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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조준 목사
오늘 주신 잠언 17장 1절 말씀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리라" 했습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133편에 보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형제가 서로 화목하는 것 이상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말하자면 화해의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좋은 말씀만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생활의 본만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놀라운 기적만을 나타내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죄로 말미암아 원수가 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에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말하고, 이웃과 이웃과의 관계를 말하는 상징적인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가 된 우리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1절 이하에도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고 또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그랬습니다.
원수 되었던 우리,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있던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길이 어디 있습니까?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누구의 이름을 의지하고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고 나오셨습니다. 그 외는 주님 앞에 나올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함께 잠언에서 말씀하는 서로 화목케 하는 삶이 얼마나 복된가 하는 사실을 여기서 보십시다.
잠언 10장 12절에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그랬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7절 이하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하면서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그랬습니다.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 있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죄 없는 사람 하나 없이 다 죄 있는 사람인데 사랑하면 죄를 덮어버립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죄를 드러낸다는 그 말입니다.
잠언 15장 16∼18절에 보게 되면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잠언 17장 9절에 보게 되면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고 그랬습니다.
사랑하게 되면 허물이 있어도 덮어주고요, 사랑 없는 사람은 자꾸 그것을 드러내서 결국 이간시켜 버린다 하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저 자식은 희망 없는 자식이고 망나니야"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그 아들을 그렇게 희망 없는 망나니로 보는 줄 압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달라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어머니에게는 무엇이 있어요? 사랑이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세상 사람들에게는 사랑이 없으니까 그 사람이 망나니에 희망 없는 사람으로 보이지만 어머니에게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말이에요.
잠언 18장 6∼9절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어요.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 그랬습니다.
여기 '남의 말'은 무엇을 말할까요?
남의 좋은 말을 말할까요, 아니면 남의 안 좋은 말을 할까요?
우리 경험을 보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말하는 중에 남의 좋은 말, 칭찬하는 말, 성공하는 말, 잘되는 말, 훌륭한 말, 그런 말을 많이 합니까, 아니면 남 흉보는 말, 잘 안되는 말, 못된 말 그런 말을 많이 합니까?
여러분 양심이 한번 생각해 보세요. 뭐 듣는 것도 그래요. 칭찬하는 말, 성공하는 말, 좋은 말하는 것이 듣기가 좋아요, 아니면 남 흉보는 말이 듣기가 좋아요? 이상한 일입니다. 인간 성품이 타락한 다음부터는 남 훌륭한 일, 잘되는 일, 성공한 일 말하게 되면 그저 "그래, 그래" 하다가 졸지만 남 흉보는 말, 남 망했다는 말, 부도 맞았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깨요. 이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여기 뭐랬어요? 남의 흉을 보고 헐뜯는 이야기는 별식(別食)과 같아서, 귀가 솔깃해서 흥미 있게 듣는다는 말입니다. 듣기만 합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들은 대로 선전을 하는데 그대로만 선전합니까? 거기에 붙여서 전하니까 처음 말하는 것과 나중에 말하는 것이 아주 다른 말이 돼버려요. 눈사람 굴리는 것처럼 아주 불어나게 된다 그 말입니다.
전도를 하라면 평생 못하는 사람들도 남의 흉보라면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 몰라요. 그러니 이런 것이 돌고 돌아서 본인에게까지 가게 되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의 마음이 평안하게 됩니까? 아닙니다. 자연히 불화하게 되지요. 남의 말은 될 수 있는 대로, 그것도 칭찬이 아니면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제 친구 목사님이 합동측 교회목사님으로 아주 큰 교회를 모시고 계신데 한번 함께 식사를 하는데 자기 교회에 참 부끄러운 일이 하나 생겼다고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교회에서 점심을 한다고 해서 여선교회에서 식사준비를 해서 대접하는 봉사를 했는데 뭐 음식을 하다보면 좀 남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게 남으면 버릴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일하던 분들이 조금씩 나눠가지고 갔는데 하는 말이 "저 아무 집사는 말야. 음식을 해 가지고 집에 가져가려고 교인들한테 주지는 않고 저 먹을 것 다 싸가지고 간다"하는 말로 돌았습니다. 이 말이 빙빙 돌다가 그 사람한테 들릴 때에는 "음식 해놓은 것 그 사람이 다 가지고 간다"하는 말로 들렸어요. 그러니까 이 말을 전한 사람한테 와서 야단 야단을 하다가 결국 집사들끼리 경찰에 고발을 했어요.
이거 참 부끄러운 일 아닙니까? 다른 것 아니에요. 말! 말! 별거 아니입니다. 도둑질했다는 말도 아니고 그저 이런 말을 한 것이 돌고 돌다보니까 아주 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줘서 아주 난리가 났다고 그럽니다.
잠언 20장 3절에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고 그랬습니다.
잠언 25장 8절 이하에 보게 되면 "너는 급거히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또 수욕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고 했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다툼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잠언 26장 17절을 보세요. "길로 지나다가 자기에게 상관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고 했는데 참 지혜 있는 말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도 남의 간섭 잘하잖아요. "그래, 그래"하면서 훈수를 두고 하는데 이것이 뭐와 같다고 하냐면 "싸우는 개 귀 잡는 것 같다"고 그럽니다. 들러붙어 가지고 싸우는 개 귀를 한번 잡아보세요. 어때요? 당장 물립니다. 조심해야 됩니다. 간섭하지 말아야 됩니다. 남의 일 간섭하다가 남의 마음 섭섭하게 하지 말고 또 그로 인해서 자신이 손해보는 일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 다음절 보세요.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 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시비를 일으키느니라"고 그랬습니다. 숯불 위에 숯을 놓으면 불이 더 잘 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22절 말씀은 아까 읽은 18장 8절 말씀과 같습니다. 그저 한마디로 말하면 "서로 화평하게 살자"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서로 사랑하며 화평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에게 꾀임을 받아 범죄한 이래 사랑대신 미움이, 화목대신 싸움이 인간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창세기의 이야기를 기억하시지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다음에 최초의 인간적인 비극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어떤 일이었습니까? 아담에게는 아들 형제가 있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었습니다. 형제는 서로 사랑하게 되어 있고,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낳은 아들 가인과 아벨이 서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둘 다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는데 형은 형식적인 제사를 드렸습니다. 드릴 거야 다 드렸지요.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고,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니까 하나님이 안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동생 아벨은 정성껏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이 제대로 됐으면 '아, 내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제사를 안 드렸구나'라며 다시 정신 차리고 하나님 앞에 정성 다해서 제사를 드리면 되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가인은 그런 생각을 하기는커녕 '아하 하나님이 불공평하다. 내 제사는 안 받고 왜 동생의 제사를 받아? 저 놈을 저거 그냥 놔 둬?'하며 성경에 보면 "안색이 달라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얘졌는지 새파래졌는지 그것은 모르겠지만 안색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기회를 봐서 가지고 동생을 들로 끌고 나가서 돌로 쳐죽였습니다. 형이 동생을 죽였습니다.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그런데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게 인류 조상 때의 있던 일이에요.
이런 일이 오늘까지 계속 내려와요. 남남끼리 싸우는 것은 보통이고, 형제끼리의 다툼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벨이 죽은 다음에 하나님이 가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때 가인이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아니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다른 번역에 보면 "내가 동생처럼 목자입니까?"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목자는 아주 천한 직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니까 가인의 말을 다시 생각해보면 "내가 그따위 시시한 목자 노릇이나 하는 사람입니까?"라고 답변을 했다는 말입니다. 가인은 협력과 사랑의 대상이어야 할 아우를 미움으로 대했습니다. 사랑의 보금자리인 마음속에 간직할 아우를 미워한 나머지 쳐죽였어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께 반항적으로 나갔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벨은 죽었으나 그 피가 말한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있잖습니까. 그 마지막 부분에 재미있는 대화가 나오는데, 작은아들이 멀리 가서 아버지 자기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다 받아가지고 허랑방탕하다가 결국 다 없어졌습니다. 돈이라는 게 벌면서 써야지 벌지도 않고 그냥 있는 대로 뽑아 쓰니까 얼마 못 가서 다 없어진 것은 당연하지요. 그래서 그를 "형님, 형님"하면서 좇아 다니던 사람들은 다 떠나갔지요. "오빠, 오빠"하면서 좇아다니던 사람 다 떠나갔지요. 결국 돼지우리에 가서 쥐엄 열매만 먹게 되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러다간 죽겠거든요. 또 '아버지에게 지금 가면 종들도 아주 배부르게 잘 먹는데 내가 이래선 되겠나'하는 생각이 나서 성경에 보면 "이에 일어나 돌아갔다"고 합니다.
무슨 꼴로 돌아갔습니까? 거지꼴이 다 되어가지고 갔습니다. 돼지 쥐엄 열매 먹던 사람이 뭐 사람 꼴이었겠어요? 거지 모양으로 돌아갔습니다. 다행이지요. 기다리고 있던 아버지는 저기 멀리 한 사람이 보이는데 아무리 보아도 틀림없이 자기 아들입니다. 그래서 달려나가서 입을 맞추고, 옷을 갈아 입히고, 목욕을 시키고,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기고, 잔치를 차린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형이 밖에 나갔다 집에 돌아오는데 집 안에서 웅성웅성 소리가 나고 이상한 소리가 나거든요 그래서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집에 무슨 일이 있느냐?" 그랬더니 "동생이 돌아와서 아버님이 좋아서 잔치를 베풉니다"라고 그럽니다. 우리라면 그 소식이 얼마나 좋겠어요. "동생이 돌아왔으니 너무 좋구나. 그 동안 잘못된 길로 가다가 이제 정신이 들었구나"라며 좋아해야 될텐데 "난 집에 안 들어간다. 왜 내가 친구들에게 한턱 내고 인심을 쓸려고 할 때는 조그만 양 한 마리도 허락 안 하더니 동생이 돌아오니까, 그것도 제대로 된 동생이라면 모를까 아버지 재산 다 탕진해버린 놈이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아들 왔다고 준비해서 이렇게 대접을 해? 나는 뭐야? 난 안 들어간다. 안 들어 가!"
그런데 거기 보면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내 동생이 돌아오니까"라고 하지 않고, "당신의 아들이 돌아오니까"라고 합니다. 나하곤 아예 관계가 끊어진 겁니다. 형제의 관계가 끊어진 겁니다. 이게 형제예요? 그때 아버지가 한 말은 뭔지 아세요. "내 아들"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네 동생"이라고 합니다. "네 동생"이라는 말을 자꾸 강조합니다. "네 동생이야."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큰 아들은 형제 의식을 잃어버렸고, 아버지는 그것을 다시 가르쳐 준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위로 하나님과 화평하고 옆으로는 이웃과 화목되는 종교입니다.
로마서 5장 1절에도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5장 19절에도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부탁하셨을 뿐만 아니라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제물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요? 형제가 화목하지 않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지요. 이사야 1장에 보면 그 당시 유대사람이 하나님 앞에 절기를 지키고, 예물을 드리고, 뭐 할 것 다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희가 절기를 지키고, 월삭을 지키고, 예물을 드리고 하는데 나 그거 부담스럽다. 너희 성전 뜰 밟는데 나 그거 부담스럽다. 너희가 지금 손을 들고 기도하는데 그 기도 아무리 해봐라 나 안 듣겠다"고 하셨습니다.
왜요? 그 다음 말씀을 보셔야 돼요. "기도하는 거 안 듣겠다"하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 다음에 뭐라 그랬는지 아세요?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해. 손에 피 묻은, 형제 죽인 살인자들이 와서 기도해봐라. 아무 소용없다. 그 피나 닦고 와라. 그 피 닦아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배당에 아무리 나와봐야 무슨 소용 있습니까. 형제와 불화한 마음 가지고 예배당에 나와 예배 드려봐야 하나님이 그 예배 안 받으신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뜻을 받아서 에베소서 4장 1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키라."
로마서 12장 18절에 보아도 "할 수 있거든 너희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그랬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에 보아도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서로 화평한 가운데 화목할 수 있습니까?
화평을 가지려면 먼저 자신이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근심과 걱정과 염려가, 이런 내적인 투쟁이 있는 사람이 자연히 다른 사람과 화목하기가 어렵습니다.
성경에 보아도 사람의 마음은 마치 바닷물이 요동해서 솟구쳐 올라 여러 가지 더러운 것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악인의 마음에는 안정이 없고 평화가 없다고 그랬습니다. 어느 사회, 어느 단체나 말썽 부리고, 이 사람과 다투고 저 사람과 다투고 하는 사람을 가만히 보면 자기 자신의 마음에 평화가 없는 사람입니다. 집에서 남편이나 아내와 다투고 나온 사람이 밖에 나가서 편할 거 같아요? 만나는 사람에게마다 신경질 내고 짜증냅니다. 마음이 편안한 사람은 나가서 다른 사람이 다투려고 하면 피하고 맙니다. '저렇게 복잡하게 스트레스 받고, 그럴 필요가 있나?'하며 피합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이 불안한 사람은 가서 이 사람과도 다투고 저 사람과 다투고 자꾸 트러블을 만듭니다.
교회도 가만히 보면 조용한 교회를 시끄럽게 바꾸고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그 가정에 평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해야 하고, 하나님과 화평하려면 죄의 용서함을 받아야만 됩니다. 이웃과는 어떻게 해야 돼요? 화목해야 됩니다. 그래야 아름답습니다.
오늘 아침 시간에 사무실에 있던 이 집사님은 화백이신데, 동덕여대 미술교수로 계시고, 평생을 미술을 하신 분이십니다. 지난번에 아프리카에 한 달인가 두 달인가 계셨습니다. 아프리카 자연 공원이 있잖습니까? 동물의 세계에서만 보는 그런 곳에 가서 그리신 그림을 전시하는 데 제가 가서 구경한 적이 있습니다. 아주 색깔이 곱고 좋은데, 제가 '좋다'하고 생각한 그림을 오늘 가지고 오셨습니다. "목사님께 드립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져오셨는데, 동굴의 색깔을 아름답게, 조화있게 해 놓으니까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모든 것을 조화 있게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그분이 그걸 캐치한 거예요. 그게 기술 아닙니까? 그게 재능 아닙니까? 그래서 오늘 아침 "화백님, 새 예배당을 짓고 있는데 멋있는 그림 하나만 그려주십시요"라고 특별한 부탁까지 하면서 연구하시고 기도하시라고 했으니까 아마 기도하실 거예요. 그래서 좋은 그림 생길 줄 압니다. 왜 그림이 아름다워요? 자연의 아름다운 조화를 나타낸 걸 표시할 때 아름다움이 생깁니다. 보세요. 색깔도 그래요. 무지개가 왜 아름다워요? 일곱 가지 색깔이 조화를 이루어서 아름다운 겁니다. 빨주노초파남보, 이 색깔이 조화를 이루니까 아름답지요. 이 조화를 안 이루고 가리고 보세요. 새빨간 색깔만 보세요. 노란 색깔만 무지개가 되었다 해보세요. 별 모양 없을 겁니다. 조화된 색깔이 아름답습니다.
오늘 '생명의 양식'을 독창하신 분이 이태리에서 소프라노 공부해서 세계적인 음악가와 같이 오페라를 하던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좀 다르지 않습니까? 이렇게 조화를 이루니까 '생명의 양식' 이라는 찬양이 얼마나 듣기가 좋습니까. 음도 화음이 좋아야 듣기 좋지요. 이게 불협화음이 돼보세요. 조금만 들어도 짜증이 나서 다 나갈 겁니다. 음은 화음, 사람들은 화목을 이루는 것이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맺은 사람은 사람 사이에도 화평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끼리 화목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악으로 악을 갚지 않고, 욕으로 욕을 갚지 아니합니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착하게 합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좇으라."
화평한 일을 좇습니다. 원수를 사랑합니다. 주릴 때 먹이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합니다. 저 사람이 내게 어떻게 하든지 나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화평의 생활을 하고 화평의 성품을 가지고 화목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화목한 가운데 살 수 있습니까? 우리가 힘쓸 일이 무엇입니까? 소극적으로는 싸움을 붙이지 않으려고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대개 싸움이 어디서 납니까? 말에서 나옵니다.
요새 국회의원들 싸움하는 것 보셨습니까? 국민한테 국회의원 대접받을 때는 굉장하지만 싸움하는 거 보면 아기들만도 못합니다. 우리 국민들이 볼 때는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 수가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전에 여당하고 야당하고 싸울 때 보면 '여당하고 야당이어서 그런가 보다'했는데 바꿔놓고 보니 똑같습니다. 희한한 일입니다. 야당 때 주장하던 사람이 여당이 되니까 아주 달라집니다. 가령 예를 들어서 요즘 특검제 때문에 야단났는데 그 특검제 반대하는 사람이 누군줄 아세요? 전에 야당 때는 "특검제 안하면 우리 나라 못 산다"고 큰소리치던 사람들이 여당쪽 되니까 특검제하면 안된다고 그럽니다. '그렇게 얼굴을 바꿀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어떤 분이 야국개학이 없으면 좋겠다고 그래요. 오죽 속 상하면 그러겠어요. 지금 말싸움 아니에요? 편안하려면 말조심해야 합니다.
속담에 "불붙는 집에 키질한다"는 말이 있는데 화목하며 사는 사람은 그렇게 남의 집에 키질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보통 때는 평안히 있다가도, 구역예배 드려야 돼도 시간 바빠서 못 나간다고 하다가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점심 싸 가지고 다닙니다. 이것은 제대로 된 사람은 아닙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한강물 흐린다"는 말과 같습니다.
화목하기 위해서 힘쓰는 사람은 분쟁을 가져오지 않기 위해서 조심해야 합니다.
화평한 가정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 조심해야 합니다.
화평한 교회는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서로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힘쓸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여 주신 화평의 매인 줄을 끊지 아니하고 끝까지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를 끊지 아니하려고 애씁니다.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나 국제 간에도 언제나 화평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시간을 냅니다. 어디서나 화평을 말합니다. 화평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
그러면 끝으로 이렇게 화목하기 위해서 힘쓰면 어떤 축복이 임합니까?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지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 하나님의 아들의 특색, 하나님의 자녀의 특색이 무엇입니까? 화평케 하는 자는 요새말로 하면 피스 메이커(peace maker)입니다. 어디 가나 화평둥이, 화목둥이가 돼야지 분란둥이가 되면은 안됩니다. 이 말씀을 바꿔서 말하면 "불화케 하는 자는 화가 있나니 마귀 자식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디가나 화목을 위해서 힘써야 됩니다. 그런데 여기 예수님 말씀은 이렇게 화목하게 지내려고 힘쓰는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아, 너희는 과연 내 아들이다" 말씀하신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귀하고 복된 일입니까? 여러분,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받게 되었는데 물에서 올라올 때 하늘에서 무슨 소리가 났습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화목하기 위해서 힘을 쓰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내려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기뻐하는 자다."
오늘날 20세기는 어떤 이의 말대로 기독교 역사상으로 볼 때 평화 운동의 세기입니다. 16세기에서 17세기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선교의 진리를 분명히 새롭게 제시하였습니다. 18세기에서 19세기는 세계 선교운동의 세기로 온 천하에 가서 땅 끝까지 말씀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부탁을 특별히 힘쓴 세기입니다.
20세기는 어떤 세기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는 다 주 안에서 하나가 되었은즉 어떻게 하든지 믿는 사람과 믿는 교회들이 서로 연합하고 하나가 되어 화평한 가운데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그동안 참 부끄러운 말이지만, 우리 한국교회, 더구나 우리 신교가 얼마나 파당이 많았습니까? 지금 교단이 몇 개인지 알지도 못합니다. 200개가 훨씬 넘습니다. 그것도 좋은데, 갈라진 것도 좋은데 얼마나 서로 비난을 하고 남보기에 부끄러운 일을 많이 했습니까?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의 목자가 우물 때문에 초장 때문에 서로 다투지 않았어요? 이 소식을 아브라함이 들었어요. 그때 롯을 데려다 놓고 말했습니다. "자네와 나는 친척 아닌가? 그런데 내게 자네 목자와 내 목자가 다툰다하는 말이 들리는데 이거 그러면 안돼. 우리끼리 살아도 모르겠는데 여기에는 지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가나안 사람, 브리스 사람이 있지 않은가? 저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투면,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것이 싸우는 것 좀 봐라' 할 텐데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 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되겠나? 그러니까 우리 다투지 마세." 그래서 헤어졌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다투는 것보다는 헤어지는 게 낫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한국 교회가 이렇게 산산조각으로 갈라졌는데 요사이 많은 교단들이 그래도 어른들이 "이러지 말고 우리 파로 싸워보니 뭐 별거 아니고, 우리가 다른 게 무엇이 있냐? 같은 예수 믿으면서 왜 이렇게 싸웠느냐? 이제라도 정신차리고, 합하지는 않더라도 다투지 말고 살자"라며 강단도 교류하고 하는 거 보면 얼마나 한국 교회의 앞날을 위해서 행복하고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다투지 말아야 돼요. 다른 거 아무리 훌륭하게 다 잘한다고 해도 다투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는 신학자도 필요하고 여러 사람이 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제일 필요한 인물이 누굽니까?
제가 보기에는 화목케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 이런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루는 가정이 화목하고, 우리가 다니는 교회가 화평하고, 우리가 사는 사회가 평안하고, 우리 나라가 화평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결국 세계가 평안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성령의 열매로 사랑이 임하고, 평화가 임하고, 기쁨이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음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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