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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라는 기쁨과 사랑의 구원을 위하여
---이관묵의 시세계
장석원
1. 갑사에서
「계룡산」을 읽고 매장된 기억을 발굴한다. 사실은 사라졌다. 이미지의 잔상만 너울거린다. 그날 우리는 갑사를 거닐었다. 시인과 다른 시인과 한 평론가와 나. 서울에서 내려간 시인과 평론가의 선문답 같은 대화를 조용히 응시하면서 연못에 어른거리는 바람의 그림자처럼 혼자와 타인의 경계를 넘나들던, 어느새 허공의 침묵에 스며들던, 이관묵 시인의 일렁이는 눈빛을 기억한다. 폼페이의 그라디바처럼 그가 걸어온다. “막 해지는 당신이 나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그가 그날 갑사에서 띄웠던 편지가 당도한 것이다. 편지에 적힌 한 문장. “나를 다 읽으면 찢어버리세요.” 기억을 세절한다. 문자가 비산한다. 서신을 수신한 나의 몸에 글자가 새겨진다. “당신과 나, 아직 도착하지 않은 서로의 답장입니다.”
2. 망각(望角)과 봉독(奉讀)
장-프랑수와 밀레의 「만종」을 펼친다. “두 부부가 일손을 멈추고 // 발아래 내려다보”(「할미꽃」)고 있다. 나는 시와 그림을 겹쳐 놓는다. 고개 떨구고 두 손 모아 감사 기도 드리는 부부가 두 그루 관목 같다. 시간에 떠밀려 사라지는 세사(世事) 속에 고사목처럼 그들이 박혀 있다. “사랑받지 못하고 죽은 시간을 위하여” 또한 “발아래 매장된 발의 싹을 위하여”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생의 간절함을 다지고 다져 흙에 파종하는 일. 부부의 발에서 싹이 돋아난다. 그들은 대지가 품어 틔운 꽃이다. 사람이 발아한다. 사건이 시작된다. “새가 높이 날아오르”고 “봄의 남쪽이 크게 한 번 출렁”한다. 시인이 할미꽃의 속삭임을 받아 적는다. 결정적 사건의 도래, 개화. 할미꽃처럼, 그림 속의 부부처럼, 저두(低頭)한다. 우리는 “수그리고 또 수그”린다. 수그린 삶의 양태를 압축한 꽃, 할미꽃이 머리 숙여 낮게 기도하는 소리 들려온다.
늦가을 청암사 진영각 / (……) // 툇마루 혼자 앉아 듣는 낙숫물 소리 / 스님은 비를 봉독하고 / 땅바닥은 그걸 받아쓰고 // 저 소리로 나는 나를 받아쓰고 싶다 / (……) // 온전히 나를 나이게 하는 언어 // 땅바닥
―「땅바닥 경행(經行)」 부분
‘나’는 저 세계에 실재하는 “낙숫물 소리”를 본다. 스님이 “비를 봉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땅바닥에 닿는 비의 움직임을 받들어 읽는다. 비가 써 내려가는 시. 빗줄기가 땅바닥에 그려 넣는 시. 소리가 지면에 재봉질하는 문구. 그 “소리로 나는 나를 받아쓰고 싶다”고 말하는 시인. 미천한 ‘나’가 할 수 있는 일, 비가 땅바닥을 양각하는 광경을 보고[望], 뜯어낸 땅바닥, 마음의 지면에 자연의 숨소리를 기재하는 일. 우리에게 보고(報告)하는 일. 그것만이 “온전히 나를 나이게 하는 언어”라고 다짐하는 시인의 말소리 땅바닥에서 핏물처럼 배어나온다. 봉독하기 위해 봉쇄한다. 세속적 삶에 일그러진 ‘나’의 귀면(鬼面)을 바로 보기 위해 땅바닥에 얼굴을 대고 기어간다. 얼굴을 간다. 엎드려 빗줄기 채찍을 알몸으로 받아낸다. 처벌 또는 학대. 행위의 주체는 ‘나’이고, 대상도 ‘나’이다. 시인이 염결한 의지로 올연한 시를 빚어낸다.
마음이 마음을 건드려 빛을 발하듯 / 구절초 앞에서는 / 구절초 앞에서는 / 왜 이별을 만든 이유가 말해지는지 / 왜 모든 얼굴들이 이해되는지 / 구절초 앞에서는 / (……)
―「구절초 앞에서는」 부분
나는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관묵은 독자를 가르치지 않는다. 시는 도덕의 교재가 아니다. 시는 재도지기(載道之器)가 아니다. 시인이 낮은 목소리로 허공에 “마음 줄줄 엎질러진 얼룩 같은 꽃”을 새긴다. 구절초가 피었다. 꽃이 ‘나’에게 전해주는 것은 무정형의 마음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침묵의 꽃이 기다렸다는 듯이 마음을 건넨다. 누구나 받을 수 있지만 아무나 받지 못하는 그 꽃은 흉중 어둠에 숨어 있었다. 꽃의 마음에 촉지(觸指)할 수 있어야 ‘나’의 마음도 받아들일 수 있다. 꽃의 마음이 ‘나’의 마음을 건드린다. 각(角)이 솟는다. 빛이 퍼진다. 구절초 앞에서 일어난 일이다. 시인이 발견한 수긍의 대상이다. “이별을 만든 이유”를, 그 이별을 실행한 그 사람과 ‘나’를 이해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별의 “후문 같은 꽃”이 ‘나’를 기다린다. ‘나’가 발견한 것이 아니다. 꽃이 나를 선택했다. 시인이 시 속에 구절초를 심어놓았다. 우리가 봉독한 꽃의 말이다.
3. 능멸과 처벌
삶을 능멸한 자, 마땅히, 벌 받아야 하리. ‘시’라는 천형에서 벗어나지 못하리. 이관묵의 시집에 절절하게 울려 퍼지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돋을새김되는 가혹한 태형의 문장. 시를 쓰는 자들에게 삶이 휘두르는 징계의 칼날. 함부로 시 쓰지 말라는 뜻이다. 하여 우리는 이관묵의 시집에서 ‘평생 시로 자신을 능멸한 죄 찬란하다’라는 문장을 캐낸다. 시인의 죄에 영광의 왕관을 선사하는 것, 시뿐이다. 능멸(“우리는 이미 삶을 능멸하고 있다”, 「건어(乾魚)」)과 처벌(“말 안의 나와 / 내 안의 말과 / 번갈아 두들겨 패다”, 「산딸나무 꽃」)의 이중주가 시의 광배를 드리운다. 시인의 고통과 시의 쾌락적 황홀이 치환된다. 시가 처형해버린 자, 시인. 시의 영광을 위해 ‘나’는 가장 소중한 것을 시에 바쳐야 한다. 이관묵은 시가 요구하는 것에 자신을 내어준다. (You are a drug to me.) 사랑을 봉헌한 자의 절대 고독. 시는 다른 사랑을 원하지 않는다. 시는 시인에게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할 것을 명령한다. 다른 존재에게 마음을 주지 말라고 선언한다. 시가 시인의 사지를 자른다. 눈구멍에 납물을 붓는다. 혀에 쇳물을 내리쏟는다. 빛나는 고통 속으로 들어선다. 몸통만 남겨진다. 시인의 토르소에 새 몸이 잎새처럼 돋아난다. 시이다. 이관묵 시의 엑스터시가 이것이다. 전율이다. 진동수가 일치한다. 공진(共振)이다. 우리는 갈갈이 찢어진다.
공공근로 나온 꽃들이 / 언덕을 떠메고 가네 / 무거운 듯 힘겹게 떠메고 가네 // (……) // 돌아서서 검은 비닐봉지 닮은 나를 벌려 / 다시 나를 구겨 넣네
―「봄 무늬」 부분
봄꽃이 피었다. 공공근로 나온 사람들이다. 언덕에 사람 꽃이 박혀 있다. 땅바닥에 다닥다닥 붙어 앉은걸음으로 조금씩 움직인다. 살아서 꿈틀거린다.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바닥에서 뜯어내 시의 화폭에 옮겨 심은 ‘나’가 아프다. 살아 있어서 아프다. 아름다운 비참이다. 시인이 할 수 있는 것, 자폐 또는 수감. “돌아서서 검은 비닐봉지”에 “나를 구겨 넣”는다. 봄꽃을 발견한 일, 죄이다. 마땅히 처벌받아야 한다. 누가 누구를 투옥하는가. 시인이 자신을 암흑 속에 가두고 출입구를 밀봉한다. 그리고 기도한다.
나는 나를 낭독하지 않습니다 / 나는 나를 번역하지 않습니다 // 나를 내 밖에 세워두고 눈 맞히소서 / 내가 나로 들끓게 하소서
―「겨울 버즘나무의 기도」 부분
‘나’를 위해 ‘나’를 깎아낸다. ‘나’의 비루함과 남루함을 절삭한다. 홀로 눈 맞는 ‘나’와 “나 대신 비 맞는 나”를 쪼개버린다. 이것이 “시가 언어를 견디는 방식”이다. “내가 나를 고쳐 입을 때까지”(「돌장승」) “나는 나를 낭독하지” 않고 “번역하지 않”을 것이다. 시인의 다짐이다. 그가 지켜야 할 원칙이다. “내가 나로 들끓”어 언어라는 몸을 잃을 때까지, 언어 없이 시의 몸을 탄생시킬 때까지, ‘나’는 “수그리고 들어”갈 것이다, “1인 기도실 // 나”(「대성당」)의 내부로, 어둠의 내장 속으로. 이관묵의 시집 안에서 조르주 루오의 검은 예수를 대면한다. 그의 시적 윤리가 길어 올린 이미지이다.
4. 혼자와 사람
여기 「고사목」이 있다. “외피뿐인 / 윤곽뿐인 / (……) / 관념뿐인 // 나”가 있다. 시인은 여행 중이다. “혼자 저무는 날들이 많은 노인이 자신의 빗소리 나는 여름 한 칸을 내”준 「하늘 민박」에 투숙한다. 사람을 만나 “나의 똥광 같은 죄를 읽었”다고 고백하는 시인. “나 떠난 것들과 노인 떠난 것들 밤새 맞대”본 후, 아버지와 사별하는 것처럼 떠나올 때, 노인이 건넨 말, “비 맞은 사흘, 볕에 잘 말려두게 생물이라 쉽게 상하네”. 이 별리는 겪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가 염원하여 욕망이 만들어낸 가상일지도 모른다. 취생몽사일지도 모른다. 환몽(還夢)한 그에게 남겨진 말. “나는 나를 경계로 안과 밖이 넓어졌습니다”.(「하늘 민박」) 이전에 그가 던진 질문.
침침한 등잔불 밑에서 툭툭 튿어지는 엄마를 꿰매던 빗소리가, / 죽은 이가 묻힌 검은 가슴이, / 내가 // 모두 같은 소년에서 살다 떠난 벽입니다 // (……) // 내가 내 안의 소년일까? / 소년이 내 밖의 나일까? / 도대체 나는 윤곽일까, 실체일까?
―「질문의 생가」 부분
과거의 ‘나’는 ‘나’일까. ‘나’였던 그 소년은 지금도 ‘나’의 일부일까. 사라진 것, 떠나버린 것이 남겨놓은 이미지. 그것만이 실체가 된다. “등잔불 밑에서” 바느질하는 엄마가 보인다. 이관묵은 빗소리가 “툭툭 튿어지는 엄마를 꿰매”고 있었다고 말한다. 축자적인 의미를 초월하는 이미지이다. 엄마의 인생을 문장 하나로 집약하는, 꿰뚫는, 이미지이다. 엄마는 아직도 ‘튿어지고’ 있다. 영원한 현재이다. 영생하는 이미지. 우리는 함묵(緘默)할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할 수 없는 단어 하나를 내려놓는다. 먹먹하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과거의 ‘나’를 받아들인다. 소년은 떠났지만 소년은 죽은 것이 아니다. 소년은 ‘나’의 영육(靈肉)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였던 소년이 늙은 ‘나’에게 손을 내민다. 소년이 ‘나’를 안아준다. 시간의 지각을 뚫고 사람이 돌아왔다.
사람이 지옥이라는 사람의 생각을 지나면 멀리 방파제가 보였어 오늘은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사는 이름들 휘날리다 왔네 문득 손에 쥔 돌멩이가 아직 마음이 남아 있는지 울퉁불퉁 툴툴거리더군
―「그늘 이후」 부분
네가 자주 앓던 사람 지나야 능소화가 보여 (……) 사람이 사람을 도려내고 그 움푹 패인 자리 다시 사람이 돋을 때까지 다녀간 밤들, 그게 능소화의 감정이라는 거 (……) 어서 ‘나’ 열고 들어와 ‘나’를 앓아 봐 ‘나’를 아파 봐 능소화처럼
―「능소화」 부분
두 편의 산문시에서 우리는 사람을 앓고 있는 시인을 만난다. 사람이 병이고 사람이 약이다. 사람 때문에 아파하고 주저앉고, 사람 때문에 기뻐하고 일어선다. 그럴 수밖에…… 사람이 없으면 사랑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사랑의 고통도 없을 것이지만, 사람의 사랑이 없으면 사랑의 행복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버리지도 거두지도 못한다. “사람이 지옥이라는 사람의 생각”을 삭제시키고 “멀리 방파제”에 나간다. 상처 받는다 해도, 중독처럼 마약처럼, 다시 ‘나’는 사랑 나눌 사람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관묵은 이와 같은 사람의 정리(情理)를 깨달음의 문형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나’를 열고 들어와 ‘나’를 앓아 봐 ‘나’를 아파”해 보라고 혼잣말을 침묵 속에 투척한다. 시인의 본질적 태도가 여기에 있다. 교설(敎說/巧說)하지 않으려는 의지. 이 사람을 보라. 이 시인을 보라. 이관묵은 “사람한테 데고도 또 사람을 심”(「헌 빗자루」)는 사람이다.
네가 생각나는 밤으로 비가 오고 // 네가 생각나는 밤으로 달이 뜨고 // (……) // 너한테 가서 타오르고 싶다고 // 너한테 가서 저물고 싶다고 // 밤 한 통 썼다 찢고 // 썼다 찢고
―「밤 편지」 부분
사랑이여! 불주사 맞은 듯하다. ‘혼자’가 이루어낸 ‘사람’이 사랑이라는 사건을 실천하는 장면이다. 편지는 발송하지 못했지만 시가 찾아왔다. 나는 소중한 형용사 하나를 기입한다. 아름답다. 이관묵의 시집은 우리를 치유의 숲으로 데려간다. 거기에서 나는 사랑과 재회한다. “미움이었는지 용서였는지 모르지만, 자꾸만 나를 흔드는 어떤 힘으로 부대끼면서 또 깎았다, 너를. 네가 없으니까 // 너는 내 몸 안의 너였던 높이만큼 푸르게 먼 곳이었”다고 말하면서 ‘너/나=우리’를 포옹하는 시인. 시인의 ‘너’가 나였으면 좋겠다는 바람 속으로 “비정형의 문장”이 들어온다. “너로 알고 깎았는데 나였다”. 먼저 ‘나’를 깨뜨려야 한다. 사랑의 실패는 ‘나’ 때문에 벌어진 일. 사랑의 폐허에서 ‘나’를 발견하고, 깨진 ‘나’를 인정한 후에야 이루어지는, 새로운 사랑. 사랑의 주체 ‘나’가 ‘너’에게 다가가기 위해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관묵이 보여주는 답, 「혼자라는 성지」. “그믐달 닮은 / 혼자 // 내겐 당신이 성지다”. 그 후에 만나는 것. 시인이 감추어둔 말. ‘혼자를 격파하라.’ 결기가 시퍼렇다. 시인이 우리 앞에 서 있다. 그는 ‘혼자’의 ‘고사목(高師木)’이다. 코스모스(cosmos, 高士慕師) 같은 사람이 귀환한다.
5. 멸점(滅點)과 구원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는 결코 일치할 수 없다. 둘은 단 한 번도 한 몸이 된 적 없다. ‘기표―기의’의 관계는 느슨하게 묶인 계약이다. 의미는 기표에 의해 전달될 뿐이다. 이원항 관계가 불확정적인 지시 기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이다. 언어의 의미가 고정되지 않고 통시적 흐름 속에서 변화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시의 가변성도 언어의 특성(‘기표―기의’의 관계 양상)에서 기인한다. 시가 지니고 있는 불명료한 의미의 무한한 잉여들. 언어의 조건에서 비롯되는 의미의 개방성이 시에서 폭발적으로 실현되는 양상. 시의 의미를 단정할 수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시는 의미의 집합체가 아니다. 시인은 의미의 조물주가 아니다. 시는 모든 가능성의 열린 장(場)이다. 의미 대신 시를 구원하는 것, 이미지이다. 이미지만이 현실이고, 이미지만이 의미를 생성한다. 의미를 구축하려는 의도에 구속되지 않는 이미지가 기표와 얼굴을 맞대고 있는 기의를 다중적으로 지시한다. 낡은 의미를 거부하는 새로운 이미지의 힘. 이관묵의 시를 열린 체계로 끊임없이 인도하는 것, 이미지이다. “뼈 없는 맨살”(「첫 눈발들」)을 어루만진다. 우리는 이미지의 결정(結晶)을 마주한다. 이관묵의 시에 나는 그슬린다. 이미지―사건에 휘말린다.
물을 태우고 난 뒤 / 재를 헤집어 물소리 몇 과 수습하다 // 물소리는 물의 사리 / 물의 뼈 // 물소리 봉안할 절 한 채 지어야 하리
―「물 다비식」 전문
물을 태우다, 물소리 몇 과 수습하다. 불가능한 이 행위에서 이미지의 가능성을 확인한다. 물을 태운다는 진술에서 우리는 죽은 자에게 올리는 술, 타는 물 한 잔을 떠올린다. 영결(永訣)하기 위해 불꽃 닮은 “물의 뼈”를 담아 제단에 바친다. 물이 소리를 뱉는다. 물이 뼈를 허공에 던진다. 물소리 귀에 박힌다. 물의 뼈, 마음을 가로지른다. 물의 뼈, 몸속에 쟁쟁하다. “물소리 봉안”한다. 죽음 너머로 물이 흘러간다. 이미지는 창생(創生)한다. 죽음을 넘어선다. 영원한 생의 현장으로 데려가는 청각 이미지. 생령 가득한 “눈 오시는 길 / 나무가 내 걸음 앞에 삭정이 하나를 // 툭! // 떨어뜨린다”. 나는 ‘툭’ 부러진다. 이미지가 나를 부스러뜨린다. “그 소리 주어다 처마 끝에 걸어두었더니 /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반복하며 바싹 말랐다”. 시인은 “앙상한 단어”라고 지시하지만, 우리는 빙설의 폭풍 속에 매달린, 껍질과 뼈만 남은, 말라비틀어진 북어 같은, 수사(修士) 이관묵의 형상을 그린다. 견딤의 양식이 걸려 있다. “한층 더 높아진 하늘”(「무생(無生)」)이 열린다.
이른 새벽 / 보육원 현관 앞 핏덩어리 던져 놓고 / 가다 돌아보고 / 가다 돌아보고 // 눈물! // 얘야, 이 분이 네 엄마란다 / 나보다 푹신한
―「흑동백」 전문
나는 흑동백, 핏덩어리 같은 꽃을 주워들 수 없다. 흑동백, 떨어진 꽃송이, 출산 후 땅바닥에 쏟아진 피, 어미 몸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가축, 유기된 신생아로 연속되는 이미지의 변환 앞에서 우리는 무너져 내린다. 엄마의 눈물을 가슴에 담는다. 언어를 압살하는 이미지의 마력에 전율한다. 그리고 외친다. “이 세상 눈물보다 더한 구원은 없습니다”.(「절벽기도」) 시인이 전해준 아름다움에 젖어 소리친다. “기쁨!”. 이관묵의 시집은 “우리를 발 없는 발로 서 있게 하는 // 하얀 마주침 / 하얀 시”로 독자를 정결한 그리움에 물들게 한다. 사랑하고 싶다. ‘너’를 만나고 싶다. “너를 안아보”(「눈사람」)고 싶다. 이 시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미지, 먼 방파제. 반지하와 할머니의 죽음과 엎어진 운동화 한 짝이 죽음을 포월(包越)하는 찬란한 빛으로 넘실댄다. 비극을 사랑으로 감싸는 시인의 눈물이 가슴을 적신다. 따스하고 아픈 절창을 듣는다.
갓 여남은 살이나 되었을까 사내아이가 반지하 단간 방 찬 바닥에 새우처럼 구부리고 잠을 잔다. 며칠 전 병원으로 실려 간 할머니의 잠을 둘둘 말아 개 놓고 오늘은 할머니가 입던 시간도 깨끗이 빨아 널었다. 연탄아궁이 앞 엎어진 운동화 한 짝은 모든 길이 공중에 나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지상의 물음에 지하의 묵묵부답이 깊어지는 세계. 절반은 낮이고 나머지 절반은 늘 끌고 다닌다. 오늘도 그 절반을 데리고 멀리 방파제 가서 한참을 앉았다 왔다.
―「반지하」 전문
6. 석계역에서
갑사에서 시인이 「석계역」의 시인에게 보낸 편지는 이것이다. “석계역 끌고 가서 / 석계역 기차 쇠바퀴 소리 덜컹거리는 밤 / 도로 실어 왔지요 // 오래전 내가 주무시라고 사 보낸 밤 // (……) // 집 근처 가로등 밑으로 깡소주 몇 병 불러내 / 타이르고, 달래고, 어루만지고…… // 밤은 밤이 얼마나 지겨웠을까 // (……) // 끌어내 훌훌 털어 볕 좀 쬐어 개 놓았어요”
시집의 첫 시 「시 그늘」의 첫 행은 “나, 네가 왔다”이다. 나는 이 구절을 ‘시가 왔다, 너를 안는다, 사랑을 시작한다’로 읽는다. “내가 가장 얇을 때, / 폐가일 때,” 시가 찾아온다. 시를 발견한다. 사랑하는 ‘당신’과 재회한다. 당신을 만나 ‘나’는 “여기부터 맥박이에요”라고 “여기부터가 마음이에요”(「산안리 2」)라고 고백할 수 있었다. 환한 개화를 불러온 당신, 당신의 사랑, 당신이라는 사랑. “음악 같은 / 음악의 끝 악장 같은”(「일반석」) 당신을 만나 ‘나’는 아름다웠고, 당신을 읽은 나는 행복했다. “세상의 끄트머리”에서 “혼자 피었다가 툴툴거리며 지는 꽃”(「산안리 1」)을, 이관묵 시인을, 석계역에서 만난다. 그리고 당신을, 당신이라는 시를, ‘나’의 사랑을, 우리의 재회를 노래한다. 사람 끝에서 사람과 상봉한다. 시집의 붉은 박동이 들려온다.
노래 속에 넣어 둔 노래
절반은 가슴이고 절반은 등뿐인 서로
윤곽이 다른 걱정
입구와 출구가 바뀐 이별
사람 끝에서 캔 사람
―「어떤 낭인(浪人)을 위하여」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