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에 이르는 안식
31: 12-17
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14.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찌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찌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15.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찌니라
16.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17.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
-------------------------------------------------------------------------------------
신약, 히브리서 4:1-11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4.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 또 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8.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
현대의 휴가
우리는 지금 일년 중 가장 더운 계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연일 계속되고 낮과 밤 동안 별차이 없는 더위가 일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부터 본격적인 휴가철이 시작되었고 피서지를 향한 교통체증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피서지 인파가 도심보다 더 붐비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는 휴가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경향이 있습니다. 한 경향은 휴가와 휴식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입니다. 휴식 시간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견해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일할까, 어떻게 하면 더 오래 일할까를 생각합니다. 이들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벌고, 남보다 더 빨리 승진할 수 있나에 우선 순위를 두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일하다 보면 일중독에 걸리게 되고 일중독에서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쉬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쉴만큼 한가하지도 않고 상황이 긴박하므로 쉴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경향은 휴가는 꼭 한번 이상은 가야하는 의례로 생각하는 견해입니다. 굳이 날씨 때문이 아니라도 현대 사회에서 휴가는 점점 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입사 조건에서 연봉 못지 않게 휴가 일수가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 신화의 한 부분으로서 휴가 신화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는 정말 쉼이 필요없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도 휴가를 확보해야 하는 것입니까? 또한 많은 사람이 이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휴가 속에는 진정한 쉼이 있는가 하고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왜 쉬어야 하며, 진정한 쉼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휴식이 가져오는 유익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안식
1. 안식은 하나님의 명령
첫째, 안식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에게 안식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당신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을 아는 표징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은 다른 것들로부터 구별하여서 하나님의 것을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의 것으로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1장 15절은 말씀하십니다.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하나님께서 이토록 엄하게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은 사람과 만물에 생명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안식은 일을 전제합니다. 안식은 일을 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하지 않는 자는 쉼도 없습니다. 노동없는 인간은 안식이 필요없습니다. 그러나 안식 없는 노동은 비극입니다.
자동차의 왕이라 불리운 헨리 포드는 노동과 휴식을 자동차에 비유하여 말합니다. 노동은 자동차의 엔진이고 휴식은 자동차의 브레이크다. 노동없는 인간은 엔진없는 자동차와 같고, 휴식없는 인간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다. 엔진 없는 자동차는 달릴 수 없고, 멈출 수 없는 자동차는 매우 위험합니다.
참된 노동은 휴식을 부정하지 않고 참된 휴식은 노동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 둘이 함께 있을 때 서로의 가치를 높여줄 수 있습니다. 열심히 노동한 사람만이 참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부지런한 불신앙인들이 많습니다. 불신앙인들에게 노동과 물질은 전부입니다. 불신앙인들에게 물질과 노동은 우상이요, 종교입니다. 불신앙인들 중에는 물질에 궁극적인 의미를 두고 노력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게으른 신앙인도 있습니다. 신앙으로 자신의 게으름을 정당화합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서 너무나 쉽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참 신앙인은 세속에서도 불신앙인 못지 않게 부지런하게 살아야 합니다. 많은 신앙 전통 중에서도 우리 장로교는 대단히 근면한 전통에 서 있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자본의 형성이 바로 칼빈주의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칼빈주의의 직업 윤리는 노동을 하나님의 뜻으로 중요시 합니다. 이런 칼빈주의의 노동에 대힌 열심과 엄격성이 자본을 축적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노동이 하나님의 명령이듯이 안식도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참된 신앙 안에서는 노동과 안식은 동시에 긍정되는 것입니다.
2. 안식은 진실된 만남에서 일어난다.
둘째, 안식은 진실된 만남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과거에는 여인들은 쉬는 기간에 친정을 가곤 합니다. 가족과의 만남 가운데서 쉼이 있습니다. 엄마를 따라간 아이들에게도 휴가는 친척들과의 만남의 시간이었습니다. 휴가는 관계를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휴가는 소비의 시간, 규격화된 오락의 시간입니다. 현대 신화 속에서의 휴가는 사람들에게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놀이, 프로그램으로 짜여진 경험을 추구하게 합니다. 오늘날 휴가는 자본주의에 철저히 봉사하는 소비 문화 속에서 상품화되고 규격화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비해서 만남 속에서 취하는 쉼은 전혀 다른 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남에 치중하는 쉼은 사람과의 만남을 중시하고, 자연과의 만남을 중시합니다. 사람과의 만남이 자연스럽게 자연과의 만남과 어우러집니다.
우리는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삶을 새롭게 하고, 삶의 능력과 에너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만남 속에서 존재를 새롭게 합니다.
현대 사회의 풍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원에서 자신의 휴가를 보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그 속에서 진정한 안식을 얻게 됩니다.
안식은 사람과의 만남, 자연과의 만남, 하나님과의 만남을 새롭게 하고, 이 만남 속에서 생명을 새롭게 하는 시간입니다.
진정한 안식으로 얻는 유익
우리는 진정한 안식으로부터 많은 유익을 얻습니다. 어떤 유익들이 있을까요?
1. 참 안식/휴식은 자기다움을 찾게한다.
먼저 사람들은 참 안식을 통해서 자기다움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일하는 기간에는 자기 자신보다는 일을 먼저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일상에서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일 시간이 없습니다. 자신을 능력과 기능에 의해서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유용성에 의해서 판단합니다. 오늘날에는 모든 것이 도구화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과 자연을 이용의 대상으로서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내게 도움을 주는 신으로만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오로지 내 뜻에 의해서만 움직여야 합니다. 다른 독립된 인격과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다른 독립된 인격과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부드러운 방법으로 또는 폭력으로 다스리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하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보다 힘이 셀 때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서 자기 마음을 알리고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합니다. 때로는 자연에게 제사를 지내서 자연을 달랩니다.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안될 때는 달래고, 내가 힘이 더 많을 때는 폭력으로 다스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도의 타락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기도도 꼭 자신이 원하는 대로 기도해 주어야 만족을 얻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합니다. 참된 기도는 성령님께서 주시는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목사에게 ‘우리 아들 꼭 S대학에 들어가게 기도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 부탁을 합니다. 이 때 목사가 ‘하나님 그가 노력한 것이 조금도 실수없이 나타나게 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면 ‘그런 기도는 누가 못하나 꼭 S대학에 붙도록 기도해야지’ 하면서 불만을 표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냥 웃어넘기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이것은 엄청난 타락입니다.
기도에서는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서 일하실 자유를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여유없이 하는 기도는 타락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명령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는 기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과 이웃과 자연을 이용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에게 참 안식은 없습니다. 사실 이런 자세는 타락한 죄악입니다.
우리는 일을 떠나서 사물과 관계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욕망과 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자신을 바라보고, 타인을 바라보고, 자연을 보며, 하나님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참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참 안식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사람을 사람답게, 자연을 자연답게 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독립된 존재, 독립된 인격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안식을 통해서 비로소 자기다움을 찾게 되고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게 합니다. 우리는 휴식의 기간에 사람과 자연과 심지어는 하나님까지도 이용하여 도구화하려는 죄악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참 안식은 인간이 자신의 역할과 기능에서 제 자리를 되찾는 것입니다. 안식을 통해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2. 참 안식은 성숙을 이룬다.
참된 안식으로부터 얻는 두번째 유익은 성숙을 이루는 것입니다.
다른 존재의 독립성, 하나님의 독립적 인격을 인정하는 것은 내가 한계 없이 다른 존재를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바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노년의 지혜 중에서 중요한 한 가지는 자신의 한계를 아는 것입니다. 생물학적인 한계 즉 죽음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청년들은 이 사실이 자신에게는 별로 해당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스스로 죽음 자체를 적극적으로 긍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물학적인 한계를 인정하면 자신의 생각의 한계도 인정하게 됩니다. 타인의 형편과 생각도 인정하게 됩니다. 여기에 아름다운 노년과 부끄러운 노년의 차이가 있습니다.
왜 나이 들어서 절제할 줄 모릅니까? 왜 참을성도 없어집니까? 왜 자기 생각, 자기 고집 밖에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까? 왜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왜 내 마음대로 행동합니까? 왠 걱정이 그렇게 많습니까? 고집이 세어지고 자기가 원하는 꼭 그대로 되어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두려움과 염려가 많은 것은 아직 내 뜻이 포기 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 안식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노년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영역을 인정합니다. 다른 생각, 다른 원리, 다른 철학을 인정합니다. 오랜 경험을 통해서 다른 여러 인생들을 포용하고 용납하는 이해의 폭이 넓어져야 합니다.
사람이 죽음을 인정해야 죽음 다음의 세계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수용하고 한계를 넘어가야 합니다. 한계를 알고,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한계를 인정하는 사람에게만 낙천적인 삶이 열립니다.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밝고 희망이 있습니다. 한계 너머를 존중하고 사모합니다.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한계는 절망입니다. 그러나 한계 너머를 생각하는 사람에게 한계는 희망의 시작입니다.
3. 참 안식은 평화를 이룬다.
참된 안식의 세번째 유익은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진정한 안식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세상의 일이 멈춘 곳에서 세상을 이기는 평안을 맛볼 수 있습니다.
4. 참 안식은 구원을 이룬다.
참된 안식의 네번째 유익은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진정한 안식의 장소는 예배 현장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곳이 최고의 안식 장소입니다.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그곳이 예배의 현장입니다.
우리는 예배에서 구원(영원한 안식)을 연습합니다. 안식의 목표는 궁극적인 구원입니다. 예배 속의 안식은 구원의 세계를 향한 연습이며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안식을 누리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안식은 하나님의 품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사모하는 믿음을 가지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히4:16).
진정한 안식은 하나님 앞에 거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안식은 하나님의 생명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안식을 맛본 사람들은 도리어 십자가를 지면서도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갈 때는 무겁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면 십자가는 도리어 가볍고 기쁩니다. 나의 모든 욕망과 죄악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주님의 사랑만이 마음에 가득 채워질 때가 가장 평안할 때인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서 참 안식을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안식 속에서 참된 만남을 경험하시길 축복합니다.
참 안식 속에서 인간다움을 회복하고 참 성숙을 이루며 평화와 구원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