 그 고민과 부담의 크기는 과연 얼마나 될까? 자칫 드론 전쟁이 전쟁의 참혹함과 자신의 정신적 고통을 희석시키는 것은 아닐까? 영화는 현대의 드론 전쟁에 대해 많은 질문을 던진다.
정의란 무엇인가
‘아이 인 더 스카이’는 현대 드론 전쟁의 실상을 보여주면서 갈수록 게임화되어 가는 전쟁에 대한 우려를 깔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더욱 주목하게 하는 것은 인물들이 놓인 윤리적인 혼란이다.
영화에서 영국군 작전 지휘관 파월 대령(헬렌 미렌)은 테러리스트를 생포하려고 하지만 드론이 보낸 영상을 통해 자살 폭탄 테러가 계획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이들을 감시하던 드론의 배터리가 방전되어 더 이상 정보를 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자칫 테러리스트를 놓쳐 더 큰 희생을 우려한 파월 대령은 테러리스트의 생포를 포기하고 미사일 발사를 명령한다.
그런데 이때 케냐 소녀가 빵을 팔려고 테러리스트의 은신처 근처로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이곳은 미사일 폭발 범위 안에 들어가는 지역으로 미사일이 발사되면 소녀는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려고 모의실험과 계산을 거듭해 보았지만 소녀를 살릴 방법은 없다. 어서 빨리 소녀가 빵을 다 팔고 그 자리를 떠나는 수밖에. 영화의 긴장감은 이 장면에서 정점에 이르고, 파월 대령을 포함한 인물들의 선택에 대한 부담감도 최고조에 달한다.
자살 폭탄 테러를 획책하는 테러리스트를 놓치면 8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한 명의 소녀를 살릴 것인가? 80명의 무고한 희생자를 구할 것인가? 바로 이것이 영화 속 인물들이 고민하는 어려운 숙제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기시감이 있다. 바로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열차 실험’에 관한 내용이다. 멈출 수 없는 열차 때문에 철로 위 다섯 인부를 죽게 할지, 비상선로로 방향을 틀어 그곳에 있는 한 명의 인부를 죽게 할지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에 대하여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의 처지와 관점, 그리고 위치에 따라 다양하게 반응한다. 작전 지휘관인 파월 대령은 발사를 명령하고, 정치인 장관은 명분을 내세워 반대하며, 미사일 버튼을 눌러야 하는 드론 조종사 와츠 중위(아론폴)는 보류를 요청하다 결국 버튼을 누른다.
이 영화는 누가 옳고 그른지를 판별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처지와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만약 나라면 저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영화는 그 어떤 결정도 쉽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누구도 비난하기 어렵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수긍하게 한다.
물론 그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법적으로나 정치적인 책임을 면한다 하더라도 아무 죄 없는 어린 소녀를 희생자로 삼은 도덕적 책임과 그에 따른 죄의식까지는 털어내지 못할 것이다. 작전에 참여한 이들의 표정에서 자랑스러움과 당당함이 아니라 착잡함과 번민이 묻어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선택의 윤리, 책임의 무게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면서 선택과 결정에 자주 직면한다. 그 선택과 결정은 자신과 가족, 주변사람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친다. 어떤 선택은 사회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이 좋은 선택일 수도, 나쁜 선택일 수도 있지만, 좋은 선택을 하거나 적어도 최선의 선택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아직 이 세상에는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이 복잡해지고 상대화되면서 선택은 더 어려워졌다. 내 처지에서는 최선이지만, 상대의 처지에서는 최악의 경우도 많아졌다. 또한 다수를 위한 선택이 거기에서 배제된 소수에게는 치명적이고 불합리하게 작용하는 경우도 많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정의로운 것인가? 선택의 중압감이 덮쳐올 때, 자신의 지혜가 보잘 것 없음을 절감할 때 인간은 신에게 기도를 한다. 그분이 내게 지혜를 주시고 옳은 길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말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 선택과 결정에 대한 책임은 인간의 몫이다.
‘아이 인 더 스카이’는 선택의 윤리, 책임의 무게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영화 속 신앙 찾기] 밀정 - 어느 역사에 이름을 올릴 것인가
올해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잇달아 등장하여 눈길을 끈다. ‘암살’(최동훈 감독), ‘대호’(박훈정 감독), ‘동주’(이준익 감독), ‘귀향’(조정래 감독), ‘해어화’(박흥식 감독), ‘아가씨’(박찬욱 감독), ‘덕혜옹주’(허진호 감독), 그리고 ‘밀정’(김지운 감독)에 이르기까지 일제강점기를 다루는 영화들이 부쩍 많아졌다.
일제강점기는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고통과 질곡을 안겨준 시기였던 만큼 시대의 분위기가 주는 엄혹함과 비장함이 있고, 그 시대 사람들의 다양하고 비극적인 행보 또한 극적인 요소가 큰 편이어서 여러 매체의 작품에서 다루어졌다.
영화 ‘밀정’은 일제강점기, 그중에서도 삼일운동 뒤인 1920년대를 시간적 배경에 두고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의 활동을 되짚으며 당시 사람들의 믿음과 선택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황옥 경부 폭탄사건이 토대
영화에는 이정출(송강호)이라는 일본 경찰이 등장한다. 이정출은 조선인으로서 독립운동하는 동족을 잡아내는 일을 한다. 영화의 시작 장면은 일본 경찰에 쫓기는 조선인 의열단원 김장옥(박희순)의 체포 작전에 나선 이정출을 등장시켜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군상들을 보여준다.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내부의 밀정과 외부의 또 다른 밀정, 의열단과 일본 경찰 등 여러 겹의 갈등과 긴장관계가 이 영화 속에 함축되어 있다. 특히 의열단 단장 정채산을 체포하고 의열단을 붕괴시키려는 계획을 세운 일본 경찰 수뇌부가 또 다른 조선인 경찰 하시모토(엄태구)를 투입하여 경쟁시킴으로써 살아남으려는 이정출의 안간힘과 불안 그리고 선택이 영화의 긴장감을 조성한다.
‘밀정’은 1923년 실제로 있었던 ‘황옥 경부 폭탄사건’을 바탕으로 당시 의열단에 일어났던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엮어 만든 영화이다. 상해에서 경성으로 일제의 심장부인 총독부 등의 주요 시설을 타격할 폭탄을 들여오려는 의열단과, 이를 방해하고 파괴하려 들어온 조선인 일본 경찰 간의 암투와 회유와 교란작전이 주요 줄거리를 이룬다.
여기에 “친일 또는 항일의 한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에 어느 한쪽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는, 그런 인물이 그 경계 위에서 줄타기하는 모습들이 흥미로웠다. 시대가 사람들을 어떻게 압박했는지, 어디로 몰고 가는지 시대의 가속을 받는 인물들의 감정적 과정과 어두운 내면의 행로를 시대적인 공기와 함께 다루고 있다”(김지운, ‘밀정’ 보도자료).
‘밀정’은 제목 그대로 스파이 영화다. 따라서 스파이 영화의 특성상 분열적 정체성, 가면(거짓)과 진실, 공작과 역공작 등의 구성이 긴장감 있게 전개된다. 특히 밀정이라는 드러나지 않은 존재(일종의 그림자)는 관객에게 긴장의 밀도를 높인다. 영화에서 의열단을 정탐하고 파괴할 목적으로 들어온 이정출 외에도 의열단 내부의 또 다른 밀정에 의해 조직이 위험에 빠지는 상황은 관객을 더욱 긴장하게 만든다.
아울러 액션 장면의 기민함과 화려함이 김지운 감독 특유의 연출과 잘 어우러져 인상 깊은 장면들을 제공한다. 영화의 시작에서 한옥 지붕 위를 뛰어다니며 총싸움을 벌이는 장면이나, 기차에서의 격렬한 싸움 장면은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
‘밀정’의 영어 제목은 ‘그림자들의 시대(The Age of Shadows)’이다. 김지운 감독은 드러나지 않는 또는 드러낼 수 없는, 그러나 존재하는 그림자와 같은 이들이 살아가는 시대를 그리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의 언급처럼 그 시대는 “어느 한쪽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는” 그런 시대이고, 그림자들은 그런 ‘칼날 위의 삶’이 계속되었다. 그림자들의 삶이 지니는 본질적인 어둠과 위험, 또한 일제강점기라는 엄혹한 시대의 공기가 지속적으로 영화에 긴장의 밀도를 더해가는 요소로 작용한다.
마음의 빚, 그것의 무게
이 영화의 볼거리는 이정출이라는 인물의 변화이다. 독립운동에 몸담았다 변절한 뒤 일본 경찰이 되고, 다시 이중 스파이가 되어 의열단을 돕다가 마지막에는 독립운동가로 변모하는 이정출의 모습은 영화에서 꽤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실제 인물인 황옥은 경기도 경찰부 소속 경부로 의열단원 김시현(영화에서는 김우진 : 배우 공유)의 설득으로 상하이에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한 뒤 경찰의 지위를 이용하여 거사용 폭탄을 국내로 들여왔다.
그러나 동료의 배신으로 검거되자 자신이 일제의 밀정이었다고 법정에서 고백함으로써 큰 파문을 일으켰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규명되지 않은, 논란의 인물이다. 이처럼 실제 인물에 대한 논란은 있으나, 영화에서는 이정출의 변화를 꽤 설득력 있게 그려나간다.
영화는 이정출의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는 요소로 ‘마음의 빚’을 거론한다. 그는 지난날 김장옥과 함께한 친구이자 동지였으나, 일본 경찰이 됨으로써 그를 등지고 급기야 친구가 자신 앞에서 자결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인물이다. 이정출의 마음의 빚을 알고 이를 끌어내 돌아서게 하는 사람은 의열단 단장 정채산(이병헌 : 실제 인물은 김원봉)이다.
정채산은 “밀정에게도 조국은 하나다. 그에게도 분명 마음의 빚이 있을 것이며, 마음의 움직임이 가장 무서운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정출에게 “누구나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어느 역사에 이름을 올릴 것인지 선택하라.”고 한다.
정채산의 지적처럼 이정출은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니 ‘마음의 움직임’이 이정출이라는 인물의 표면 밖으로 조금씩 새어나온다.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은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잡혀온 연계순(한지민)을 직접 고문하고 급기야 거적에 덮여 수레에 실려나가는 그녀의 주검을 대했을 때 터져나온다.
배우 송강호는 이정출을 극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억누르고 힘을 덜어냄으로써 인물에 대한 신뢰감을 확보하였고, 감정의 완급을 효과적으로 조절하였다. 스파이 영화에 나오는 냉혹하고 주도면밀한 인물을 연기하기에는 어딘가 허술하고 능글맞으며 굼뜬 중년의 송강호가 돋보이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믿음의 힘
‘밀정’은 믿음에 대한 영화이다. 이정출을 비롯한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의 믿음에 관하여 확신하거나 의심한다. 그들의 믿음은 조국의 독립이다. 일제강점기에 많은 사람이 일본제국의 강건한 힘을 믿었고 그래서 친일파로 돌아섰다.
이정출도 처음에는 조국의 독립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독립운동을 하는 친구 김장옥에게 투항을 권하며 이렇게 말한다. “넌 이 나라가 독립될 거 같냐? 어차피 기울어진 배야!” 그러나 김장옥은 이정출 앞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자신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긴다.
일본의 압제에서 독립할 것이라는 믿음이 확고한 이들은 독립의 그날을 기다리며 고난을 견디거나 스스로 고난의 길로 들어섰다.
정채산의 말처럼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믿으면서 실패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실패가 쌓여 그 실패를 딛고 일어서서 앞으로 전진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서야” 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아마 순교의 시대에 우리 신앙의 선조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순교를 요구하지 않는 시대, 신앙에 대한 박해가 없는 이 시대에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가? 간절함이나 굳건함은 사라진 채 신자로서 최소한의 의무만을 치러내는 안이하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머물러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 속 신앙 찾기] 소명과 사랑, 용기와 실천, 그리고 희망 오! 마이 파파
필리핀 소녀들이 장례미사에서 눈물을 훌쩍이며 ‘오! 마이 파파’를 부른다. 파파는 바로 소 알로이시오 신부다. 그의 이름은 몰라도, 대한민국 중년들은 부산 ‘소년의 집’을 알고 있다. 한때 축구를 잘해 전국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서만은 아니다. 전쟁과 가난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의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그 ‘희망’을 만든 소 알로이시오 신부가 주인공인 ‘오! 마이 파파’는 박혁지 감독과 조미혜 작가의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낡은 사진과 자료를 뒤지고,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의 추억과 기억을 끄집어내고, 그가 남긴 흔적들을 찾아가면서, 그의 시간들이 얼마나 우리에게 소중한지 확인해 준다.
‘오! 마이 파파’는 과장도 없다. 소 신부에 대한 너그러운 미화도, 상업적 계산으로 집어넣은 극적인 장치도 없다. 카메라와 마이크는 마치 구경하듯 가난한 아이들의 아버지 소 신부의 소명과 사랑, 용기와 실천, 그리고 희망을 소박하게 담을 뿐이다.
소명
주님의 일을 하다 보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소 신부는 성모 발현지인 벨기에 바뇌에 있는 성모상을 자주 찾았고, 성모님의 가르침에 따라 ‘가장 어렵고 가난한 나라에서 봉사하겠다.’고 약속한다.
1957년 27세에 사제품을 받자마자 이 땅을 찾은 것부터가 우연이 아니었다. 소명이 아니라면, 수많은 가난한 나라 가운데 왜 하필 한국이었을까? 소명이 아니라면, 이 땅에서 끝내지 않고 평생 성모님의 뜻을 따라 가난한 아이들을 찾아나설 수 있었을까?
여동생의 말이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하여 학교를 세우려고 후원자를 찾아 돌아다니며 애태우던 오빠가 미국에서 모금을 위한 강연을 했는데, 오빠의 아파트에서 모금 전문가를 만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사랑
소 신부에게는 사랑이 있었다. 만일 사랑이 없었다면, 종교와 인종과 국적을 떠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라는 성모님의 가르침대로 살 수 없었을 것이다. 1957년 12월 8일, 처음으로 부임한 부산에서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고아원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이었다. 누구의 눈에도 그들은 보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을 그냥 지나치거나 피했다.필리핀 마닐라에서도 냄새와 파리 떼로 눈을 뜰 수 없는 쓰레기 더미 속에서 생활하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소 신부가 막사이사이상을 받으러 간 1983년에만 그들이 그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전에도 있었고, 그 이후에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들을 보았다. 그러나 사랑으로 보는 눈이 아니었기에 보이지 않았고, 보았어도 가슴까지 다다르지 못했다.
‘오 마이 파파’는 사랑을 가진 사람은 눈부터 다르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눈으로 자신이 손잡아주어야 할 사람, 함께 가야 할 사람을 모두 담는다고 말한다.
소 신부는 사랑의 눈으로 가난한 한국의 고아들을 보았고,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래서 1964년 ‘마리아수녀회’를 창설해 고아들에게 가장 간절한 엄마의 사랑을 선물했다. 20년 뒤인 1984년 필리핀 마닐라에도 쓰레기 더미 속에 사는 아이들의 엄마가 될 수녀 두 명을 파견했다.
그는 형식적인 엄마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리아수녀회 수녀들에게 강조했다. “늘 아이들 곁에 같이 있어라. 기도 중이라도 아이가 부르면 달려가라. 아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께 먼저 봉사하라.”
소 신부는 ‘오! 마이 파파’를 통해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가난한 사람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답이 사랑임을 알고 있다. 다만 실천하지 못할 뿐이다.
용기와 실천
‘오! 마이 파파’에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감동적인 장면은, 멋지게 지은 필리핀과 과테말라의 소년 · 소녀의 집이 아니다. 1992년 그가 선종한 지 23년 만인 지난해 교황청이 결정한 ‘가경자’ 선포식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다큐멘터리 중간에 정지 흑백 화면으로 담은 소 신부의 표정이다.
따스하면서도 강렬한 눈빛. 거기에서 가난한 아이들에 대한 그의 사명과 실천의지를 읽은 것은 지나친 감정이입 때문은 아닐 것이다. 우리를 숙연하게, 부끄럽게 하는 또 한 장면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부산에 판자로 지은 그의 오두막 사제관과 필리핀 알로이시오 메모리얼센터에 유품으로 보관하고 있는 군데군데 기운 허름한 단벌 수단, 낡은 구두, 그리고 빛바랜 안경. 가난한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치면서도, 정작 자신에게는 지독히 가난하고 검소했던 소 신부의 오두막 사제관. 1982년 미국의 도티 부부는 이 사제관을 보고 감동하여 무려 25만 달러를 아이들의 수영장 건설을 위해 선뜻 내놓았다.
그는 정말 새 것이 싫어서 마다하고 낡은 것을 고집했을까? “차라리 애덕은 어렵지 않으나, 스스로 가난하게 사는 것은 진짜 어려운 일”이라는 한 수녀의 고백이 소 신부의 존재를 더욱 아름답게 느끼도록 해준다.
소 신부는 말했다. “제 희망은 평범한 한국 가정의 아이들처럼 우리 아이들이 교육을 잘 받아서 건강하게 사회에 나가서 사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지금도 세계 여섯 나라의 10개 도시에 아들딸 2만여 명이 있다. 또한 멕시코 과달라하라 소년의 집에서 봉사하는 수련 수녀인 안나 히메네스처럼 그의 뜻을 따르며 오늘도 어떻게 하면 이 가난한 아이들을 도울 수 있을지 고민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
희망
소년 우리엘은 소 신부의 이야기를 들은 뒤 희망을 안고 이틀을 걸어서 소년의 집을 찾아왔다. 산베드로의 빈민가 양철판잣집에 사는 소녀 루셀로는 중학생이 되어 이제는 의사가 되는 꿈을 갖게 되었다.
희망은 우리 인간의 존재 이유이고 힘이다. 희망이 없으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에게 오너라.”(마태 11,28)하셨고, 가난한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보살피라고 하셨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를 쳐다보고, 누구를 외면하고 있느냐?’ ‘오! 마이 파파’는 이렇게 우리에게 묻는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하루라도 빨리, 더 많은 학교를 짓고 싶었던 소 알로이시오 신부를 주님께서는 이제 그만 주님 곁에 와서 쉬라고 부르셨다. 치유 불가능한 루게릭병에 걸려 예정된 죽음이 다가오는 시간에도 소 신부는 ‘주님 안에서 내 일을 다한다.’는 자세를 한시도 잃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걱정했다. ‘지금까지 주님의 뜻보다 내 뜻대로 행동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그의 마음에 주님께서는 ‘네가 시작은 하지만 끝낼 필요는 없다. 이것은 너의 미완성 교향곡이다.’라는 메시지를 주신다. 어쩌면 그 메시지야말로 살아있는 우리를 향한 것인지도 모른다.
소 신부는 굳게 믿었다, 복음대로만 한다면 주님께서 계속하게 해주실 것이라고. 실제로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오 마이 파파’는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소 신부에게 복음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실천이다. 담아두지 말고 달려가 전할 때, 우리는 하나가 된다. 언젠가는 그런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기에 그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축복이십니다.”라는 작별인사를 한 것인지 모른다.
[영화 속 신앙 찾기] 판도라 - 희망의 두께
요즘 가장 ‘극적’인 분야는 뉴스다. 예상도 하지 못했던 어마어마한 소식이 날마다 쏟아져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다. 뉴스와 픽션의 가장 큰 차이는 ‘개연성’이다. 뉴스는 이미 벌어진 일이다. 말이 되건 안 되건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실은 뉴스 또한 일종의 ‘후일담’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가 가장 극적인 것은 아닐까? 극적(劇的)이고 극단적(極端的)이다. 현실이 상상력의 세계를 압도해 버린 지 이미 오래다.
판도라, 이미 ‘극적’인 재난 영화
영화는 최대한 여러 각도에서 개연성을 검토해야 하는 매체다. 관객을 가장 열심히 설득해야 하는 매체 특성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해 연말 개봉한 박정우 감독의 ‘판도라’는 극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개연성의 영역이 아니라 그냥 현실처럼 비치기까지 한다. 이 무지막지한 선택을 현실의 영화 개봉으로 성사시킨 제작진의 뚝심과 열정이 놀랍다.
과장이 아니라, 이런 영화는 2011년 3월 후쿠시마 원전이 이미 폭발한 바 있는 일본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다. 영화 ‘판도라’ 예고 영상에서도, 한 일본인 관객이 눈물을 참으며 “이런 영화를 만들어주어서 고맙다.”고 이야기한다.
참사 당시에도 그 뒤에도, 정작 일본 정부는 여전히 ‘후쿠시마’에 대해 비밀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핵 발전소 폭발 직후에 만들어진 일본 영화 ‘온화한 일상’(2012년) 등을 보면, 얼마나 철저하게 국민을 속이고 사고 자체를 묻어버리려 하는지 느낄 수 있다.
마스크를 쓰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경제논리’로 덮으려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어떠한 대처도 하기 힘든 개인들의 파괴된 삶이 ‘닫힌 사회’를 여실히 보여준다. 영화 ‘온화한 일상’에 제작비를 댄 사람들의 이름은 철저히 비밀이고, 배우들도 많은 불이익을 감수하며 출연했다고 한다.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끊임없이 방사능 간접 피폭을 우려하는 것만도 괴로운데, 더 나아가 ‘우리의 현실’이 될 수도 있다고 (상상이지만) 경고하는 영화가 나왔다. 참으로 절묘한 개봉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우리 땅에 밀집해 있는 노후된 핵 발전소의 위험성에 대해 미처 깨닫지 못하는 국민이 많은 대신, ‘판도라’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배급망을 통하여 전국 영화관에서 정식으로 상영했으며, 심지어 흥행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이미 관객 4백만 명을 훌쩍 넘었다.
기계도 사람처럼 수명이 있다
솔직히 영화관에 가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원전을 다룬 일본 영화들처럼 ‘재난’은 말로만 나오는 수준의 구성이 아니라, 거대한 세트를 짓고 핵 발전소 폭발 장면과 온갖 위기를 초대형 규모로 보여주었다. ‘대작 재난영화!’를 보면서 펑펑 울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목이 조일 듯한 초반의 긴장감과 조바심을 풀어주며 눈물에 푹 잠기게 한다. 차라리 모든 것을 내려놓고 우는 동안, 무언가를 어떻게든 붙잡아야 한다는 의지가 솟구친다. 뭐라도 붙들고 살아남아야 한다. 당장 꺼야한다, 저 꺼지지 않을 불의 도화선이 점화되기 전에! 지금 당장!
영화 ‘판도라’의 내용은 어쩌면 단순하다. 줄거리는 이렇다. ‘역대 최대 규모의 강진에 이어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까지. 예고 없이 찾아온 초유의 재난 앞에 한반도는 일대 혼란에 휩싸이고, 믿고 있던 통제탑마저 사정없이 흔들린다.
방사능 유출의 공포는 점차 극에 달하고 최악의 사태를 유발할 2차 폭발의 위험을 막으려고 발전소 직원인 재혁(김남길 분)과 그의 동료들은 목숨 건 사투를 시작한다. 기계도 사람처럼 수명이 있다. 특히 핵 발전소는, 정해진 수명을 다하면 반드시 사고로 이어진다. 절대로 ‘안전’하지 않으며 예외란 없다.
하지만 영화 ‘판도라’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다. 감히 그 지옥 불 속에서 희망을 건져올린다. 그 꺼지지 않을 불 속에서도 인간만이 품을 수 있는 희망이라는 것의 실체에 대해 눈물겹게 그려낸다. 한 가닥의 희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녀린 개개인들이 나 아닌 타인을 위한 절대적 소망으로 자신을 희생하려 할 때, 희망은 놀랍도록 두터워진다.
희망은 한번 뭉쳐지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확인’되고 나면 삽시간에 불어난다. 희망의 두께는 종종 그 속으로 몸을 던진 이들조차 예측하지 못했을 정도로 두터워진다. 그 두터움이 모든 것을 재편시킨다. 기어이 그렇게 만들고야 만다.
절망이 희망으로 몸을 바꾸는 순간
희망이란 어쩌면 구체적 감각이다. 마음보다 몸이 먼저 알아보는 것은 아닐까? 시간을 입혀 숙성시켜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기다림인지도 모른 채 기다리고, 그것이 희망인지도 모른 채 희망하는, 더디고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만 얻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희망은, 절망의 ‘바닥’을 짚었을 때 비로소 헤아려지는 간절함일 수도 있다.아직은 이 땅을 딛고 살아야 하는 우리가 감내해야 할 몫은, 어떠한 희망도 버릴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희망을 가져도, 희망을 버려도 어차피 시간은 간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희망은 아무리 가느다랗더라도 질기다. 희망이 실체가 되려는 구체적 조건이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그 질김의 속성을 믿고 끝내 도달해 보겠다는 용기가 아닐까? 가늘지만 질긴 그 끈이 내 손에 잡힐 때까지 놓지 않겠다는 각오로 말이다.
그래서 신앙의 선조들은 그토록 희망의 증거를 보여주시기를 하느님께 간청했는지도 모르겠다. 희망의 증거를 조금이라도 보여주신다면, 믿음의 증거 또한 보여드리겠다는, 또는 보여드릴 수도 있다는 식의 조건부 기도를 감히 청하고 애걸하고 그러다 지쳐 쓰러져간 기록들이 성경을 채우고 있다. 인간의 나약함과 절박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대목이다. 우리는 그렇게 믿음을 스스로 저울에 달았고 눈금을 재가며 제풀에 지쳐갔다. 그것을 벗어나 다른 식으로 희망을 품어보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절박함에 기초한 조건은 희망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실상 절망에 이미 기울어져버린 조건이다. 곧 패배할 것을 아는 이들의 것이다. 그래서 신앙의 선조들은 깨달음 이후에 또 기록하였다. 믿음과 희망은 구체적인 ‘경험’의 문제다. 자신의 삶 안에서 발견하고 느껴지는 것이어야 한다.
희망이란 순차적인 조건과 단계를 거쳐 도출되는 게 아님을 영화 ‘판도라’는 새삼 일깨운다. 희망은 실상 이미 내재되거나 장착되어 있는 것 가운데 (숨어)있었다. 다만 그게 희망인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알아보았을지라도 배제했다. 배제할 이유는 너무나 많았다. 산처럼 쌓인 보고서로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희망을 위해 필요한 것은 단 하나, 새로운 각오였다. 그 각오를 향해 몸을 움직여야 했다. 도망도 겉으로는 마치 몸을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 ‘판도라’는 증명한다. 도망쳐봤자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두려움이 서로를 꼼짝하지 못하게 가두기에, 그저 밟고 밟힐 뿐 아무도 도망에 성공하지 못한다. 나 혼자가 아닌 공동체를 위한 각오를 서로 다질 때만, 한 줄기 길이 비로소 열린다.
영화 ‘판도라’를 본 뒤 오래도록 의구심을 가졌던 로마서의 구절을 다시 찾아보았다. 어쩌면 희망이야말로 선연히 ‘눈에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 유혹에만 머물지 말고 더 큰 데를 바라보라는 비유가 아닐지 요즘 깊이 생각 중이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