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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큰믿음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인내의열매
사도와 선지자들을 잡는 위조 영분별 (당신의 영분별을 영분별하라!)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3:29-39)
목 차
1. 바리새인 스타일의 영분별 2. 가말리엘 스타일의 영분별 3. 세례요한 스타일의 영분별 4. 예수님이 가르치신 영분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영분별의 은사를 소유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단사냥꾼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영분별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성경공부 좀 했다고 하는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판단을 믿습니다. 그러나 영분별 은사는 신학적인 알량한 지식이나 견해가 아니라 캐더린 쿨만, 오랄 로버츠 그리고 케네스 해긴 목사님이 이구동성으로 말한 것처럼 영적인 눈이 열려 영의 세계를 실제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분별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사실은 소수입니다. 반면에, 위조 영분별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프랜시스 프랜지팬은 “영적 전투의 세 영역”이라는 탁월한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판단하려는 우리의 본능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까지 참된 분별은 시작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항상 의식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목표가 구원이지 심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분별의 기초가 바로 놓여져야만 합니다... 실제로는 비판적인 마음의 베일을 통해 보면서도 우리는 분별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랑 안에서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는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에 골칫거리가 될 것입니다.”
또한, 릭 조이너는 “21세기를 위한 예언적 비전”이라는 책에서 “위조된 분별의 은사”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종교적 영은 위조된 영분별의 은사를 낳습니다. 이 위조된 은사는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도우시는가 하는 것보다는 남들의 잘못된 점만을 보는데 열심입니다.(만약 당신이 시험 문제 4번 ‘다른 사람 혹은 다른 교회의 옳은 점보다는 그들의 잘못된 점을 보려는 경향’과 6번 ‘당신이 다른 모든 사람들을 교정해주도록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믿음-하나님 나라에서 스스로 기름 부음을 받은 순찰자나 보안관들은 무엇을 건설하는 일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끊임없는 동요와 소란 속에 있게 하고 심각한 분열을 야기시키기도 합니다.’에 해당한다면 위조된 분별의 은사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의 지혜는 선악과나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그 진실이 정확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죽이는 영 속에서 그 사역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거부와 영토 보존 욕구, 그리고 일반적 불안정으로 인한 의심이 이런 위조된 은사를 야기시킵니다. 그러나 진정한 분별의 은사는 오직 사랑과 함께 기능을 수행합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 혹은 집단에 대해 판단 혹은 비판을 할 때마다, 나는 그가 진정으로 그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투자’를 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그 판단이나 비판을 무시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사랑으로 구해야 하며(고전 14:1) 사랑으로 사용해야 합니다(고전 13:1-3). 영분별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영분별은 사랑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까지 사랑의 동기로 사역하는 이단사냥꾼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희 교회와 다른 교회들을 음해하는 목회자와 신자들 역시 사랑으로 그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수칙을 지켰을 것입니다.
마 18:15-17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제 말은 그들이 정죄하고 매도하는 것이 아니라 회복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진 영분별은 참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영분별이 아니라 참소하는 자인 사탄에게서 온 흠 잡고 참소하는 영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이런 위조된 영분별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이런 위조 영분별을 가지고 하나님이 쓰시는 교회와 목회자들을 매도하고 뭇 영혼들에게 걸림돌이 되는 목회자와 신자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1. 바리새인 스타일의 영분별
바리새인들은 영적으로 눈멀고 귀먹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을 분별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상태에 대해서도 눈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이 영분별을 할 수 있다고 믿었고 세례 요한과 예수님, 그리고 베드로와 바울을 위시한 사도들을 상대로 영분별을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잘못되었다고 결정 내렸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예수님과 바울을 이단으로 모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성경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사 내내 바리새인들이 있었고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일으킨 사람들을 상대로 같은 일을 했습니다. 성경에서 세례 요한에 대해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거기에 바리새인들이 출현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거기에 바리새인들이 출현합니다. 베드로나 바울에 대해서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거기에 바리새인들이 출현합니다. 교회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존 웨슬리의 전기를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거기에 바리새인들이 나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기를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거기에 바리새인들이 나옵니다. 찰스 피니의 전기를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거기에 바리새인들이 나옵니다. 항상 그렇습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여전히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들 주위에 바리새인들이 있고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상대로 똑같은 일을 행합니다. 저는 근거 없이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오늘날 교회 안에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기준을 가지고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면 아마 깜짝 놀랄 것입니다. 성경의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교리’와 ‘전통’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믿는 것과 조금만 다르면 뱀처럼 물어뜯고 공격했습니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이 그들을 행해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책망하셨겠습니까?
(1) 성경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교리를 영분별의 잣대로 삼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장로의 유전을 신봉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장로의 유전을 “사람의 가르침”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으로 왜곡시킨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다른 견해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산상수훈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마 5:21-22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 5:27-28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 5:33-24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 5:38-39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마 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님이 계속 “너희가 들었으나” 라고 했는데 누구에게 들었다는 말일까요?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입니다. 당시에는 성경이 귀해서 개인이 소장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읽은 것이 아니라 들었습니다. 그들이 들은 것은 바른 해석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즉 다른 해석을 하셨고 다르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전통적인 가르침과 달랐지만 성경을 바르게 해석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신봉했던 유대교의 교리인 장로의 유전이 사람의 가르침이었던 것처럼, 오늘날도 교리 중 어떤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다수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바리새인들처럼 자기 교단의 교리를 잣대로 영분별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성경대로 설교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매도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2) 성경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영분별의 잣대로 삼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이 아니라 장로들의 유전을 신봉했습니다. 그것을 성경 위에 올려 놓고 잣대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성경적이 아닌 많은 전통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학, 자기들의 견해, 자기들의 전통을 성경 위에 올려놓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요. 그런데 전통이라고 다 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전통을 모두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의 눈 밖에 벗어났고 그들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마 12:1-8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막 3:1-6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막 7:1-13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눅 13:10-17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십 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요 5:2-16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이처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조항, 그것도 자기들이 임의로 과도하게 기준을 정한 규례들을 따르면서 긍휼이나 자비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청결을 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은 유대교의 전통 중 이런 것들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들어낸 사람의 계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미워했고 심지어 죽이려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교회 안에 이런 바리새적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은 바리새인과 똑같은 기준으로 다른 교회나 사역자를 판단하려 듭니다. 저는 어떤 분이 성가대가 없다고 이단이라고 말하는 것도 들었고, 교독문을 읽지 않는다고 이단이라고 말하는 것도 들었고, 집회 때 마지막에 주기도문이나 축도로 마치지 않고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마치거나 강사가 안수하며 사역하다가 마치는 것을 보고 이단 아니냐고 말하는 것도 들었습니다. 심지어 교회가 큰데 왜 홈페이지를 만들지 않고 카페를 사용하느냐? 그것을 보니 이단이라고 말한다는 어처구니없는 말도 들었습니다. 이게 제 정신으로 하는 소리입니까? 한국 교회 안에 얼마나 바리새인들처럼 종교적인 사람이 많은 지 그래서 얼마나 이단이라는 말을 쉽게 하는지 때로는 안타까움을 넘어서 절망감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현재 한국 교회 안에는 ‘현대판 바리새인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처럼 교만과 시기심과 자기 영역을 보호하기 위해 활동합니다. 그리고 교리와 전통이라는 불완전한 잣대로 다른 교회나 사역자를 이단으로 매도합니다. 목회자들과 성도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사랑이 없고 다른 교회나 사역자를 향해 이단이라는 말을 얼마나 쉽게 하는지 그저 놀랍고 기가 찰 노릇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이단이라는 말을 쉽게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단에 대한 정의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단’(異端)은 한자로 ‘다를 이’와 ‘끝 단’ 자를 씁니다. 다 같은데 끝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결론이 다르다거나 종말이 다르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정죄의 영에 오염되어 자기와 조금만 달라도 이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만약 조금만 달라도 이단이라면 모두가 이단입니다. 왜냐하면 같은 신학노선을 취하는 주경신학자들의 주석책을 보아도 같은 구절에 대한 해석이 거의 다 다르고 목회자 개개인이 성경을 해석하고 보는 관점도 조금씩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개념이며 이와 같은 이단의 정의는 형제를 참소하는 자인 사탄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럼 이단의 바른 정의는 무엇일까요?
벧후 2:1-3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이처럼 이단은 서로 다른 견해나 의식이 아니라 “멸망케 할 이단”이라는 말에 나타나듯이 멸망을 초래할 만큼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심각하게 부정하는 교회나 집단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교회나 목회자가 주장하거나 설교하는 내용으로는 구원 받는 것이 불가능하고 그 교회에 다니면 지옥에 가야 합니다. 그 정도로 복음과 진리가 심각하게 훼손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이 말하는 진짜 이단입니다. 그 증거로 장로교에서 보면 감리교는 분명히 잘못되었습니다. 또 감리교에서 보면 장로교가 잘못되었습니다. 교리적으로 서로 크게 다릅니다. 그러나 장로교에 다녀도 구원이 가능하고 감리교에 다녀도 구원이 가능합니다. 둘 중 어느 쪽도 구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진리가 훼손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로 많이 다르지만 둘 다 이단은 아닙니다. 더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천주교를 보십시오. 천주교와 개신교는 교리와 전통에 있어서 서로 크게 다릅니다. 분명 천주교에 많은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 역시 이단은 아닙니다. 천주교에 교리적인 그리고 의식과 전통에 있어서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며 천주교인들 중에도 천국에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저는 종교다원주의에 빠져 있는 천주교 신부나 신자는 예외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구교건 신교건 간에 이단입니다.). 오래 전 제가 주안장로교회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그 교회에서 간증한 나현숙 목사님의 천국지옥간증 동영상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 간증에서 나 목사님은 천국에 갔을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간증했습니다.
“예수님의 집무실인데 주님이 가자 보여줄 것이 있다 해서 따라갔습니다... 잘 보고 가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책이 놓여져 있었어요... 그 성경책을 예수님이 드셨습니다. 성경책을 드시더니 ‘너희들이 세상에서 보고 있는 성경책은 구원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또 성경을 통하여 진리를 깨달아서 더 좋은 부활을 받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보는 성경에는 인간에게는 육이 있기 때문에 한계가 있단 말입니다. 지식에도 한계가 있어요. 그래서 풀어지지 않는 의문이 너무너무 많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신학자들이 성경을 해석하고 풀이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경을 잘 해석한 신학박사라 할지라도 신이신 하나님이 볼 때는 완전한 해석을 한 사람은 사람 중에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너희들이 구원받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성경 해석을 놓고 싸움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성경 해석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할 구원자시요 구주이시요 생명의 주인이심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저와 여러분을 살려주실 영원한 구주이심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것이 분명하면 이단이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적그리스도가 될 수 없습니다. 믿으십니까? 그러시면서 성경의 해석에는 자유가 있는데 성경의 해석을 놓고 서로 싸워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무익한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는 인간 중에 완전한 해석을 한 사람은 사람 중에 없다. 그러나 너희들이 육을 벗어버리고 신령한 몸을 입고 천국에 들어오면 성경의 모든 의문이 한 눈에 다 풀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의문이 있으면 네 안에 계신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 기도하여 물으면 성령이 가르쳐 줄 것이라. 깨닫게 해 줄 것이다. 보여 줄 것이다. 들려 줄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입을 열어서 죄를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임금과 구주로 모셔들이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열심히 신앙 생활합니다. 그런데 이 성도가 기독교의 근본 교리가 아닌 다른 지엽적인 성경 주제에 대해서 견해가 다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피로 구원한 이 사람을 지옥에 보내실까요? 저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마음이 좁거나 편협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통일교, 전도관,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신천지처럼 멸망으로 몰아넣을 정도로 심각하게 다른 주장을 하고 있지 않는 한 함부로 다른 교회나 목회자를 이단이라고 정죄해선 안 됩니다. 우리는 잘못 된 부분은 그 부분이 잘못 되었다고 하고,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은 그 부분은 잘못 알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을 넘어서서 함부로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사탄이 원하는 일이며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일입니다. 제가 이 설교를 하기 위해 주일날 교회에 가던 중 고 신현균 목사님이 담임하셨던 성민교회를 지날 때였습니다. 운전 도중 저는 장로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 많은 바리새인들이 있음을 의식할 수 있었습니다. 또, 진실하지만 저와 신학적인 견해가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인식했습니다. 그때 후자에 대해 이런 불일치는 잠시 동안이고 육신의 옷을 벗고 천국에 가면 즉각 모두가 성경적인 바른 진리를 깨닫고 일치하게 될 것이며 영원히 한 형제로서 서로 사랑하며 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 즉시 나와 견해가 다른 그들을 향한 사랑이 내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힘있게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 영으로 이것이 바른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느꼈습니다. 제 온 영으로 그것을 느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제게 말씀했습니다.
‘너는 진리의 회복을 위해 지금까지 최전선에서 잘못된 교리들과 싸워왔다. 그것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았고 공격도 많이 받았다. 네가 이처럼 진리의 회복을 위해 싸우는 것은 옳은 것이고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하거라. 너의 싸움은 네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형제애에 의해 조절되고 승화되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너와 너의 사역을 온전히 기뻐할 것이다.’
옳습니다. 비록 견해 차이가 있어도 우리는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 같은 아담의 자손이면서도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증오하고 박해했던 KKK 단원과 같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즉 영적인 KKK 단원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비결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형제를 참소하는 영을 극복하고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됩시다.
2. 가말리엘 스타일의 영분별
가말리엘은 사도 바울의 스승이며 바리새인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시기심과 편견으로 가득했던 다른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공정한 마음을 가진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가말리엘의 신중함과 지혜를 배워야합니다.
행 5:33-39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쌔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간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잘못된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난 사람은 시작은 미약해도 끝이 창대케 됩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두고 지켜보면 그 교회나 단체가 하나님께로서 났는지 사람에게서 난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존 스토트는 “진정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단에는 ‘누가 보아도’ 가짜인 무엇이 있으며, 진리에는 자명하게 참된 무엇이 있다. 오류는 잠시 동안 보급되고 인기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리 멀리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에 가서는 노출되지 않을 수 없으며, 진리는 분명코 옳다는 것이 입증된다. 이것은 교회사를 통해서 분명하게 볼 수 있는 교훈이다. 수많은 이단들이 일어났으며, 어떤 것들은 승리할 것같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골동품 연구가들의 관심사일 뿐이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보존하셨다.”
한국 교회 안에는 인내를 가지고 지켜보지 않고 성급하게 다른 교회나 사역자를 이단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인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누가 그들의 마음을 이렇게 격동시키고 들끓게 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아닙니다(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형제를 참소하는 자이며 참소를 주무기로 삼는 사탄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본인은 알든 모르든 실제로는 사탄의 하수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의 하수인, 끔찍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성급함을 버리고 가말리엘의 인내와 지혜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대개 이단은 잠시 흥황 했다가 몰락하거나 쇠퇴합니다. 간혹 명이 긴 이단들이 있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자연스럽게 그들이 이단인 것이 교회 앞에 명백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중 일부’가 아니라 ‘교회 전체’가 그들을 이단으로 인지하게 됩니다. 이처럼 시간을 두고 지켜보고 모든 교회가 이단이라고 해야 정말 이단입니다. 반면에 시기심과 종교적인 편견 때문에 어떤 교회나 목회자를 성급하게 이단으로 몰고 그래서 일부는 이단이라고 하나 다른 이들은 어째서 이단이냐고 하는 교회나 목회자는 실제로는 이단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는 참으로 많은 잘못을 범해 왔습니다. 이제라도 누군가가 나서서 한국 교회의 이런 악행에 제동을 걸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교회는 앞으로도 계속 그 손에 형제들의 피를 뭍이게 될 것입니다. 한편, 가말리엘의 지혜로운 제안에서 또 한 가지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직업적인 이단사냥꾼들이 정말 문제가 있어 성도가 없어지고 텅텅 비어가는 교회는 문제 삼지 않고 거의 매번 빠르게 부흥하는 교회들의 발목을 잡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며, 적그리스도의 영에게 이용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래 전 흰돌산기도원에서 윤석전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일이 있는데, 윤 목사님이 왜 부흥하는 교회들만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면서 건드리느냐? 오히려 부흥하지 않고 줄어드는 교회를 향해 어떻게 목회를 해서 이렇게 됐느냐? 뭐가 문제이기에 교인이 줄어드느냐? 그 이유를 조사하고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하시면서 열변을 토하시는 것을 듣고 당시 우리 교회의 성도가 20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깊이 공감한 일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통합 측에서 목회하는 어떤 목사님을 만났는데, 당시 우리 교회가 이단 시비로 고통을 당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저를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큰믿음교회가 성장하고 교회가 크니까 건드리지 자기네 같이 작은 교회는 뭐라고 말하고 무슨 일을 하든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상투적인 말로 생각하고 “아니 목사님 교회에 오해받을 만한 일이 뭐가 있어요?” 했더니 아니라고 하면서 쭉 얘기를 해주는데 정말 파격적인 목회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구설수에 오를 소지가 충분히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제서야 그 목사님의 말이 실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불행히도 우리나라는 이단시비가 부흥하는 교회들의 통과의례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에 나타나 있는 민족적인 악한 심리 때문입니다. 부흥하는 교회들에게 배우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시기심 때문에 일거수일투족을 뾰족한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 ‘혹시 우리 교회에서 그 교회로 성도들이 옮겨가지는 않을까?’ 하는 자기 보존의 본능에서 나오는 것으로 참된 이단시비와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 교회와 관련해서도 이런 여러 가지 사례들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말씀드리지는 않겠지만, 우리 교회를 공격하는 목회자들 중 많은 경우가 어이없게도 실제로 이단성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시기심과 그리고 우리도 모르게 그냥 자발적으로 우리 교회로 옮긴 성도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자발적으로 교회를 옮길 때 그 교회가 이단이라서가 아니라 좋은 교회이기 때문에 옮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교회의 성도가 그리로 옮겼다고 그 교회를 공격하고 이단시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풍조이며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짓입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것처럼, 영분별은 단지 현 상태가 아니라 방향성을 보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사진’이 아니라 미래의 ‘동영상’을 보고 영분별을 해야 합니다. 성급하게 옳다 아니다 할 것이 아니라 시간이 필요합니다. 세상 재판도 보면 단순한 것도 얼마나 시간이 많이 걸립니까? 하물며 어떤 교회나 사역자를 이단이라고 판정하는 것은 영적인 사형선고입니다. 그러므로 이단이 아닌데 이단이라고 하는 것은 정신적인 폭력을 넘어서서 영적인 살인죄에 해당하는 중범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성령의 역사를 귀신의 역사로 내몰아 이단시 하는 성령훼방죄를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라고 경계하신 것입니다.
마 12:22-37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이것은 사실이며 매우 두려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겁 없이 그렇게 쉽게 이단이니 삼단이니 해서 되겠습니까? 우리는 사랑과 공정한 마음을 가지고 반드시 오래 동안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중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인자가 되지 않고 심판을 면할 수 있습니다.
3. 세례 요한 스타일의 영분별
세례 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이며,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온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영분별이 뛰어납니다. 일예로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세례 받으러 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보고 다짜고짜 이렇게 호통을 쳤습니다.
마 3:7-10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훗날 예수님은 이들에 대해 같은 평을 하셨습니다. 이것 하나만 보아도 세례 요한이 얼마나 영분별이 뛰어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영분별이 뛰어났던 세례 요한도 한 때 예수님이 정말 메시아가 맞는지 의심했습니다. 이것은 영분별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눅 7:19-23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왜 요한은 갑자기 혼란을 느끼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대답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바리새인들처럼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행보를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꼭 그대로는 아니겠지만 존 비비어가 공감이 가는 추측성 글을 썼습니다.
“요한이 이렇게 묻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당신이 그의 입장에 서 보라. 당신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가장 앞장서온 사람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전도를 받아왔다. 그리고 당신은 이 나라에서 가장 폭넓은 선교 활동을 한 사람으로 인정받아왔다. 스스로를 부정하는 삶을 살았으며, 주어진 사명을 다하려고 결혼마저 포기했다. 사막에서 메뚜기와 거친 꿀을 먹으며 살았고, 단식도 자주하였다. 바리새인들과 맞서 싸웠으며 마귀가 들린 사람이란 비웃음도 받았다. 당신의 인생은 오로지 오실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데 드려졌다. 그런 당신이 지금 옥에 갇혀 있다. 그것도 오랫동안 갇혀 있는 상태이다.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의 관심이 이제는 나사렛 마을의 예수님께 쏠려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제자들마저도 예수님께 가버렸다. 단지 몇 명만이 남아 당신을 섬기고 있을 뿐이다. 찾아오는 제자들이 전하는 말로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생활은 당신네 사람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들은 세리는 물론 죄인들과도 함께 먹고, 술도 마신다 한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며, 심지어 금식도 하지 않는다 한다. 당신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성령이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심을 보았는데, 과연 이런 행동들이 메시아의 행동이라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옥에 있는 기간이 길면 길수록, 당신을 실족케 하여 성나게 할 유혹은 점점 커져 간다. ‘내가 그 분의 길을 예비하며 온 인생을 다 바쳤거늘, 어쩌면 옥에 갇힌 내게 한 번도 찾아오시지 않는 것인가! 이럴 수 있는 것인가? 정녕 그 분이 메시아라면 왜 나를 풀어주시지 않는 것인가?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당신은 충직한 제자 둘을 예수님께 보내어 이렇게 묻는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요한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내가 메시아다’ 혹은 ‘아니다’ 라고 직설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오래 동안 저는 예수님이 왜 이렇게 이상한 대답하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압니다. 이것은 예언의 성취입니다.
사 29:18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
사 35:4-6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사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이것은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인데, 예수님은 바로 그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메시아임을 입증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예언뿐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말에 의해서도 입증됩니다. 예수님은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5:31-36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요 10:23-26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다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이 행하시는 역사가 메시아임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명백한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런 것을 전혀 증거로 여기지 않았습니다(요 10:26). 싹 무시했습니다. 심지어 죽은 자가 살아나도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예수님을 죽이려고만 했습니다. 얼마나 완고하고 교만한지! 찰스 피니는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좌절감을 느끼며 이렇게 썼습니다.
“자기들의 관심사에 벗어나는 그런 주제들에 관한 증거에는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그 증거가 아무리 중대할지라도 아주 하찮은 난관이라도 보일듯하면 그냥 넘어지고 만다... 어떠한 것이 되었든 일단 문제나 어려움이 생기면 그것을 빌미로 이적들의 증거까지도 반대하고 나선다. 그러한 경우에는 논리적 증거도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문제에 대한 답변을 제시해도, 그들은 주목하지 않는다... 가장 죄악 되고 혐오스러운 마음의 상태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생애, 가르침, 이적들, 죽으심은 물론 그의 부활조차도 유대인들에게 아무런 확신을 줄 수 없었을 때, 바로 이 태도가 그들 가운데서 아주 혐오스럽게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어떤 분일 것이라는 선입견들과,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에 대한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해석들이, 그들의 마음에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메시아이심을 입증하는 증거로 내놓으신 모든 증거의 위력을 분쇄하기에 충분한 반대 이유들이 되었다. 불신앙이 진리를 입증하는 증거의 위력을 어떻게 무력하게 만드는가를 보면 놀라우면서도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무게 있는 증거나 허다한 많은 증거로도 엉뚱하기 짝이 없는 반론들을 하는 사람들의 지성과 마음은 결코 지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피니처럼 저 역시 완고한 이단 사냥꾼이나 이 시대의 바리새인인 종교적인 자들에 대해 슬픔을 넘어서 좌절감을 느낍니다. 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혀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사람들이 목회자나 평신도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가 생생한 예를 하나 들어 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제가 김옥경 전도사님의 간증을 교회 인터넷 카페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전체 메일로 회원들에게 보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할렐루야! 정말 써프라이즈(슈프레자: “놀랍다”는 뜻)한 간증을 소개합니다.
이번에 슈프레자 싯홀 목사님의 집회는 한 마디로 써프라이즈 했습니다. 특히 그분의 예언 사역이 그랬습니다. 저는 국제적으로 저명한 거의 모든 선지자들로부터 예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밥 존스를 제외하고는 슈프레자 싯홀 목사님만큼 예언이 깊이가 있고 정확한 분은 보지 못했습니다. 정말 그 정확성과 깊이에 있어서 최고입니다. 이제 집회기간 중 가장 써프라이즈 했던 예언을 한 가지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의 중보기도 팀장이며 중보기도학교 교장인 김옥경 전도사님에 관한 예언입니다. 김옥경 전도사님은 집사 시절부터 저를 비서실장으로 섬겨왔고 그때부터 이미 저의 가장 친한 친구로 지내왔습니다. ‘주여~’라는 책에 소개한 대로 김옥경 전도사님은 마치 예레미야와 같은 눈물의 중보기도자입니다. 오래 전부터 저는 김 전도사님으로부터 눈물로 기도하던 중 자주 천국의 하나님의 보좌에 이끌려 올라간다는 것과 마치 성경의 에스겔이 그랬던 것처럼 기도 중 영으로 매우 빈번하게 이스라엘, 아프리카, 중국, 미국... 북한 등 세계각지에 가서 기도하게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체험을 쉽게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간증이 너무 대단해서 긍정도 부정도 아니하고 약 2년간 선반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슈프레자 싯홀 목사님의 집회를 통해 그것이 모두 사실임이 밝혀졌습니다. 물론 저는 김옥경 전도사님의 이런 체험들에 대해 강사 목사님께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김옥경 전도사님을 보고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출국하기 전 저와 식사하며 담소할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김옥경 전도사님을 이스라엘에서도 보았고, 미국의 어느 첨탑에서 오래 동안 기도할 때도 보았고, 아프리카에서도 보았고, 매우 여러 곳에서 여러 번 보았습니다. 저는 김 전도사님을 본 나라와 장소들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 전도사님은 전 세계를 통틀어서 몇 안 되는 가장 강력한 중보기도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참고로 김 전도사님은 아직까지 한 번도 외국에 나간 일이 없습니다. 그분은 오직 기도에 헌신하는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이제 집회 마지막 날에 있었던 김옥경 전도사님에 관한 예언을 소개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어 주신 만남입니다. 하나님이 이어 주신 만남입니다. 제가 그 전에도 마치 여러 곳에서 전도사님을 만났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많은 곳을 여행하듯이 전도사님의 영을 많은 곳으로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많은 곳입니다. 많은 곳입니다. 제가 이스라엘에 있을 때 전도사님 얼굴을 뵈었고, 미국에 있을 때도 전도사님 얼굴을 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전세계적으로 전도사님의 사역을 펼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전도사님 기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기도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전도사님 기도가 항상 주님 앞에 상달되어 있습니다. 바로 주님 앞에 놓여있는 대접 안에 전도사님의 기도가 담겨있습니다. 제가 주님의 보좌 앞으로 갔을 때 전도사님 얼굴을 보았습니다. 제가 기도할 때 전도사님 얼굴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 앞에 항상 서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주님이 전도사님을 사랑하십니다. 주님 앞에 은총을 받은 자입니다. 주님께서 지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몸을 입고 드디어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몸을 입고 서로 보게 된 것입니다. 제가 그 전에 여러 장소에서 만났지만 또한 보좌 앞에서도 만났지만, 주님께서 몸을 입고서도 보좌 앞으로 갈 수 있도록 하실 것입니다. 또 제가 믿기로 언젠가 보좌 앞에서 같이 함께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 한국에서 오셨네요. 반갑습니다.’ 하고 서로 인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내가 전도사님에게 미소 지을 수 있고요. 전도사님도 저를 보고 웃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다시 이 땅으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에게 그 보좌에 대해서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 앞에 큰 은총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마시고 계속하십시오. 밤에, 또 하나님께서 깨우실 때 계속 기도하십시오. 낮에도 주님께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실 때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보좌 어딘가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 감사합니다. 주의 성령님 감사합니다. 전도사님의 기도가 주님의 대접에 담겨있습니다. 주님 앞에 있는 보좌에 담겨있습니다. 기도하실 때 주님께서 모든 기도를 받으십니다. 주님께서 그 기도를 받으십니다. 주님께서 전도사님의 모든 기도를 보좌 앞에서 보고 계십니다. 주님 앞에 아주 향기로운 향기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할렐루야! 주님! 할렐루야! 예수님! 할렐루야! 예수님! 드디어 그날이 왔습니다. 주님께서 오늘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래서 직접 서로 만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님 이 시간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 딸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이 날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전도사님 몸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가정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할렐루야! 아버지, 예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 돌립니다. 한없이 부족하기만 한 저에게 최고의 동역자들을 붙여주신 하나님께 무한 감사드리고, 그리고 중보기도학교에 놀라운 발전이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할렐루야!!!”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김옥경 전도사님은 제 책 “주여~”에 소개한 대로 지속적인 눈물의 기도 생활과 주님 닮은 인격과 삶으로 인해 검증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슈프레자 싯홀은 롤랜드, 하이디 베이커와 더불어 현재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장 위대한 부흥이라고 할 수 있는 모잠비크 부흥을 주도하고 있는 아이리쉬미니스트리의 세 명의 이사 중의 한 분입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7,000 교회를 감독하고 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3명의 죽은 자를 살렸고, 오병이어의 기적과 각종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고, 4번 이상 환상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것처럼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난 천사의 방문을 받았으며, 여러 차례 천국에 이끌려 올라가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영어를 비롯하여 13개 나라의 언어를 은사로 받아 자신이 배우지 않은 언어로 초자연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 분이 놀랍게도 저만 알고 있던 김옥경 전도사님의 체험을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더구나 가장 최근에 나온 저의 책 제목이 윤석전 목사님께서 추천해주신 “꺼져가는 등불, 양심”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저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전체 메일로 보냈을 때 어떤 사람이 제게 뭐라고 메일을 보냈는지 아십니까?
“변승우 목사 같은 목회자는 지옥에나 떨어져라. 주여 사기꾼 변승우 목사가 지옥에 떨어지게 해주시옵소서. 지옥에나 떨어질지어다. 아멘”
오! 이런 사람들이 바로 현대판 바리새인입니다. 예수님이 “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책망하셨던 그런 지옥의 자식입니다. 이런 이들에게는 어떤 증거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오만과 편견이 그들의 눈과 귀를 모두 막아버리고 자신을 영적인 불구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비근한 예로, 갓피플몰에서 판매되고 있는 제 책에 벌써 수십 번째 계속 서평이랍시고 무례하고 악의적이고 거짓된 말로 음해하는 글을 올리고 있는 신학생이 있는데 한O희 라고 하는 악한 사람이 있습니다. 갓피플 측에 전화를 했더니 이해할 수 없는 답변을 했습니다. 악의적인 글을 올릴 수 없게 제명을 할 수는 없고 신고하시면 그때 그때 내려주기는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요일 밤에 올리면 월요일 오전까지는 갓피플 측과 연락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런 무책임한 답변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리고 여 직원이 저에게 “목사님, 그 사람이 목사님께 직접 연락하도록 해드릴까요?”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간단하게 말했습니다.
“성경에 거룩한 것을 개에게 던지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조심하라(마 7:6)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만과 종교성 때문에 영적으로 눈멀고 귀먹은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과 얘기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쓸 데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며 “저희가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할 것이요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리라”고 한 것이 바로 이런 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들에게는 어떠한 증거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들은 어떠한 논리적인 설명도, 그리고 어떠한 하나님의 역사도, 자기들의 견해에 반하는 증거로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 이렇게 영적으로 귀먹고 눈먼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많은 지 정말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간절히 호소합니다. 여러분은 절대로 이런 바리새인이 되지 마십시오.
한편, 바리새인들과 달리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이루시는 역사를 증거로 받아들였습니다. 며칠 전 우연히 CBS에서 하는 영화 “막달라 마리아(2)”를 보았는데 거기서 세례 요한이 제자들과 막달라 마리아를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것과 똑같은 대답을 하셨습니다. 즉 그때 일어나고 있던 기적들을 거론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대답에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이게 어떻게 대답이 될 수 있는 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전해들은 세례 요한은 눈가에 눈물을 머금으면서 이렇게 조용히 말합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분이 메시아시군요.”
그러면 어떻게 이것이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오래 전부터 그 점이 궁금했는데, 최근에 성령께서 그 이유를 앞에서 설명한 것보다 더 자세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세례 요한이 처음에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어떻게 알아보았습니까? 당시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안나도 죽고 시므온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동방박사들도 모두 죽었습니다. 마리아가 있긴 하지만 그는 그 사실을 마음에 담아 두었습니다. 육신적으로는 예수님이 자신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요 1:29-34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이처럼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께 내려오는 것을 봄으로써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례 요한에게 주신 분별 법이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분별 법입니다. 성령이 예수님께 임한 것이 증거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단순히 교리나 전통이 아니라 성령이 그에게 정말로 임해 있는가? 그것을 보고 영분별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이나 신약이나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야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왜 예수님에게 임하셨을까요? 그것은 이사야의 예언에 잘 나타나 있는데, 누가가 누가복음 4장 18-19절에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인용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그런데 세례 요한이 혼란을 느끼고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냈을 때 예수님이 바로 이런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성령이 함께 하셔야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성령이 예수님께 임하는 것을 보고 메시아라는 것을 알았는데,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성령이 여전히 예수님 위에 임해 계셨고 그래서 성경의 예언대로 사역하시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왜 의심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에는 바로 이런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눅 7:23)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마치 자기가 기준인 것처럼 예수님이 자기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실족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마저도 그런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는 나실인인 자기의 행보와 다른 예수님의 행보와 처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넘어질 뻔했습니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뿐 아니라 주님이 보내시는 사도들과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과 일반 목회자와 신자들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리새인들과 달랐듯 그들이 메시지와 사역 방식은 일반 목사들이나 교회와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단의 표식이 아니라 사도나 선지자의 표식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세례 요한은 뒤늦게라도 이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확신했고 평안히 최후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함께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아닌 지 분별했던 이 방법이 다른 교회와 사역자들을 분별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강력한 표적이 따르지 않는다고 꼭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강력한 표적이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증거의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라는 말씀 때문에 이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닌 지 분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왜 표적하면 이 말씀만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사고구조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구약과 신약에 보면 수많은 표적과 기적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중 대부분은 거짓 선지자나 적그리스도가 아니라 진정한 사도들과 선지자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신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 4:1-9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또 가라사대 이는 그들로 그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함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흰지라. 가라사대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손이 여상하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이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둘째 이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하수를 조금 취하여다가 육지에 부으라. 네가 취한 하수가 육지에서 피가 되리라.”
이처럼 하나님은 표적을 모세를 보내신 증거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 5: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요 10:25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그리고 바울 사도의 경우도 그러했습니다.
고후 12:11-12 “내가 아무것도 아니나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니라.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와 표적과 기적을 평가절하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천박한 것인양 내려다보는 것은 바리새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보시기에 악한 것입니다. 물론 모든 표적이 다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모세가 행한 표적을 처음에는 애굽의 술사들이 따라서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지팡이가 변해서 된 뱀이 애굽 술사들의 지팡이가 변해서 된 뱀을 잡아먹었고, 그리고 재앙도 계속 따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놀랍게도 술사들이 하나님의 역사임을 인정했습니다. 신약에서도 이와 유사한 예를 볼 수 있는데 빌립이 사마리아에 갔을 때 마술사 시몬이 빌립이 행하는 표적을 보고 압도되어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행하시는 표적과 악한 영들이 행하는 표적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간증들을 서로 비교해보십시오. 타종교에도 영적 체험과 기적이 있고 그리고 기독교에도 영적 체험과 기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면 서로 차이가 납니다.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납니다. 예를 들어, 성 프랜시스, 스미스 위글스워스, 존 레이크, 그리고 밥 존스나 하이디 베이커나 라인하르트 본케의 사역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은 수준의 간증은 이방종교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정한 마음으로 비교해보면 이방종교에서 역사하는 것은 잡신인 귀신들이고 기독교에서 역사하는 것은 천지를 지으신 참 하나님이심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표적은 언제나 진실 됩니다. 그러나 악한 영들이 행하는 표적은 과장과 거짓이 섞여있습니다. 왜냐하면 귀신은 거짓말쟁이이기 때문입니다.
살후 2:9-10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와 같이 표적이 일어나되 정직하지 못하고 과장하고 거짓말로 지어내는 것, 이것은 오히려 그가 사탄에게 속해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기회를 빌어 해명을 한 가지 해야 하겠습니다. 제가 이 해명을 하는 이유는 용서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영혼들을 위해서입니다. 서울에 영성운동을 하는 순복음교회 목사 중에 정OO목사라고 있습니다.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믿기 어려울 정도로 거짓되고 사악한 사람입니다. 그는 인터넷 카페를 통해 우리 교회를 음해하는 거짓된 정보를 여러해 전부터 조직적으로 퍼뜨려왔습니다. 그는 우리가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이단이라고 하고, 우리 교회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한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리고 선지자학교에서 우리 교회에 등록하라고 예언한다는 거짓말을 퍼뜨렸습니다. 그뿐 아니라 심지어 각 사람에게 20만원에서 30만원씩 주어가며 거짓 간증을 써오게 하여 카페에 올리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한 번은 제 설교 테잎을 들은 한국영성총연합회 예영수 박사님이 전화로 “설교 중 20만원씩 성도들에게 드리라”는 말이 나오는데 무슨 말이냐? 고 물어오셨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왜 그런 악의적인 소문이 나게 되었는지를 나름대로 추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큰믿음가족 서로 사랑 이벤트’라 하여 매해 구제헌금을 거두어 가난한 성도들 가정에 전세지원금으로 한 가정당 2,000만원씩 지원합니다. 올해의 경우는 9,000만원을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구정과 추석 때에는 전교인을 대상으로 조사하여 월수입이 150만원 이하 되는 가정에 명절을 외롭지 않게 잘 지내시라고 각 가정당 20만원씩 수천만원을 지원합니다. 설교 테이프에 나오는 말은 바로 이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20만원씩 돈을 주고 거짓 간증을 써오게 한다는 악의적인 거짓말로 둔갑할 수 있는지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제가 이것을 밝히는 이유는, 진상을 알지 못하고 그저 인터넷에 떠도는 거짓 정보를 믿고 우리 교회를 오해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수년째 계속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인터넷에 퍼트린 거짓말 때문에 어떤 유명한 목사님은 내게 등을 돌렸고, 글을 싣는 것이 중단되었고, 몇몇 신학대학에서의 초청들이 무산되었습니다. 그 피해는 실로 엄청납니다. 그래서 이제라도 밝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악한 자에게 절대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즉 바리새인 식의 영분별을 고수할 것인지 아니면 세례 요한 식의 영분별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바리새인들의 영분별을 고수한다면 여러분은 예수님과 예수님이 보내시는 사람들, 특히 사도와 선지자들의 대적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잘 알고, 그리고 심지어 목회자라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다음 말씀이 여러분에게 응하게 될 것입니다.
마 23:29-34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반면에 세례 요한 식의 영분별을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들과 힘을 합하여 주님이 다시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될 것이며,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 23:39) 하고 사도는 사도로, 선지자는 선지자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가 되어 그들의 사역을 통해 유익을 얻고 준비 되어 주님께 크게 쓰임 받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늦기 전에 바리새인 식의 영분별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세례 요한 식의 영분별을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결정적으로 중요한 말을 한 가지 하겠습니다. 오늘날 불신자들도 아닌 믿는 자들이 이렇게 성령의 은사와 역사들을 천박한 것으로 여기고 병적으로 지적인 것만 추구하게 된 배후에는 종교개혁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은사 중단론”이라는 비성경적이고 어리석은 이론이 있습니다. 1세기 이후로 성령의 은사들이 교회에서 거두어지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이론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이단사냥꾼들은 은사 중단론을 신봉하고 있거나 그와 유사한 사상에 물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들에 대해선 관대하면서도 사도나 선지자적인 사역을 하고 있는 교회와 사역자들은 끈질기게 괴롭히고 공격하는 것입니다. 비단 이들뿐 아니라, 오늘날 너무나도 많은 목회자와 신자들이 은사 중단론을 추종하거나 그와 유사한 사상에 쇠뇌 되어 있습니다. 최근에는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은사 중단론자인 존 맥아더의 책의 영향을 받은 어느 집사가 방언을 공격하는 책까지 써냈습니다. 얼마나 통탄할 일인지요! 역사가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은사 중단론을 신봉하는 한 절대로 영분별을 바르게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단사냥꾼이든 신학자든 목회자든 성경을 얼마나 알든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은사 중단론이나 그와 유사한 사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직접 성경에서 걸어 나와도 이단이라고 정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정도로 은사 중단론은 판단력을 왜곡시키며 바리새인의 뒤를 따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은사 중단론을 경계하고, 은사 중단론과 그와 유사한 사상을 여러분의 머리에서 폐기처분하시기 바랍니다.
4. 예수님 스타일의 영분별 예수님은 최고의 권위자이십니다. 영분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영분별에 대해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마 7:15-20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저는 이 대지의 제목을 ‘예수님 스타일의 영분별’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한가? 하는 문제로 잠시 고민했었습니다. 예수님은 불꽃과 같은 눈으로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보고 분별하시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이 시간이라는 과정을 통해 보이게 된 것, 그것이 열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도 열매를 보고 분별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예수님 스타일의 영분별’이라는 제목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이 영분별은 열매를 보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정확한 영분별 법입니다. 아무리 도시에서 나고 자라서 나무를 잘 모르는 사람도 그 나무에 달린 열매를 보면 나무의 정체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사과나무구나, 배나무구나, 포도나무구나, 감나무구나 이렇게 말입니다. 이처럼 열매를 보고 분별하는 것은 가장 확실하고 정확합니다. 하나님의 여종 캐더린 쿨만은 “성령의 은사”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성령의 은사의 사역을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성령은 확실히 은사를 주시지만, 성령의 은사에 의한 열매, 즉 성령의 열매도 또한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은사가 진짜인지를 우리가 알기 위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7장 20절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체험이 무엇이든 그 체험은 개인적인 것이어서, 주님과 그 개인과의 사이의 전혀 사적인 체험입니다. 실제의 사건(transaction)은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고, 그 사람이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그 영적인 만남이 진짜라고 입증되는 것은 그 사람의 행동, 생활, 내면에서 생성된 것이 외적으로 드러남에 의해서입니다. 개개인의 구원에 관해서 말하면, 그 사람이 거듭났는지 어떤지는 그 외면적인 나타남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적으로 동일하게 성령으로 충만 되어 있는 사람의 삶 가운데, 성령의 열매는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문자 그대로 사람의 몸 안에 오셔서 성령의 임재가 대충 얼버무릴 수 없는 외적인 증거를 산출해냅니다. 그리고 이러한 외적인 확증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여러 해 전의 일입니다. 당시 토론토 축복이 큰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토론토를 이단시 했습니다. 심지어 영성운동을 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조차 상당수가 토론토를 부정적으로 보고 이단시했습니다. 그 때에는 누가 토론토를 옹호만 해도 도매금으로 잘못된 사람으로 취급 받는 그런 때였습니다. 저 역시 토론토와 직접적인 관련도 없고 그저 사람들이 그러기에 그런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존 아놋트 목사님의 “아버지의 축복”이란 책이 나온 것을 보았지만 사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조용기 목사님이 예언한대로 펜사콜라 브라운스빌에서 대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펜사콜라에 대한 책들이 나오고, 세미나들이 열렸습니다. 당시 저는 현재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담임하는 이영훈 목사님이 쓴 “펜사콜라 기적의 현장 브라운스빌교회”를 위시해서 펜사콜라 부흥에 관한 모든 책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펜사콜라 브라운스빌교회를 담임하는 존 킬 패트릭 목사님이 가장 영향을 받고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바로 토론토 축복의 존 아놋트 목사님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더 충격을 받은 것은 그 존경하는 이유가 그가 아는 가장 겸손한 사람이 존 아놋트 목사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영훈 목사님이 쓴 “펜사콜라 기적의 현장 브라운스빌교회”라는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부흥하는 교회에 속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캐나다, 특히 토론토 공항교회(Tcronto Airport Christian Fellowship)가 전세계적인 부흥의 불을 지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성도들은 토론토 축복의 장본인인 존 아놋트(John Arnott)목사가 그날 밤 그 방문자들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아놋트 목사의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은 토론토에 영적 갱신의 불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존 아놋트 목사는 지금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곳의 다른 많은 리더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게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피하려고 많은 애를 썼다. 그는 공항에서나 호텔에서나 간편하게 옷을 입고 가방을 손수 들고 다녔고, 심지어 자신이 주강사일 때조차도, 강단 중앙에 집중되어 있는 조명을 피해 옆에서 있었다. 존 아놋트 목사가 예배를 인도할 때에는 성부 하나님께서 항상 영광 받는 자리 중심에 계신다. 그의 대화하는 듯한 설교 스타일은 은사 운동이 절정에 달했을 때 많은 설교자들이 사람들 앞에 화려하게 비춰졌던 것과는 완전히 대조적이다.”
이 부분을 읽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겸손하다면 그러면 잘못된 분일 리가 없는데!’
그래서 처음으로 마음을 열고 존 아놋트 목사님이 쓰신 “아버지의 축복”이라는 책을 사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가장 원하는 것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가장 원하는 것은 쓰러지는 것도, 웃는 것도, 예언도, 기적도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부흥 자체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거룩하여지고 사람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읽은 책에서 저는 토론토공항교회에서 은혜를 체험하고 쓰러지고 웃는 사람들이 단순히 쓰러지거나 웃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변화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압도적으로 느꼈습니다. 그리고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토론토공항교회의 담임목사인 존 아놋트 목사님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어느 날 나는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생각하면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예수님, 이 땅에서 예수님을 위한 삶은 대단한 것입니다만, 주님을 뵐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 정말 힘듭니다. 주님의 불꽃같은 눈동자를 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만나서 그 동안 내가 생각해온 모든 질문을 할 수 있도록 24시간 모두를 주님 곁에 있고 싶습니다.’”
그분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타나는 현상 그 자체를 주목하는 것은 올바른 반응이 아닙니다. 그 나타나는 현상은 성령의 외적인 부분에 불과하며, 중요한 것은 내적인 역사입니다... 나는 성령께서 운행하실 때 마귀가 속임수를 쓸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속임수를 쓸 수 없는 일은, 사람의 내부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일, 즉 삶을 변화시키는 예수님과의 사랑에 빠지는 일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 열매에 관해서 언급하지 않고, 그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서만 언급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기독교 고전부터 시작하여 많은 책들을 읽었고 가장 저의 관심을 끈 것은 성자들과 기독교 위인들의 업적이나 기적보다는 그들의 고백 속에 나타난 하나님께 대한 사심이 없고 탁월한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신기하고 가장 부러웠고, 그리고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이렇게 자신있게 이렇게 진심으로 온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을 보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입니다. 대부분의 복음주의 신학자들과 설교자는 그 중요성에 대해서 말하고 어느 정도 사랑을 고백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샘물이라면 토론토에서는 강물과 같은 사랑을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토론토에서 나온 하이디 베이커가 “보좌로부터 사랑의 강물이”라는 말로 빛을 발하고 유명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그들이 고백하고 나타내고 있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압도되었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평하는 것처럼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영분별은 이렇게 힘든 것입니다.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거의 대부분이 실패한 영분별을 나는 당연히 하고 있고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얼마나 교만하고 어리석은 일인지요. 그러므로 마음을 낮추고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쉽게 이런 말, 저런 말에 휩쓸리지 마시고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대로 열매를 보고 분별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책을 쓰고 있을 때, 저는 미국에서 목회하고 있는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져 있는 한 목사님으로부터 메일을 받았습니다. 실례가 될 수 있으므로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그분은 신앙계와 뉴 와인에 글이 실린 분이고, 사랑의 교회에서 설교를 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또, 주안장로교회 창립 60주년 집회에 하루 저녁 설교를 하게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분의 메일에서 저의 관심을 끈 것은 “구원에 빠진 교훈들을 전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하면서 “청교도적인 구원의 빠진 부분을 홀로 전하는 변 목사님께...”라고 한 부분과 “청교도적인 구원의 본질과 현 세대를 이끄는 성령사역들을 교류하는 그 큰 폭을 어떻게 조화되게 할 수 있는지... 청교도적인 구원과 이 세대를 주도하는 성령운동이 동시에 조화될 수 있다는 점이 놀랍네요.”라고 쓴 부분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으로 보아 저는 이분이 매우 통찰력이 있는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메일 서두에 “신앙계 ***기자로부터 메일주소를 받았습니다.”라고 해서 제가 그 기자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에 대해서 물어보았습니다. 그 후 이렇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방금 전화해서 물어보았어요. 목사님이 어떤 분이시냐고. 저는 아무리 교회가 크고 영향력이 있고 유명해도 좋은 분이 아닌 분과 교제하거나 시간을 보내는 것을 원치 않거든요. 그것은 시간 낭비이고, 더구나 제가 부족하기 때문에 더욱 저는 좋은 분들을 만나 좋은 영향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자분이 좋은 분이 어떤 것이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식에서 나오는 분별력이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지성에서 나오는, 은사나 체험에서 나오는 분별력 그것은 아닙니다. 겸손에서 나오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만이 자기가 아는 것과 다르다고 다른 사람을 매도하지 않고 정말 자기가 틀렸을 경우에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 마음이 바르기 때문에 성품에서 나오는 분별력이 있습니다. 바른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말씀의 지식, 계시, 능력, 성장 그 무엇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미혹되지 않는 것이지요. 이런 분별력을 가지고 있는 분이 좋은 분입니다. 인격이 제일 중요하지만, 단지 인격적인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불신자도 가지고 있는 혼에서 나오는 인격이 있고 영에서 나오는 인격이 있습니다. 혼에서 나오는 인격이 훌륭한 사람은 바리새인이 되기 쉽고 하나님의 일에 가장 큰 대적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겸손에서 나오는 분별력, 성품에서 나오는 분별력을 가졌기 때문에 영에서 나오는 인격을 가진 사람, 이런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두서없이 썼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메일에 나타나는 통찰력을 보니 목사님이라면 잘 다듬어 보내지 않아도 이해하실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그 목사님에게 보낸 메일을 이렇게 소개하는 이유는 신앙계 기자와 통화를 하면서 이 말을 할 때 성령의 깊은 감동을 느꼈고 성령께서 제 입술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영분별의 중요한 원리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영분별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 속에 있는 성령의 열매를 보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앞으로는 꼭 성령의 열매를 보고 영분별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절대 속거나 범죄하는 일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바리새인, 가말리엘, 세례 요한, 예수님 등 네 가지 유형의 영분별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특히 저는 바리새인의 영분별과 세례 요한의 영분별을 서로 비교하며 설명하는데 비중을 두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바리새인들은 ‘교리’와 ‘전통’으로 영분별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러면 무엇으로 영분별을 합니까?” 라고 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기준의 영분별에 의해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정죄를 받으셨고 12사도와 바울이 정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은 과거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오늘날도 일어날 수 있고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식으로 영분별을 하면 복음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는 괜찮지만 사도와 선지자들은 이단이나 사이비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존 비비어가 “사탄의 덫”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쓴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종교지도자들에게서 가장 큰 핍박을 받으셨다.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사고영역 한계 내에서만 활동하신다고 믿는다. 그리고는 자신들만이 하나님과 아주 특별한 '연줄'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만일 주께서 이천 년 전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 종교지도자들을 실족케 하셨다면, 오늘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분명 그 종교지도자들을 실족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영분별을 해선 안 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분별을 해야 할까요? 그것은 가말리엘, 세례 요한, 예수님의 영분별 법에 나타나 있는데 그것을 압축해서 핵심을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우리는 ‘교리’가 아니라 ‘성경’으로 영분별을 해야 합니다.
행 17:10-12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보십시오. 베뢰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배우고 알고 믿고 있던 교리가 아니라 비록 자신들이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새로운 얘기였지만 성경을 통해서 분별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처럼 바울을 대적하지 않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바리새인이 아니라 베뢰아 사람들을 본받으십시오. 그럴 때 진정한 영분별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정말로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 우리는 ‘전통’이 아니라 ‘열매’를 보고 영분별을 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라고 말씀한 것처럼 기독교는 종교적인 의식의 결합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에서 나오는 참 생명입니다. 그 생명을 통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믿음이며 참된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매를 보고 영분별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머리가 아니라 마음을 보십니다. 세상에는 머리가 바르지 못해도 마음이 바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머리는 바른데 마음이 바르지 못한 사람은 7배나 더 많습니다. 그래서 열매로 분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열매를 보고 분별하면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신 대로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는 없는 것처럼 못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고 그리고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예수님이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라고 말씀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도시사람처럼 영의 세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영분별한다며 생사람 잡지 말고 겸손히 열매를 살피고 성령의 열매를 통해 제대로 영분별을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서 문 최근에 저는 릭 조이너가 담임하는 모닝스타펠로우쉽교회가 있는 샬롯에 가서 밥 존스 목사님 댁을 방문했습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밥 존스 목사님은 이 시대 최고의 선지자입니다. 영성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만나고 싶어하는 영적인 거성 중의 거성이십니다. 릭 조이너, 마이클 비클, 샨 볼츠를 위시하여 다수의 쟁쟁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 분을 자신의 멘토 내지는 영적인 아버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하나님의 사람인 슈프레자 싯홀 목사님은 이 분을 “선지자들의 아버지”라고 칭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저에게 장장 1시간이 넘게 개인 예언을 해 준 후 함께 간 벤자민 오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영분별이 정말로 필요합니다. 영분별의 은사를 갈고 닦으십시오. 목사님은 사람들이 거짓말을 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아시는 분입니다. 목사님, 이 은사를 갈고 닦으세요. 교회에 영분별의 은사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입니다.” 밥 존스 목사님이 말한대로 지금 교회에는 영분별의 은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계는 위조 영분별이 만연되어 있고 걸핏하면 성령의 사람들을 이단, 사이비, 광신자, 신비주의자... 운운하며 매도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여 선지자들을 죽인 자기 조상들의 죄의 양을 채운 것처럼, 교회도 교회사 내내 존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즈, 찰스 피니, 윌리암 부스, 찰스 스펄전, 디 엘 무디, 윌리암 씨무어, 썬다 싱, 스미스 위글스워스, 캐더린 쿨만, 케네스 해긴 목사님... 등 거의 대부분의 하나님의 사람들을 이단으로 공격하거나 매도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도 바리새인들처럼 자기의 조상들이 핍박했던 이런 하나님의 사람들의 무덤을 꾸미며 그들의 말을 책이나 설교에서 인용하며 존경을 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한국 교회가 이용도 목사님, 조용기 목사님, 윤석전 목사님...을 이단으로 몰았었던 것처럼 여전히 조상들의 죄를 답습하며 같은 죄를 짓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성격이 가히 ‘적그리스도적’입니다. 주님이 보내신 사람들을 대적하는 것은 곧 주님을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악한 일의 중심에는 예수님을 죽인 바리새인들의 대표적인 후예인 이단 사냥꾼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양의 탈을 쓰고 있어 종교적인 사람들이 보기에는 한국 교회를 위하는 정의의 투사같이 보이지만, 성령의 사람이라면 이들이 실제로는 뱀들과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것을 누구나 다 압니다. 저는 그들의 글을 실어주거나 그들을 초대하여 강연을 듣는 것도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말이 지나치다고요? 과연 그럴까요? 제 말을 잘 들어보십시오. 도둑과 강도를 잡는 경찰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 경찰이 선량한 시민을 강도로 오인하여 죽였습니다. 도둑과 강도를 잡으면서 지속적으로 가끔 이런 일을 합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도둑을 잡고 있다고 이 경찰을 용납할 것 같습니까? 그를 영웅시할 것 같습니까? 절대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단 사냥꾼들에 의해 억울하게 피해를 본 교회와 목회자들이 많지만 한국 교회는 이기적이 되어 단지 내 문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공의를 저버리고, 게다가 영적 무지와 시기심에 사로잡혀 형제의 피로 물든 그들의 손을 들어주며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있습니다. 포도원을 허무는 이 작은 여우들을 잡지 않고 그들에게 마음대로 포도원을 뛰어다니며 해할 수 있는 자유를 주고, 역으로 교회에 새로운 부흥과 전기를 가져올 수 있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공격하고 매도하는 일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대 부흥과 대추수가 다가오는 있는 아주 중요한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묻고 싶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형제를 참소하는 자인 사탄의 사냥개들의 편에 서서 형제들의 피를 흘릴 것입니까? 여러분의 눈에는 쌍둥이만 형제로 보입니까? 얼굴이 똑같아야만 형제입니까? 쌍둥이가 아닌 형제들이 더 많듯이 생긴 게 달라도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회개하고 형제들의 피를 그 손에서 씻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흥을 위해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이 시대의 사도들, 선지자들과 협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장이 멈춘지 오래 된 한국 교회가 되살아나고 평양대부흥을 무색케 할 대부흥과 대추수가 이 땅에서도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이 그 일을 위해 강력하게 쓰임 받을 것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2008년 7월 7일 한국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변승우 목사 씀 |