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문화원 마곡사와 무령왕릉 유적지답사[5]
백제의 혼이 잠든 무령왕릉과 왕릉원/이명철
고창문화원 유적지 답사팀은 일정에 따라 마곡사 답사를 마치고 점심 후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에 도착하였다. 해설사의 해설은 고분군이 위치한 송산리 동남쪽 능선 해발 75m 정도의 무령왕릉자리에서 시작하였다. 이는 마치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AD501년에 맞추고 타임머신에 탑승하여 옛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다.
AD501년은 무령왕이 왕위에 오른 해였다. 부왕(父王)인 동성왕이 시해(弑害)된 바로 그해(501), 무령왕은 4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왕은 재위기간 동안 민생 안전과 백제의 국력을 신장하여 국제적 지위를 강화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큰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러니까 동성왕의 업적은 아들 성왕(聖王)으로 하여금 백제의 중흥을 열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었다.
무령왕은 523년 5월 7일에 돌아가신 후, 3년째 되는 525년 8월 12일에 지금 이곳 공주 송산리에 안장되었다.
왕릉에 입구에서부터 당시의 제도와 풍습과 역사의 현장을 마치 눈앞에 훤히 보이는 듯 공주 해설사님의 해설이 시작되었다.
자상하면서도 해박한 지식으로 물이 흐르듯 미풍이 불듯 무령왕릉의 신비를 하나하나 벗겨주는 것이었다.
"백제웅진 도읍지의 왕과 왕족들은 이 계곡에 무덤을 썼습니다. 무령왕릉(武寧王陵)도 이곳에 안장을 하고요.."
해설사님은 자리를 이동하며
“총 7기의 고분이 분포되어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계곡의 서쪽에 무령왕릉과 5~6호분, 동쪽으로 1-4호분이 있습니다.
“무령왕릉은 6호분 배수로 공사를 하면서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상시시키면서, 묘실 안으로 들어갔다.
묘실 전체는 벽돌로 쌓은 벽돌무덤으로 입구통로에 해당하는 연도와 시신을 안치하는 현실(玄室)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었다.
이 벽돌무덤 안에서는 지신(地神)에게 무덤의 터를 샀다는 기록을 묘지석(墓地石)에 새겨놓았다는 해설을 들으며 동시에 확인하였다. 후세에 증거가 될 가장 중요한 유물이 될 지신에게 무덤의 터를 샀다는 묘지석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나라와 민족의 반역자가 되면서까지 남의 땅을 제 것으로 꿀꺽 삼키려는 현대의 파렴치한 사람들에 비하면 얼마나 신성한 일인가.
이 묘지석에는, '왕은 523년 5월 7일에 돌아가셨고, 3년째 되는 525년 8월 12일 왕릉에 안장하였으며, 왕비는 526년 12월에 돌아가셨고 529년 2월 12일에 왕릉에 안장하였다'고 새겨져 있었다.
무덤을 사기위해 실재 사용되던 돈을 토지신에게 지급하고 땅을 산 증명서인 매지권(買地券)까지 작성하는 신성함. 왕이 산 땅에 왕릉을 썼으니, 이보다 더 확실한 자기 땅에 쓴 무덤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는가!
그러한 신성함과 정성이 있었기에 1500년이 넘는 지금까지 도굴하나 당하지 않고 보존되어 있었으리라.
고창문화원 답사팀은 천천히 무덤 속을 살폈다. ‘무덤 안이 어둡고 으스스하다. 벽에 희뜩희뜩 벽화가 아닌 회가 칠해져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사신도(四神圖:청룡 백호 주작 현무)를 그려 놓았다.
왕과 왕비가 사용했던 모든 것들이 왕과 왕비와 같이 묻혔는데, 하나도 흐트러짐 없이 질서 정연하다.
벽에는 등잔을 놓아 불을 켜놓고, 베게며 금관, 귀걸이 목걸이, 글자를 새긴 반지, 발받침대 등이 살아있는 사람인 양 놓여있었다.
무덤 입구가 막히면 그러한 부장품들이 더욱 빛을 발할 것이고, 묻힌 이들의 뼈와 살은 흙이 되어 시공의 태허로 돌아갈망정 부장품들은 남아 백제역사의 진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왜곡된 역사의 흐름이 있을지라도 왜곡을 바로 잡을 것만 것은 도굴당하지 않고 오롯이 남은 유물,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무덤을 쓰던 당시에는 왕과 왕비의 영생불변이 오늘을 사는 우리와 영원한 미래의 후손들에게 저 부장품들은 모두 국보고 보물로 남아 우리의 영원한 미래를 밝혀줄 것이란 생각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왕릉를 나왔다.
고창문화원답사팀은 무령왕릉과 고분군을 돌아 걸어서 손으로 만져보고 눈에 비추인 대상을 마음으로 보면서 차를 타고 이동하였다. 멀리 공산성이 보인다. 여러 번 가서 본 곳이기에 바라만 보아도 정감이 든다.
국립공주박물관 앞 야외전시장에는 공주의 대통사지 석조와 서혈사지의 석조여래좌상 등 석조 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백제인의 석공 기술과 불교미술을 본다.
고구려와 신라뿐 아니라 그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백제 불교미술의 아름다움이 다소곳이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박물관 안에는 대전과 충남지역에서 출토된 국보 19점과 보물 3점, 문화재 16,0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저러한 유물들이 천년의 세월 속에 고이 간직되어 있다가 새 세상에 출현하여 백제의 한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니, 생각할수록 가슴이 벅차오른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능력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으니 말이다.
어지럽혀있다고 말하지 말라. 저 자체가 다 보물이다.
약탈과 도굴, 왜곡과 이간질이 아무리 심하다 한들 세월 속에 묻혀 있는 영혼까지 약탈하고 왜곡하던 못하였으니, 저 은은한 백제의 빛이 하늘과 땅 사해에 빛나고 있는 것을 어찌 다시 왜곡할 수 있으랴.
물질적 현상은 공(空)하여 소멸할지 몰라도 허공이 영원하듯 백제의 혼도 허공과 같이 영원하여 역사 속의 백제는 언제까지나 살아 숨 쉬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